묵상/요한계시록

1장 16절

기독항해자 2021. 3. 29. 17:29

그의 오른손에 일곱 별이 있고 그의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 그 얼굴은 가 힘있게 비치는 것 같더라

 

부활하신 예수님의 오른 손에 일곱 별이 있습니다.

사실 별은 아니겠죠,

별이 얼마나 큰 지 사람들은 지금은 압니다,

한 마디로 사기꾼으로 몰릴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별은 상징입니다.

요한은 교회라고 말하고 싶은데 대신에 별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은 교회라고 말합니다.

저는 여기서 교회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누가 썼는지는 모르겠지만 잘 쓴 글이 있어 가져 왔습니다,

 

1.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어디서 모였을까?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어디서 모여서 예배와 교제, 성례를 행하고 신앙의 길을 갔을까? 

오늘의 예배당과 같은 집회소로서의 교회당은 언제부터 생겨나게 되었으며 어떤 발전의 과정을 거쳐 갔을까? 

이와 같은 의문은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신앙과 삶의 자리를 이해하는데 유익한 정보를 제공해 줄 것이다.

 

역사적으로 공식적인 집회소로서 예배당 건물이 발견된 것은 256년 유프라데스강 상류지역에 위치한 두라-유로포스(Dura-Europos)에서였다. 

고대도시 두라(Dura)를 헬라인들은 유로포스(Europos)라고 불렀는데, 이곳은 영국군대에 의해 1920년 발굴되었다. 

그 후 프랑스와 미국의 고고학자들에 의해 연구되기 시작하였는데, 이 발굴은 20세기 가장 중요한 발굴로 간주되고 있다. 

바로 이곳에서 그리스도인들의 정기적인 집회소로 판단되는 교회당이 최초로 발굴된 것이다. 

이 교회당 건물은 256년 이전에 건축되었는데, 칼 볼츠)나 베인톤 230년 혹은 232년경의 것으로 추정한다. 

원래 주택이었으나 후일 교회당으로 개축된 것으로 보이는 이 건물에는 욕조가 딸린 작은 세례실이 있어 이 집회소에서 세례를 베풀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교회 유적은 현재는 미국 예일대학 미술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처음 발견된 이 교회당이 230년경에 예배처소로 개조된 것으로 본다하더라도 이것은 일반화된 것은 아니므로 적어도 예루살렘에 신약시대 최초의 교회가 설립된 이래 상당기간 동안 독립된 교회당 건물을 갖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오시에크(Carolyn Osiek)와 발취(David L. Balch)는 적어도 첫 150여년간은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예배를 위한 독립된 별도의 건물을 소유하지 않았으며, 단지 필요한 경우 기존의 이용가능한 장소를 이용했을 뿐이라고 주장한다. 

브래드리 블루(Bradley Blue)는 그의 사도행전과 가정교회”(Acts and House Church)라는 글에서 4세기 초 곧, 콘스탄틴이 최초의 바실리카라는 교회당을 세우기까지 약 300여년 동안 그리스도인들은 독립된 건물로서 교회당이나 예배 처소를 갖지 않고 가정집에서 회집하는 가정교회 중심으로 유지되어 왔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블루가 그리스도인들의 집회소의 변천과정을 개괄적으로 설명하는 것이지만,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처음부터 교회당을 소유하지 않았다. 

예수님의 승천 후 제자들이 가정집을 중심으로 회집하고 바울의 개종자들이 가정 중심의 공동체를 형성해 간 것은 회집할 다른 장소가 없었다는 불가피성 때문이 아니라(not by default alone) 그리스도인들의 모임에 유효한 장점들, 예컨대 안전이나, 공동식사와 교제를 위한 주방이 있었기 때문이었다.5)

 

리차드 크라우다이머(Richard Krautheimer)는 기독교회의 설립에서 기독교가 로마 제국에서 공인받는 4세기 초까지(30-313)의 그리스도인들의 집회처소, 곧 가정교회에서 바실리카까지는 3단계의 발전과정을 거쳐 왔다고 주장했다. 

첫 번째 시기는 대략 150년까지인데 이 급진적인 발전기에 그리스도인들의 집회소는 신자들의 가정집이었다. 

두 번째 시기는 대략 150년부터 250년 어간인데, 이 시기는 개인 주택을 개조하여 전적으로 집회소로 사용하는 시기였다.

3번째 시기는 대략 250년에서 313년까지인데, 콘스탄틴에 의한 바실리카 교회당이 세워지기 전으로서 사적이든 공공의 것이든 큰 건물이나 홀이 집회소로 대두된 시기라고 한다. 

이렇게 볼 때 그리스도인들의 집회소는 개인의 가정집에서 개조된 가정집으로, 보다 넓은 홀이나 건물로, 그리고 바실리카교회당으로의 변천을 거쳐 왔다고 할 수 있다.

 

1) 초기 가정교회

 

어떤 점에서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처음부터 별도의 집회소를 생각하지 않았고, 특별히 자신들의 종교적인 활동을 위해 건축된 건물을 소유하지 않았다. 

또 그럴 필요도 없었다. 

교회는 믿는 자들로 구성되는 것이지 건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들에게 있어서 에클레시아는 이름 그대로 모임’()이었지 건물을 의미하지 않았다. 

여기에는 세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는 초기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시급한 과제는 제자삼은 일, 곧 십자가와 부활의 도를 증거 하는 것이었지 가시적 집회소로서의 가견적 교회당을 세우는 일이 아니었다. 

이들에게 있어서 교회 그리스도의 몸이었고, 성도들의 모임이었지 건물이 아니었다. 

따라서 이교의 관행처럼 신전(temple)과 같은 종교적 목적을 위한 별도의 건물 취득을 추구하지 않았다. 

이것이 가정중심의 신앙생활을 했던 보다 우선하는 이유였다. 

이런 의식에 영향을 준 것은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기대였다. 

임박한 재림에 대한 기대는 이 땅에서의 제도로서의 교회당을 요구하지 않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래서 신약성경 어디에서도 별도의 예배처소에 대한 암시나 요구가 없다.

 

둘째, 이 당시는 가정(house) 혹은 가문(household)은 하나의 기본적인 정치 단위였기 때문에 하나의 조직으로서의 기능을 행사했고, 특히 안전을 보장하고 있어 신교(信敎)의 자유가 주어져 있지 않았던 이 시대에 회집하기 좋은 장점을 지니고 있었다. 

이 점은 기독교 공동체의 존재 양식이나 발전에 지대한 의미를 주고 있다. 

이 당시 가문이라고 할 때 그 가속(家屬)은 직계 가족 만이 아니라 노예나 해방된 노예, 일꾼, 때로는 소작인이나 동업자까지 포함하는 광의의 조직이었다. 

이들에게 있어서 가정집은 그리스도인들의 안전과 공동식사 등 신자들의 교제에 유용한 환경이었다. 

사도행전이나 바울의 선교활동에서 이런 가정 중심의 복음운동의 다양한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셋째, 초기 그리스도인들, 특히 4세기 이전의 그리스도인 공동체는 탄압받는 공동체였고, 교회 공동체 이름의 합법적인 제산 취득이 용이하지 않았다. 

신교(信敎)의 자유를 누리지 못했던 이들은 왕왕히 정치적인 집단으로 간주되기도 했다. 

예수의 추종자들은 안디옥에서 그리스도인’(Cristianou,j,, christianos)으로 불렸는데, 이 말이 라틴어라는 점에서 로마인들에 의해 불려진 이름임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라틴어로 그리스도당파(partisan of Christ)라는 정치적인 용어였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인 이런 이름으로 불렸다는 사실 자체가 정치적인 집단으로 간주되었다는 중요한 증거를 주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저들의 불확실한 법적 지위 때문에 별도의 집회소로서의 예배당과 같은 제산의 취득은 시급한 요청이 아니라고 보았던 것이다.

 

이런 현실에서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집회소는 개인주택이었다. 

이것은 오늘의 중국에서의 경우처럼 탄압받는 시대에서 교회의 생존 모델이기도하다. 

그 후 신자들이 증가함에 따라 오직 예배를 위해 봉헌되는 주택이 필요하게 되었고, 앞서 언급한 바처럼 두라-유로포스에서 교회당이 발굴된 것이다. 

분명한 사실은 초기 기독교회는 가정교회로 출발하였다는 점이다. 

신약성경과 가버나움, 로마, 켄트(Kent)에서 발견한 고고학적 증거는 이 점을 분명하게 증거 해 준다. 

신약성경에는 여러 지역에 가정교회(domus ecclesiae)가 있었음을 보여주는 여러 흔적들이 있다. 

그러나 한 지역 내에 가정교회들이 수나 가정교회 상호간의 관계에 대한 정보는 매우 빈약하다.

 

예루살렘에서의 가정교회

우선 사도행전 1장에서 5장 사이에 보면 첫 기독교 공동체는 가정교회로 시작되었음을 암시하는데, 특히 2:43-47, 4:32-37, 5:12-16, 5:42을 보면 이들은 개인 집에 모였음을 알 수 있다. 

누가는 예수의 제자들이 감람산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들어가..... 다락에 올라가니(ες τὸ ὑπερον)..... 그 모임에는(ἐπ τ ατό) 120명이 모였다고 했다(1:13-4). 

누가는 이 곳을 마가라고도 하는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이라고 했는데, 이곳이 예수님의 승천 후 11제자들과 여인들, 그리고 예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모였던 다락방(1:13)이었고 맛디아를 선출하고(1:26) 오순절 성령강림이 있었던 바로 그 이었다(2:2).

 

그런데 누가는 사도행전 2 1, “저희가 다 같이 한곳에 모였더니에서 π τ ατ를 사용하고 있는데, ἐπ τ ατ를 쓸 때 누가는 (1:15, 2:1, 고전11:20, 14:23에서 보는 바처럼) 의식적으로 어떤 장소에서 회집된 그룹을 지칭하던지, 아니면 사도행전 2 47절에서와 같은 일반적인 기독교 공동체를 의미하던 간에 기독교공동체의 모임’(the assembly of the Christian community)을 언급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π τ ατ라는 표현은 1세기와 2세기 교부들의 문헌에서도 계속적으로 나타나는데, 이를 통해 누가가 이 표현을 통해 의도했던 의미를 해명하는 데 도움을 준다. 

즉 이들이 회집했던 한곳은 개인의 가정집이었음을 암시한다.

 

이 점은 사도행전 여러 곳에서 암시되거나 시위되고 있다. 

스데반의 순교이후 바울의 기독교 박해를 보도하는 사도행전 8 3절에서, “바울이 교회를 잔멸할 새 각 집에 들어가 남여를 끌어다가 옥에 넘기는 기록에서 바울은 예루살렘교회(th.n evkklhsi,an th.n evn ~Ierosolu,moij, 8:1)를 탄압할 목적으로 각 집마다 찾아다닌 것”(kata. tou.j oi;kouj eivsporeuo,menoj) 남여들을 끌어 간 것은 남여들로 구성된 가정교회의 성격을 보여준다.

 

사도행전 12 12절에서 언급하고 있는 마가라 하는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은 예수님의 승천을 목격하고 돌아온 제자들이 모였던 바로 그 으로서, 이곳은 은밀한 가정교회였음이 분명하다. 

이곳은 여러 사람이 모여 기도하던 곳으로서 예루살렘의 그리스도인들의 집회소였다. 

감옥에서 나온 베드로가 이곳으로 찾아간 것을 보면 이곳은 예루살렘의 주된 집회소였음을 암시하고, 천사가 이곳까지의 길을 안내한 일이나(12:10), 로데라는 여종이 영접하려 나온 일(12:13),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이 이 집에 모여 있었다는 점(12:14-15)과 베드로가 놀란 성도들을 진정시킨 일(12:17), 특히 헤롯 아그립바의 군대가 출옥한 베드로 수색에 실패한 점은 이곳은 예루살렘의 여러 가정 교회 중 가장 중심되는 집회소이자 은밀한 가정교회였음을 보여준다.

 

베드로의 투옥 및 출옥과 관련한 이 본문에서 베드로가 자신의 이적적인 석방에 대해 보고한 후 또 야고보와 형제들에게(VIakw,bw| kai. toi/j avdelfoi/j) 이 말을 전하라 하고 떠나 다른 곳으로(eivj e[teron to,pon) 갔다”(12:17)는 기록은 야고보가 중심이 된 다른 가정교회가 있다는 점을 보여주며, 베드로가 다른 곳으로 갔다는 점은 제3의 가정교회가 있었다는 점을 강하게 암시하고 있다.

 

흥미로운 사실은 예루살렘에 다수의 가정중심의 그리스도인 집단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하나의 교회, 곧 예루살렘교회로 인식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점은 누가가 장로 또는 감독을 해 지역의 개별적 집단과 관련시키지 않고 그 도시에 관련시키는 것을 볼 때 분명하다(14:23, 20:17).20) 이 점은 바울의 경우에도 동일하다(1:5). 

바울이 한 지역, 특히 로마시의 경우에 복수의 가정교회가 있었음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개별적인 서신을 보내지 않고 하나의 서신을 그 도시에 보낸 것은 그 모든 가정교회는 오직 하나의 로마교회를 구성하고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일 것이다. 

동시에 이 가정교회들은 서로 고립되어 있지 않고 연합되어 한 지역의 교회를 구성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방 지역의 가정교회

 

가정교회에 대한 흔적은 사도행전 13장 이후에도 산재해 있지만 바울서신에는 보다 분명하게 초기 기독교 공동체가 가정 중심의 교회를 형성하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에베소에는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중심이 된 가정교회가 있었다. 

이 점은 바울의 아굴라와 브리스가와 그 집에 있는 교회가 주안에서 너희에게 문안한다”(avspa,zetai u`ma/j evn kuri,w| polla. VAku,laj kai. Pri,ska su.n th/| katV oi=kon auvtw/n evkklhsi,a,)고전16:19)는 언급에서 분명히 알 수 있다.

 

고린도에는 하나의 지역교회와 여러 가정교회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바울은 고린도에서 그리스보와 가이오에게 세례를 주었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는데(고전1:14) 그리스보는 회당장으로 온 집으로 더불어 주를 믿었던 인물(18:8)임을 고려해 볼 때 자기 집이 가정교회로 제공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가이오는 온 교회 식주인”(the host of the all the church, 16:23)으로 소개되고 있는데, 그는 바울에게만이 아니라 전체 교회에 후의를 베풀었던 인물이었다. 

이 점은 가이오의 집이 가정교회로 사용되었음을 보여준다. 

또 바울은 고린도에 있을 때 스데바나 집 사람에게(to.n Stefana/ oi=kon) 세례를 베풀었는데(고전1:16), 스데바나의 집은(th.n oivki,an Stefana) 아가야지방의 첫 열매라고 소개한다(고전16:15). 

그의 집은 성도 섬기기로 작정한 자라는 바울의 언급에서 그의 집이 가정교회로 제공되었음을 암시하고 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에는 하나 이상의 교회가(살전5:27),22) 라오디게아에도 하나 이상의 가정교회가 있었음(4:15)을 알고 있었다는 점을 암시한다.

 

가정교회와 관련한 바울 서신에서 가장 흥미로운 점은 바울은 로마시에 적어도 세 개 처 이상의 가정교회가 있었다는 점을 알고 있었다는 점이다(16:5, 14, 15).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보낸 문안의 편지인 로마서 16장은 일종의 추신으로서 초기 가정 교회에 관한 중요한 증거를 제공하고 있다. 

여기서 바울은 자신이 알고 있거나 함께 일했던 26명의 이름을 일일이 거명하며 문안하고 있는데, 이 문안은 개인이나 가정교회 공동체에 속한 이들에 대한 그룹들에 대한 정보를 주고 있다. 

일반적으로 이 16장에는 적어도 3개 처의 가정 교회들이 언급되어 있는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 

그 첫 번째는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의 집에 있는 교회”(th.n katV oi=kon auvtw/n evkklhsi,an, 16:6)이다. 

지도자가 유대인이어서, 아마도 유대인 기독교인의 가정교회인 것으로 보인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바울처럼 장막을 만드는 사람으로서(18:3), 특정 지역에 정주(定住)하지 않고 여러 지역을 순회하였다. 

즉 본도에서 출생한 그는 로마에 거주하다가 클라우디우스황제의 유대인 추방령에 따라 고린도로 이주하였고(18:2) 다시 에베소로 옮겨갔으나(18:18), 다시 로마로 돌아간 것으로 보인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에서 이 부부와 접촉하게 되었고, 이 부부 집에서 가정교회가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이 부부는 바울과 함께 에베소로 이거하여 그곳에 다시 가정교회를 세웠다(고전16:19). 후에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로마로 이거하였고, 그곳 자신의 집이 가정교회로 제공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둘째는 아순그리도, 블레곤, 헤메, 바드로바, 허마, 그리고 그들의 형제들을 포함하는(tou.j su.n auvtoi/j avdelfou,j) 가정교회이다(16:14). 

이들 모두의 이름이 헬라어라는 점이서 이들은 유대인이 아니었다. 앞의 세 명은 동부 그리스 출신이고, 바드로마와 허마는 로마의 노예 이름이라는 점에서 노예이거나 해방된 노예였을 것이다. 아순그리도, 블레곤, 헤메, 바드로바, 허마로 대표되는 신자들은 다른 형제들과 함께 가정교회를 구성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세 번째의 가정교회는 빌롤로고와 율리아, 네레오와 그의 자매 올름바와 그들과 함께 하는 모든 성도의 교회이다(16:15). 

율리아는 라틴 이름이고, 나머지는 모두 헬라어 이름이다. 

율리아는 해방이라는 라틴 이름을 얻은 헬라인 노예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빌롤로고와 네레오는 로마에서 흔한 노예의 이름이다. 

네레오가 그의 자매를 알았다는 사실은 그와 그의 자매가 해방된 노예의 후손이였다는 것을 추측하게 한다. 

그래서 빌롤로고와 율리아, 네레오와 그의 자매 올름바로 대표되는 신자들은 다른 성도들과 함께 하나의 가정교회를 구성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상의 3개 처의 가정교회 중 첫 번째는 대다수가 유대인들로 구성된 교회였으나, 다른 두 개처의 가정교회는 주로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노예나 해방된 노예들로 구성된 이방인들의 교회였음을 알 수 있다. 

이들 세 개 처의 가정교회 중에서 다른 두 교회는 주안에서 아리스도불로의 식솔들과 나깃수의 식솔들을 나타내는 10절과 11절에 소개되어 있다. 

이들 종들이나 자유민들은 그들 자신의 가정을 중심으로 회집했던 것이다.

 

말허비는 바울의 목회서신들은 초기 기독교 공동체가 가정 중심의 공동체였고 가정교회 형태였다는 점을 뒷받침 해 주고 있다고 이해했다. 

바울의 후기 서신이라고 할 수 있는 목회서신에서는 이단의 출현과 가정에로의 침입을 경계하고 있는데(딤후3:16, 1:11), 이 서신에서는 오이코스와 그 동족어가 매우 빈번히 나오고 있다(딤전3:4,5,12,15; 5:4,8,13,14; 딤후2:10; 1:7,11 ).

 교회는 하나님의 집으로 묘사되고 있고(딤전3:15, 딤후2:20), 직분자의 자격을 말할 때마다 가정을 잘 다스릴 줄 알아야 한다는 점이 강조되고 있다(딤전3:4-5,12, 5:4). 

이런 가정에 대한 강조가 당시 교회가 가정교회적 형태였음을 보여주는 반증이라고 보고 있다.

 

어떻든 신자의 가정집을 집회소로 하는 가정교회 형태는 2세기 중엽이나 2세기 말까지 계속된 것으로 보인다. 

이 경우 집을 소유한 비교적 부유한 그리스도인은 권속들의 후견인(patron)으로서의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이런 가정집의 경우 회집할 수 있는 인원은 50여명 미만이었을 것이다.

 

2) 그 이후의 변천

 

그러다가 2세기 중엽을 거쳐 가면서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집회소에는 새로운 변화가 나타나는데, 기존의 개인의 가정집을 수리, 확장, 혹은 개조하여 전적으로 종교적 목적으로 이용하는 새로운 형태의 가정교회(domus ecclesiae)가 대두하기 시작한다. 

이것은 보다 편리한 회집과 예배를 위한 자연스런 발전이었다. 

이런 변화에 대한 분명한 증거가 앞서 언급한 바 있는 두라 유로포스에서 발견된 가정교회였다. 

이 가정교회는 두 방 사이의 벽을 허문 직사각형의 구조로서 5.15X12.9미터의 크기의 65명에서 75명까지를 수용할 수 있는 건물이었다. 

이런 변화와 함께 기독교 예배는 가정교회적인 환경과는 다른 공적인 예전에 따라 시행된 것으로 보인다.

 

기존의 건물을 개조하거나 확장하여 보다 넓은 홀로 변천하는 이 시기의 집회소를 미카엘 와이트(Michael White)교수는 aula ecclesiae,  교회의 홀”(hall of the church)이라고 불렀다. 

 aula ecclesiae  교회의 집’(house of the church)이란 의미의 domus ecclesiae 혹은 하르낙이 Saalkirched라고 불렀던 그 이후 시기의 집회소를 칭하는 말이었다. 

와이트에 의하면 가정집의 개조에서 콘스탄틴 시대의 바실리카로의 전환이라는 일반적인 과정을 확인할 수 있는 증거가 없다고 주장한다. 

도리어 그는 aula ecclesiae가 어떤 지역에서는 5세기까지 잔존했던 곳으로 보인다고 주장한다.

 

3세기 말까지는 여전히 개조된 가정교회가 중심을 이루지만 크라우다이머(R. Krautheimer)의 지적처럼 약 250년을 경과해 가면서 별도의 집회소로서의 교회당 건물이 세워지기 시작한다. 

이러한 상황의 변화는 당시의 정치적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

249년에 황제가 된 데시우스(Decius)는 기독교가 별로 전파되지 않는 다뉴브 강 유역인 북부 출신으로서 그의 가장 큰 관심사는 로마의 예 명성을 회복하는 일이었다. 

당시의 경제, 사회적 불안은 로마가 옛 신들을 버린 결과로 보아 이교의 부흥을 의도했다. 

이것의 그의 종교정책의 기반이었다. 

그래서 그는 기독교에 적대감을 가지고 250년부터 기독교를 혹독하게 탄압하기 시작했다. 

그의 목표는 순교자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배교자를 만드는 것이었다. 

그는 신들에게 드리는 제사에 참여하는 자에게는 증명서(libelli)를 발급하는 등 조직적으로 그리스도인들을 탄압했으나 251년 고트족과의 전투에서 사망했다. 

데시우스가 사망하자 그의 친구 발레리안(Valerian)이 황제가 되어 전임자의 정책을 고수했다. 

그도 곧 야만인(페르시아인)들에게 포로로 잡혀갔고 그의 아들 갈리에누스(Gallienus) 260년 황제가 되었다.

 

갈리에누스는 탄압에도 불구하고 확대되는 기독교의 영향력을 보면서 기독교에 대한 통제나 박해가 유효한 결과를 가져오지 못한다는 사실을 인식하기 시작했다. 

그는 곧 기독교에 대한 박해를 해제함으로서 디오클레티안에 의한 기독교의 박해가 재개되기까지 교회는 40년 간 비교적 평화를 누릴 수 있었다.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260년 이후 약 40년 동안, 특히 270년에서 303년까지 개종자들이 늘어났고, 그 필요에 따라 여러 지역에 별도의 집회소로서의 교회당이 세워지기 시작하였다. 

이것은 집회소로서의 교회당 건축사에서 중요한 발전이었다.

 

그런데 갈리에누스(Gallienus) 260년 혹은 261년에 발표된 기독교에 대한 박해를 해제하는 그의 칙령에서 박해자들이 기독교인들의 예배장소’(place of worship)에서 떠나야 한다고 말할 때(ὅπως π τν τόπων τν ϑρσκευσίμων ποχωρήσωσιν. ... ) ϑρσκευσίμων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단어(ϑρσκεύσιμος)는 약 6천만어에 달하는 헬라어 단어 중에 유세비우스의 기록에서 오직 단 한번 밖에 사용되지 않는 단어(hapax)인데, 여기서 말하는 예배의 장소들은 그랜트의 해석처럼) 예배를 위해 독립적으로 세워진 교회당이라기보다는 가정교회 혹은 그 다음 시기의 집회소였던 보다 확장된 가정 교회였을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250년을 경과해 가면서 여전히 가정교회 형태가 주류를 이루었고 점차 별도의 교회당 건물이 세워지기 시작한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3세기 중엽이후 점차 별도의 집회소로서 교회당 건물이 세워지기 시작했다는 점은 유세비우스의 교회사에서 분명히 드러나고 있는데, 유세비우스는 303년 이전에도 과거의 건물에 만족하지 않고 건축기금을 사용하여 모든 도시에 보다 큰 교회당을 세우고자 하는 기독교인들이 많았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이 진술이 다소 과장된 것임을 감안하더라도 콘스탄틴 이전 시대에 이미 어느 정도의 교회당 건물, 곧 바실리카들(basilicas)이 존재했을 것이라고 그랜트는 지적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을 확인할 수 있는 건물은 없다.

 

한 가지 주목할 사실은 에클레시아 라는 용어가 회(), 혹은 모임으로만이 아니라 적어도 270년 전후부터는 건물을 칭하기도 한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다. 

유세비우스 교회사 VIII 2장은 교회당의 파괴를 취급하고 있는데, 디오클레티안(Diocletian, 재위 284-305) 황제는 재위 19,  303 9월에 칙령(βασιλικ γρμματα, an imperial letter)을 내려 교회당을 파괴하고, 성경을 불사르게 하는 등 혹독한 박해를 시작하였고, 고위직에 있는 신자들을 공직에서 축출하고 공민권을 박탈하는 등 박해가 약 10년간 계속되었음을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점은 교회를 '기도하는 집'(house of prayer, οκους ζψους)이라고 하기도 하지만 교회당의 파괴를 말할 때 교회당을 에클레시아(ἐκκλησας)라고 말함으로서, 에클레시아라는 단어가 후일에는 건물을 의미하게 되었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점은 이보다 약간 앞선 3세기 말 교회당의 파괴를 말할 때도 유세비우스는 에클레시아를 사용하고 있다.

 

3) 바실리카의 출현

 

313년 기독교의 공인, 곧 밀란 칙령은 그리스도인과 기독교회의 날들과 일들(days and works)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고, 동시에 교회당 건축에도 엄청난 변화를 주었다. 

밀란칙령의 내용은 다 알려져 있지 않으나, 기독교를 공인과 함께 기독교에 대한 탄압을 중지하고 기독교회들과 묘지, 기타 재산을 돌려준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이제 기독교회는 불법의 집단이 아니라 합법적인 종교로 인정을 받았고, 공개적인 활동이 보장되었다. 

기독교는 점차 제국의 종교로 변모되어 갔다.

 

기독교의 공인 당시 제국 내의 기독교 인구는 약 10% 정도로 추산하고 있으나, 곧 그 수효는 크게 증가해 갔다. 

콘스탄틴의 전임 황제들이 정치적인 이유로 기독교인들을 박해하였듯이 콘스탄틴도 유사한 이유에서 기독교에 관용을 베풀었기 때문이다.

4세기 초 가정교회들의 파괴, 그리고 새로운 재건의 필요성은 기독교 인구의 증가와 함께 교회당의 건축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 

이제 교회는 재산이나 유산을 기증 받을 수 있도록 허용되었으므로 새로운 형식의 교회당이 건축되기 시작하였다. 

콘스탄틴 이전의 예배당은 단순하고 소박한 개조된 가정집에 불과했으나, 콘스탄틴과 그 후계자들이 건축한 교회당은 소위 바실리카’(Basilica)라고 불리는 직사각형의 규모가 크고 찬란한 건축양식이 나타났다. 

바실리카란 벽으로 둘러 싸여 있는 직사각형의 초기 교회당 건축양식을 의미하는데, 이 한쪽 끝에서 다른 쪽 끝까지 개방된 홀(hall)이 있고, 줄을 맞추어 기둥이 세워져 있는(列柱) 건축형식을 의미한다. 

이런 양식은 기독교 이전 시대 이탈리아나 로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건축양식이었는데, 줄을 맞추어 세워진 기둥 위에 지붕을 덮은 공공건물이나 시장 등이 그것이다. 

호주 시드니의 경우를 예로 든다면, 퀸 빅토리아 빌딩과 같은 건축양식을 의미한다. 

이제 교회는 기존의 바실리카를 교회당으로 사용하거나, 바실리카형식의 교회당을 건축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블루의 지적처럼 4세기 초의 바실리카의 출현은 교회당 양식 혹은 기독교 건축사의 분수령이 된다.

 

바실리카라고 불리는 교회 건물들은 3부분으로 구성되었는데, 아트리움(atrium), 회중석(naves) 그리고 성소(sanctuary)가 그것이다. 

아트리움은 벽돌에 의해 둘러싸인 사각형의 형태를 띤 입구이며, 회중석은 바실리카에서 가장 넓은 공간이며, 성소는 회중석 끝에 위치하였고 그 바닥이 한층 높았다. 

성소에는 예식을 주관하는 목회자들을 위한 좌석이 있었는데 감독을 위한 좌석을 보좌’(cathedra)라고 하였는데 이 단어로부터 성당’(cathedral)이라는 용어가 파생되었다.

 

워드-퍼킨스(J. B. Ward-Perkins)는 콘스탄틴 이전 시대의 기독교회에는 콘스탄틴이나 그 이후 시대 바실리카의 모델이 되었다고 볼 수 있는 기념비적인 건축물로 볼 수 있는 것이 전혀 없고, 로마의 캘리안 언덕 위에 세워진 성 존 라테란(St. John Lateran)교회는 황제의 지휘 하에서 세워진 최초의 견고한 교회당(the first substantial church)으로서 기존의 주장과는 달리 초기 기독교의 전향적인 형태의 바실리카로 건축되었다고 주장한다. 

이 교회당은 314년 경에 세워진 것으로 본다.

그러나 흔히 315년 경 두로에 세워진 바실리카는 가장 대표적인 교회당으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교회당의 건축은 새로운 시대에 나타난 변화였고, 그 후 콘스탄틴은 로마에 7개처에 교회를 건축하고, 콘스탄티노플에는 '성스러운 평화'라는 이름의 세인트 아일린 교회당을 짓도록 명령하였다. 

그의 어머니 헬레나는 베들레헴에 성탄교회를, 그리고 감람산교회도 건축하였다. 

제국의 중요도시에는 큰 교회당이 건축되었는데, 이러한 정책은 자기 이름을 남기고자 했던 콘스탄틴과 그 후계자들에 의해 계속되었다.

 

지금은 이 당시에 건축한 교회당이 거의 파괴되었지만 그 기본 구조를 짐작해 볼 수 있는 증거들이 남아있다. 

문제는 이런 외형적인 교회당의 웅대함과 찬란함 속에 진정한 경건과 믿음은 점차 사라져 갔다는 점이다. 

크리소스톰과 같은 교부는 이런 외적인 치장을 경계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1세기 교회는 가정교회의 형태였습니다.

가정에서 모여 예배하고 식탁교제를 나누고 삶을 나누었습니다.

예수님이 보신 교회도 바로 그런 교회의 모습이겠죠.

전문적인 신학을 공부한 목사가 인도하는 예배도 아닙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눈으로 보고 있는 사랑의 교회, 에덴 교회는 예수님이 보시는 교회는 아닙니다.

여러분의 교회당이 크고 화려해질수록 그 속에 계신 예수님은 조그라들고 아파하실지 모르겠습니다.

 

그의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

 

어떻게 입에서 검이 나올까요?

실제 검은 아니겠죠.

입에서는 검이 아니라 말이 나와요.

말은 권세를 가지고 있어요.

구약성경 민수기 14장 28절에“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인간의 입이 자신의 명운과 미래, 모든 인생을 결정한다는 뜻입니다.

내 말에 예언의 기능이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없다'고 말하니까 진짜 세상이 없는 것처럼 보여요.

모든 만사가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돌아가요.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던 세상입니다.

오늘 나는 "하나님은 계시다"라고 선언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있다고 말하는 것과 하나님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어마어마한 차이를 만들어내요.

오늘 나에게 말입니다.

세상은 하나님을 중심으로 돌아가겠죠.

 

유대인은 이 사실을 항상 믿었고 선언했죠.

그들은 지복을 주시는 하나님을 매일 경험했죠.

그렇다고 모두가 그렇다는 것은 아니에요.

믿지 않는 사람은 어쩔 수가 없죠.

믿음은 그냥 믿음이 아닙니다.

믿은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믿음대로 사니까 믿음대로 이루어집니다.

그 행함에 선포가 있을 수가 있어요.

그래서 말씀대로 선포했어요.

말씀대로 이루어졌어요.

 

입의 말로 사람을 죽일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대적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말씀으로 심판이 임한다고 합니다.

정말 그런가요.

내가 한 말이 나를 심판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민수기 14장 28절에“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오늘 내가 한 험담이 나에게 돌아와서 내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오늘 내가 누구와 함께 제 삼자를 험담했어요.

그 누구는 내가 신뢰하는 사람이에요.

그런데 이 사람이 부지불식간에 누가(내가) 제 삼자에 안 좋게 말하더라고 옮길 수 있어요.

그래서 제 삼자가 없는 상태에서는 그 사람에 대해서 말해선 안 됩니다.

베드로의 말 한마디에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즉시 죽었습니다.

베드로의 말이 검이 되었습니다.

바울의 말에 마술사 엘루마는 눈이 어두어지고 주를 대적하는 일을 그칩니다(행 13:11).

엘리야의 말에 하늘로부터 불이 임하고 50명의 군사들이 죽습니다.

말이 능력이고 힘입니다.

말로서 살리기도 하지만 죽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어떤 날선 검보다도 예리하여"(히 4:12).

날카로운 검이 되어 혼과 영과 육체 안의 죄를 드러내고 뜻을 판단하십니다.

말씀이 뼈를 발라내듯이 우리 안의 죄와 더러움을 드러내시고 잘라내십니다.

 

사람의 말도 이런 기능이 있습니다.

창조하는 기능입니다.

오늘 내가 한 말이 그대로 이루어지는 것을 보고 놀랐 때가 있습니다.

물론 말 이전에 생각이 있습니다.

생각을 실현하는 것이 말입니다.

그리고 그 말을 옮기는 것이 행동입니다.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합니다.

그러면 반드시 결과를 만들어 냅니다.

 

작은 키 하나가 배의 방향을 조정하듯이 사람의 말은 자기 인생의 방향을 결정합니다.

말이 긍정적인 방향으로 나를 인도하기도 하고 몰락의 길로 인도하기도 합니다.

인본주의심리학이라고 하는 학문이 있습니다.

내가 하는 말이 쌓이면 인격이 됩니다.

인격이 쌓이면 내 인생이 된다고 세상 사람들도 믿고 있습니다.

선한 말을 하면 내가 먼저 선 해 집니다.

악한 말을 하면 내 마음이 먼저 악 해 집니다.

깨끗한 말을 하면 내 영혼이 깨끗해지는 법이고, 더러운 말을 하면 마음이 먼저 더러워지는 법입니다.

야고보는 사람의 말을 배의 키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야고보서 3장 1-15절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된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줄 알고 선생이 많이 되지 말라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라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

우리가 말들의 입에 재갈 물리는 것은 우리에게 순종하게 하려고 그 온 몸을 제어하는 것이라

또 배를 보라 그렇게 크고 광풍에 밀려가는 것들을 지극히 작은 키로써 사공의 뜻대로 운행하나니

이와 같이 혀도 작은 지체로되 큰 것을 자랑하도다 보라 얼마나 작은 불이 얼마나 많은 나무를 태우는가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삶의 수레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 불에서 나느니라

여러 종류의 짐승과 새와 벌레와 바다의 생물은 다 사람이 길들일 수 있고 길들여 왔거니와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

이것으로 우리가 주 아버지 찬송하고 또 이것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을 저주하나니

한 입에서 찬송과 저주가 나오는도다 내 형제들아 이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샘이 한 구멍으로 어찌 단 과 쓴 을 내겠느냐

 형제들아 어찌 무화과나무가 감람 열매를, 포도나무가 무화과를 맺겠느냐 이와 같이 짠 이 단 을 내지 못하느니라

너희 중에 지혜와 총명이 있는 자가 누구냐 그는 선행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온유함으로 그 행함을 보일지니라

그러나 너희 마음 속에 독한 시기와 다툼이 있으면 자랑하지 말라 진리를 거슬러 거짓말하지 말라

이러한 지혜는 위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요 땅 위의 것이요 정욕의 것이요 귀신의 것이니

 

장로교회는 각종 회의가 참 많이 있습니다.

가장 기본적인 회의가 노회입니다.

한 때는 노회에 참석한 적이 있습니다.

샘이 한 구멍으로 어찌 단 과 쓴 을 내겠느냐

이 장면을 생생하게 목격합니다.

혀 하나 잘 관리하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충분히 좋은 그리스도인될 수 있습니다.

 

그 얼굴은 가 힘있게 비치는 것 같더라

창세기 32장 29-31절

야곱이 청하여 이르되 당신의 이름을 알려주소서 그 사람이 이르되 어찌하여 내 이름을 묻느냐 하고 거기서 야곱에게 축복한지라

그러므로 야곱이 그 곳 이름을 브니엘이라 하였으니 그가 이르기를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 함이더라

그가 브니엘을 지날 때에 해가 돋았고 그의 허벅다리로 말미암아 절었더라

 

하나님의 얼굴이 해처럼 빛나는 것을 처음 본 사람은 아마도 야곱일 것입니다.

물론 야곱 이전에도 하나님의 얼굴을 본 사람이 있었을 것입니다.

여기서 나타나신 하나님은 항상 제2위 하나님이십니다.

성삼위일체는 너무 신비하여 다 풀이할 수가 없습니다.

그냥 믿는 게 좋습니다.

너무 따지다보면 양태론에 빠질 수가 있습니다.

그 날에 우리가 주님의 얼굴을 모든 문제가 해결되겠죠.

 

몸이 아프면 사람은 병원을 갑니다.

의사에게 아픈 곳을 이야기합니다.

이것을 문진이라고 부릅니다.

대부분 문진으로 다 판단을 합니다.

좀 더 심각한 것은 검사를 합니다.

내가 아플 때 의사를 찾아가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나보다 내 몸에 대해서 좀 더 잘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을 전문인이라고 부릅니다.

전문인이 모든 질병을 다 아나요.

안과 의사는 이비인후과 질병에 대해 문외한입니다.

그들도 이비인후과 질병이 걸리면 이비인후과 의사를 찾습니다.

의사는 내 몸에 대해서 완벽히 모르지만 나보다는 조금 더 잘 압니다.

그래서 나는 의사를 찾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일반의 은혜라고 말합니다.

병에 걸리면 의사를 찾아가세요, 평판이 좋은 의사를 찾아가세요.

 

곁길로 갔습니다.

마태복음 17장 1,2절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

그들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

 

실제로 요한은 예수님의 얼굴로 변화되는 것을 목격한 적이 있습니다.

사도 마태는 그 이야기를 간직했다고 마태복음에 옮겨 적었습니다.

우리는 변화산 사건이라고 부릅니다.

이 장면에 모세, 엘리야가 등장합니다.

나는 이들이 어떻게 모세와 엘리야를 알아 보았을까?

궁금하지 않습니까?

저도 궁금합니다.

저는 이들이 모세와 엘리야를 보자, 바로 알아보았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을 사람들은 직관력이라고 부릅니다.

아니면 나중에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그들이 누구인지 설명해 주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비몽사몽간에 모세와 엘리야에 대해서 말합니다.

그러니까 직관적으로 알았다는 말이 맞을 것입니다.

얼굴이 해같이 빛나는 분은 누구, 부활승천하신 예수님입니다.

부활승천하신 예수님이 요한 앞에 떡 하니 등장을 합니다.

요한은 놀라고 놀라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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