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을 돌이켜 나에게 말한 음성을 알아 보려고 돌이킬 때에 일곱 금 촛대를 보았는데
요한은 몸을 돌이켰습니다.
그 이유는 요한에게 말하신 분이 누구인지 알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요한은 놀라운 광경을 목격합니다.
일곱 금 촛대를 보았습니다.
요한이 본 일곱 금 촛대는 어디에 있었습니까?
일곱 금 촛대는 성전에 있었습니다.
히브리어로 메노라라고 부릅니다.
메노라는 성막의 7갈래 금촛대를 본뜬 것입니다.
금촛대는 7일간의 천지창조를 뜻하며, 안식일을 나타내기 위해 조금 높이 솟은 중앙 촛대 꼭대기의 잔을 중심으로 양쪽에 각각 3개의 촛대가 있습니다.
모양은 아래처럼 생긴 것으로 여겨집니다.
초를 꽂은 것은 아니니까 촛대는 아니겠죠.
그래서 성경 번역가들은 촛대라고 번역했으니까 촛대라고 부르겠습니다.
성전 안에는 공식적으로 제사장만 들어갈 수 있습니다.
이들의 임무 중 하나가 촛대의 불을 살피는 일이었습니다.
불이 꺼져 있으면 기름을 채우고 새 심지에 불을 피웠습니다.
그래서 온종일 성전 안을 밝히도록 했습니다.
출애굽기 27:21(개역한글)
아론과 그 아들들로 회막안 증거궤 앞 휘장 밖에서 저녁부터 아침까지 항상 여호와 앞에 그 등불을 간검하게 하라 이는 이스라엘 자손의 대대로 영원한 규례니라
출애굽기 27:21(개정개역)
아론과 그의 아들들로 회막 안 증거궤 앞 휘장 밖에서 저녁부터 아침까지 항상 여호와 앞에 그 등불을 보살피게 하라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대대로 지킬 규례이니라
또 다른 설명은 일곱 개의 촛대는 모세가 시나이 산에서 십계명을 받을 때 숲에서 불이 피어오르나 타지 않는 떨기나무에서 나타난 하나님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성경 출애굽기 25장 31절부터 40절까지 성막을 만들 시절의 메노라 제작에 대한 하나님의 지시가 나와 있습니다.
이 메노라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오는 진리의 빛을 상징한다고 합니다.
출애굽기 25장 31-40절
너는 순금으로 등잔대를 쳐 만들되 그 밑판과 줄기와 잔과 꽃받침과 꽃을 한 덩이로 연결하고
가지 여섯을 등잔대 곁에서 나오게 하되 다른 세 가지는 이쪽으로 나오고 다른 세 가지는 저쪽으로 나오게 하며
이쪽 가지에 살구꽃 형상의 잔 셋과 꽃받침과 꽃이 있게 하고 저쪽 가지에도 살구꽃 형상의 잔 셋과 꽃받침과 꽃이 있게 하여 등잔대에서 나온 가지 여섯을 같게 할지며
등잔대 줄기에는 살구꽃 형상의 잔 넷과 꽃받침과 꽃이 있게 하고
등잔대에서 나온 가지 여섯을 위하여 꽃받침이 있게 하되 두 가지 아래에 한 꽃받침이 있어 줄기와 연결하며 또 두 가지 아래에 한 꽃받침이 있어 줄기와 연결하며 또 두 가지 아래에 한 꽃받침이 있어 줄기와 연결하게 하고
그 꽃받침과 가지를 줄기와 연결하여 전부를 순금으로 쳐 만들고
등잔 일곱을 만들어 그 위에 두어 앞을 비추게 하며
그 불 집게와 불 똥 그릇도 순금으로 만들지니
등잔대와 이 모든 기구를 순금 한 달란트로 만들되
너는 삼가 이 산에서 네게 보인 양식대로 할지니라
순복음 교단의 안도현 목사가 크리스천 연합신문에 '메노라의 교훈'이란 제목으로 올려 놓은 글이 있어 간추려 옮겨 놓았습니다.
"안도현 목사 (아름다운교회)
우리가 걷는 인생의 길은 어려움의 연속이라 하여도 과언이 아닙니다.
고난 없이 살고 싶지만, 고난은 인간에게 주어진 숙명입니다.
우리에게 고난의 의미를 깨우쳐주는 것이 메노라입니다.
성막에 들어가면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이 등대입니다.
성소를 밝히고 있는 그 등대를 히브리어로 ‘메노라( הָרוֹנְמ )’라고 합니다.
순금으로 만들어진 메노라는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메노라는 중앙의 가지와 양쪽으로 3개씩 줄기가 있어 촛대는 모두 일곱 개입니다.
성경에서 숫자는 모두 뜻이 있는데 6은 사람을 나타내며 7은 완전한 숫자입니다.
등대의 줄기 6개는 예수 그리스도에 붙어있는 하나님의 자녀들을 뜻합니다.
기독교의 상징이 십자가라면 유대교의 상징은 메노라입니다.
교회마다 십자가가 있듯이 유대인의 회당에는 메노라가 있습니다.
메노라는 어떻게 만들어졌을까요?
등대의 소재인 금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상징합니다.
메노라는 아무 불순물이 들어가지 않은 순금으로 만들되 금을 녹여서 부어 만든 것이 아니라 한 달란트나 되는 금을 망치로 두드려서 만든 것입니다.
한 달란트는 34kg입니다.
그러한 금덩어리를 원하는 모양이 될 때까지 계속 망치로 두드리고 또 두드려서 만든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우리 때문에 채찍에 맞아 고난을 당하신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성막의 등대를 만드는 과정은 성도의 고난과 연단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메노라의 재료인 순금을 만들기 위해서는 섭씨 1000도 이상의 고열을 가해야만 합니다.
성소의 등대는 뜨거운 열을 견뎌낸 정금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금을 쳐서 가공하는 단조의 과정을 통과해야 합니다.
금을 단조하여 가공하면 두 가지 장점이 있습니다.
첫째 찢어지거나 부러지지 않습니다.
둘째, 금을 두드려서 가공하면 더 밝은 빛을 반사하게 됩니다.
이 모든 과정은 신자의 고난을 의미합니다.
욥은 자신의 고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나의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같이 되어 나오리라”(욥 23:10).
고난 없는 성숙은 없습니다.
사람은 고난을 통과하며 연단을 받아야 비로소 성숙해집니다.
데이비드 브린클리는 “신은 가끔 우리 앞에 빵 대신 벽돌을 던져놓기도 하는데 어떤 이는 원망해서 그 벽돌을 걷어차다가 발가락 하나가 더부러지기도 하고 어떤 이는 그 벽돌을 주춧돌로 삼아집을 짓기 시작한다.”라는 명언을 남겼습니다.
고난이라는 벽돌은 다루는 사람에 따라 행복의 기초가 될 수도 있고 불행의 원인이 될 수도 있습니다.
사람은 참으로 신기한 존재입니다.
고난을 당하면 더 약해질 것 같고, 변질될 것 같지만 그 반대입니다.
완악했던 사람이 부드러워집니다.
교만했던 사람이 겸손해집니다.
이기적이던 사람이 이타적인 사람이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고난으로 성도들은 연단하시는 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촛대를 보여준 것은 아닐 것입니다.
요한이 계시를 받을 때는 성전은 이미 파괴된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예루살렘에 가서 메노라를 더 이상 볼 수 없었습니다.
로마를 가면 티투스 개선문을 만날 수가 있습니다.
티투스 개선문은 로마제국의 도미티아누스 황제가 세웠습니다.
그의 친형이었던 티투스의 1차 유대로마 전쟁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서기 82년에 세운 가장 오래된 개선문입니다.
히브리어로 등대를 의미하는 유대교를 상징하는 7개의 가지가 있는 촛대가 메노라입니다.
이 메노라는 유대교를 상징하는 가장 중요한 상징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유대인 회당에도 메노라가 있습니다.
로마 제국은 메노라를 유대인의 두드러진 상징으로 보았습니다.
그들은 유대인을 정복하고 세운 티투스 개선문에 전리품으로 메노라를 들고 가는 모습을 부조했습니다.
전쟁사는 승자와 패자의 역사입니다.
전쟁에 승리한 로마제국에는 티투스 개선문이 영광이지만 패배한 유대인에게는 아픔이었습니다.
개선문 내벽에는 메노라와 황금 나팔, 진설병을 얹어 놓은 탁자 등을 옮기는 장면이 부조로 생생히 조각돼 있습니다.
도미티아누스 황제는 티투스 개선문을 로마 공화정의 중심거리인 비아 사크라의 가장 높은 벨리아 언덕에 세웠습니다.
이 도미티아누스 황제 박해 때 요한은 밧모섬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촛대의 광경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80세의 노인에게 촛대의 광경은 무슨 의미일까요?
예루살렘에도 체류하며 지냈던 관계로 보아 대제사장 가야바의 가족과 먼 인척관계를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요한은 제사장 가야바 집에 들어오지 못하고 있었던 베드로를 들여보내 주었습니다(요18:15).
요한복음에 따르면 요한이 대제사장과 친분이 있었던 점과 아버지가 배를 가지고 있는 선주였다는 것을 보면 요한이 어느정도 유력한 집안에 속해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시몬 베드로와 또 다른 제자 하나가 예수를 따르니 이 제자는 대제사장과 아는 사람이라 예수와 함께 대제사장의 집 뜰에 들어갔습니다(요 18:15).
[출처] 밧모섬/사도요한의 밧모섬 사역|작성자 김정국 목사
이상의 글을 보면 요한이 대제사장을 잘 알고 있던 친분의 사람인 것은 분명합니다.
나무위키에 이런 글이 있습니다.
"근대의 연구에 의하면 사도 성 요한과 그의 형 사도 성 야고보는 사제 가문이고, 아버지 제배대오는 유대교 사제이며, 요한과 야고보는 사제 교육을 받은 엘리트들이라는 결과가 있다.
당대의 유대교 사제들은 성전에서 봉직하는 때를 제외하고는 자신이 따로 갖고 있던 직업이 있었고 그것으로 먹고 살았는데 요한과 야고보의 아버지 제배대오의 경우에는 그것이 어부였다.
게다가 이들은 꽤나 부유한지 복음서들, 특히 마태오에 의하면 그리스도의 부름을 받았을 때에 베드로와 안드레아 형제가 그물만 버려두고 따랐다고 나오는데 반해 이 둘은 배와 아버지를 버려두고 그리스도를 따라간다.
즉, 베드로 형제의 경우에는 자기 소유의 배가 없었던 반면에 요한 형제는 자기 소유의 배가 있었다.
또한 이들은 예루살렘에 자신 가문에 속한 별장이 있었는데, 이 별장이 바로 그리스도께서 성체성사를 제정하신 곳, 다시 말해서 최후의 만찬을 행하신 곳이다.
또한 이들은 대사제의 친척이었고, 그렇기에 대사제와 아는 사이였다고 한다.
요한의 복음서에서는 그리스도께서 붙잡히시고 붙잡혀 가실 때에 베드로와 요한 두 제자가 따라가는 장면이 있는데, 여기에서 요한을 두고 "그 제자는 대사제와 아는 사이여서, 예수님과 함께 대사제의 저택 안뜰에 들어갔다"(18:15)고 명시한다."
만약 이 주장이 맞다면 요한은 성전에서 이미 메노라를 보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요한이 이미 익히 알고 있던 메노라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나무위키의 글을 믿기에는 그 근거가 너무 빈약합니다.
사도 요한이 어떤 지파에 속했었는지 충분한 자료가 필요합니다.
요한의 가계를 더듬어 보겠습니다.
요한의 어머니 살로메는 예수의 이모였습니다(요19:25).
누가복음에 따르면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가 세례요한의 어머니 엘리사벳과 친족관계였습니다.
엘리사벳은 최초의 대제사장 아론의 후예였습니다(눅1:36).
자연히 사도 요한의 어머니도 역시 아론 대제사장의 후예인 것입니다.
손진길 씨는 요한의 아버지 세베대도 레위지파로 추정합니다.
그렇다면 나무위키의 글은 충분히 신뢰할 만합니다.
요한이 레위인이라고 주장하려면 세베대가 레위인이라고 주장해야만 합니다.
세베대는 레위지파 후손이라는 글이 있습니다.
오버도사란 사람이 주장한 글입니다(blog.naver.com/go210093/157090267).
메노라와 관련하여 다른 각도에서 조망해 보겠습니다.
유대인들이 지키는 절기 중에 하나가 하누카입니다.
구약성경의 모세 율법에는 없었던 '하누카'는 수전절이라는 이름으로 신약성경에 나옵니다.
예루살렘에 수전절이 이르니 때는 겨울이라(요한복음 10장 22절).
하누카는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의 중간시대에 일어났던 사건을 배경으로 합니다.
유대인들이 셀류쿠스 왕조의 안티오쿠스 4세에 의해서 더럽혀진 성전을 되찾아서 하나님께 바친 것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수전절은 헬라어로 '재건'이란 뜻의 '엔카이니아'입니다.
히브리어로는 '하누카'라고 부르는데 봉헌이란 뜻입니다.
성전을 재건하여 하나님께 봉헌했다는 의미로 수전절이며, 하누카라고 유대인들은 부릅니다.
하누카 절기가 되면 유대인들은 집집마다 등불을 켜놓습니다.
그래서 하누카를 빛의 축제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성전을 탈환했을 때 성전 등잔에 불을 밝힐 기름이 하루 분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성전을 새로 봉헌할 때까지 8일 동안이나 기적적으로 불을 밝힐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전설에 따라 하누카 절기는 8일 동안 지켰습니다.
하누카는 아홉개의 촛대를 밝히는데 성전의 기적을 기념하여 저녁마다 하루에 하나씩 불을 켜며 팔 일때에는 8개를 다 켭니다.
아홉 개 중 나모지 한 촛대는 다른 촛대를 켜는데 사용하기 위한 것입니다.
하누카는 겨울에 지켜졌습니다.
하누카는 유대력 키슬레브월 25일부터 8일간 지키는 데 공교롭게도 하누카는 성탄절과 비슷한 시기에 지켜졌습니다.
그래서 요렇게 생긴 메노라를 하누카 메노라라고 부릅니다.
지금은 다양한 하누카 메노라가 있습니다.
켠 것은 촛불은 아닙니다.
기름을 채워 넣었으니까 등대라고 부르는 게 맞겠죠.
요한은 하누카 되면 메노라에 불을 켜는 것을 보고 자랐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