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그에게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
그의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았다고 말합니다.
관계가 그렇다는 뜻입니다.
성부가 제일원인이십니다.
모든 것을 있게 하신 근원이십니다.
성자는 성부에게서 나왔습니다.
성자는 만들어진 존재가 아니라 나온 존재입니다.
사람은 만들어진 존재입니다.
성자와 인간의 근본적인 차이입니다.
성부는 모든 것은 근원이십니다.
나는 나의 아버지로부터 나온 존재입니다.
나는 나의 아버지가 만든 존재가 아닙니다.
나의 아버지가 만든 존재들이 있긴 합니다.
그렇지만 생명체를 만들지는 않습니다.
무생물체를 만들어냅니다.
인간은 이런 점에서 하나님을 닮은 존재들입니다.
하나님은 생명체를 만들고 인간은 무생물체를 만듭니다.
만드는 것은 비슷하고 생명체냐 무생물체냐 차이가 있습니다.
성자께서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셨습니다.
성자께서 우리를 왕 제사장으로 삼으셨습니다.
우리는 다스리도록 만들어진 존재입니다.
창세기 1장 26-28절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하나님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모든 만물을 다스리도록 인간을 만드셨습니다.
개는 훌륭하다라는 예능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강형욱 훈련사와 예능인 이경규가 진행하는 프로그램입니다.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해 주는 프로그램입니다.
예전에 우리 어렸을 때는 반련견이란 말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애완견이란 말도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똥개란 말로 퉁치던 시대가 있었습니다.
복날이 되면 개들이 수난을 당했습니다.
사람들은 복날에 먹기 위해 개들을 키웠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예쁘고 귀엽게 생긴 개들을 키우기 시작했습니다.
개들은 사람들 사회에 적응한 몇 안 되는 동물 중에 하나입니다.
애완견이란 말로 불릴 때도 있었습니다.
이제는 반려견이란 말로 불립니다.
우리 어머니는 개는 영물이라고 종종 말씀하셨습니다.
국어사전을 보니까 영물을 신령스러운 동물이나 물건으로 풀이하고 있습니다.
신령스럽다를 찾아보니까 신비하고 초자연적인 기운이 있는 듯하다라고 풀이를 합니다.
자연적이지 않다, 설명하기가 쉽지 않다는 뜻일 것입니다.
영물이란 애매모호한 말입니다.
개는 주인을 닮아갑니다.
개는 주인에게 자신을 철저히 맞춥니다.
개는 주인이 강하게 나오면 꼬리를 내립니다.
개는 주인이 약하게 나오면 꼬리를 듭니다.
개는 주인이 내가 꼬리를 내려야 할지 세워야 할지 판단합니다.
꼬리를 드는 개를 보면 주인이 개인에게 애걸복걸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한마디로 개를 다스릴 줄 모르는 것입니다.
개에게 끌려다닙니다.
오히려 개가 주인을 다스립니다.
주인과 개의 자리가 전도된 것입니다.
강형욱 씨는 이것을 드려다 봅니다.
그리고 개와 주인의 자리를 제자리로 돌려 놓습니다.
주인은 개가 무엇인지 보다 정확한 지식을 갖게 됩니다.
개에 대한 제대로 된 지식이 없이 개를 키우다가 잘못된 지식으로 망쳐진 관계가 됩니다.
그것을 되돌려 놓는 것이 이 프로그램의 목적입니다.
이게 바로 회개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바른 관계로 되돌려 놓는 것, 그것이 회개입니다.
바른 관계로 되돌리려면 바른 관계가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손자병법에 지피지기면 백전불태라는 말입니다.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는 뜻입니다.
성경에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지식이 없으면 진짜로 망합니다.
오늘 아침에 내가 먹은 음식물이 어떻게 내 몸을 살리는지 알아야 합니다.
오늘 아침에 내가 먹은 음식물이 내 몸을 어떻게 망치는지 알아야 합니다.
바른 지식을 가져야 바른 청지기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우리는 다 제대로 알 수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한 가지 지식을 파고 파면 나중에는 거인이 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도 거인이 되고 싶습니다.
요한계시록의 해석자로 거인이 되고 싶습니다.
요한계시록을 바르게 해석하는 해석자로 남고 싶습니다.
지금은 초심자이지만 요한계시록을 들여다보고 들여다보면 나도 언젠가는 거목이 되는 날이 올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셨습니다.
제사장은 예배자를 말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하나님을 예배하는 예배자로 세우셨습니다.
우리는 무언가를 예배합니다.
그 대상이 무엇이든 사람들은 다 예배하는 예배자로 삽니다.
기독교인이든 아니든, 상관없이 다 예배하며 삽니다.
요한계시록은 우리를 예배의 자리로 데려 갑니다.
우리를 요한계시록을 통해 예배가 무엇인지 엿볼 수가 있습니다.
주님의 신부교회 카페에 올라온 글을 보면 예배가 무엇인지 설명하는 글이 있습니다.
[창세기 22:5]
이에 아브라함이 종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라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예배하고 우리가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하고
성경에서 예배라는 단어는 창세기 22장 5절에서 처음 나옵니다.
그 전에는 ‘단을 쌓았더라’ ‘여호와 이름을 불렀더라’ 등으로 씌였습니다.
예배를 뜻하는 영어 단어 ‘worship’은 worth 가치와 ship 신분 위치라는 단어가 합성된 것으로, 대상에게 합당한 가치와 존귀를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독일어 ‘Gottesdienst’에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섬김이란 뜻이 더 포함되어 하나님과 성도 사이의 상호 작용이란 의미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요한복음 4:23]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이 말씀은 경건생활을 하던 당대의 종교인들에게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죄성으로 인해 무너지고 상처받고 목이 마르고 남편이 다섯일 정도로 망가진 삶을 살았던 여인, 동네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받았던 수가성 여인에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만이 채워줄 수 있는 부분을 여인은 사람에게서 찾았고 결과적으로 허무한 삶을 살아갔습니다.
그 여인을 향한 아버지의 마음, 회복시키기 위해 부르시는 초청은 지금도 우리를 향해 계속되고 있습니다.
아무리 잘나가고 화려한 삶을 살아도 예배가 회복되지 않으면 인생에 만족이 없습니다.
우리가 영과 진리 안에서 올바로 예배 드리기 시작하면 반드시 회복됩니다.
온전한 예배자는 하나님의 임재 앞에 항상 서 있는 자입니다
예배는 가치를 알고 가치에 합당한 대우를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아는 게 중요합니다.
알되 제대로 알아야 합당한 가치에 대한 대가를 지불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모르는 것을 예배할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예배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누구신지, 어떤 분이신지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하나님을 합당하게 대우할 수가 있습니다.
그에게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
이것을 뭐라고 표현하죠.
송영이라고 부릅니다.
혹은 기원이라고 부릅니다.
국어사전은 송영을 시가를 외어서 그 뜻을 새기면서 나지막이 읊음이라고 풀이하고 있습니다.
송영은 성 삼위 일체 하나님께 영광의 찬양을 드리는 찬미를 말합니다.
예배의 본질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데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무슨 일을 행하셨는지를 알고 그것을 찬양하는 데서부터 출발합니다.
그런 찬양을 가리켜서 송가, 또는 송영(送迎, doxology)이라고 합니다.
송영은 영광(doxa)과 말(logy)의 합성어입니다.
이것은 원래 그분의 것입니다.
그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분을 인정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인정하려면 자신을 낮추어야 합니다.
사람은 자신을 낮추는 게 쉽지 않습니다.
우리가 예배한다는 것은 자신을 낮추고 하나님을 높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신 일을 인정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