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우리는 무엇을 읽고 있는가? 요한계시록의 형식
고먼은 성경학자들과 신학자들이 쓴 작품과 일반 저자들이 쓴 작품의 제목들을 정리하는 것으로 이 장을 시작한다.
많은 책들이 미래에 관한 요한계시록의 메시지(종말론)에 초점을 맞춘다.
종말 Scott Hahn
요한계시록 : 마지막 때 수수께끼를 풀다 Bruce Bickel and Stan Jantz
하나님의 장엄한 피날레 Hilton Sutton
드러난 휴거 : 요한계시록이 제시하는 소망의 메시지 Barbara Rossing
마지막 날들을 바라보는 산 소망 John MacArthur
다른 제목들은 어린 양이신 그리스도(요한계시록의 핵심 이미지)나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을 가리킨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말하는 책 Daniel Harrington
승리하신 그리스도 C. Freeman Sleeper
다시 오시는 왕 Vern S. Poythress
존귀하신 어린 양 Sam Gordon
어린 양의 능력 Ward Ewing
사자인 어린 양 Gladys Hunt
요한계시록의 메시지, 곧 어린 양의 전쟁 William John Dey
다른 제목들은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종말론적이고 정치적인 갈등, 또는 그것과 이 시대 정치와의 연관성에 초점을 맞춘다.
마지막 두 도시 이야기 Paul Winkler
요한계시록: 묵시와 제국 Leonard L. Thompson
제국의 베일을 벗기다: 그 때와 지금의 요한계시록 읽기
요한계시록: 정의로운 세계를 꿈꾸다 Elisabeth Schussler Fiorenza
위로와 저항: 한 남아프라카인의 눈으로 본 요한계시록 Allan Boesak
일부 제목들은 제자도에 초점을 맞추며 때로는 정치와 연결되어 있다.
요한계시록의 광시곡: 어린 양의 노래에 귀를 기울이다 Robert Lowery
요한계시록과 충성: 요한계시록이 말하는 예배, 정치, 그리고 섬김 J. Nelson Kraybill
다른 제목들은 다가올 위험 그리고 참회하라는 메시지를 분명하게 혹은 은연중에 부각한다.
다가오는 밤을 피하라 David Jeremiah
레프트 비하인드 Tim LaHaye and Jerry Jenkins
몇몇 책들은 요한계시록이 제시하는 환상 같은 이미지들을 강조한다.
제국의 광경: 괴물들, 순교자들 그리고 요한계시록 Christopher A. Frilingos
용, 메뚜기 그리고 개구리 Jerry L. Parks
용을 사슬로 묶다 Ralph Schreiber
몇몇 책의 제목은 요한계시록의 내용이 아닌 그 난해함을 암시한다.
요한계시록을 풀다 Perry Stone
암호풀기 Bruce Metzger
고먼은 다양한 책 제목들은 요한계시록의 내용과 관련하여 몇가지 진지한 질문을 불러일으킨다고 본다.
요한계시록은 이해할 수 있는 책인가?
요한계시록은 좋은 소식인가 나쁜 소식인가?
요한계시록이 이야기하는 것은 그리스도인가 적그리스도인가?
요한계시록이 다루는 것은 과거인가 현재인가 미래인가?
요한계시록이 불러일으키는 것은 두려움인가 믿음인가?
요한계시록이 말하는 것은 심판인가 소망인가?
요한계시록은-과거, 현재 혹은 미래의-특정한 악의 제국을 이야기하는가 아니면 보다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악과 제국을 이야기하는가?
고먼은 말한다.
요한계시록을 다룬 많은 제목들은 요한계시록을 소위 종말을 상세히 예고한 책으로 본다는 것이다.
둘째로 요한계시록은 여러 층으로 이루어진 의미를 지닌 풍성하고 깊이 있는 텍스트라는 것이다.
한 번 숙고하고 의미를 알 수 있는 그런 책이 아니라는 뜻이다.
고먼은 그가 가장 좋아하는 책 제목을 제시한다.
"어린 양을 따라 새 창조로 나아가다"
요한계시록은 그리스도와 예배와 제자도를 다룬 책이다.
요한계시록은 이 세상에 주는 마지막 소망을 다룬 책이다.
요한계시록은 하나님의 어린 양이신 그리스도를 전하는 좋은 소식이다.
그는 하나님 보좌에 함께 앉아계신 분이시요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푸는 열쇠이시다.
요한계시록은 심지어 악이 그치지 않고 제국이 폭압을 일삼는 와중에도 영원한 소망으로 우리를 인도하는 굳건한 신실함을 다룬 책이다.
이런 내용을 담고 있는 요한계시록의 형식은 무엇일까?
요한계시록의 장르
성경에는 다양한 유형의 책이 있고 우리는 이 다양한 유형을 서로 다른 방법으로 읽고 해석해야 한다.
이 원리는 보통 다른 책을 읽을 때도 똑같이 적용된다.
로마 제국의 역사를 다룬 책을 읽으면서 SF 판타지처럼 읽는다면 그 사람은 바보가 될 것이다.
성경도 마찬가지다.
시편의 시들을 사도행전의 내러티브를 다룰 때와 똑같은 방법으로 해석하지는 않는다.
바울 서신의 논증을 사도행전을 해석할 때와 똑같이 하지도 않는다.
장르라는 문제는 어떤 글을 해석할 때든 올바른 해석을 위해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특히 요한계시록 같은 작품에서는 더 그렇다.
우리가 장르를 무시한다면 심각한 잘못을 범해서 본문을 크게 오해할 수 있다.
이 문제를 올바른 인식한다면 가장 심각한 잘못은 범하지 않을 것이며 어찌 되었든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갈 것이다.
요한계시록은 장로를 결정하기가 어려운 종류의 책이다.
그것은 이 책이 다양한 문학 양식의 특징을 가진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고먼은 요한계시록은 여러 유형이 뒤섞인 혼성 문서로 분류한다.
요한계시록이 혼성 문학 작품의 성격을 가졌기 때문에 아주 많은 테마들과 해석들을 낳은 이유이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요한계시록이 묵시이자 예언이며 서신이라는데 동의할 것이다.
아니면 "회람 서신의 성격을 가진 묵시 예언"이라고 정의할지도 모르겠다.
동시예 요한계시록은 예전적인 텍스트이자 정치(혹은 신정)적인 텍스트로 보이기도 한다.
유진 피터스는 요한계시록이 정치성을 띤 작품이라고 주석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여느 사람들이 상상하는 것보다 더 정치성을 띠고 있지만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고먼은 요한계시록은 다섯 가지 차원이 서로 연관된 하나의 혼성 책으로 본다.
묵시, 예언, 서신은 이 책의 형식을 이루고, 예전적인 텍스트와 정치적인 텍스트는 내용을 이룬다.
묵시
요한계시록 헬라어 본문의 첫 단어는 "베일을 벗음" 혹은 "나타냄(계시)"이라는 뜻을 가진 아포칼립시스(묵시)다.
본문은 이 본문 자체를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고 밝힌다.
이는 그리스도에 관한 계시라는 의미일 수도 있고 그리스도로부터 나온 계시라는 의미일 수도 있고 두 가지 의미를 다 가졌을 수도 있다.
하지만 요한계시록은 이 말을 문학 장르를 지징하는 전문 용어로 사용하지는 않는다.
성경과 고대 문헌을 공부하는 사람들은 "묵시"라는 말을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후 몇 세기 동안 유대교 신자들과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널리 퍼져 있던 기록 유형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한다.
"묵시"라는 말은 요한계시록과 같은 종류의 문학 작품이 표현하는 세계관을 가리키는 형용사나 명사로 사용할 수 있다.
고먼은 성경학자 존 콜린스의 정의를 인용한다.
묵시는 내러티브 틀을 가진 계시 문학의 한 장르다.
다른 세계에 있는 존재는 이 묵시를 통해 사람인 수신자에게 계시를 전달하고 초월적인 현실을 알려준다.
그 현실은 종말에 있을 구원을 보여준다는 점에서는 시간성을 지니며, 초자연 세계인 또 다른 세계와 관련된다는 점에서는 공간성을 지닌다.
묵시는 환상, 이 세상이 아닌 저 세상으로의 여행, 그리고 하늘의 책을 본 이야기 등과 같은 다양한 하위 형태로 등장한다.
성경에서 묵시 문학의 중요한 예를 찾아볼 수 있다.
다니엘 7-12장과 마가복음 13장이 바로 그것이다.
마가복음 13장은 종종 "작은 계시록"이라고 불린다.
성경 밖 묵시 문학 작품에는 에녹 1서(기원전 3세기부터 기원후 1세기까지 몇몇 묵시들을 모아놓은 작품)와 에스라 4서(기원후 1세기 작품으로 요한계시록과 평행을 이루는 본문이 많다) 같은 유대교 작품 그리고 "베드로묵시록"과 "헤르마스 목자들"(둘 다 기원 후 2세기 초 작품일 가능성이 높다) 같은 기독교 작품이 있다.
정경이 완성되기 전에는 초기 그리스도인들 중에도 이 두 묵시 작품 가운데 어느 하나를 성경에 포함시켜야 한다고 생각한 이들이 일부 있었다.
일부 성경학자들은 묵시 문학을 "새로운 관용어로 전한 예언"이라고 불렀다.
묵시는 예언과 여러 가지 유사점을 갖고 있다.
그렇지만 관용어는 아주 독특하다.
관용어란 둘 이상의 낱말이 합쳐져 원래의 뜻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의미로 굳어져서 쓰이는 표현을 말한다.
본래의 낱말 뜻과는 다른 새로운 뜻으로 굳어진 비유적인 표현들이 많기 때문에 어떤 뜻인지 곱씹어 보아야 그 뜻을 알 수 있다.
‘발이 넓다’라는 관용어의 뜻을 한번 살펴보면, 여러 사람과 쉽게 잘 사귀어서 아는 사람이 많다라는 말이다.
이렇듯 관용어에 쓰인 각각의 낱말을 본래의 뜻으로만 이해하려고 하면 그 뜻을 제대로 알 수 없기 때문에 앞뒤 문맥과 상황을 바탕으로 그 뜻을 짐작할 수 있어야 한다.
‘입을 모으다’라는 관용어는 ‘입’과 ‘모으다’라는 각각의 낱말이 합쳐져서 ‘여러 사람이 같은 의견을 말하다.’라는 뜻으로 쓰인 것을 알 수 있다.
학자들은 묵시 신학과 묵시 문학의 기원을 놓고 논쟁을 벌이지만 이런 신학과 문학의 기본 기능은 분명해 보인다.
악과 억압이 횡행하는 위기의 시대에 하나님 백성을 지탱해주는 것이 바로 묵시 신학과 묵시 문학의 기능이다.
묵시 문학은 억압을 일삼는 자들을 가차 없이 비판하고 이들에게 저항할 것을 권면한다.
때로는 맞서 싸울 준비를 하라고 권면하기까지 한다.
하나님이 결국에는 현존하는 악을 격파하시리라는 것을 굳건히 신뢰하라고 권면함으로써 소망을 표현함과 동시에 소망을 불러 일으키기도 한다.
묵시 문학은 이런 소망을 상징 언어 혹은 신비한 언어로 표현한다.
이런 소망은 묵시가 곧 저항 언어이자 저항 문학임을 의미한다.
고먼은 여기서 미국의 신약학자인 리처드 호슬리의 글을 인용한다.
"그들(유대 묵시 문헌 저자들)은 세상 종말을 고대하지 않고 제국의 종말을 고대했다.
그들은 사람들이 예상한 우주 용해(우주가 녹아 없어짐)라는 그늘에 살지 않고 이 땅이 새롭게 되어 인간 사회의 삶이 새로워질 수 있기를 고대했다."
묵시 문학은 하나님과 하늘과 지옥처럼 우리 눈에 보이지 않으나 현존하는 실제들과 심판과 구원 같이 우리가 알지 못하나 미래에 있을 실제들에 관한 진리를 계시함으로 소망과 저항을 가능하게 해주었다.
묵시는 현재와 관련된 수직 내지 공간 계시일 수도 있고 혹은 미래와 관련된 수평 내지 시간 계시일 수도 있다.
때로는 요한계시록처럼 묵시가 두 성격을 다 가질 때도 있다.
성경 마지막 책을 보면 하늘에 있는 하나님과 그리스도와 신자들과 순교자들을 본 환상들(공간, 수직)이 다가오는 핍박과 심판 그리고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이루어진 구원을 본 환상들(시간, 수평)과 뒤섞여 있다.
묵시에는 가끔씩 하늘과 지옥 속으로 들어가거나 이곳들을 구경한 사연이 들어 있다.
요한계시록에는 보는 자가 들림을 받아 하늘 속으로 들어간다.
이어지는 장들은 마치 여행기 같다.
묵시 문학은 묵시 신학을 표현한다.
묵시 신학의 핵심에는 우주 이원론이 자리해 있다.
우주 안에는 서로 대립하는 두 세력이 활동하며 하나는 악한 세력이요(보통 사탄과 그를 따르는 마귀들이다), 다른 하나는 선한 세력이다(보통 하나님과 천사들이다).
이런 우주 이원론이 실제 삶속에서 드러난 것이 이 땅에서 선과 악이 벌이는 투쟁이다.
이 투쟁은 더 나아가 하나님 혹은 빛의 자녀들이 사탄 혹은 어둠의 자녀들과 벌이는 투쟁이라는 역사 이원론을 낳았다.
이렇게 우주와 역사 속에서 실제로 투쟁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은 모든 사람들이 이쪽 아니면 저쪽을 택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모든 사람은 선과 하나님 쪽을 택하든지 아니면 악과 사탄 쪽을 택해야 한다.
고먼은 이것에 윤리 이원론이라는 이름표를 붙인다.
묵시 문학에는 또 다른 종류의 이원론이 들어 있다.
바로 시간 이원론이다.
이 이론은 역사를 두 시대로 나누어 이 시대와 오는 시대로 구분한다.
현세를 규정하는 특징은 악과 불의와 억압과 핍박이다.
반면 오는 시대는 선과 정의와 평화의 시대이다.
이 두 시대는 서로 극과 극이다.
이 시대는 사탄과 악의 세력이 판을 치는 시대이다.
때문에 묵시 문학은 비관론을 드러낸다.
이 시대의 위기에 인간이 내놓은 해결책은 소망이 없다.
오직 하나님이 개입하셔야만 만사를 바로잡을 수 있다.
사실 하나님이 그리 하실 것이다.
그래서 묵시문학의 비관론은 낙관론에 길을 내준다.
이 낙관론은 인간의 행동에 근거한 낙관론이 아니라 장차 하나님이 승리하시리라는 확신에 근거한 낙관론이다.
고먼은 미첼 레디쉬의 말을 인용한다.
요한계시록은 환상과 상징과 고대 신화를 사용하여 그가 전하려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이 책 언어는 주로 시각 언어요 상징 언어다.
이 책 언어는 과학 언어나 논리 언어가 아니다.
오히려 그 언어는 뭔가를 일깨워주고 힘차고 감동을 자아내는 언어이며 산문이라기보다는 시에 더 가깝다.
시어가 그렇듯이 요한계시록의 언어도 가끔은 신비롭고 손에 쥐기가 힘들다.
요한계시록의 언어는 읽는 이들로 하여금 전에는 상상도 못했던 연결을 해보게 하고 전에는 볼 수 없었던 가능성을 탐색하게 한다.
요한계시록의 언어가 살아 움직이는 것은 정보를 전달해주기 때문이 아니라 독자가 요한이 체험한 것을 체험하게 도와주기 때문이다.
묵시를 보는 자들은 표현이 거의 불가능한 것을 표현하려고 할 때 동물, 색깔, 숫자 그리고 일상에서 만나는 다른 것들에 뭔가를 상징하는 가치를 입힌다.
요한계시록에서 가장 자주 등장하는 가장 중요한 상징 요소들 가운데에는 특정한 색깔과 숫자가 있다.
색깔은 형용사라기보다는 이미지처럼 기능할 때가 더 많고 숫자는 숫자라기보다는 형용사처럼 기능할 때가 더 많다.
요한계시록이 상징으로 제시하는 색깔과 숫자
흰색(승리, 부활, 순결/정결, 하늘/신성)
붉은 색(피, 폭력)
자주색(퇴폐, 제국과 황제의 악)
검은 색(죽음, 재앙)
청황색(죽음)
금색(썩지 않는 부, 아름다움, 왕권)
1/3,1/2(제한된 시야 혹은 시간)
3(구별된 그룹, 신 혹은 거짓 신)
3과1/2(제한된 시간, 충만함의 절반)
4(보편성, 피조 세계 안의 보편성)
6(불완전함, 거짓 신(충만함이 없음))
7(충만함, 완전함)
12(하나님 백성, 하나님이 택하신 족속들 그리고 사도들, 하나님의 현존 즉 우주적 충만함)
상징 언어는 뭔가를 일깨워주며 풍부한 의미를 표현한다.
상징 언어는 신문이 쓰는 언어가 아니라 시가 쓰는 언어다.
상징은 초월성을 지녔더라도 실제로 존재하는 대상을 가리킨다.
상징 언어를 "문자에 충실한 비문자주의"라고 부를 수 있다.
상징들이 만들어내는 세계는 허구가 아니다.
그것은 문자와 딱 들어맞지 않아도 실존하는 세계다.
요한계시록을 묵시문학으로 이해하는 것은 요한계시록이 우주적 차원에서 반영해주고 이야기하는 현실 세계 상황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우리에게 용기를 불어넣어 줄 것이다.
그렇게 이해한다는 것은 우리가 상징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도록, 실제 같은 청황색 말이나 머리가 여럿인 짐승이나 천년이라는 기간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않도록 권면한다.
이것들은 모두 상징이지만 그렇다고 이것들이 가리키는 실제들의 현실성이 줄어들지는 않는다.
요한계시록을 해석한다는 사람들조차 요한계시록의 상징을 상징으로 여기면서도 메뚜기는 헬리콥터요 뿔이 열 개 달린 짐승은 다시 뭉친 로마 제국인 유럽연합을 가리킨다는 식으로 해석한다.
훌륭한 정치 풍자만화나 시처럼 묵시도 하나님의 백성이 체험하거나 소망하룰 수 있는 가장 심오한 실재들을 다룰 수 있는 상상력에 호소한다.
고먼은 피터슨을 인용한다.
묵시적 상상이 하는 일은 지금 우리 삶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일들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이미지를 제공하는 것이다.
솔 벨로우가 쓴 어느 소솔에 등장하는 한 인물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 주면에 신비한 힘이 있다면 오로지 과장만이 우리가 그것을 볼 수 있게 도와줄 수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세상을 만든-세상을 바라보면 알 수 있는-힘이 있고 세상을 파괴하는 다른 힘이 있음을 느낍니다."
플래너리 오코너는 그가 쓴 이야기 책 속에 나오는 기괴한 인물들을 창조한 아유를 묻는 질문에 거의 앞을 못보는 사람들을 생각하면 아주 크고 단순한 캐리커처를 그릴 수밖에 없었다고 대답했다.
고먼은 피터슨이 다른 작가인 웬델 베리의 글을 인용한 것도 인용한다.
"상상은 우리가 하나님의 심상으로 들어가는 길로서 우리가 흩어져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전체로-전체이자 거룩한 것으로-보게 해주고 우리가 무질서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질서로 보게 해준다."
고먼은 요한은 단지 상상에서 나온 묵시를 쓰고 있는 게 아니라고 본다.
그는 지금 하나님이 성경 속 선지자들에게 보여주시고(에스겔 37장에 나오는 에스겔과 마른 뼈로 가득한 골짜기 이야기) 베드로와 같은 초기 교회 지도자들에게 보여주신 것처럼(사도행전 10장)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주신 것과 들려주신 것을 기록하고 있다.
그는 다른 사람들이 보지 못한 것을 보았다.
실로 그는 현재 우주의 실상이 어떠하며 장차 이 우주가 어찌 될 것인지 알려주는 진리-눈에 보이지 않는 미래를 알려주는 진리-를 보았다.
그가 본 것을 기록해놓은 보고는 구약 신학자인 엘렌 데이비스가 선지자들이 하는 일로 묘사한 바로 그 일을 한다.
데이비스는 선지자들이 "우리 눈을 더 밝혀줌-으로써 우리의 빈약한 신앙적 심상(상상)을 이끌어주고 역사 속의 이 순간을 하나님의 시각으로 볼 수 있게 해준다-고 말한다.
요한계시록은 묵시로서 감추려하지 않고 드러내려 한다.
동시에 성경의 예언들처럼 "사색을 통해 앞일을 미래 내다봄이 아니라 신학적인 관점에서 속에 숨어 있는 것을 꿰뚫어 봄을 그 목표로 삼는다."
선지자들과 보는 자 요한이 비슷한 이유는 요한 자신이 선지자였기 때문이다.
요한계시록 바르게 읽기-마이클 고먼, 박규태, 상상플러스, 49-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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