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요한계시록

마이클 고먼을 따라 읽기7

기독항해자 2021. 1. 27. 17:46

6장 요한계시록의 중심이요 초점인 환상-하나님과 어린 양(4-5장)

 

하나인 환상

요한이 하늘에서 엿본 것은 예배를 보여주는 환상이며 이 환상은 이어 예배하라는 요구로 바뀐다.

고먼은 유진 피터슨의 글을 인용한다.

유진 피터슨은 말한다.

 

"예배는 우리의 삶이 하나님을 중심으로 삼고 그 중심에서 벗어나는 삶을 살지 않도록 중심에서 이루어지는 모임이다.

우리는 예배함으로써 이 중심이신 살아계신 하나님께 응답하고 이 하나님으로부터 응답을 듣는 삶을 산다.

예배가 없으면 우리가 얻는 것은 온갖 광고와 유혹과 사이렌에 휘둘린 채 발작과 경련을 일으키는 삶이다.

중심이 없으면 주위도 없다.

예배하지 않는 사람은 일관된 지향점과 꾸준한 목적도 없이 엄청난 불안과 세상의 전염병에 휩쓸리고 만다."

 

참된 중심에 초점을 맞춘 예배, 삶의 참된 권위에 초점을 맞춘 예배의 반대말은 거짓 중심, 즉 바벨론에 초점을 맞춘 예배다.

바벨론은 '예배에 대항하는 곳'이다.

 

요한의 체험을 담은 이 기록은 요한계시록의 나머지 부분을 지배하는 두 가지 이미지를 우리에게 보여준다.

하나님의 보좌와 하나님의 어린 양이 그 두 이미지다.

보좌란 말은 요한계시록 4장부터 끝에 이를 때까지 43회, 어린 양이란 말은 28회 나타난다.

이 이미지들은 한 데 어울려 요한계시록 전체를 열어주는 해석학적 열쇠 혹은 해석의 열쇠를 이룬다.

이들은 여러 장면으로 요한계시록의 본질을 이루는 신학을 알려준다.

창조주 하나님은 통치하시며 우리로부터 완전한 예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시다.

신실하고 죽임을 당하신 하나님의 어린 양 예수 역사 하나님과 함께 통치하시고 하나님과 똑같이 우리로부터 완전한 예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시다.

 

그리스도의 음성은 요한을 불러들여 미래를 보여준다.

요한이 미래를 보려면 먼저 그 전에 미래를 주장하시는 분이 누구인지 미래를 만들어낼 만한 분이 누구인지 알아야 한다.

요한은 보좌와 그 보좌에 앉으신 이를 본다.

그러나 보좌에 앉아계신 이의 정체를 알려주는 말은 거의 없다.

요한계시록은 이 분을 빛이 나는 아름다운 보석을 닮은 분으로 묘사한다.

이 분은 분명 '전능하신 주 하나님'(4:8)이요, 이스라엘의 영원하고 거룩하신 하나님으로서 온 우주의 중심에 자리한 보좌에 앉아계신다.

이 분 주위에는 타오르는 일곱 횃불과 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가 동심원 모양으로 에워싸고 있다.

생물과 장로들은 모두 찬송과 경배하는 몸짓으로 보좌에 앉아계신 이에게 예배한다.

 

네 생물은 하늘에 있는 존재들로서 어쩌면 모든 피조물을 상징하는 존재로, 그리고 이십사 장로는 하나님 백성을 상징하는 존재로 보는 것이 가장 좋을 것이라고 고먼은 말한다.

이십사라는 숫자는 다윗이 정한 제사장 직무 수행자의 순서에서 가져왔을 수도 있지만 이스라엘 열두 지파와 열두 사도에서 가져왔을 가능성이 더 크다.

이십사 장로는 흰옷을 입고 금관을 썼다.

흰옷은 정결과 승리와 예배를 상징하며 금관은 이 장로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통치에 동참함을 상징한다.

 

이 생물들과 장로들의 정체와 모습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들의 행동이다.

이들은 끊임없는 찬송과 예배로 하나님이 영원하신 분이요 창조주로서 당연히 예배 받으실 분이심을 찬미한다.

 

 

그리스도 현현(요한계시록 5장)

5장에서는 두 단계에 걸쳐 드라마와 같은 초점 이동이 이루어진다.

5장의 첫째 부분은 능력과 권위 있는 손을 가리키는 하나님의 오른손에 있는 신비한 두루마리에 초점을 맞춘다.

이 두루마리는 파피루스나 양피지 양면에 쓴 글을 담고 있으며 일곱 인으로 봉해져 있다.

사람들은 이 두루마리를 성경, 생명책, 그리고 법률문서 등 여러 가지로 보았지만, 하나님이 마지막 때에 세계를 심판하시고 구원하실 계획을 담은 기록으로 보는 경우가 가장 많았다.

고먼은 요한계시록의 내러티브 흐름은 물론이요 다른 묵시 문헌에 들어 있는 평행 본문을 고려할 때, 마지막 해석이 가장 설득력이 있다고 본다.

그 이유는 6장부터 하나님의 심판을 상징하는 인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이번 장에서 그 이름은 나오지 않아도 하나님의 어린 양은 예수임이 분명하다.

예수는 구속주로서 하나님만이 받으실 찬송을 받기에 합당하신 분이요, 하나님이 마지막 때에 행하실 강력한 심판과 구원을 시작하기에 합당하신 분이다.

왜 그럴까?

이는 그가 이미 그의 죽음으로 능력과 심판과 구원의 참된 의미를 보여주셨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가 하는 일이 곧 하나님이 하는 일이요 하나님이 하는 일이 곧 그리스도가 하는 일이다.

 

예수는 높이 올림을 받으셨지만 여전히 어린 양이요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이시다.

그 하나님이라는 지위와 하나님의 통치에 동참한다.

그는 죽임 당하신 어린 양인데도 예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하다.

예수는 누구신가?

하나님의 어린양이시다.

우리의 예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한 분이다.

고먼은 요한계시록을 읽어갈 때 우리가 이 증언을 무시하거나 잊어버려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인간은 심지어 외관상 신실해 보이는 그리스도인조차도 우주를 힘으로 다스리려 하는 강력한 신을, 아니 차라리 인간의 입맛에 맞춰주는 신, 필요하면 무력도 불사하는 신을 원할 때가 아주 잦다.

이런 하나님, 이런 주권 개념을 신봉하는 자는 이 하나님이 하나님의 정의(라 추정하는 무언가)를 이루고자 하나님의 힘(이라 여기는 것)을 휘둘러도 그런 하나님 편을 든다.

어린 양이 주님이시라는 사실-그리고 어린 양의 능력이 그러하다는 사실-은 하나님의 능력과 정의를 잘못 이해한 모든 오해, 그리고 그런 오해 때문에 사람들이 저지르는 잘못들에 마침표를 찍는다.

물론 과거의 역사를 보고 오늘을 봐도 그런 오해는 여전히 존속한다.

 

사람들은 요한계시록을 바로 이런 하나님이 인간 역사에 강합하는 힘을 행사하심을 실증하는 책으로 잘못 읽고 한다.

그중에서도 심판 환상들을 해석할 때 더 그렇다.

 

7장 충돌과 등장 배우들-요한계시록이라는 극

 

요한계시록의 줄거리

 

프롤로그: 우주를 아우르는 무대를 열다

하나님은 인류가 하나님을 예배하고 다른 이들과 한 몸을 이루어 살며 다른 피조물과 조화를 이루어 살게 창조하셨다.

이것은 생명 문화나 하나님의 통치 혹은 하나님의 도성이라 부를 수 있겠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신실한 선지자들을 보내셔서 이런 목적을 되새겨 주셨다.

하나님은 예수를 메시아를 보내셨다.

사탄은 예수를 핍박했으나 예수는 심지어 죽기까지 신실함을 지키셨다.

이에 하나님은 예수를 다시 살리시고 들어 올리심으로 예수가 정당함으로 확증하시고 당신과 함께 예배와 충성을 받기에 합당한 분으로 만드셨다.

예수가 우리를 사랑하사 죽으심으로 해방을 안겨주셨다는 좋은 소식, 그리고 그가 부활하사 높이 올림을 받아 주의 자리에 앉으셨다는 좋은 소식이 세계 전역에 전파되었다.

많은 이들이 로마의 아시아 속주에 있는 도시들에게 그 메시지를 받고 예언의 영(성령)에 감동을 받아 하나님과 어린 양께 신실히 충성하는 자그마한 공동체를 이루었다.

그러나 하늘에서 내쫓긴 사탄은 여전히 하나님과 하나님의 목적을 대적하면서 계속해서 하나님 백성을 핍박해왔다.

사탄은 중요한 사람들을 꾀어 우상숭배와 악과 혼돈이 난무하는 반대 문화, 죽음 문화-바벨론-을 만들어내는 데 동참케 했다.

하나님께서 신실한 이들 가운데 한 명 또는 그보다 많은 이들이 죽임을 당했고, 최소한 한 사람, 요한은 신실히 증언했다는 이유로 유배를 갔다.

 

요한계시록 13장의 666

첫 번째 짐승을 666이라는 숫자를 가진 인물로 보는 관점은 널리 퍼져 있다.

이 666은 모든 시대를 통틀어 가장 유명한 상징 숫자이자 심지어 미신처럼 받들어온 숫자 가운데 하나다.

666이라는 숫자를 두려워하는 현상을 가리키는 전문용어도 있다.

바로 666공포증이다.

 

일단 666은 완전함을 가리키는 777의 패러디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숫자로 상징되는 인격체는 신인 체 행세하지만 헛일일 뿐이다.

그런 식으로 행세해도 그가 "철저히 불완전하다"는 것만 드러난다.

이 숫자는 고대 관습인 게마트리아에 해당하는 사례로 해석할 수 있다.

게마트리아는 히브리어, 헬라어, 라틴어를 불문하고 문자로 숫자를 나타내던 체계에서 한 단어에 들어 있는 글자들이 나타내는 숫자 합계에 의미를 부여하는 관습이다.

 

지난 세기를 살펴보면 666에 해당하여 적그리스도라 불린 후보들이 많았다.

아돌프 히틀러: a=100, b=101, c=103라면 Hitler는 666과 같다.

헨리 키신저: 키신저 이름을 히브리어로 쓰면 111이라는 값을 갖는다고 한다.

미국 전직 대통령인 로널드 윌슨 레이건: 첫 이름과 가운데 이름과 마지막 이름(성)이 모두 여섯 글자다.

빌 클린턴: 히브리어와 헬라어에서 그의 이름 글자를 다 더하면 666이 될 수 있다고 한다.

 

666이 네로 황제를 가리킨다고 믿는 이들이 많다.

오늘날 대다수 학자는 그렇게 믿는 것 같다.

1. 네로 카이사르를 가리키는 헬라어를 히브리어로 옮긴다.

히브리어 게마트리아를 사용하여 각 글자에 붙인 숫자 값을 더하면 666이 된다.

 

신실한 증인들

교회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가지는 가장 중요한 특징은 신실한 증인으로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이다.

교회는 자신을 대적하는 반대와 유혹이 긴밀한 동맹관계를 맺고 있다 할지라도 이 부르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이 부르심의 뿌리는 신실한 증인이신 예수이시다.

밧모섬에 있는 신실한 증인인 요한, 버가모의 순교자 안디바, 그리고 하늘에 있는 모든 신실한 증인/순교자들은 이 신실한 증인의 본보기다.

비유 같은 두 증인 환상도 이 부르심을 강조한다.

요한이 그리스도와 선지자처럼 신실한 증인이 되라는 부르심을 받았음은 그가 달콤하나 쓴 두루마리를 먹는 환상을 본 사실이 다시금 확인해준다.

유배당한 요한은 하나님이 다른 이들도 증인으로 부르셨음을 깨닫는다.

여기서 고먼은 피터슨의 글을 인용한다.

 

"예배하는 곳은 보호를 받지만 증언하는 곳은 그렇지 않다.

증인이 증언하는 이방인의 뜰은 측량을 받지 않는다(보호받지 않는다).

증언은 적대자들 앞에서 이루어진다.

그리스도인에게는 증인이 영웅일지 모르나 세상에서 증인은 외롭고 의심받고 무시당하고 때로는 가혹한 대우를 받는다."

 

증인이 수행해야 할 일은 말과 행동으로 용감하게 말하면서 하나님의 진리를 증언하고, 이런 하나님의 진리를 왜곡하며 조롱하는 모든 거짓에 맞서 예언하는 것이다.

증인은 다른 사람들도 잘못을 회개하고 진리로 돌아오리라는 소망을 품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주신 환상을 증언하지만, 이 증인이 성공했느냐 여부를 판단하는 척도는 증인이 회심케 한 사람들의 숫자가 아니라 증인으로서 끝까지 흔들리지 않고 본분을 다했느냐다.

증인이 되라는 소명은 어렵고 위험하지만 이 소명에는 지금도 하나님이 보호해주신다는 약속과 장차 하나님이 보상해주시리라는 약속이 함께 따른다.

하나님이 교회를 보호하신다는 것은 교회가 시험과 고난을 모면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이런 시험과 고난이 불가피한 현실이 되어도 이에 굴하지 않게끔 보호해 주신다는 뜻이다.

 

 

요한계시록 바르게 읽기-마이클 고먼, 박규태, 상상플러스, 205-265

'묵상 > 요한계시록' 카테고리의 다른 글

1장 4절  (0) 2021.02.23
1장 1-3절  (0) 2021.01.30
마이클 고먼을 따라 읽기6  (0) 2021.01.21
마이클 고먼을 따라 읽기5  (0) 2021.01.20
마이클 고먼을 따라 읽기 4  (0) 2021.01.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