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계시록의 신학: 개관
요한계시록을 바르게 읽으려면 요한계시록 전체를 아우르는 해석의 틀 혹은 해석학적 틀을 갖는 것이다.
우리는 그 틀 안에서 요한계시록을 읽어낸다.
요한계시록의 목적을 밝혀 내기
대다수의 사람들은 요한계시록이 세상 종말을 미리 알려주는 예고편 DVD라고 해석한다.
이 사람들은 요한계시록이 마지막 때의 일을 다루는 종말론에 초점을 맞춘다고 생각한다.
물론 어떤 의미에서 보면 성경 마지막 책인 이 책은 종말론에 초점을 맞춘다.
그러나 이 책의 의미를 깊이 파 들어가면 요한계시록이 겨냥하는 궁극의 초점은 종말론이 아니다.
우리가 요한계시록에서 발견하는 종말론도 목표에 이르는 방법이다.
요한계시록의 의도는 시련과 시험의 때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소망을 주어, 이들이 하나님과 맺은 언약에 끝까지 신실함을 지키면서 헌신하게 하는 것이다.
요한계시록의 목적은 고금을 막론하고 요한계시록을 듣고 읽는 자들을 권면하여 과거나 현재에 당하는 고난 속에서도, 그리고 미래에 있을지도 모를 고난 속에서도-그 고난이 어떤 형태를 띠든, 그 고난의 근원이 무엇이든-하나님께 끝까지 신실함을 지키게 하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 신실하게 살아가도록 하는 것이 요한계시록의 목적이다.
기억이나 경험이나 공포 때문에 불가능하다 생각할지 모르나 요한계시록은 예수가 언약에 신실하셨으므로 우리도 언약에 신실함을 지키는 것이 가능하며 하나님이 우리와 모든 피조 세계를 위하여 영광스러운 미래를 예비해두셨으므로 언약에 신실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말한다.
요한계시록은 부도덕하고 또 우상 숭배를 일삼는 제국의 죽음의 문화에 동화하길 거분하는 사람이 되어 그런 문화를 상대로, 그런 문화에 맞서, 그런 문화 안에서 생명을 주시는 그리스도를 증언할 것을 생명력이 넘치고 상상을 자극하는 예언으로 우리에게 요구한다.
요한계시록은 이를 요구할 때, 하나님이 미래에 이루실 구원을 내다보는 소망을 제시하는 방법을 쓸 뿐 아니라, 하나님이 지금도 주권자이심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방법을 사용한다.
미래에 있을 구원을 확실히 보장함과 동시에 현재 하나님이 주권을 행사하신다는 사실을 함께 제시한다는 것은 이제 우리가 하나님과 어린 양을 예배하고 신실히 따르는 삶을 살아야 하며 그런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요한계시록의 일곱 가지 신학적 주제
1. 보좌: 하나님과 어린 양의 통치
창조주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죽임당하신 어린 양이신 구속주 예수는 주님이시다.
처음이요 마지막이신, 영원하신 하나님의 통치는 미래나 과거의 일이 아니라 현재의 일이다.
이 통치는 죽임 당하신 어린 양을 통해 나타난다.
하나님과 어린 양을 서로 뗄래야 뗄 수 없다.
하나님과 어린 양을 모두 알파와 오메가로 부를 수 있으며, 두 분이 함께 한 보좌에 앉아 다스리신다.
이것이 십자가를 중심으로 삼고 십자가 형상을 따라서 하나님의 능력을 이해한 것이다.
2. 현실로 존재하는 악과 제국
악은 실제로 있다.
제국 역시 바로 지금 단지 미래나 과거가 아니라 현재 존재한다.
제국은 본질상 악한 길로 유혹하고 하나님을 모독하며 부도덕한 주장을 내세우고 더불어 수직관계(사람과 하나님의 관계)와 수평관계(사람과 사람의 관계)의 질서를 무너뜨리는 일을 행하며, 생명을 주겠다고 약속하지만 실상은 육신과 영혼의 죽음을 가져다준다.
3. 우상숭배와 부도덕으로 유혹함
교회는 제국의 우상 숭배와 부도덕의 유혹에 쉽게 넘어간다.
이런 주장과 관습이 종종 종교적인 의미와 권위를 가지면서 우상숭배와 부도덕이 시민 종교가 되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부도덕은 결국 우상숭배, 곧 폭력과 억압과 탐욕과 정욕을 우상을 섬기는 것과 같다.
인간이 인간성을 잃어버리는 것은-인간이 같은 인간을 처분할 수 있는 물건으로 취급하는 것은-결국 창조주요 구속주이신 하나님을 공격하는 일이 되고 만다.
4. 언약에 신실할 것과 저항을 요구함
교회는 하나님과 맺는 언약을 신실히 지키려면 제국과 시민 종교 한 가운데 있더라도 당연히 이것들에 맞서 저항해야 한다.
그것들이 어떤 형태를 띠든, 이 의무는 변함이 없다.
이 요구를 지키려면 선지자처럼 영을 분별할 수 있어야 하며, 이 요구를 지키다 갖가지 고난을 겪을 수도 있다.
5. 예배와 다른 시각
교회가 영을 분별할 수 있으려면 하나님과 현실을 다른 식으로 볼 수 있는 시각을 가져야 한다.
이 시각은 제국의 정체를 폭로하고 제국에 도전하는데, 이 시각을 가지려면 알고 적용하는 성령의 지혜가 필요하다.
요한계시록은 이런 시각으로 시민 종교를 거부하는 예배와 환상을 제시하는데, 이는 영원하고 거룩하신 하나님과 신실하고 죽임 당하신 어린 양, 그리고 다가오는 새창조에 초점을 맞춘다.
6. 신실한 증인: 그리스도가 보여주신 모범
그리스도인이 제국과 우상 숭배에 맞서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사도들과 성도들과 선지자들과 순교자들이 보여준 모범과 닮았다.
이들은 모두 신실하고 참되고 용감하고 의롭고 비폭력적이었다.
이 모범은 수동적이 아니라 능동적이며 오직 하나님께만 충성하겠다고 맹세하는 공동체와 개인,
벗은 물론이요 적에게도 폭력을 쓰지 않고 사랑을 베풀며 살아가는 공동체와 개인,
복수는 하나님께 맡기는 공동체와 개인,
그리고 하나님의 영을 힘입어 죽음을 안겨주는 제국의 문화에 맞서 대안으로 생명을 가져다주는 미니 문화를 만들어내는 공동체와 개인을 형성한다.
이것은 제자도와 선교를 어린 양의 형상 혹은 십자가의 형상을 따라 이해한 것이다.
7. 임박한 심판과 구원/하나님의 새 창조
창조주 하나님과 구속주 그리스도는 악과 불의를 심각하게 받아들이시며, 곧 오셔서 인류를 심판하시고 신실한 자들을 구원하시며 온 우주를 새롭게 하실 것이다.
하나님의 뜻은 모든 사람이 어린 양을 따라 하나님이 영원히 우리와 함께하심으로 가져다주는 구원의 생명에 동참하는 것이다.
대안으로 제시하는, 십자가를 본받는 해석 전략
이 접근법은 요한계시록을 하나님의 정치(시민 종교를 거부함), 신학시(예배), 목회-예언(증언)의 시각에서 바라보는 접근법이라고 부를 수 있다.
1. 요한계시록에서 가장 중요하고 중심에 있는 이미자가 죽임 당하신 어린 양이심을 인식하라.
요한계시록은 그리스도가 우리 죄 때문에 죽으셨지만 아울러 하나님께 맞서는 세력들 앞에서 하나님께 신실함을 지킴을 보여주는 화신이자 모범으로 죽으셨다고 말한다.
그리스도는 주요 그리스도는 승리하신 분이시다.
그리스도는 십자가라는 형태로 신실히 저항하심으로 폭력을 행사하지 않고 폭력을 감내하심으로 사람을 죽이는 행동이 아니라 능력 있는 말씀을 선포하심으로 정복하셨다.
요한계시록은 제국에 대항하면서 많은 이들이 어린 양의 능력이라 부르는 것을 로마가 내건 승리와 힘의 신학에 도전한다.
우리 역시 바벨론이나 로마나 이와 비슷한 제국의 힘이 아니라 어린 양을 따름으로 승리한다.
2. 요한계시록은 무엇보다 1세기 그리스도인이 1세기 그리스도인들을 염두에 두고 1세기의 문학 도구와 이미지를 사용하여 기록했음을 기억하라.
이 이미지는 1세기에 실제로 존재하던 것을 되비쳐주며 21세기에 실제로 존재할 것들을 특별히 미리 일러주지는 않는다.
하지만 다른 강력한 이미지와 마찬가지로 요한계시록의 이미지들도 우리 자신이 사는 시대를 포함하여 다른 시대에 존재한 비슷한 것들과 연관이 있음을 일깨워준다.
3. 요한계시록을 역사를 미리 기록해놓은 책처럼 여기면서 소위 문자적, 직선적 접근법으로 이 책에 다가가는 것을 그만두고, 요한계시록과 이 시대를 서로 연계하기보다 양자를 유비하는 해석 전략을 활용하라.
요한계시록은 이미지요 은유요 시요 정치 풍자문화다.
요한계시록은 상상에 호소하며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길(방법)을, 특히 죽임 당하신 어린 양 그리스도가 드러내 보여주신하나님의 길을 반대하는 모든 체제의 본질을 폭록한다.
이런 체제는 미래에 등장할 특정 권력에 국한되지 않고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언제 어디에서나 찾아낼 수 있다.
우리는 우리가 따르는 갖가지 이데올로기와 무슨 주의를 검토하여 제국주의와 군사력만능주의, 국가주의와 인종차별주의, 계급주의(자기가 속한 집단은 떠받들고 다른 사람이 속한 집단은 깎아내리는 주의)와 소비만능주의, 그리고 쾌락주의(갖가지 물건과 쾌락을 숭배함)에서 나타나는 갖가지 우상 숭배와 부도덕을 검증해야 한다.
4. 공중 가운데서 예배하고 제자도를 실천하는 요한계시록의 요구에 초점을 맞추라.
요한계시록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분별 있는 제자도라는 고된 길-세상을 본받지 않고 십자가를 본받아 신실함을 지킴-을 요구한다.
당장은 이 제자도가 소외를 부를 수 있고 심지어 핍박을 초래할 수도 있으나 결국에는 하나님이 만드실 새 하늘과 새 땅에 있는 자리로 인도한다.
요한계시록은 신자들에게 보복하지 말고 폭력을 행사하지 말라고 요구할 뿐 아니라 현재와 미래를 통틀어 어떤 전쟁도 요구하지 않는다.
신실함을 지키며 세상을 본받지 않음은 본질상 저항이지만 이는 현실에서 벌어지는 일들과 완전히 담을 쌓는다는 말이 아니라, 아주 다른 관점에서 비판하는 자세로 그런 일들에 참여한다는 말이다.
이런 자세는 예배 속에서 태어나고 자란다.
해리 마이어가 주장하듯이, 서구 세계에 사는 우리 대부분은 라오디게아 사람과 같으며, 요한계시록을 있는 그대로 읽어야 할 사람들이라고 고먼은 본다.
마이어의 주장이 옳다면 우리는 몰골이 엉망이면서도 그런 줄도 모르고 살고 있는 셈이다.
5.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죽음과 파괴의 이미지를 더 큰 소망의 틀 안에서 놓고 보라.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죽음과 파괴는 하나님의 행하시는 심판과 정화를 상징한다.
이 심판과 정화는 그리스도가 제시하는 소망, 즉 오직 하나님과 어린 양이 모든 족속과 백성과 나라로부터 온, 구속 받고 회복된 사람들을 영원히 다스리실 새 하늘과 새 땅을 향한 소망을 현실로 이루는 데 필요하다.
교회는 미래에 실현될 이 일을 말과 행위로 증언하지만 장차 마지막에 이르러 이를 이 땅에 이루실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뿐임을 안다.
교회가 끊임없이 "오시옵소서, 주 예수여"라고 기도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5장 부활하신 주님이 주신 일곱 가지 목회와 예언의 메시지(요한계시록 1-7장)
요한계시록 첫 장은 저자 요한이 누구인지 일러준다.
요한이 진정 우리에게 알리고 싶어하는 것은 그가 누구이며 그가 무슨 일을 했냐가 아니라 그가 만난 하나님이 누구시며 이 하나님이 그에게 계시하사 교회에게 전하게 하신 것이 무엇인가다.
여는 말
요한은 요한계시록을 시작하면서 우리에게 이 책이 무엇인지를 알려준다.
요한계시록은 묵시요 예언이며 서신이다.
요한계시록은 처음부터 읽기 시작하는 것이 중요하다.
어떤 사람들은 요한계시록 1:19이 으뜸이요 가장 중요한 구절인 것처럼 여기며 요한계시록을 읽었다.
이 구절에 따르면 요한은 기록을 하고 요한계시록은 우리에게 "네가 본 것과 지금 있는 일과 장차 될 일"을 일러줄 것이다.
몇몇 해석자는 이 본문에서 요한계시록의 내용과 구조뿐 아니라 요한계시록을 읽는 목적까지 찾아냈다.
즉 정보를, 특히 장차 될 일-마지막 때에 일어날 사건-에 관한 정보를 얻는 것이 요한계시록을 읽는 목적이다.
그러나 고먼은 이것은 아주 잘못된 출발점이라고 본다.
요한계시록 1:3은 요한계시록에 있는 일곱 가지 축도 혹은 복 가운데 첫 번째 것을 담고 있다.
요한계시록은 이 복을 (회중 속에서) 큰 소리로 읽는 자와 이 예언을 듣는 자/지키는 자에게 선포한다.
예언의 말씀을 지킴을 강조하는 것은 이 책이 무엇보다 우리의 호기심을 만족시키려고 장자 임할 사건을 묘사한 책이 아니라, "첫째 계명에 신실하라"는 요구요, 과거와 현재와 미래 사실을 밝히 살펴 회개하고 제자의 길을 가라는 요구를 제시한 책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일깨워준다.
이 근본 핵심을 놓치게 되면 요한계시록의 핵심을 놓치는 것이며 그렇게 되면 요한계시록의 내용을 바르게 해석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고먼은 본다.
요한계시록 1:3은 우리가 요한계시록을 읽으려는 동기와 요한계시록을 읽을 때 구사하는 기본 전략을 구사할 때 요한계시록을 해석하는 열쇠다.
요한계시록을 정보를 얻기 위해 읽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요한계시록을 살아내야 할 말씀으로 읽어야 한다.
여는 환상
여는 환상(1:9-20)은 다니엘 7:9-14을 끌어다가 그리스도를 능력이 있으시고, 제사장이시며 현존하시는 분으로 묘사한다.
요한은 예수에게 사람("사람 같은 이" 혹은 "인자")과 다니엘 7장의 옛적부터 계신 분이라는 형상을 모두 적용한다.
이를 통해 그는 예수가 하나님의 정체성과 통치권을 함께 가지신 분이심을 우리에게 일러준다.
주님이신 이 예수가 교회 가운데 계신다는 것(촛대가 이를 상징한다)은 1:3이 천명한 목회-예언의 기능을 한다.
첫째 이것은 안전을 보장해주는 징표다.
전능하신 이가 교회를 지켜주실 것이다.
두려워하지 말라는 요한에게마 주는 말씀이 아니라 이 말씀을 읽거나 듣는 모든 이에게 주시는 말씀이다.
그들은 어떤 일이 닥쳐도 안전하게 보호받을 것이요, 예수와 함께 정복하고 승리할 것이다.
둘째 이 환상은 소망을 보여주는 징표다.
죽임을 당한 자들이 지금 살아 있으며 앞으로도 영원히 영광 가운데 살 것이다.
셋째 이 환상은 제자의 길로 부르심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이는 교회에게 순종을 요구한다.
이 환상이 지닌 이런 세 가지 측면은 교회에게 주신 일곱 메시지 안에서도 모두 등장한다.
교회에게 주는 일곱 가지 목회-예언의 메시지
요한계시록 본문 가운데 오랜 세월을 통틀어 가장 잘 이해될 수 있고 또 설교할 수 있는 본문이 일곱 교회에 주는 메시지다.
무엇보다 예수가 당신 입에서 뜨뜻미지근한 라오디게아 교회를 뱉어버리시는 강렬한 이미지(3:16)와 예수가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는 인상 깊은 이미지(3:20)가 가장 유명한 이 본문은 1세기 교회의 삶과 그들이 가진 강점 및 약점을 들여다볼 창을 제공해줌과 동시에 이 시대 독자에게도 계속하여 도전을 던진다.
오해 없애기
고먼은 이야기를 진행하기에 앞서 오해를 없애는 것에 주목한다.
어떤 집단에는 일곱 교회가 사도 시대로부터 현세나 교회 시대라는 말로도 알려져 있는 현재에 이르기까지 교회사를 구성한다는 견해가 널리 퍼져 있다.
이 접근법은 일곱 메시지가 1세기 교회나 그 이후의 개개 신자 및 교회와 직접 연관이 있음을 부인하지는 않는다.
이 접근법은 이 일곱 메시지의 1차 목적이 미래의 일을 미리 알려줌에 있다고 본다.
고먼은 이런 점이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끼친 스코필드 주석 성경이 요한계시록 2-3장을 소개하면서 달아놓은 연구 주에 따르면 "전체를 통틀어 이 메시지는 교회의 영적 역사를 그것도 여기서 말하는 순서대로 정확하게 미리 보여준다."
이 접근법-교회사를 조감하는 접근법-은 지난 100년 동안 미국 보수 개신교 집단에서 인기를 누렸다.
당연히 한국 교회도 이 영향을 크게 받았다.
스코필드 성경에 들어 있는 주석들, 침례교 목사인 클래런스 라킨이 요한계시록의 내용을 담아 만든 도표들(1919년경), 홀 린지가 쓴 요한계시록 주해서와 팀 라헤이가 쓴 요한계시록 주해서에서 발견할 수 있다.
세대주의자가 요한계시록 2-3장의 교회를 해석한 내용
2:1-7/에베소/사도교회/100년 혹은 150년경까지
2:8-11/서머나/핍박받는 교회/100년경-312년(콘스탄티누스)
2:12-17/버가모/제국의 후원을 받으며 세상과 타협하다 그리스도께 심판받는 교회/312년-606년(교황 보니파키우스 3세 선출)
2:18-29/두아디라/교황제가 지배하고 미신과 이교 신앙이 두드러지면서 세상에 물들고 해이해진 중세 교회/606년경-1500/1517년(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 그러나 이 개혁은 요한계시록이 말하는 고난까지 이어짐
3:1-6/사데/종교개혁 교회, 아직도 중세교회와 아주 많이 비슷하며 살아있다기보다 죽어 있음/1517-1750년, 그러나 오늘날까지도 이어짐
3:7-13/빌라델비아/그리스도가 사랑하시는 참 교회로서 부흥과 선교 활동이 그 특징임/1750년경-20세기 초. 그러나 휴거 때까지 이어짐
3:14-22/라오디게아/미지근하고 배교하며 초자연성을 거부하는 교회/1900년경-요한계시록이 말하는 고난까지
이 접근법은 나름 독창적이고 매력이 있을 수 있다고 고먼은 본다.
그렇지만 몇 가지 큰 문제가 있다고 고먼은 말한다.
첫째, 요한계시록은 교회의 특별한 시대에 관심이 있음을 내비치지도 않고 이런 시대를 알지도 못한다.
요한계시록 2-3장의 실제 내용은 물론이요, 이 두 장의 문맥은 미래 교회에 관심을 보이기 보다 1세기에 맞닥뜨린 1세기의 진짜 교회에 관심을 보인다.
이 2-3장이 교회에 어떤 상징으로 계속하여 의미를 가짐을 부인하는 말은 아니다.
2-3장의 실제 내용과 문맥이 1세기의 진짜 교회에 관심을 보이는 것을 신학적인 면에서 꼼꼼히 곱씹어 보아야 한다.
엉뚱한 공상 대상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
둘째, 이런 종류의 체계는 보수성이 아주 강하고(대부분 근본주의적이고) 미국 개신교 색깔이 아주 강한 시각을 아무 비판 없이 그래로 반영한다.
이런 시각은 초대 교회와 개신교 선교 운동에서 추종할 만한 영웅을 찾고 가톨릭 교회와 주요 종교개혁 및 그 후손들인 "주류 개신교" 속에서 그 적을 발견한다.
이런 식의 교회사 해석은 성경 본문에 아무런 근거가 없고, 단지 해석자의 편견을 보여줄 뿐이며, 본문을 그야말로 유럽과 미국 중심으로 읽은 것에 불과하다.
메시지 형태
예수는 왕, 아니 황제 같은 분으로 요한을 통해 교회에게 말씀하신다.
예수의 말씀은 지극히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예수는 동시에 교회 사이를 거니시는 목자로서 말씀하신다.
교회의 여러 사자에게 주는 메세지는 목회자가 차례로 목회지를 돌아보는 방문인 셈이다.
고먼은 여기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부분들로 이루어진 상당히 일관된 문학적 구조를 밝혀낼 수 있다고 본다.
* 교회의 사자에게 하시는 말씀
* 대부분 여는 환상으로부터 가져온, 그리스도를 묘사한 말
* 칭찬(라오디게아를 제외한 모든 교회가 칭찬을 들음)
* 꾸지람(서머나와 빌라델비아를 제외한 모든 교회가 꾸지람을 들음)
* 도전:권면/경고
* 이기는 이들(신실한 이들)에게 주시는 종말의 약속
* 성령에 귀를 기울이라는 권면
메시지 내용
이 일곱 메세지를 읽을 때면 교회가 당면한 큰 문제에 깜짝 놀란다.
그 중 하나는 여러 종류의 핍박이요 다른 하나는 현실에 순응하라는 유혹이 강격했다는 점이다.
일부 사라들은 현실과의 타협이 핍박을 피하거나 그치게 할 방법이라고 여겼을지도 모른다.
여기서 문제 삼는 현실 순응의 가장 두드러진 형태는 여러 잡신(그리스도인의 관점에서 보면 우상)에게 희생 제물로 바쳐진 음식을 먹는 것이다.
이는 그 시대의 문화가 요구하는 규범으로 당연한 일이었으며 정치 현실과 사회 현실을 인정한다는 뜻을 나타내는 행위였다.
교회에서는 여러 개인과 그룹이 이런 일을 행하고 옹호했는데, 요한은 그런 개인과 그룹에게 상징성을 지닌 이름을 붙여, 버거모 교회에서는 이런 일을 한 자에겐 발람 추종자요 니골라당이라는 이름을(2:14,15), 에베소 교회에서 이런 일을 한 자에겐 니골라당이라는 이름을(2:6), 두아디라 교회에서 이런 일을 한 자에겐 이세벨과 그 추종자란 이름을 붙인다(2:20-25).
발람은 이스라엘이 미디안 족속과 더불어 우상 숭배와 부도덕에 빠진 일과 관련이 있는 선지자였다.
그는 나중에 심판을 받고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죽었다.
이세벨은 페니키아 출신인게 이스라엘 왕 아합의 아내로 야웨의 선지자들을 적대시하고 죽이면서 바알 선지자들을 옹호했다.
니골라당은 널리 알려지지 않았으나 그 이름은 "사람들을 정복하는 자들"이라는 뜻이다.
그는 이 운동을 이끈 이들을 거짓 사도요 거짓 선지자라 부르며 그 앞에 있던 다른 선지자들과 마찬가지로 이런 우상 숭배를 영적 음행이요 간음이라 일컫는다.
핍박은 몇 가지 형태로 다가왔다.
에베소와 빌라델비아에선 그리스도인임이 발혀지자 괴롭힘을 당했다.
서머나와 빌라델비아에선 어떤 유대인에게 비방을 받음은 물론 경제와 사회 분야에서 핍절한 처지로 내몰렸다.
서머나에선 곧 닥칠 체포를 두려워했는데 이는 속주 관원들이 그리스도인을 조사했음을 시사한다.
버가모에선 괴롭힘을 당하고 심지어 폭행으로 목숨까지 잃었다.
요한은 이런 핍박이 결국 사탄이 한 일이라고 보는데, 요한계시록 12장과 13장에서 사탄 및 사탄의 짐승을 묘사한 내용과 일치한다.
각 교회
2:1-7
에베소에는 속주 총독(임명직 정무관)이 살고, 아르테미스 여신과 황제에게 바친 거대한 신전들이 있는 큰 항구 도시다.에베서의 아르테미스는 제국 전역에서 숭배되었으며 아르테미스 신전은 고대 세계 7대 불가사의 가운데 하나로 알려져 있었다.
사람들은 종종 에베소의 문제를 영성(하나님을 사랑함)의 실패나 정행(올바른 실천, 특히 이웃 사랑)의 실패로 이어질 수 밖에 없는 경직된 정통(올바른 믿음에 강조점을 두는 태도)이 갖는 여러 위험한 모습과 연계해 생각한다.
고먼은 이렇게 보는 견해는 성경이 말하지 않는 두 가지 생각, 곧 (1) 믿음과 사랑은 서로 다르며 구별된다는 생각과 (2)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에 대한 성실한 행동이라기 보다 내면의 태도라는 생각을 널리 퍼뜨린다고 본다.
에베소 교회의 상황은 정통을 바로 따르지 않아 경직된 마음으로 보이는 것들을 거부해야 할 상황이라기 보다는 정행이 불완전하여 회개와 보완이 필요한 상황으로 보는 것이 더 좋다.
요한계시록 바르게 읽기-마이클 고먼, 박규태, 상상플러스, 159-1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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