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요한계시록

1장 9절

기독항해자 2021. 3. 10. 10:39

 요한은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를 증언하였음으로 말미암아 밧모라 하는 섬에 있었더니

 

요한은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밝힙니다.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요한은 자신을 형제라고 소개합니다.

그들 중에 있는 한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종종 제왕적인 교회들을 볼 때가 있습니다.

설교자들은 마치 교황처럼 행동하는 교회들을 보게 됩니다.

설교자들은 무지 몽매한 성도들에게 무언가를 시혜하는 자세로 설교를 합니다.

그런데 요한은 뭐라고 말합니까?

나는 너희 중에 있는 한 사람이다라고 말합니다.

다른 종류의 사람이 아니라 똑같은 사람이다라고 말합니다.

요한은 우리와 같은 사람입니다.

이 지구상에 다른 류의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오늘 권력 집단들은 자기의 보스를 무오한 사람으로 만들려고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비판하는 사람들을 비난합니다.

자기의 보스는 다르다라고 말합니다.

 

둘째로 요한은 자신을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고 합니다.

요한은 환난의 시대를 살았던 사람입니다.

요한은 도미티아누스의 박해를 받았습니다.

로마 황제 도미타아누스 박해를 정리하고 가겠습니다.

우리는 글을 읽을 때 그 글이 누구의 손에 의해 기록되었느냐에 따라 과장이 있음을 감안해야 합니다.

 

도미타아누스는 형 티투스가 아들을 남기지 않은 탓에 30세의 나이에 황제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도미티아누스는 전임자인 아버지와 형과는 모든 면에서 대조적인 인물이었습니다.

그의 등장으로 로마는 다시금 가이우스와 네로 황제 때 경험했던 악몽을 되풀이해야 했습니다.
사치스럽고 귀족적인 생활을 좋아했던 도미티아누스에게 있어서 치명적인 문제는 그가 죽은 후에 신격화되는 것을 기다릴 만한 인내심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로마는 황제가 선정을 베풀 경우 죽은 후에 신으로 선포해 숭배하는 전례가 있었습니다.

아버지와 형 모두 사후에 신격화되었고, 이런 영예는 이전에 율리우스 카이사르, 옥타비아누스, 클라우디우스에게만 주어진 것이었습니다.

살아서 신으로 추앙받기 원했던 도미티아누스를 보면서 로마 시민들은 죽은 네로 황제의 그림자를 보았습니다.

결국 그는 암살로 생을 마감하며 '기록말살형'에 처해집니다.

'기록말살형'은 제정 로마에서 원로원이 황제에게 가할 수 있는 최고의 복수극이었습니다.

교회사에서도 도미티아누스는 네로 황제에 이어서 기독교를 핍박한 잔인한 황제로 기억됩니다.


네로는 로마제국에서 최초로 발생한 기독교 박해자로 기록된 황제입니다.

그 두 번째 박해자로 이름을 올린 사람이 바로 도미티아누스입니다.

서민적이고 소박했던 아버지(베스파시아누스)와 형(티투스)과는 달리 어릴 때부터 황궁에서 자라 사치스러웠고, 형이 일찍 요절한 탓에 30세의 젊은 나이에 얼떨결에 황제가 된 도미티아누스는 분명 여러 면에서 ‘준비되지 않은’ 황제였습니다.
그가 폭군의 길로 확실히 접어들게 된 것은 살아서 신으로 추앙받고자 한 그의 정책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이것을 대단한 신성모독으로 여기겠지만, 고대 로마제국에서 황제의 신격화는 그렇게 혐오스런 일이 아니었고 옥타비아누스 황제 때부터 내려온 전통이었습니다.
선정을 베푼 황제들은 죽은 후에 예외 없이 신격화되었고, 충성스런 로마 시민들은 신전을 찾아가 죽은 황제를 위해 향불을 피우곤 했습니다.

이런 상황을 알 때 살아서 신으로 추앙받고자 했던 도미티아누스의 문제를 지적하자면, '인내심 부족' 내지는 '허영심'이었지, 이것이 동시대 로마인들에게 '우상숭배'와 같은 그런 느낌을 준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살아 있는 자신을 신격화한 도미티아누스의 정책은 유대인과 기독교인들로부터 극심한 반발을 초래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철저한 유일신 신앙을 특징으로 하는 유대교와 기독교의 특성상 그들의 반발은 불을 보듯 뻔한 것이었습니다.

그들의 반발에 도미티아누스도 전혀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그는 먼저 유대교 진영을 정조준한 반유대교 법령들을 발표했습니다.

이 법령들로 인해 로마 시민들이 유대교로 개종하는 것은 금지되었고,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해마다 예루살렘에 바치던 반 세겔의 성전세도 성전이 파괴된 것을 이유로 들며(주후 70년) 로마 시에 있는 쥬피터 신전의 유지비 명목으로 사용했습니다.
이런 조치들로 인해 발생할 유대인들의 반란을 미연에 막기 위해 이스라엘 땅에서는 삼엄한 공포 정치가 행해졌습니다.

유세비우스(4세기 교회사)는 이 당시 나사렛에 사는 예수님의 친족들이 당해야 했던 심문에 대한 흥미로운 스토리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친족들은 다윗 왕실에 속한 혈통이었기 때문에 자의든 타의든 반란의 선봉에 설 가능성이 높다는 이유로 고발되었습니다.

하지만 도미티아누스는 이들이 세속 권력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소박한 농부들임을 알고 그냥 무죄 방면했다고 합니다.

유대교 진영과 함께 기독교에 대한 핍박도 병행되었습니다.

네로 치하에서의 기독교 박해가 로마 시에만 국한되었던 것과 달리 도미티아누스 치하에서의 박해는 멀리 소아시아 지방에까지 미쳤습니다.

박해의 여파로 사도 요한은 밧모 섬에 유배되었고, 이런 배경에서 씌어진 서신이 바로 요한계시록입니다.

바울은 로마의 기독교인들을 향해 세속 정부에 복종하도록 권면하면서 권력이 하나님에 의해 세워진 것임을 말한 바 있습니다(롬13:1,2).

하지만 밧모 섬에 유배된 요한은 자신의 서신서에서 로마제국을 '성도들의 피와 예수의 증인들의 피에 취한… 큰 음녀'(계17:1,6)로 묘사하면서 세속 정부에 대한 노골적인 적대감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도미티아누스의 박해기에 처형된 인물 가운데 최고위층 인사는 다름 아닌 황실 내에 있었는데, 이들에 대해서는 특별히 언급할 만합니다.

그들은 바로 클레멘스와 도미틸라 부부였습니다.

클레멘스는 황제의 사촌이었고 도미틸라는 황제의 조카딸이었습니다.
클레멘스는 처형되던 해인 주후 95년에 로마제국에서 최고위직인 집정관을 지내기도 했습니다.

이들 부부가 처형된 이유는 기독교에 귀의했기 때문인 것으로 전해집니다.

클레멘스와 도미틸라 부부에게는 두 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아들이 없던 도미티아누스는 이들을 자신의 후계자로 삼기 위해 양자로 입적시켰습니다.

이들의 이름도 각각 베스파시아누스와 도미티아누스로 바꾸어주고 최고의 학자를 붙여 두 소년에게 통치자 수업을 시켰습니다.
그런데 이들의 친부모가 당시 로마법에서는 불법 종교였던 기독교에 귀의하는 바람에 모든 계획이 수포로 돌아갔습니다.

이교를 믿는 건 자유지만 차기 황제의 친부모가 로마의 전통적인 종교를 버리고 이교를 선택한다는 것은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도미티아누스의 기독교 핍박은 그가 갑작스레 암살당하면서 그치게 됩니다.

도미티아누스의 심장에 비수를 꽂은 사람은 도미틸라의 집사장이었던 해방 노예 스테파누스였다고 합니다.

 

도미티아누스의 박해 때에 불똥이 요한에게도 미쳤습니다.

그래서 밧모섬에 유배를 당했습니다.

요한은 견디는 것만이 최고의 방책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참음, 이것이 기독교인의 제일 덕목입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를 증언하였음으로 말미암아 밧모라 하는 섬에 있었더니

요한은 왜 환난을 당했을까요?

요한은 환난을 예수의 환난으로 표현했습니다.

예수님으로 인해 받은 환난이란 뜻입니다.

요한은 왜 환난을 당했느냐면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를 증언하였음으로 말미암아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유대교를 말합니다.

예수는 기독교를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때문에 환난을 당한 것입니다.

그가 받은 환난은 밧모라고 하는 섬에 갇히게 된 것입니다.

 

현재 밧모섬은 그리스의 영토입니다.

터키 해안에서는 불과 60㎞밖에 떨어져 있지 않으나 아테네에서는 250㎞나 떨어져 있습니다.

밧모섬의 크기는 남북이 약 16㎞, 동서로는 넓은 곳이 약 10㎞이며 중간 부분은 너비가 불과 1㎞정도밖에 안됩니다.

해안 굴곡이 심하여 주위 둘레는 약 60㎞에 이르나 면적은 34㎢입니다.

주민은 2700여명인데 반 이상이 섬 중앙의 산언덕에 있는 호라 마을에 거주하고 있습니다.

이곳의 집들은 대부분 백색이어서 매우 깨끗하게 느껴집니다.

이곳의 교통수단은 굴곡이 심한 지형적 특징 때문에 승용차보다는 오토바이가 많이 이용됩니다.

관광객들 역시 오토바이를 빌려 사용합니다.

 

로마제국 시대에 밧모섬은 정치·종교 중범자들의 유배처였습니다.

한번 들어가면 살아나오기 힘든 생지옥이었다고 합니다.

예수의 제자 중 유일하게 순교하지 않은 사도 요한은 도미티아누스 황제 때 이 섬으로 유배됐다가(주후 95년께·계1:9) 도미티아누스가 죽은 후 석방돼 96년 에베소로 귀향하였다고 합니다.

이곳 전승에 의하면 요한은 돌을 깨는 일에 동원되었다고 합니다.

아직도 이곳 채석장에서는 돌을 생산하고 있습니다.

사도 요한이 유배생활 중에 계시를 받았다는 산 중턱의 요한 계시동굴 안에는 요한이 계시를 받을 때 갈라졌다고 하는 바위가 있고 바위벽 1m 높이에는 요한이 기도하고 일어날 때마다 손을 짚어 파였다는 손자국이 있습니다.

계시 동굴 입구에는 눈이 어두운 요한 대신에 계시의 내용을 대서한 요한의 제자 브로고로 집사의 모습이 그려져 있습니다.

사도행전 6장 5절에 따르면 브로고로 집사는 예루살렘 교회 초대 7집사 중 한 사람으로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었습니다.

산정상에 요한 수도원이 있습니다.

요한 수도원은 난공불락의 요새 같은 성으로 섬을 압도할 듯 버티고 서 있습니다.

이 수도원은 1088년 수도자 성 크리스둘툴러스가 사도 요한을 기념하여 세웠습니다.

그리고 이 지역에 자주 출몰하는 해적들의 공격을 막기 위하여 요새화되었다고 합니다.

 

요한은 유배지에 죄수의 신분으로 와 있습니다.

모든 것이 부족했을 것입니다.

불편하기가 이루 말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요한은 이제 나이도 많았을 것입니다.

아마도 요한이 예수님을 따라 다닐 때의 나이가 20대라고 한다면 그는 80대의 노인이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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