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계시록의 저자는 소아시아에 있는 교회들에게 잘 알려져 있는 인물입니다(1:4, 11).
저자는 자신을 단지 요한으로 밝히고 있습니다(1:1, 4, 9; 22:8).
전통적으로는 사도요한을 본서의 기록자로 보았습니다.
그러나 3세기 때, 오리겐의 제자인 디오니시우스로부터 저자에 대한 논란이 시작되었습니다.
요한이란 이름과 관련하여 떠올릴 수있는 대표적인 인물로는 사도 요한과 마가 요한 그리고 소아시아의 기독교인 예언자 요한 등이 있습니다.
이 이름의 헬라어 형태는 “요안네스”(Ioannes)(눅 1:13)인데, 이것은 흔히 있는 히브리 이름 “요하난”(Yochanan, Johanan)의 음역입니다.
“요하난”이란 이름은 구약의 후기 책들과 외경과 요세푸스의 문헌에 허다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러한 이름은 이 책의 저자가 유대인임을 밝혀줍니다.
여러가지 증거들은 요한이라는 이름이 많은 유대교의 묵시적 작품들과 초기 그리스도교의 묵시적 작품들이 가지고 있던 것과 같은 가명이 아니라 이 책의 저자의 실제적인 이름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첫번째 사실은 계시록의 저자는 자신을 요한이라고 밝힘에 있어서 자신이 교회 내의 어떤 지위를 가진 사람으로 돋보이게 하려는 시도를 전혀 하지 않고 있다는 점입니다.
여러가지 유대교회의 묵시들과 그리스도교의 묵시들은 히브리인 부조들과 선지자들 또는 그리스도교 사도들의 저술이라고 자처하고 있습니다.
만약 계시록도 역시 그 저자의 이름이 가명이라면, 그 저자는 자신을 하나의 사도로 소개하기 위하여 특별한 시도를 했을 것이 기대됩니다.
그러나 그 저자가 자신의 이름이 “너의 형제 요한”(계 1:9, 바울에 대한 베드로의 호칭 벧후 3:15)이라고 한 단순한 진술은 그가 자신의 본명을 그대로 밝히고 있다는 증거가 됩니다.
분명히 그 기자는 교회들에게 너무나 잘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그의 이름만으로도 그가 누구인지를 밝힌 것과 그가 본 계시들의 기록을 신용하기에 충분하였습니다.
더우기, 예언의 은사가 활발하게 나타나던 때에는 가명을 쓰는 습관은 성행하지 않았던 것으로 나타납니다.
한편으로, 중간사 시대 동안에는 우리가 아는 대로는 유대인들 가운데 공인된 선지자가 없었으므로, 종교적인 저술가들은 그들의 저술이 전반적으로 용납되도록 하기 위하여 그것에다 고대의 어떤 명망높은 인물의 이름을 붙이는 일이 필요하다고 느낀 사례가 빈번하였습니다.
구약 선지자들과 같이 하나님을 대신하여 말하던 참된 선지자가 그 당시에 없었던 것은 명백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의 시작과 함께 예언의 은사가 다시한번 활약하였습니다.
1세기의 그리스도 교회에는 사람들이 상상하는 바와같이 가명을 사용할 필요성이 존재하지 않았으며,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사도들과 선지자들이 직접적으로 하나님을 대신하여 말한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선지자의 직분이 좋지 않은 평판을 얻게 되고, 2세기에 와서는 마침내 사라져 버리게 되자, 여러 사도들의 이름을 도용한 가명의 작품들이 나타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와같은 사실들에 비춰볼 때, 계시록은 1세기에 기록된 것으로서 가명의 작품이 아니라, 그의 본명이 요한인 사람이 직접 저술한 책이라고 결론을 짓는 것은 합리적인 일입니다.
그러면 이 요한은 누구였을까?
신약은 여러 사람들을 이 이름으로 일컫고 있는데, 그들은 침례자 요한, 열 두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세베대의 아들 요한, 그의 성(姓) 마가였던 요한, 대제사장 안나스의 어떤 측근이었던 요한(행 4:6)등이 있습니다.
계시록의 저자가 침례자 요한일 수는 없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그 요한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시기 전에 죽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또한 안나스의 측근인 요한이 계시록의 저자였을 가능성도 전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그리스도 교인이 되었다는 암시가 아무데도 없기 때문입니다.
이와 흡사하게 마가 요한이 계시록의 저자였다는 증거도 거의 없습니다.
제 2복음서(마가복음)의 문체와 어투와 접근 방법은 계시록의 그것과 상당히 다르며, 초기 교회의 어느 누구인가 계시록과 마가복음을 본격적으로 연결시켰다는 증거는 전혀 없습니다.
이와같이 하나씩 제외하다보면, 남는 것은 세베대의 아들이요, 야고보의 형제인 요한입니다.
그는 열 두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을 뿐만 아니라, 예수의 내부 일원들 중에 하나이었습니다.
거의 만장일치로 초기 그리스도교 전통은 그를 계시록의 저자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사실에 있어서, 그들의 저술들이 오늘날까지 보존되고 이 문제를 언급한 적이 있는 3세기 중엽까지의 모든 그리스도교 저술가는 계시록을 사도 요한의 기록으로 돌립니다.
이러한 저술가들이란 로마의 유스티노스 마르튀로스(Justin Martyr, A.D. 100-165?), 리용(Lyons)의 이레내우스(Irenaeus, A.D. 130- 202?), 카르타고(Carthage)의 테르툴리아누스(Tertullian, A.D. 160-240?), 로마의 히폴뤼투스(Hippolytus, A.D. 235? 사망), 그리고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Clement, A.D. 220? 사망)등이 있습니다.
이러한 증언들은 계시록의 저자가 사도 요한이라고 믿던 초기 교회의 강하고도 널리 퍼져 있던 신념을 입증해 줍니다. 게다가 초기 그리스도교의 여러가지 전통들은 요한의 말년을 에베소라는 도시와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이와같이 이레내우스는 그의 젊은 시절에 “그리스도를 본 적이 있는 많은 사람들과 대화를 나눈” 서머나의 연로한 폴리갑을 만난 일이 있다고 선언하면서 그 사람들 가운데서 트라야누스(Trajan, A.D. 98-117)시대까지 에베소에서 영주한 요한도 만났다고 하였습니다.
에베소의 감독 폴뤼크라테스(polycrates, A.D. 130-200?)는 그의 가문에서 그리스도교의 감독이 된 여덟번째의 인물로서 증거하기를, “주의 품에 기대고 있던” 그 요한은 “에베소에서 휴양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진술들은 요한이 친히 그의 기록을 아시아에 있는 교회들과 에베소로 보낸다고 말한 사실과 일치하고 있습니다(계 1:4, 11).
이 기간 동안에, 계시록의 저자가 사도 요한임을 불신하는 것으로 말한 유일한 증언은 초기 그리스도교 교부 파피아스(Papias, A.D. 163? 사망)에게서 유래합니다.
파피아스의 작품들은 상실되고 없으며, 그의 작품들 가운데 현존하는 모든 것은 후기의 저술가들에 의하여 보존된 인용구들 속에 극히 단편적인 형태로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 중에 둘은 요한의 죽음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 중 하나는 7세기 또는 8세기의 사본으로서 시데의 필립(Philip of Side, 5세기)이 저술한 ‘역대기’의 요약인 것으로 보이는데, 거기에 말하기를, “파피아스는 그의 두번째 책에서 신령자 요한과 그의 형제 야고보는 유대인들에게 살해당하였다고 말한다” 라고 하였습니다.
이와 흡사하게 게오르기우스 하마르톨루스의 역대기(Chronicle of Georgius Hamartolus, A.D. 860경)의 한 사본은 말하기를, “이 일에 대한 목격자인 히에라폴리스의 감독 파피아스는 주의 말씀을 기록한 그의 두번째 책에서 그(요한)가 유대인들에게 죽임을 당함으로써, 그의 형제와 더불어, 그들에 관한 그리스도의 예언을 분명하게 성취하였다고 말한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얼핏 보기에 이 인용구들은 1세기 말이나 2세기 초에 에베소 근방에 살고 있던 한 그리스도교 임원인 사도 요한은 그의 형제와 마찬가지로 유대인들에 의하여 너무나 일찌기 죽임을 당했기 때문에 학자들이 보통 매기는 연대인 네로나 도미티아누스의 시대에 계시록을 기록하지 못했다고 증언하는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좀 더 가까이서 살펴보면, 이 인용구들에 관한 여러가지 의문이 제기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옥스포드 사본으로부터 따온 구절에서 요한을 “신학자”라고 칭한 사실은 그 인용구가 중세의 필사자에 의하여 약간 수식되었음을 지적합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칭호는 8세기 이전의 것으로서 현존하는 어떤 성경 사본에서도 요한에게 적용된 적이 없으며, 따라서 파피아스가 그 칭호를 사용했을 가능성은 사실상 상상도 못할 일이기 때문입니다.
게오르기우스 하마르톨루스에게서 따온 두번째 인용구는 그 저자의 오직 한 사본에서만 발견되는 것입니다.
그의 저작은 다른 사본들은 단지 요한이 평화로운 가운데 죽었다고만 말할 뿐, 파피아스의 글은 하나도 인용하지 않고 있음이 확실합니다.
결과적으로 파피아스가 요한의 죽음에 관한여 말한 바가 꼭 무엇인지는 알기가 힘듭니다.
만약에 그가 요한이 야고보처럼 유대인들에게 죽임을 당했다고 참으로 기록했다면, 그것이 곧 그들의 죽음이 동기에 있은 일이라거나 또는 비슷한 시기에 있은 일이었음을 뜻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계시록은 그것이 기록되던 당시에 유대인들이 아직도 그리스도인들에게 어려움을 유발시키고 있었음을 이 책 자체에 나타내고 있으며, 만약 요한이 마침내 순교자의 죽음을 당한 것이 사실이라면, 그것은 아마도 유대인의 음모의 결과였을 것입니다.
파피아스의 글에서 따온 세번째 인용구는 교회 역사가(歷史家) 유세비우스(A.D. 340 사망)에 의하여 기록된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그 해석에다 내가 장로들에게서 잘 배워왔기 때문에 잘 기억하고 있는 모든 것을 덧붙이기를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의 진리를 나는 확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장로들을 추종하던 어떤 사람이라도 오기만 한다면, 나는 장로들이 한 말들을 물어서 안드레나 베드로나 빌립이나 도마나 야고보나 요한이나 마태나 또는 주님의 제자들 가운데 어느 누가 무엇을 말했는지를 알아 보았고, 아리스톤(Aristion)과 장로 요한과 주의 제자들이 무엇을 말하고 있었는지를 알아 보았다. 왜냐하면 나는 서적에서 얻은 정보가 살아있는 생생한 육성으로 하는 말만큼 나에게 도움을 줄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구절은 많은 억측의 주제가 되어 왔습니다.
유세비우스는 이것을 1세기의 말엽에 아시아에 요한이라는 이름을 가진 인물이 두 사람 살았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하였습니다.
즉 사도 요한과 장로였던 다른 요한이 같은 시대에 있었던 것으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유세비우스의 의견은 이 후자 요한이 파피아스가 개인적으로 잘 알고 있던 그 사람이며, 그가 곧 계시록을 기록한 사람이라는 것이며, 한편으로 사도 요한은 복음서의 저자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파피아스의 말을 또 다른 방법으로 해석하는 일도 가능합니다.
독일의 신약학자 짠(Zahn, Introduction to the New Testament, 2d ed, vol.2, PP.451-453)이 지적한 바와 같이 파피아스의 진술 가운데는 장로들과 사도들 사이의 실제적인 구분입니다.
파피아스는 그가 “장로들이 한 말들을 물어서…”라고 말해 놓고는 곧 이어서 사람들의 이름을 열거하고 있으며, 그 다음에는 그가 “장로 요한”을 언급하면서 즉시 그를 “주의 제자들”중의 하나로 밝히고 있습니다.
그가 언급하는 두 부류 사이의 실제적인 구분은 “에이펜”(eipen-말했다)이라는 말과 “레구신”(legousin-말하고 있었다)이라는 말에 있습니다.
이것은 여기에 언급된 첫번째 부류에 속한 사람들은 파피아스의 시대 이전에 살면서 그들의 증거를 남긴 예수님의 제자들인 반면에, 두번째 부류에 속한 사람들은 파피아스의 당대에 아직도 살아 있어서 정보를 제공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음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만약 상기한 이레내우스의 증거가 받아들여진다면 사도 요한은 두가지 부류에 다 포함되었기 때문에 두번 언급된 것으로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파피아스의 진술에서 두 사람의 요한을 끌어내려고 애쓴 유세비우스의 노력은, 그의 결론이 알렉산드리아의 감독 디오뉘시우스(Dionysius, A.D. 265 사망)의 저술에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에 의하여 더욱 더 이해할 만하게 됩니다.
문자적인 천년기를 강조하던 약간의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반작용으로 디오뉘시우스는 ‘언약론’이라는 논문을 저술하였는데, 거기서 그는 계시록이 사도 요한에 의하여 기록된 것이 아니라, 동일한 이름의 다른 사람에 의하여 기록되었다는 것을 학자적인 논증으로써 증명하려고 애썼습니다.
디오뉘시우스는 계시록의 저자가 사도임을 의심한 첫 교부였으며, 그의 논증들은 그와 견해를 같이 하는 학자들에게 고전적인 논증으로 남아 왔습니다.
디오뉘시우스는 복음서의 언어와 계시록의 언어 사이에는 명백한 차이점들이 있다는 사실에다 그의 비평의 주안점을 두었습니다.
그 두가지의 책의 어휘들은 현저한 차이점들을 나타내고, 한 책에서 특별히 자주 사용된 많은 단어들이 다른 책에서는 매우 드물게 사용되어 있습니다.
다음의 보기들은 특별히 두드러진 것들입니다.
“코스모스”(kosmos-세상, 세계)는 요한복음에서 79번 나타나지만, 계시록에서는 오직 3번 나타나고, “알레테이아”(aletheia-진리, 참)는 요한복음에서 25번, 계시록에서는 한번도 나타나지 않습니다.
“포스”(phos- 빛)은 요한복음에서 22번, 계시록에서는 3번 나타납니다.
“아가파오”(agapao-사랑하다)는 요한복음에서 37번, 계시록에서는 4번 사용되었으며, “피스튜오”(pisteuo-믿다)는 요한복음에서 100번, 계시록에서는 전혀 사용되지 않습니다.
“알라”(alla- 그러나)는 요한복음에서 100번 이상, 계시록에서는 13번 나타나며, “에노피온”(enopion-앞에, 면전에)은 요한복음에서 단 한번, 계시록에서는 36번 나타납니다.
“에모스”(emos-나의, 나의 것)는 요한복음에서 42번, 계시록에서는 단 한번 사용되었습니다.
그리스도를 “어린 양”으로 칭함에 있어서 복음서는 언제나 “암노스”(amnos)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으나, 계시록은 항상 “아르니온”(arnion)이란 단어를 사용하고 있는데, 이 두 단어 모두가 “어린 양”(lamb)을 뜻하는 단어입니다.
복음서에서 예루살렘은 언제나 “히에로솔루마”(Hierosoluma)로 되어 있으나, 계시록에서는 한결같이 “히에루살렘”(Hierousalem)으로 되어 있습니다.
디오뉘시우스는 요한복음의 헬라어는 정확하고 관용어법에 맞는 반면에 계시록의 그것은 정확한 헬라어 문법과 구문으로 설명될 수 없는 구절들을 많이 포함하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해 내었습니다.
복음서와 계시록 사이의 이와같은 현저한 차이점들에 비추어서, 디오뉘시우스는 그 두 책이 동일한 저자의 기록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이러한 비평들은 계시록의 사도성과 그에 따라 정경성에 관한 동방 교회의 생각에 광범한 영향을 끼쳤던 것으로 보입니다.
유세비우스는 디오뉘시우스의 논증들의 세부 사항들을 다 기록했을 뿐만 아니라, 그는 위에 인용한 파피아스의 귀절을 사용하여 그것들을 더욱 더 확고하게 하려고 노력하였습니다.
이와 흡사한 방법으로, 계시록의 정경성에 관하여 그는 다음과 같이 보고 하였습니다.
“복음서에 추가하여 요한이 기록한 글들 가운데 첫번째 편지서는 고대인들과 현대인들에 의하여 공히 아무런 논쟁없이 받아들여져 왔으나, 다른 두 편지서는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으며, 계시록에 관해서는 현재까지 쌍방으로 각기 다른 의견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어 왔다.”
두 사람의 요한을 가려 내기 위하여 디오뉘시우스가 제시한 증거가 비록 유력하다 할찌라도, 마지막 판정이 내려지기 전에 여러가지 다른 사람들이 고려되지 않으면 안됩니다.
디오뉘시우스와 유세비우스의 견해는 주로 두 가지 점- 파피아스의 글로부터 따온 모호한 인용 구절, 그리고 복음서와 계시록 사이에 있는 언어상의 차이점들에 입각한 디오뉘시우스의 논증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파피아스가 서로 다른 두 사람을 요한이라는 이름으로 일컬은 것이 아님을 증명할 수는 없지만, 만약 그가 그렇게 했다면, 그의 증언은 그것이 계시록의 저자가 사도가 아님을 말해주는 증거로 사용되는 한에는 대여섯 명의 다른 교부들의 증언과는 모순을 이루고 있습니다(주(註):앞에서 언급한 유스티노스 마르튀로스, 이레내우스, 테르툴리아누스, 히폴뤼투스, 클레멘트 등).
이 점에 있어서 특별히 중요한 것은 요한과 파피아스의 동시대인인 폴리갑과 개인적인 접촉을 친히 가진 바 있는 이레내우스의 진술입니다.
그는 오직 한 사람의 요한, 즉 사도 요한에 대해서만 알고 있는 것으로 보이며, 이 요한이 계시록을 기록했다고 명백히 진술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에 비춰볼 때, 파피아스의 애매한 진술이 두 사람의 요한이 존재했다는 것에 대한 증거로 크게 강조되어서는 안된다고 결론짓는 것이 합당한 것으로 보입니다.
복음서와 계시록 사이의 언어적인 차이점들은 실로 분명합니다.
두 책 사이에 분명히 존재하는 주제와 문체상의 차이가 서로 다른 어휘들이 사용된 데 대한 어느 정도의 설명은 될 수 있다 하더라도 동일한 저자가 “알라”(그러나), “에노피온”(…앞에), “에모스”(나의) 등과 같은 단어들을 사용함에 있어서 그처럼 현격하게 다른 빈도를 보이는 것은 보통 있는 일이 아닙니다.
주제와 문학 형태에 상관없이 동일한 저자는 그와 같은 단어들을 전혀 무의식적으로 사용하기도 하고, 생략하기도 하는 것이 상례입니다.
두 개의 작품이 이러한 단어들을 사용함에 있어서 복음서와 계시록이 다른 것만큼 현격하게 그 빈도가 다를 때에는 우선은 그 단어들이 그 두 작품을 동일한 저자의 것으로 나타낸다고 생각하기는 어려워 보일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사실 자체가 바로 요한이 그 두 책의 저자가 아니라는 의미는 되지 못합니다.
그 두 책이 기록되었을 것으로 생각되는 당시의 형편은 그 책들 안에 존재하는 바와 같은 차이점들에 대한 합리적인 설명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계시록에 요한은 그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를 인하여 밧모라 하는 섬에”(계 1:9) 있는 동안에 그 계시를 받았다고 선언합니다.
요한이 유배(流配)된 몸으로 그곳에 있었다는 것은 그가 계시록을 문장으로 형성함에 있어서 불가불 자기 자신의 언어 능력에만 의존하도록 되어 있었음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이 책의 언어가 항상 관용적(慣用的)이지는 못하고, 셈어적인 요소들(Semiticisms)이 종종 그 헬라어를 꿰뚫고 비쳐나오는 것과 이 책의 저자가 자신의 문법에 대하여 언제나 확신을 갖지 못하고 있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그와 같은 상황은 요한이 계시록을 기록한 것으로 알려진 그때의 형편과 온전히 조화를 이룹니다.
나아가서 그 계시들이 기록된 것은 계시의 장면들이 그 선지자의 눈앞에 생생하게 지나가고 있을 때였음이 분명합니다(계 10:4).
요한은 그가 기록한 계시의 극적인 감각이 상실되지 않도록 짐짓 수정을 피했을지도 모릅니다(추측).
한편으로, 초기의 그리스도교 전통은 요한복음이 기록된 것은 전혀 다른 상황 하에서였다고 지적합니다.
A.D. 170년 경에 로마에서 요한의 제자 폴리갑이 그곳을 방문한 지 불과 수십년 후에 구성된 무라토리 단편(Muratorian Fragment)은 다음과 같이 선언하고 있습니다.
“복음서들 가운데 네번째 것은 제자들 중의 한 사람인 요한의 것이다. 그의 동료 제자들과 감독들의 격려를 받은 그는 그들에게 말하기를, ‘나와 함께 오는 사흘동안 금식하고, 우리 각자에게 계시되는 바는 무엇이든지 우리가 서로 말해 주기로 하자’고 하였다. 그날 밤, 사도들 가운데 한 사람인 안드레에게 계시가 나타나기를 그들이 모두 수정을 하기는 하였으나, 요한이 그 모든 것을 그 자신의 이름으로 서술할 것이라고 하였다.”
비록 이 이야기가 요한이 복음서를 기록한 시기에 안드레와 다른 제자들이 그와 함께 있었다는 것과 같은 환상적인 점들을 가지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하더라도 그것은 요한이 복음서를 저술함에 있어서 다른 사람의 협조를 받았을 것임을 암시하는 핵심적인 진실을 여전히 지니고 있습니다.
이것이 그러했을 것이라는 사실은 10세기의 한 사본에 보존된, 파피아스의 기록으로 생각되는 다음과 같은 진술에 의하여서도 암시되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 복음서는 분명히 계시록 다음에 기록되었으며, 요한에 의하여 아시아에 있는 교회들에게 주어졌는데, 요한의 사랑받는 제자요, 요한과 함께 그가 부르는 것을 받아서 이 복음서를 기록한 파피아스라는 이름의 히에라폴리스의 감독이 그의 ‘엑소테리카’(Exoterica) 즉 마지막 다섯권의 책에다 자세히 기록할 때까지 요한은 아직도 생존해 있었다.”
이 이야기의 세부적인 내용들이 모두 입증된 사실로 간주될 수는 없다 하더라도, 이 두가지 진술은 요한이 그의 복음서를 다른 사람들의 협조를 얻어서 저술했다는 생각이 2세기에 유포되어 있었음을 강하게 암시합니다.
이와같은 매우 초기의 전통에 비춰볼 때의 복음서의 맨 끝부분에 기록된 “이 일을 증거하고 이 일을 기록한 제자가 이 사람이라 우리는 그의 증거가 참인 줄 아노라”(요 21:24)라는 진술은 요한의 이야기가 진실함을 보증하는 그의 조력자들의 선서구술서(宣誓口述書)와 같은 것으로 보입니다.
만약 이러한 증거의 재구성이 올바른 것이라면, 아마도 요한이 밧모 섬에서 혼자 있을 때에 기록된 계시록과 에베소에서 한 사람 또는 그 이상의 동료 신자들의 도움을 입어 기록된 복음서 사이에 존재하는 언어적 및 문학적 차이점들을 설명하기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전술한 증거에다 추가할 수 있는 것은, 계시록과 요한복음 사이에는 그 저자가 동일인임을 암시하는 현저한 문학적 귀절들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은 것입니다.
계시록은 “생명수”(계 21:6; 22:17)에 대하여 말하고, 복음서는 “생수”(요 4:10; 7:38)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계시록은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계 22:17)라고 초청하고, 복음서는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요 7:37)라고 선언합니다.
“옵시스”(Opsis-외모, 얼굴)라는 단어는 신약에서 오직 요한의 기록 가운데서만 사용되었습니다(요 7:24; 11:44; 계 1:16).
“테레인 톤 로곤”(terein ton logon-내 말을 지키다)이란 표현(요 8:51, 52, 55; 14:23, 24; 15:20; 17:6; 요일 2:5; 계 3:8, 10; 22:7, 9)과 “오노마 아우토”(onoma auto-그의 이름, 그에게 이름)라는 표현(요 1:6; 3:1; 계 6:8)도 마찬가지입니다.
구약의 상징에 대하여 직접적으로 지칭한 곳을 제외하고는 오직 요한복음과 계시록에서만 그리스도가 어린양으로 특징지워져 있습니다(요 1:29, 36; 계 5:6 외 28번).
중요한 것은 요한계시록의 기자가 요한이라고 하는 사람인 것은 분명합니다.
그리고 소아시아 일곱 교회를 잘 알고 있던 사람입니다.
소아시아 일곱 교회를 순회하던 목회자였을 것입니다.
기독교회에서 전통적으로 요한은 요한복음, 요한1,2,3서 서신, 그리고 요한 계시록의 저자로 인정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현대성서 학자들은 요한 사도가 이 네 번째 복음서인 요한복음과 요한 서신과 요한계시록을 모두 작성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일부 학자들은 신약 성경에 등장하는 예수님의 12제자중의 한 사람으로서 요한사도와, 요한복음과 요한 서신을 기록한 복음전도사 요한, 그리고 파티모 섬에서 계시를 받아 요한 계시록을 기록한 파티모 요한이 각각 다른 세 명의 개인이라고 추정하기도 합니다.
즉 열두 제자인 요한사도는 다른 제자들과 마찬가지로 순교했다고 여기고 있고, 요한사도의 가까운 제자였으며 요한이라는 동일한 이름을 가진 다른 인물인 복음 전도사 요한이 요한복음과 요한 서신을 작성했다고 믿고 있고, 요한 계시록은 이들과 다른 또 다른 요한이 파티모 섬에서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 쓴 것이라고 추정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들 현대 성서학자들은 요한복음과 요한 서신과 요한 계시록은 모두 요한사도와 직접적인 관계를 가졌던 그의 제자 공동체에서 만들어진 저작들이라는데 사실에는 동의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초대 교부들은 요한 사도를 요한복음과 요한서신들 그리고 요한 계시록의 저자로서 동일한 개인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의 저자는 자신이 요한 1서의 저자임을 여러 번 적시하고 있지만, 요한 2서, 3서에 대해서 드물게 적시하고 있다고 합니다.
4세기에 로마 카톨릭 공의회는 요한 1서와 요한 2서 3서의 저자는 각각 다르다고 공포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현대 성서학자들의 다른 견해에도 불구하고, 개신교회, 로마 카톨릭 교회, 그리스 정교회는 요한복음과 요한 서신 그리고 요한계시록의 저자가 모두 한 사람의 사도 요한이라고 여기고 있으며, 앞서 각기 다른 세 명의 개인으로 그려진 요한을 세 명이 아닌 동일한 한 개인이었던 사도 요한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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