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요한계시록

마이클 고먼을 따라 읽기3

기독항해자 2021. 1. 18. 18:00

복을 선언하는 책

 

요한계시록에 복 내지 지복을 선언하는 본문이 일곱 개 등장한다.

이것들은 요한계시록이 가진 예전의 성격을 드러내는 한 차원이지, 단순히 아름답게 보이려고 집어넣은 장식품이 아니다.

복 내지 지복을 선언하는 이 본문들은 어린 양 예수가 다시 오시는 것과 더불어 종말에 있을 축하연-새 예루살렘에서 있을 어린 양과 그의 신부인 신실한 교회의 혼인 피로연-을 기대하는 가운데 이 예수의 신실한 제자로 살아가라는 요한계시록 메시지의 핵심에 자리해 있다.

신실한 자들은 복이 있다.

 

1.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1:3)

 

2. 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이르되 기록하라 지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이르시되 그러하다 그들이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그들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14:13)

 

3. 보라 내가 도둑 같이 오리니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16:15)

 

4. 천사가 내게 말하기를 기록하라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은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고 또 내게 말하되 이것은 하나님의 참되신 말씀이라 하기로(19:9)

 

5. 이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 년 동안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 노릇 하리라(20:6)

 

6.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으리라 하더라(22:7)

 

7. 자기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이는 그들이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받으려 함이로다(22:14)

 

계시와 감각들

 

요한계시록은 인간의 감각을 아주 예민하게 자극하는 텍스트다.

요한계시록에 집중하다 보면, 우리의 심상은 모든 감각을 다 활용하는데, 특히 시각과 청각과 후각을 활용한다.

요한계시록은 그 속에 있는 환상들도 유명하지만 마찬가지로 청각을 자극하는 책이다.

우리는 이 책에서 천둥소리와 천사들의 외침과 수금 소리와 나팔 소리와 그리고 밀어닥치는 물소리 같은 소리를 듣는다.

 

신정을 선언하는 텍스트: 제국에 대한 비판이자 시민 종교에 대한 반대 선언

 

대부분의 요한계시록 해석자들은 요한계시록 전체가 로마 제국과 황제 숭배를 비판하고 비꼰 내용이라고 인정한다.

황제 숭배는 1세기 후반 로마 제국의 아시아 속주에 널리 펄져 있었다.

요한계시록은 로마라는 말을 쓰진 않았지만 로마를 하나님 백성을 대적하는 큰 원수인 도시 바벨론으로 비유하여 묘사한다.

요한계시록은 억아이라는 본질을 가진 황제 권력, 그리고 하나님을 모독하는 식으로 그 권력을 내세우는 주장들을 조롱하고 비판한다.

이런 이중적인 비판은 황제숭배를 겨냥한다.

이 황제숭배야말로 로마의 권력과 소위 이 권력의 신성한 성격이 결합하여 나타나는 곳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고먼은 워렌 카터의 글을 인용한다.

워렌 카터는 뉴질랜드에서 태어난 미국 프린스턴 신학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받고  텍사스 브라이트 신학대학원에서 가르치는 신약신학자다.

 

황제숭배는 황제를 떠받든 엄청난 신전과 형상과 제의와 이런 일을 맡은 사람과 황제를 신이라 내세우는 주장이 있었음을 일러준다.

특정 황제에게 바쳐진 신전과 다른 신전에 있던 황제상은 신들에게 황제와 그의 일가를 안전히 보호하고 이들에게 복을 내려달라고 감사하며 기도하던 핵심 요소였다.

분향과 제물과 매년 바치는 서약은 시민의 충성을 표현하는 동시에 갱신시켜 주었다.

이와 관련된 거리 행진과 잔치는 종종 지배층 인사들이 자금을 댔는데, 이런 자리를 빌려 황제에게 공경과 감사를 표시하고 황제 생일, 황제 등극이나 황제에 얽힌 전승들 같은 중대한 사건을 기념했다.

아울러 예배 행위가 장인이나 종교 집단 같은 그룹들의 모임에 흡수되었다.

시민과 집단은 신의 자리에 오른 황제가 관장하는 제국을 다양한 형태로 찬미하였다.

 

황제숭배는 정교한 "신과 나라" 현상 내지 일종의 도시 종교 혹은 시민 종교로서 다양한 방법으로 로마 제국과 황제 자신에게 신성함을 부여했다.

이런 황제숭배는 어떤 이데올로기 내지 정치 신학을 자세히 표현한 것이었다.

카터는 이 이데올로기 내지 정치 신학이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주요한 신념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보았다.

 

* 신들이 로마를 선택했다.

* 로마와 로마 황제는 인간들 가운데서 신들의 통치와 뜻과 구원과 임재를 대행하는 대리자다.

* 로마는 로마의 통치에 복종하는 자들에게 신들이 베푸는 복들-안전과 평화와 정의와 신실함과 풍요로움-을 드러낸다.

 

여기서 고먼은 황제 숭배를 설명하기 위해 스타티우스를 인용한다.

스타티우스(45-96)는 로마 시인으로 상류층 생활을 묘사한 시를 많이 썼다.

스타티우스는 요한계시록이 기록되었을 당시 로마 황제였을 가능성은 큰 도미티아누스를 묘사하면서 "주피터의 명으로 그를 대신해 복 받은 세계를 다스린다"라고 썼다.

스타티우스는 도미티아누스를 "정복한 세계를 다스리는 자" "세상의 확실한 구원" "복된 보호자요 구원자"라고 불렀다.

이런 신학은 신들에게 제국과 황제를 보호해줄 것을 비는 기도와 제사를 올림은 물론이요,-백성들의 아버지요 지도자이며 주피터를 대신하는 대리 통치자인-황제 자신에게도 기도와 제사를 바칠 것을 요구했다.

 

황제신학과 관련하여 카터가 말한 세 가지 신념에 고먼은 세 가지 사항을 덧붙인다.

 

* 로마를 통한 신들의 통치는 폭력과 위압과 평화롭지 않은 화해를 통해 이루어졌고 폭력과 지배와 평화롭지 않은 화해로 나타났다.

그 유명한 로마의 평화는 무력을 앞세운 정복, 노예 삼기, 다른 형태의 폭력에 의존한 로마의 통치권 확립이었다.

* 황제 자신이 당연히 찬양과 섬김과 충성을 받아야 할 존재가 되었다.

동시에 그는 주, 만유의 주, 신, 신의 아들, 구원자처럼 신이나 신에 준하는 존재에게 붙이는 칭호를 당연히 가져야 할 이가 되었다.

황제는 신인데도 여전히 인간이었다.

기도와 희생 제사는 황제에게 드릴 수 있었지만 황제를 위해 드릴 수도 있었다.

* 로마 제정 시대는 사람들이 오랫동안 기다려온 황금시대였으며 진정한 종말의 시대였다.

이 시대에는 인류의 소망이 이루어졌지만, 그 소망이 미완의 상태로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로마는 전달 매체를-행진, 경기, 웅장한 광경, 동상, 군인들이 드는 군기, 주화를-활용하여 사람들의 마음과 생각을 사로잡았다.

1세기 주화는 황제를 신으로, 온 우주를 구하고 다스리는 자로, 전쟁을 그치게 하고 평화를 가져온 자로, 적들을 굴복시킨 자 등으로 묘사한다.

황제숭배는 소아시아와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교회들이 자리한 도시들에 널리 퍼져 있었다.

초대 황제와 다름없는 아우구스투스(기원전 63-기원후 14)는 기원전 29년에 사탄의 권자가 있는 곳인 버가모(계2:13)가 그와 로마를 섬길 신전을 세우도록 허가해주었다.

에베소와 서머나 같은 도시도 황제를 숭배하는 중요한 신전을 갖고 있었다.

에베소는 황제숭배에 합당한 수호자로 자주 인정받았으며, 아르테미스 예배와 황제 예배를 혼합했다.

서머나는 기원전 195년에 로마 여신을 섬기는 신전을 세웠고, 기원후 26년에 티베리우스 황제를 섬기는 신전을 세웠다.

이처럼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일곱 도시는 어떤 식으로든 황제를 숭배했다.

 

요한계시록은 신정적인 텍스트다.

이 책은 누가 참 하나님이신지 그리고 하나님과 사회-정치 질서 사이에 존재하는 옳고 그른 관계들을 놓고 여러 가지 주장을 제시한다.

요한계시록은 제국의 정치 신학과 이 정치 신학의 바탕이 되는 종교적 이데올로기에 도전한다.

요한계시록은 하나님과 어린 양만이 참 주권자요, 모든 복의 근원이시며 예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한 분이심을 분명히 밝힌다.

요한계시록은 우리에게 누구 진정 주권자이신지, 하나님이 행하시는 주권이 어떤 종류인가도 알려준다.

그 주권은 폭력 및 강압과 거리가 먼 "어린 양의 권세"라고 불린다.

 

고먼은 크레이그 쾨스터의 글을 인용한다.

크레이그 쾨스터는 요한계시록이 다루는 제국은 세 가지 불가분 요소로 이루어져 있으며 요한계시록은 이 세 요소 전부에 도전한다고 말한다.

세 요소는 정치 지배, 정치 질서와 신의 질서를 동일시하는 종교, 그리고 지배층을 우대하는 인간 착취를 허용하는 경제 네트워크다.

요한계시록은 "제국의 야만스러운 측면", "인간 권력자를 신으로 떠받듦", 그리고 "더러운 상거래 모습"을 "환상을 통해 비판한 책"이다.

이렇게 해석하는 이들은 로마 제국의 여러 측면과 오늘날 제국의 형태-전 세계를 하나로 묶는 자본주의 경제 그리고 강력한 정치권력, 군사력, 경제력을 가진 실체인 미국-를 연계한다.

 

고먼은 말한다.

세상 권력이 신성하다 여김을 받고 섬김과 충성을 받을 가치가 있다고 여김을 받을 때, 시민 종교라는 현상이 나타난다.

고먼은 시민 종교가 무엇인지 정의한다.

 

세상 권력(보통은 국가 그리고/또는 국가의 우두머리)에 신이 베푸는 복의 근원이라는 신성한 지위를 부여하면서, 이 신성한 권력과 이 권력이 내세우는 가치들, 이 세상 권력의 신성한 지위와 이 권력으로부터 혜택을 받은 자들이 심지어 죽는 순간까지 다해야 할 섬김과 충성이라는 신성한 의무를 강조하는 다양한 내러티브와 여러 텍스트와 의식과 전달 매체로 표현한 모든 것을 마음과 생각과 몸을 다해 섬기고 충성할 것을 요구하는 것.

 

시민 종교를 이렇게 정의함은 시민 종교라는 것이 세 가지 차원을 가졌음을 암시한다.

1. 이데올로기/신학: 국가를 신성한 존재로 만듦

여기에는 국가 권력, 국가 번영, 국가 안녕, 국가 활동과 국가가 이룬 성과들, 특히 세력 팽창과 전쟁에서 거둔 성과들, 국가를 이끄는 신화들과 가치들, 국가의 과거 영웅들과 현재의 지도자들은 신성한 존재로 만드는 것이 포함된다.

2. 헌신/관습: 더불어 국가를 엄숙히 섬기고 충성할 것을 신성한 책임으로 요구하면서 이런 섬김과 충성를 공공 의식에서 표현할 것을 요구함

3. 혼합주의: 그 문화를 지배하는 종교 전통을 재해석하여 이렇게 국가를 신성한 존재로 만드는 것과 국가에 엄숙히 충성하는 것을 결합하고, 종교의 신앙 및 관행과 정치적, 민족적 주장 및 관행을 혼합함

 

요한계시록은 시민종교를 비판한다.

요한계시록은 다양한 신화와 관행을 통해 세상의 정치권력과 경제력 그리고 군사력을 신성한 존재로 만들면서 이런 권력에 충성하기를 요구하는 것을 비판한다.

시민종교는 권력과 아주 긴밀히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때로는 제국과 제국의 모습을 띤 국가와 같은 극단적인 형태로 나타나기도 한다.

이런 현상의 밑바탕에서는 세력 팽창과 승리야말로 신이 베푼 복과 보호를 보여주는 표지들이라는 가정, 하나님은 강자 편이라는 통념이 깔려 있다.

시민종교가 존재하거나 번성하는 데는 기성교회나 기성종교나 기성예배의 의식이 필요하지 않다.

시민종교는 교회와 국가를 인위적으로 분리해놓은 곳에서도 번성할 수 있다.

시민종교는 그 나라에 거주하는 대다수 사람들이 자기나를 기독교(혹은 유대교, 이슬람교 등을 믿는 국가)로 인식하느냐와 상관없이 번성할 수 있다.

 

시민 종교 거부 선언이자 명령인 요한계시록 

 

요한계시록은 시민 종교를 거부하는 선언이자 시민 종교에 맞서 하나님을 예배하고 증언하라는 명령이다.

요한계시록은 세상 권력-군사력, 정치권력, 경제력-으로부터 그 신성함을 계속 벗겨냄과 동시에 하나님과 어린 양을 신성함을 주장할 정당한 권리를 가진 이들로, 신성한 영예를 받아 누릴 유일한 자격을 가진 자로 계속 인정한다.

요한계시록은 시민 종교가 아닌 종교가 존재하며, 시민 종교를 거부하는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가 있을 수 있음을 선포한다.

요한계시록은 제국의 권력에 맞서 대안적인 권력의 그림을 제시함으로써 제국의 권력에 도전장을 던진다.

이 대안적인 권력은 신자들에게 위로와 확신과 소망을 주고 예수가 보여주신 패러다임을 따라 제국의 권력에 맞설 용기를 준다.

요한계시록은 어린 양을 예배하고 따르는 길로 인도하는 예언과 목회와 환상이 담긴 안내서요, 시민 종교에 맞서면서 참 하나님을 참되게 예배하는 신실한 증인의 모습을 담은 틀이다.

 

우리가 상상하고 예배하는 신(신들), 특히 공적인 영역에서 그리하는 신(신들)은 하나님과 다를지도 모른다.

칼뱅은 사람 마음은 쉴새 없이 우상을 만들어낸다는 유명한 주장을 했다.

1세기 만신전에는 아프로디테, 아스클레피오스, 디오니소스, 마르스와 카이사르를 비롯한 다른 많은 신들이 있었다.

오늘 우리에겐 이 신들에 상응하는 다른 이름들이 있다.

성, 건강, 건강하고 단단한 몸, 쾌락, 전쟁, 힘, 안녕을 비롯한 것들이 그런 이름들이다.

고대 사람들은 그들이 섬기는 신을 표현하는 신전과 신상과 명문을 갖고 있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각종 전달 매체들이 전해주는 우리의 우상들을 발견한다.

잡지와 책, 우리가 즐기는 영화와 음악, TV와 온라인이 이런 우상들을 전한다.

 

고먼은 미국에서 사람들을 유혹하는 가장 치명적인 우상은 어디에나 존재하는 잡탕 신, 곧 가벼운 기독교와 결합한 국가주의라는 신으로 본다.

이 우상을 섬기는 이들은 겉으로 보면 그리스도인 같으나 이들이 드러내는 믿음과 신앙 언어와 신앙 관습에는 국가주의 신화 및 관습이 들어 있다.

 

4장 우리는 요한계시록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 요한계시록 해석

 

요한계시록을 정경에 넣느냐 마느냐? 요한계시록은 정경인가라는 문제

 

초기 교회 지도자들은 대개 요한계시록을 충분히 오래되고 또 사도로부터 유래한 기록으로 보고 그들이 쓴 작품에 인용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요한계시록의 기이한 환상과 이미지는 다른 많은 이들이 이상하다 여긴 믿음을 가진 신학자들의 놀이마당이 되었다.

몬타누스파는 그들의 신학 중 많은 부분을 요한계시록에서 끄집어냈다.

정통파 지도자들은 이 책의 저자가 사도다른 데-그리고 이 책이 정통이라는 데-의문을 제기했다.

교회사가인 유세비우스(4세기 초)에 오면 어떤 이들은 요한계시록을 정경으로 인정했으나 다른 이들은 이 책을 거부했다.

유세비우스는 교회가 완성중인 정경을 놓고 벌인 논쟁에서 "논란을 벌인" 혹은 "가짜로 여긴" 책 속에 요한계시록을 포함시켰다.

서방교회는 4세기에 이르러 정경이 완성될 때 요한계시록을 정경에 집어 넣었지만 동방교회는 여전히 이 책을 가짜라 의심했다.

예루살렘의 킬릴루스(315-386)는 요한계시록을 정경에서 빼버리고 심지어 사람들이 모인 자리나 혼자 있을 때도 읽지 못하게 했다.

동방교회에는 천년왕국(20:1-6)이 "기독교의 영적 본질을 왜곡했다"고 말하는 이들이 많았다.

 

요한계시록 저자뿐 아니라 해석학적인 문제도 논쟁거리가 되었다.

교회가 요한계시록을 정경에 넣어야 한다고 또는 정경 속에 그대로 두어야 한다고 결정했지만, 요한계시록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라는 문제는 사라지지 않았다.

요한계시록이 정경이 되자 이런 해석상의 문제는 더 뜨거운 쟁점이 되었다.

이제는 그리스도인들이 이 책을 해석해야만 했고, 이 책과 성경의 다른 책들을 통합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요한계시록 해석사에서 볼 수 있는 큰 흐름들은 교회사 첫 몇 세기에 이 책을 진지하게 다룬 신학 작품들이 등장하면서 이미 나타났다.

요한계시록의 환상은 특정한 인물과 사건을 가리키는가 아니면 역사 속 특정 인물이나 사건을 넘어 역사 전체를 통해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인물과 사건을 가리키는가?

천년왕국은 진짜 천년왕국인가 아니면 상징인가?

천년왕국은 땅 위에 있는가 아니면 하늘에 있는가?

요한계시록의 주요 내용은 심판을 미리 일어주는 말인가 아니면 그리스도와 교회의 본질인가?

 

다섯 가지 해석 전략

 

오늘날 사람들이 따르는 요한계시록 해석 전략에는 적어도 다섯 가지가 있다.

 

1. 첫번째 접근법은 요한계시록을 예언으로 보는 접근법이다.

이것은 가장 흔한 접근법으로 미래에 초점을 맞춘다.

이 접근법은 기독교 초창기의 몇몇 요한계시록 해석자까지 거슬러 올라가는데, 2세기 순교자 유스티누스와 이레나이우스, 3세기 빅토리누스가 그 예다.

이들은 지금도 남아 있는 첫 요한계시록 주석을 썼다.

여러 세기에 걸쳐 많은 그리스도인 해석자들은 요한계시록이 말하는 고난이나 천년왕국이나 인물들이 그들 자신의 시대에 이루어지거나 아주 가까운 미래에 이루어지리라고 보았다.

"요한계시록을 역사를 예언하는 데 사용하려는 잘못된 시도 때문에 역사가 난장판이 되었다."(Barr)

시대의 분기점(가령 1000년이나 2000년)이 눈앞에 이르고 세상이나 교회에서 혼란스러운 정치 시간이 일어날 동안에는 사람들이 암호를 해독하고 그것들을 서로 꿰맞추는데 더 큰 관심을 기울였다.

 

고먼은 이 접근법에서 두 가지 기본 형태를 찾아냈다고 말한다.

일부 해석자들은 역사에 초점을 맞추면서 요한계시록이 세계사나 교회사를 내다본 예언이라고 생각한다.

이 경우 그 역사는 해석자의 시대나 해석자의 시대와 가까운 시대에 정점에 이르는 것이 보통이다.

12세기에 활동한 피오레의 요아킴(힘)과 14세기에 활동한 리르의 니콜라스는 요한계시록을 교회사 순서도로 읽었다.

요아킴은 이탈리아 신비주의 영성가요 수도사이며 신학자이다.

니콜라스는 프랑스 프란체스코회 수도사요 성경 주해 학자다.

이들의 요한계시록 읽기 전략은 후대의 많은 해석자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근래 요한계시록을 예언으로 보는 대다수 해석자들은 종말론에 초점을 맞추면서 요한계시록이 주로 "마지막 때"에 관심이 있다고 본다.

가끔은 미래에 초점을 맞춘 접근법이라는 이 접근법은 요한계시록을 마지막 때를 미리 보여주는 DVD나 청사진으로 보는 많은 대중 서적과 웹사이트와 다른 미디어에서 분명하게 발견할 수 있다.

오늘날 이 접근법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진 접근법은 세대주의다.

세대주의는 플리머스 형제단 교사인 다비(1808-1882)가 대중에게 널리 알렸고, 이어 스코필드 성경, 이어 홀 린지(린드세이, 그가 쓴 대 유성 지구의 종말), 그리고 최근에는 팀 라헤이와 제리 젠킨스(레프트 비하인드 시리지)가 널리 알렸다.

세대주의자들은 역사를 여러 세대 내지 시대로 나누어 하나님이 그리시는 이야기 속에 이런 세대 내지 시대들이 있다고 본다.

세대주의자들은 요한계시록 6-19장이 말하는 고난과 다니엘 9:25-27이 말하는 일흔 번째 주를 연계하며 예수의 2단계 재림 내찌 이중 재림이 요한계시록 4:1 및 다른 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교회 "휴거"와 함께 시작한다고 믿는다.

이것은 암호 해독이라는 관점에서 요한계시록에 다가가는 방법으로,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상징과 후대의 인물 및 사건, 특히 해석자와 같은 시대의 인물 및 사건을 연결하는데 관심을 보인다.

홀 린지는 오한계시록 9장에 나오는 황충이 공격용 헬리콥터일지 모른다고 주장했다.

 

이 접근법은 정치성이 아주 강할 수 있음을 유념해야 한다고 고먼은 주장한다.

 

2. 두 번째 접근법은 우리가 과거에 초점을 맞춘 접근법이라 부르는 접근법이다.

이 접근법은 오로지 과거에 초점을 맞춘다.

가끔 기록 당시의 역사에 초점을 맞춘 접근법이라고 부르는 이 접근법은 신학적 접근법은 아니나 학문성을 띤 접근법이다.

성경 연구에 쓰는 역사 비평 방법을 쓰거나 사회학-수사학의 방법론을 사용하는 경우도 있다.

이 접근법은 요한계시록을 엄격하게 이를 기록한 시대가 만들어낸 기록이요 그 시대에 적용하려고 쓴 기록이자 종교문학의 표본으로 본다.

이 접근법이 발전한 데에는 요한계시록을 미래에 초점을 맞춰 읽어내는 접근법에 대한 반발도 한 원인이 되었다.

이 접근법을 따르는 해석자는 본문에서 예언으로 보이는 것들에 전혀 관심이 없을 수도 있고, 심지어 그 본문이 후대에도 계속 적용되는가라는 문제에도 관심이 없을지도 모른다.

이 접근법을 쓰는 해석자는 요한계시록의 상징들이 오직 1세기에 가졌을 법한 의미들을 확실히 밝혀내려고 암호를 해독한다.

 

나머지 세 가지 접근법은 요한계시록이 던지는 메시지, 혹은 그 메시지가 시간을 초월한 성격을 가진다는 점에 초점을 맞춘다.

시간을 초월했다는 말은 요한계시록이 어느 시대나 늘 통하는 살아 있고 운동력이 있는 말씀이라는 뜻이요 요한계시록이 기록될 당시는 물론이요 후대 맥락에서도 능력이 있고 예리한 말씀으로 선포할 수 있다는 뜻이다.

 

요한계시록 바르게 읽기-마이클 고먼, 박규태, 상상플러스, 98-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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