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반드시 속히 일어날 일들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의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알게 하신 것이라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 곧 자기가 본 것을 다 증언하였느니라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1절에서 저자 요한은 이 책의 제목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것은 계시라는 말입니다.
계시는 헬라어로 아포칼립시스입니다.
영어로는 아포칼립스라고 부릅니다.
에듀윌 시사상식은 아포칼립스를 이렇게 풀이하고 있습니다.
"아포칼립스는 신약 성경 마지막 권인 요한묵시룩의 영어 명칭이다.
요한묵시룩이 전하는 세상의 종말이라는 내용과 맞물려 아포칼립스는 ‘세계의 멸망’ 또는 ‘세상의 종말’이라는 뜻으로 쓰이며 그에 준하는 대재앙이나 재난을 일컫기도 한다.
아포칼립스는 그리스어인 아포칼뤼프시스를 그대로 영어화한 것이며 아포칼뤼프시스는 “베일을 벗기다”라는 뜻으로 묵시(黙示), 계시(啓示)로 번역된다."
그리고 다음백과에는 이렇게 정리해 놓고 있습니다.
"신이 계시를 통해 진리를 나타낸다는 묵시(默示)1) 를 뜻한다.
《요한 묵시록》에서 유래한 말로, 현대에는 ‘종말, 대참사’ 등의 의미로도 쓰인다.
어원은 ‘공개, 계시, 폭로’ 등을 의미하는 그리스어 ‘아포칼립시스(Apokalupsis)’다.
아포칼립시스는 ‘덮개를 떼다, 덮개를 걷다’라는 뜻으로 가려두었던 것을 공개한다는 뜻이다.
신이 특별한 사람(예언자)을 통해 인간으로서는 알 수 없는 인류의 운명과 세계의 종말, 신의 목적, 새로운 세상의 도래 등을 계시한다는 의미가 있다.
고대 신화에서의 종말
인간 사회의 종말에 대한 서사는 고대에서부터 있었다.
고대 수메르 문명의 〈길가메시 서사시〉에서는 신이 인간을 벌주기 위해 홍수를 일으킨다.
유대교와 이슬람교에서도 신이 대홍수로 인류를 멸망시키는 ‘노아의 홍수’ 이야기가 등장한다.
선한 인간인 노아는 신의 명령에 따라 미리 방주를 만들어 가족들과 짐승들을 태워 살아남는다.
대홍수로 인한 문명의 멸망과 새로운 세상의 도래는 전 세계 많은 지역의 신화에 등장하고 있다.
묵시문학
인간이 신의 계시를 받아 숨겨진 진실이나 미래를 기록한 책을 묵시문학(계시문학)이라고 한다.
특히 기원전 200년부터 기원후 200년경에 걸쳐 유대인과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융성했다.
그리스도교에서는 구약의 《다니엘서》와 신약의 《요한 계(묵)시록》이 대표적이다.
《요한 계(묵)시록》의 경우 로마가 그리스도교를 박해하는 현실에 맞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신앙을 보존하고 인내할 것을 권면하는 저항 문학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묵시문학은 신에 의한 계시(啓示), 환상, 신비적 요소, 상징주의, 미래에 대한 관심 등을 특징으로 한다.
인간으로서는 절대 알 수 없는 신의 목적과 세상의 원리, 천사나 악마 등의 특징, 천지창조, 인류 역사와 미래에 벌어질 일들을 다양한 상징을 통해 표현한다.
대부분 종말론적 세계관을 가지고 있으며 세계의 멸망과 마지막 심판, 인류의 운명, 구원자의 재림, 선택받은 자들의 궁극적인 미래와 완전히 새로운 세계의 도래 등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계시란 이런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비밀을 볼 수 있게 해 주는 것입니다.
감추인 것을 드러내 보여주는 것입니다.
계시는 우리가 눈으로 보고 깨달아 아는 것입니다.
계시는 우리 눈으로 열어 줍니다.
우리 눈이 열리는 것을 개안이라고 부릅니다.
감추인 것을 볼려면 우리 눈이 열려야 합니다.
그래서 계시를 안다는 것은 은혜입니다.
계시를 알려면 하나님이 직접 개입하셔야 합니다.
계시는 우리가 보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깨달아야 합니다.
깨닫는 것을 각(覺)이라고 부릅니다.
각성했다고 말합니다.
계시는 객관적으로 증명할 수가 없습니다.
계시는 주관적인 체험의 영역입니다.
우리가 말로는 설명할 수 있을지 몰라도 그것을 체험하게 할 수는 없습니다.
체험하는 것은 위로부터 오는 은혜입니다.
계시는 계시인데 보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고 말합니다.
계시의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란 뜻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란 계시의 주인이 예수 그리스도란 뜻이기도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계시란 말일 수도 있고 예수 그리스도가 갖고 있는 계시일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요한계시록은 요한의 계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입니다.
우리는 요한계시록을 읽어가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해야 합니다.
1절에서 요한은 그에게 계시가 주어진 이유를 밝히고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반드시 속히 일어날 일들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의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알게 하신 것이라."
여기에 보면 그 종들이 나옵니다.
그 종들에게 알려주고 싶으셨습니다.
더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1세기 교회의 성도들은 임박한 종말론을 믿었습니다.
그리스도교는 그리스 · 로마 세계 안에서 등장한 유대교의 한 분파로 시작하였습니다.
초기 그리스 사상 안에서 종말은 종교나 신화적인 사변이 아니라, 자연철학의 관심 분야였습니다.
스토아 학파 철학자들은 우주가 연소되고 재생하는 과정을 거친다고 보았습니다.
헤라클레이토스(Heracleitos)는 ‘연소’를 통해 세상이 끝난다고 주장했습니다.
스토아 학파 철학자들에 따르면, 이 세상은 몇 번의 순환을 거쳐, 결국에는 정결한 불로 남는다고 보았습니다.
로마의 시인 베르길리우스(Vergilius)는 황금시대에 트로이 전쟁이 다시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스토아 학파 철학자들은 우주적인 순환은 ‘처음’과 ‘마지막’과 ‘주요한 사건들’로 구성되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우주의 영원성을 주장하였지만, 인간의 문명들은 정기적으로 자연에 의해 파괴되며 재생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헤시오도스(Hesiodos)와 플라톤에게 과거 시대의 구분은 중요했습니다.
이런 구분은 유대인 사상에 영향을 끼쳐 기원전 2세기에 기록된 「다니엘서(Daniel書)」 7~9장에 역사적이 구분이 묘사되었습니다.
초기 로마시대에 평화로운 시대가 가까운 미래에 이루어질 것이라는 기대가 팽배했습니다.
베르길리우스는 그의 책 『아이네이스(Aeneis)』에서 ‘황금시대’를 위대한 통치자와 연결했습니다.
“여기에 너희가 종종 소문으로 들었던 예정된 사람이 있다.
신의 아들인 아우구스투스이다.
그는 라티움(Latium)에서 황금시대를 열 것이다.”
로마인들은 그리스 도시 알렉산드리아(Alexandria)의 중요한 신이었던 아이온(Aion) 신을 받아들였습니다.
아이온 신은 우주와 무한의 신으로서 황금시대를 가져다 줄 신이었습니다.
헬레니즘 시대에 불멸은 신들만의 특징이었으며, 동시에 인간 영혼의 특징이기도 했습니다.
헬레니즘식 영혼관이 초기 유대교 문헌에 영향을 끼쳤지만, 유대교는 불멸이란 종말에 부활과 함께 오는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리스도교의 종말론은 예수의 가르침에서 유추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이 십자가 처형을 당한 후, 그를 종말에 등장한 메시아로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라는 개념은 공관복음서(共觀福音書)에서 예수 가르침의 핵심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비유를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설명하고, 자신의 제자들에게도 선포할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나라 선포는 당시 유대인들의 종말론과 현저하게 달라 마찰을 빚었습니다.
신약성경 중 복음서들은 하나님의 나라에 관한 이야기로 가득 차 있습니다.
유대교에서 ‘나라’라고 해석되는 용어는 장소의 개념이 아니라, 오히려 ‘통치’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라는 번역보다는 ‘하나님의 통치’라고 번역하는 것이 원래 의미에 가깝습니다.
예수님이 활동하던 당시 유대교에서 신이 곧 활동을 계시(啓示)하여 그의 백성을 구원할 것이라는 기대가 팽배했습니다.
예수는 복음서 여러 곳에서 ‘하나님의 나라’의 도래를 전달하는 자로 묘사됩니다.
동시에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도래했다는 구절들도 등장합니다.
서로 상충되는 내용 같아 보이지만,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예수의 도래로 시작되었고, 가까운 미래에 완성될 것이라는 해석도 가능합니다.
예수님의 이런 종말론적인 생각이 독특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같은 시대 문헌인 쿰란 사본에서도 임박한 종말론을 선포했습니다.
초대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예수님을 ‘메시아’로 보았습니다.
예수님은 유대교에서 사용하는 메시아의 범주에 맞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 이후 그리스도교의 근간을 세웠던 바울(Paul)은 예수를 지칭하여, ‘메시아’라는 히브리어를 그리스어로 번역한 ‘크리스토스’라고 불렀습니다.
‘크리스토스’는 예수의 이름이 되었습니다.
바울에겐 예수가 바로 메시아입니다.
‘메시아’라는 용어만큼 종말론적인 의미가 담긴 명칭은 ‘사람의 아들’이란 용어입니다.
이 명칭은 예수가 자신을 스스로 지칭할 때 사용한 용어입니다.
‘사람의 아들’이란 명칭은 복음서에만 주로 등장합니다.
‘사람의 아들’이란 용어가 처음 등장한 곳은 신약성경이 아니라 구약성경 『다니엘서』입니다.
『다니엘서』에 등장하는 이 용어는 묵시문학에 등장하는 종말론적인 용어입니다.
예수님께서 사용하던 아람어에서 ‘사람의 아들’이란 용어는 말하는 사람을 낮추는 용어로도 사용되지만, 『다니엘서』 7장 13절에서는 분명 천상의 구원자이십니다.
그리스도교 종말론에 관한 신학적 토대를 제공한 사람은 바울입니다.
바울은 묵시적인 세계관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그는 「데살로니가 전서(Thessalonica 前書)」 1장 9~10절에서
“그들이 우리에 대하여 스스로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너희 가운데에 들어갔는지와 너희가 어떻게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살아 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는지와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그의 아들이 하늘로부터 강림하실 것을 너희가 어떻게 기다리는지를 말하니 이는 장래의 노하심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예수시니라”
라고 말하였습니다.
바울은 유대교의 이원론적 종말론을 받아들였습니다.
시간적인 이원론, 즉 ‘이 세대’와 ‘다가올 세대’는 공간적인 이원론, 즉 ‘이 세상’, ‘저 세상’과 일치합니다.
그렇지만 바울이 유대교의 이원론적 종말론을 모두 받아들인 것은 아닙니다.
그는 예수님의 부활로 이미 미래의 저 세상으로 진입하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독립적인 사건이 아니라, 모든 의로운 자들이 부활할 첫 신호라고 믿었습니다.
유대 종말론의 엄격한 구분이 예수 사건을 통해 무마되거나 흐려졌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예수 부활과 종말 사이의 ‘파루시아(parousia)’ 안에 우리가 살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바울은 ‘주의 날’이라는 유대교의 종말론적 용어를 ‘예수 그리스도의 날’로 대치하여 유대교의 신 중심 종말론을 예수 중심으로 전환시켰습니다.
1세기 교회는 주님의 재림이 곧 이루어질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재림이 속히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주님의 제자들도 하나 둘 세상을 떠났습니다.
혹은 순교로 혹은 자연사로 하나 둘 세상을 떠난 것입니다.
임박한 종말론을 믿고 있었던 그 종들은 의문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요한을 선지자로 부르셔서 이 계시의 말씀을 전하게 하신 것입니다.
여기에 보면 "반드시 속히 일어날 일들을"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반드시 일어날 것입니다.
사람들은 미래를 들여다 보고 싶어합니다.
사람들은 다양한 방법으로 미래를 들여다 보아왔습니다.
성경은 그것에 대해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 들어가거든 너는 그 민족들의 가증한 행위를 본받지 말 것이니
그의 아들이나 딸을 불 가운데로 지나게 하는 자나 점쟁이나 길흉을 말하는 자나 요술하는 자나 무당이나
진언자나 신접자나 박수나 초혼자를 너희 가운데에 용납하지 말라
이런 일을 행하는 모든 자를 여호와께서 가증히 여기시나니 이런 가증한 일로 말미암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시느니라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완전하라
네가 쫓아낼 이 민족들은 길흉을 말하는 자나 점쟁이의 말을 듣거니와 네게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런 일을 용납하지 아니하시느니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 가운데 네 형제 중에서 너를 위하여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을지니라(신명기 18장 9-15절)
하나님은 우리가 미래를 들여다보는 것을 가증한 일이라고 부르십니다.
하나님은 대신에 선지자 제도를 그 백성들에게 주셨습니다.
대안을 주신 것입니다.
사람은 시간 속에 살아갑니다.
미래가 어떤 지 알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입니다.
그래서 선지자 제도를 주셨습니다.
선지자의 말을 잘 듣고 살면 행복하게 살 게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선지자의 말, 곧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만 하면 됩니다.
듣고 순종하기만 됩니다.
그런데 사람이 그런까요?
잘 듣지 않습니다.
내 마음대로 살고 싶어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앞에 생사화복을 정해 놓으셨습니다.
우리는 매일 생사화복을 선택하며 삽니다.
무엇을 선택할지 결정해야 합니다.
유대인들은 잘 선택하도록 자녀들을 교육시켰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선택하며 살기를 바라십니다.
현명한 선택을 하길 바라십니다.
그게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입니다.
생명의 길을 선택하며 사는 것입니다.
굳이 미래를 알 필요가 없습니다.
미래가 결정되어 있다면 미래를 안다고 해서 미래를 바꿀 수가 있나요?
미래를 바꿀 수가 있다면, 그것은 결정된 미래가 아닙니다.
오늘 내가 무엇을 선택했느냐가 나의 내일을 결정합니다.
그게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자유입니다.
반드시 속히 일어날 일들 알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 굳이 이 말씀을 해야만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그 시대 살았던 유대인들과 기독교인들이 다 종말론에 빠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묵시의 영향 아래 살아갔습니다.
현실이 너무 힘들고 어려우니까 하늘만 바라보고 살아갔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분의 백성들에게 현실에 발을 딛고 뚜벅뚜벅 걸아가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통치의 개념입니다.
공간적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예전에 땅따먹기라는 놀이가 있었습니다.
요사이는 밖에서 노는 아이들이 거의 없지만 예전에는 아이들이 땅따먹기 놀이가 같은 것을 했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 나라를 땅따먹기 놀이로 이해한 것입니다.
어디에서나 하나님의 통치를 받으면 그곳이 하나님 나라가 된다는 개념입니다.
내가 이 땅에서 하나님 말씀대로 살면 거기가 하나님 나라입니다.
그런데 헬라인들은 하나님 나라를 시간적 개념으로 이해한 것입니다.
미래의 언제쯤으로 본 것입니다.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의 시간으로 하나님 나라를 유보했습니다.
그래서 현재의 시간에 하나님 통치를 받지 않습니다.
왜 하나님 통치를 받지 않을까요?
아직 하나님 나라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통치를 받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결국 내 마음대로 살아가게 됩니다.
요한계시록은 내 마음대로가 아니라 하나님 말씀대로 살라는 것입니다.
유보하지 말고, 미루지 말고 바로 지금이라고 하는 이 시간을 오로지 말씀대로 살아내야 합니다.
복음 성가 가사에 이런 노래가 있습니다.
내일 일은 난 몰라요.
하루 하루 살아요,
불행이나 요행함도 내 뜻 때로 못했요.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루 하루 삽니다.
하루 하루를 어떻게 사느냐 그게 문제죠.
사람들은 좋은 일을 다 미루고 삽니다.
내일로 미룹니다.
그런데 그 내일은 오지 않습니다.
좋은 일은 무엇입니까?
말씀대로 사는 것입니다.
말씀대로 살면 말씀대로 이루어지는 기적을 체험하게 됩니다.
말씀대로 사니까 말씀을 경험합니다.
말씀대로 살지 않으면 말씀을 경험할 수가 없습니다.
반드시 속히 일어날 일들을
요한계시록은 반드시 일어날 일들을 알려 주기 위해 기록한 책입니다.
요한계시록은 알려주는 일어날 일들은 매일매일의 삶에서 경험하는 것들입니다.
선택하고 결단하며 삽니다.
신앙생활은 선택하고 결단하며 사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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