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반드시 속히 일어날 일들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의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알게 하신 것이라
요한계시록은 본래 책 제목이 없었습니다.
다른 성경도 마찬가지만 책 제목이 후대에 붙여진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이란 요한이 쓴 계시록이 뜻입니다.
요한계시록이라고 붙인 이유가 1장 1절에 나와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은 본래 헬라어로 기록되었습니다.
왜 헬라어로 기록했을까요?
아마도 기독교가 유대교와 갈라선 다음에 대부분의 신약서가 기록되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는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들을 대상으로 선교방향을 결정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당시 세계는 로마가 지배하고 있었지만 문화는 헬라 곧 그리스가 지배를 하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라틴어가 아닌 그리스어를 쓰고 있었습니다.
라틴어가 그리스어를 이기는 것은 후대의 일입니다.
그런 이유로 인해 헬라어로 성경을 기록했을 것입니다.
물론 그들이 기록할 때 성경을 기록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계시록이란 말의 주석적 의미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주로 그랜드종합주석을 따랐습니다.
계시는 헬라어 아포칼륍시스를 번역한 말입니다.
아포칼륍시스는 하나님의 구원 섭리를 드러냄이란 조직신학적인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계시(啓示)는 어원적(語源的)으로는 '나타남' 또는 '드러남' 을 뜻하며 인간이 스스로 계시를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신에 의해서 수동적으로 신적지식을 받는 것을 말합니다.
이성을 수단으로 탐구에 의해 아는 것이 아니라 수동적으로 알려지는 것을 말합니다.
일반적으로는 우리들의 자연적인 경험이나 인식에는 없는 종교적 진리가 신 스스로 열어 보임으로써 인간에게 전달되는 것을 말합니다.
본래의 의미로는 계시란 신이 자기를 인간에게 직접 인식시키는 일인데, 창조나 섭리 등의 객관적 수단으로 간접적으로 그 본성이 나타나는 경우는 이를 자연 계시라고 합니다.
그러나 자연계시는 죄의 오염으로 이해의 한계를 갖습니다.
그래서 항상 특별계시를 필요로 합니다.
자연계시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뜻입니다.
죄로 오염된 사람들이 하나님을 알려면 특별계시가 필요합니다.
계시는 사전적 의미로는 신(神)과 같은 초월적 존재로부터 사람의 지혜로서는 알 수 없는 사실이나 진리를 전달받는 것을 총칭하지만 하나님이나 신(神)이 인간에게 자신을 드러내는 직, 간접적인 모든 것을 나타내는 말로 널리 쓰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계시 양식에 근거하여 자연적인가 아니면 초자연적인가에 따라 분류합니다.
계시의 성격과 대상과 관련하여 구분하는데 일반계시와 특별계시가 있습니다.
자연계시와 초자연계시
자연계시란 인간의 구조와 자연 현상을 통하여 하나님의 임재가 전달된 계시입니다.
초자연계시란 하나님께서 자연의 현상을 넘어 하나님의 특별한 목적을 보여주기 위해 초자연적인 방법을 사용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초자연적 간섭의 계시로 꿈이나 구전과 같은 자연적 방법을 사용함에 있어서도 초자연적 성격을 가집니다.
그것은 말씀과 사실의 계시인데 여기서 말씀은 사실을 해명하고 사실은 말씀을 예증해 줍니다.
일반 계시와 특별 계시
신학적으로는 성경 내용을 기준하여, 한정된 조건에서 특정한 내용이 담긴 개별적 계시와 널리 선포될 내용이 담긴 보편적 계시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계시의 형태와 특징을 기준할 때는 일반적 계시와 특별 계시로 분류하고 있습니다.
수많은 성경 구절에서 볼 수 있듯이 일반적 계시는 성경 로마서(1:20)의 선언처럼 자연과 같은 비언어적으로 모든 사람에게 드러내는 것을 말하며, 특별 계시는 창세기(15:4)를 비롯한 많은 구절에서 나타나고 있듯이 음성이나 기록물을 통하여 도덕적 영적인 요구에 적용되기 위해 하나님이 직접 혹은 대행자를 통하여 스스로를 드러내는 것을 말합니다.
성경과 신학에서 말하는 "계시"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나타내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본질적으로 유한한 인간이 다 파악할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는 불가해적이신 분이십니다.
유한한 인간의 이성으로는 하나님을 다 이해할 수 없고, 다 헤아릴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자신을 우리 유한한 인간에게 드러내시는 것, 그것이 바로 "계시"입니다.
"계시"에 대해서는 다양한 분류가 존재합니다.
로마 카톨릭 신학은 주로 초자연계시와 자연계시로 계시를 분류합니다.
하나님께서 초자연적으로 역사하셔서 자신을 드러내시기도 하고, 자연적인 방식으로(예: 사계절, 자연의 질서 등) 자신을 드러내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개혁주의 신학은 흔히 하나님의 계시를 다른 두 가지 방식으로 분류합니다.
그것이 바로 일반계시와 특별계시입니.
이러한 개혁신학의 계시 분류법은 "구원"과 관련하여 계시를 두 가지로 분류한 것입니다.
일반계시는 하나님께서 구원 받는 신자든 불신자든 상관없이 모든 사람에게 일반으로 주시는 계시입니다.
그래서 일반계시에는 (1)피조물과 자연, (2)하나님의 섭리, (3)역사 등이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만드신 모든 피조물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신다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 있는 만물의 질서, 만물의 보존, 만물을 유지하시는 등, 모든 존재하는 것들 가운데 섭리(攝理)하심으로 자신을 계시하십니다.
예를 들어, 사계절의 순환, 농작물의 결실 등을 통해서 하나님은 자신을 드러내십니다.
또한 세상의 역사에서도 하나님께서는 모든 역사의 주관자이십니다.
바벨론이나 로마라는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제국을 통해서 심판을 하시기도 하고 벌을 주기도 하십니다.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시편 19:1-2)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로마서 1:20)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마태복음 5:45)
그러나 이러한 일반계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계시된 일반계시로는 모든 사람이 하나님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죄가 그의 눈을 가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루이스 벌코프가 말하듯이, 그리스도인이 믿음의 눈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하나님의 일반계시를 바라보고 해석할 때에야 비로소 하나님이 자신을 드러내심을 발견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습니다.
여기서 "특별계시"의 필요성이 요청됩니다.
죄로 물든 인간들은 피조물과 섭리와 역사 속에서 나타나는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특별계시는 무엇입니까?
특별계시는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구원하시기로 택정하신 자들에게 주시는 계시, 즉 자신을 나타내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특별한 계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일반계시로는 오히려 왜곡되게 알 수밖에 없던 하나님을 바로 교정해주는 계시가 바로 특별계시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특별한 지식에는 대표적으로 "성경"이 있습니다.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디모데후서 3:15~17)
오직 성경만이 창조주이시자 구원자이신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우리에게 계시해줍니다.
특별히 하나님께서는 성경을 통하여 성경의 핵심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을 우리에게 깨닫게 하십니다.
구약과 신약을 관통하는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그분의 구속사역의 성취가 우리에게 하나님을 아는 참 지식을 갖게 하며, 일반계시도 바르게 볼 수 있게 해 줍니다.
그러므로 참으로 하나님을 알고 싶다면, 하나님의 특별계시인 "말씀" 곧 "성경"을 가까이 해야 합니다.
그리고 참으로 하나님을 바르게 알고 신앙하고 싶다면, 성경의 계시를 따라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행하신 일에 대하여 알아야 합니다.
그 전까지 그의 눈은 까막 눈에 불과하며, 더듬어 하나님을 찾으나, 방황하며 유리할 뿐입니다.
이는 사람으로 혹 하나님을 더듬어 찾아 발견하게 하려 하심이로되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계시지 아니하도다(사도행전 17:27)
계시에는 성서신학적인 용어인 묵시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묵시는 계시보다 작은 뜻의 용어입니다.
그 뜻은 현 세상의 종말과 새 천국의 도래 과정을 독특한 문학 형식을 통해 드러냄이란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요한계시록은 요한묵시록은 보아야 합니다.
여기서 묵시의 의미에 대해 좀 더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묵시란 일종의 계시문학입니다.
그것은 어떤 초현실적인 존재가 특정한 인간을 수령자로 하여 전하는 계시를 이야기 형식으로 기록하고 있는 글입니다.
묵시는 시간적, 공간적 차원의 초월적인 실체를 은근히 보도합니다.
즉, 묵시는 종말론적 구원을 애타게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시간적이고, 저 세상 또는 다른 초자연적인 세계를 희구하고 있다는 점에서 공간적인 차원을 지닌 초월적 실재에 대한 계시입니다.
유대 묵시문학에는 두 종류의 종말론이 있습니다.
하나는 종말에 이르는 시간을 축으로 전개되는 종말론이고, 다른 하나는 ‘초현세적인 세상’(supernatural world)을 축으로 전개되는 종말론입니다.
전자는 ‘때’라는 축(temporal)을 가르침의 기둥으로 삼습니다.
후자는 ‘공간’이라는 축(spatial axis)을 가르침의 근간으로 삼습니다.
묵시로 전수되는 ‘마지막 때의 구원’(eschatological salvation)이 전자의 가르침이라면, ‘다른 세상에로의 여행’(otherworldly journey), 즉 ‘하늘나라에 올라가는 여행’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여전히 창조의 질서 속에 운행되고 있음을 확인하는 이야기는 후자의 묵시입니다.
이때 첫째 유형을 ‘종말론적 묵시’ 또는 ‘역사적 묵시’라고 부른다면, 둘째 유형은 ‘하늘나라 견문기’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이 두 종류의 종말론은 엄밀히 말해서 유대 묵시문학의 세계에서 상호 보완되는 영역입니다.
묵시는 본래 성경에 없는 가르침이었습니다.
성경에는 순전히 여기 이 세상에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할 지를 가르칩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포로기 때에 바빌론으로 끌려갑니다.
바빌론은 페르시아에 의해 멸망합니다.
페르시아의 고레스(키루스 2세)는 유대인들에게 귀환 명령을 내립니다.
강제적인 명령은 아니었습니다.
돌아갈 사람은 돌아가라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포로지에 남았습니다.
당시에 페르시아의 종교는 조로아스터교입니다.
조로아스터교는 고대 이란의 종교로 조로아스터(Zoroaster, 기원전 660~기원전 583)를 시조로 삼는 고대 종교입니다.
아후라 마즈다(Ahura-Magda)를 최고신으로 숭배하기 때문에 마즈다교라고도 하고, 배화 의례가 있기 때문에 배화교라고도 합니다.
배화교는 중국에서 부르는 이름입니다.
5세기경 중국에 전해져 요교로 불리기도 했습니다.
시조인 조로아스터는 서부 이란, 지금의 아제르바이잔에서 출생하여, 30세 때 하늘의 계시를 받은 예언자로서 원시 이란 종교의 신 관념을 토대로 유목 민족에 대한 농목 민족의 투쟁을 반영한 인물이었습니다.
광명과 선의 신, 아후라 마즈다와 암흑과 악의 신, 앙그로마이뉴(Angro Mainyu)의 끊임없는 투쟁의 장이 이 세계라고 하는 이원론적인 우주관에 입각한 교의를 설파하였습니다.
동부 이란의 박트리아 왕의 보호 하에 이란에서 서아시아 각지까지 교세가 확장되어 고대 이란 제국의 국교가 되었습니다(기원전 5세기).
특히 사산 왕조 페르시아 시대(3~7세기)에는 교리도 체계화되어 성전 "아베스타(Avesta)" 가 완성되었습니다.
"아베스타" 에 의하면 선과 악의 두 원리가 대립, 투쟁하고 있는데 궁극적으로는 빛과 선의 신이 승리하며, 인간이 선의 신 편에 서서 싸운다면 최후의 심판에 따라 천국에 태어난다고 합니다.
천국에는 아후라 마즈다 아래 6개의 선령이 있고, 그 아래에 태양 · 달 · 별 등 다수의 선령이 있어, 이원론적이면서 아후라 마즈다를 최고신으로 하는 일신교적 성격과 함께 다신교적 성격도 지니고 있습니다.
특히 불은 아후라 마즈다의 아들로서 신성시되어, 악을 태워 깨끗이 하는 의례가 중시되었습니다.
인도의 베다교와 밀접한 관계가 있고, 유대교, 크리스트교와의 유사점도 지적되고 있습니다.
이 종교를 모태로 미트라교나 마니교가 생겨났는데, 조로아스터교 자체는 이란이 아랍의 무슬림들에 의해 정복됨에 따라 거의 멸망하였습니다.
지금은 인도에 파르시교도로 불리는 수만 명의 신도가 있을 뿐입니다.
이런 조로아스터교의 영향을 유대인들은 받았습니다.
묵시문학은 BC2세기에서 AD1세기에 유대인 사이에서 유행한 문학형식입니다.
BC2세기에 AD1세기는 아주 혼란한 시대였습니다.
로마가 세력을 펴서 지중해를 석권하던 때입니다.
어디에나 전쟁의 피비린내가 진동했습니다.
사람들은 마음 둘 곳을 찾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그 속에서 묵시 문학이 꽃을 피웠습니다.
사회가 혼란하면 사람들은 마음 둘 곳을 찾습니다.
그리고 묵시 문학에 빠져듭니다.
종말론에 심취합니다.
구약에서의 묵시문학은 다니엘서입니다.
기독교 신앙 공동체는 구약의 다니엘이 대변하는 유대 묵시사상을 신약의 요한계시록이 계승했다고 보았습니다.
다니엘의 묵시록에는 세상의 마지막에 관한, 곧 사악한 현실세계의 종언에 관한 증언이 치밀하게 수록되어 있습니다.
다니엘서에서 말하는 ‘그날’은 예언자들이 주장하는 이스라엘의 회복의 날이라기보다 온 나라, 온 세상, 모든 사람의 마지막에 대한 청사진입니다.
희망은 미래에 있습니다.
구원은 아래로부터가 아니라 위로부터 옵니다.
다니엘의 묵시록에는 이런 기대와 믿음이 서려 있습니다.
다니엘서는 그런 받침 위에서 역사의 과정이 어떻게 전개되었다가 어떻게 끝을 맺게 되었는지를, 그리고 그 끝에 이르는 때가 얼마나 남았는지를 수수께끼와도 같은 상징 언어로 내세웁니다.
유대인들은 성경을 분류할 때 다니엘서를 예언서가 아닌 성문서로 분류합니다.
다니엘서는 두 부분으로 나누어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1장부터 6장까지와 7장부터 나머지 부분입니다.
7장부터 나머지 부분이 묵시적 요소가 강하게 표출된 부분입니다.
말라기 선지자 이후 유대 땅에 사는 사람들은 많은 환난을 겪게 됩니다.
애굽과 수리아의 지배를 받으면서 그럴 때마다 저항하는 사람들이 끊임없이 일어났습니다.
이와 같이 행동으로 저항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문학으로 대처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의 기록은 대부분이 익명이나 가명으로 기록하였기 때문에 저자가 누구인지 잘 알 수 없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사해사본이 발견된 쿰란 공동체가 남긴 기록물들 가운데 묵시문학적인 기록물들이 많이 발견되었습니다.
쿰란 공동체가 남긴 문서들 가운데 요벨서에 대한 사본이 10개, 에녹서의 80%에 해당하는 사본의 단편들이 10개, 그리고 [레위와 납달리의 유언]등이 발견됨으로써 묵시 문학이 엣세네파와 관계가 있는 것으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묵시문학이란 말은 사실 쉬운 말이 아닙니다.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는 묵시문학이란 말이 바르게 쓰여지지 않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실제로 어떤 사람에게 계시를 보여 주셔서 이를 기록했다면 이러한 기록물을 단순히 묵시문학이라고 해서는 안됩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계시를 기록한 문서는 계시록처럼 성경이라 하여 거룩한 책으로 이미 구별되어야 합니다.
반면에 어떤 사람이 하나님께서로부터 계시를 받은 것처럼 기록하되, 오래 전에 실제로 있었던 위대한 인물이나 예언자의 이름으로 글을 써서 읽는 사람들에게 특수한 방법으로 이해시키려는 문학이 묵시문학입니다.
BC2세기에서 AD1세기까지 계속된 묵시문학은 위경과 외경이라는 이름으로 출판되었습니다.
신구약 정경 66권이 확정되기 전에는 이들 위경과 외경 중에서 몇 권의 책은 성경과 비슷한 비중으로 인용되었습니다.
외경과 위경이 비슷하지만 다릅니다.
외경(外經, Aposrypha) : 70인역(LXX)에 포함되어 있으면서 구약 히브리어 정경에 들어가지 못한 책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위경(僞經, pseudograph) : 70인역(L X X)에 포함되지도 않았고, 구약 히브리어 정경에 들어가지 못한 책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70인역을 편집한 학자들은 헬라화된 유대인들입니다.
정통 유대인들이라면 절대로 히브리어를 다른 언어로 번역할 생각을 꿈도 꾸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 시대부터 유대인들은 다중언어를 하며 살았습니다.
바빌론에 포로로 끌려간 유대인들은 포로지에서 히브리어와 바빌론어를 동시에 사용했습니다.
히브리어는 지방어이고 바빌론는 국제어였습니다.
바빌론에 이어 유대인들은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았습니다.
이제 유대인들은 페르시아를 배워야만 했습니다.
히브리어, 바빌론어, 페르시아어를 동시에 할 줄 아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히브리어를 모르면 히브리어 성경을 읽을 수가 없습니다.
당근 히브리어는 기본이었습니다.
거기에 그가 살고 있는 나라의 언어를 할 줄 알아야만 했습니다.
그래야 생존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70인역을 편찬한 번역자들은 헬라화된 유대인들이었습니다.
신약시대의 기록물들 가운데 신약 성경에 포함되지 않은 기록물들은 위경이라 하지 않고 다 ‘외경’이라고 부릅니다.
외경이나 위경을 기록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을 거룩한 사기꾼으로 생각하지 않고 실제로 고대 족장들의 전통에 서서 그 정신으로 글을 쓴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렇게 하여 그들은 자신들을 감추고 오히려 고대의 족장들을 나타내면서 몇 가지 목적을 가지고 기록하였습니다.
첫째, 고난과 환난에 처한 백성들을 위로하고 소망을 주어 인내하게 하려하는 뜻에서 이러한 글을 썼습니다.
둘째, 분파와 당파가 서로 비방하고 갈등하는 사이에서는 불신 풍조가 만연되어, 살아있는 사람들의 말은 권위가 없고 믿으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죽은 지 오래된 거룩한 사람들의 이름으로 기록하여 그 이름의 권위로 말함으로써 독자들에게 영향력을 끼치려 했습니다.
셋째, 기록자의 이름을 감추거나 고대 족장들의 이름을 사용함으로써 박해하는 사람들로부터 필화(筆禍)를 면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넷째, 유대인들로서 이스라엘 역사를 아는 사람들만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이었기 때문에 묵시문학이 이용되었습니다.
일반 예언자들과 묵시문학의 저자들 사이에는 약간씩 차이가 있습니다.
예언자들은 보통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가라사대”라고 시작하는 반면에 묵시문학의 저자들은 전사를 통하여 계시를 받은 것으로 기록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예언자들은 대개 현재의 잘못을 지적하고 회개를 촉구했지만 묵시문학의 저자들은 미래의 승리와 종말이 임박함을 강조하고 소망을 갖게 하는 글을 썼습니다.
이들은 때가 차면 기름 부음을 받은 다윗의 자손이 강림하게 될 것이며 악은 심판을 받고 의인들은 나라를 차지하게 될 것을 강조하였습니다.
일반 예언자들이 말하는 하나님의 나라, 혹은 여호와의 날은 대개 다윗의 자손 가운데서 다윗과 같은 메시야가 기름부음을 받을 것이며, 그 메시야로 말미암아 역사 가운데서 다윗의 왕국과 같은 나라가 구체화될 것으로 예언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묵시문학에서 보이는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이 친히 강림하시는 초역사적인 하나님의 나라를 강조하는 경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 예언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이런 두 가지 종말 사상이 나타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언자들이 말하는 종말론은 지상에 다윗왕국의 도래를 말하는 것처럼 보이고, 묵시문학의 종말론에서는 하늘에서 천상적인 인자가 임하여 악을 심판하게 되는, 그러한 나라의 도래를 고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묵시문학의 또 다른 특징은 인위적이고 모방적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점이 묵시문학의 가치를 평가 절하하게 되는 이유가 됩니다.
예언자들은 직접적이고 주관적이며 개인적인 확실한 체험을 간증하듯이 기록하고 있는데 비하여 묵시문학은 환상과 꿈 등이 문학 양식에 도입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환상에 관한 이야기는 실제로 환상을 본 것이 아니라 순전히 문학적인 작품입니다.
마치 단테가 신곡을 쓴 것과 같습니다.
묵시문학의 두드러진 특징 가운데 하나는 하나님의 심판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것입니다.
의인들의 구원보다는 악인들의 심판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많은 상징물들과 비유를 이용하여 이야기를 엮어 가고 있다는 점도 묵시문학의 특징 가운데 하나로 꼽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문학은 예루살렘 멸망과 함께 차차 줄어들었습니다.
결론을 맺도록 하겠습니다.
“묵시문학”(Apocalyptic)은 “신구약 중간기”에 나타난 것으로, 흔히 대환란 혹은 세상의 종말에 대한 표상을 담은 다양한 내용의 문서와 사고를 통틀어 일컫는 말입니다.
“묵시문학”이라는 말은 “계시”를 뜻하는 그리스어 “아포칼립시스”(apokalypsis, 계 1:1)라는 명사에서 나왔습니다.
‘감추어진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보인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러한 내용의 문서를 가리켜 “아포칼립스”(Apocalypse, "묵시록“ 혹은 ”계시록“)라 부릅니다.
이와는 달리 일반적으로 “아포칼립틱”(Apocalyptic/Apokalyptik, "묵시 문학“)이라는 용어가 있는데, 이는 후기 이스라엘과 원시 그리스도교 문헌의 정신적 배경을 나타낼 뿐 아니라, 인간과 세상의 미래에 대한 환상적인 종교 사유를 폭넓게 가리키는 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구약 성경에 들어있는 다니엘서를 비롯하여 에녹서와 바룩서, 제4에스라서와 같은 책이 묵시 문학에 속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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