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요한계시록

목적

기독항해자 2021. 1. 8. 20:52

저자가 글을 쓰려면 먼저 글을 쓰는 목적이 있을 것이다.

모든 글에는 다 목적이 있다.

목적이 없는 글은 논지를 잃게 되고 결국 잡문에 불과하게 된다.

우리가 요한계시록의 목적을 발견하려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요한계시록은 서신서다.

서신서지만 묵시문학에 속하기도 한다.

서신서라는 것은 독자가 특정되어 있다는 뜻이다.

소아시아 7 교회가 요한계시록의 수신자들이다.

보내는 이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요한은 대필자이다.

그렇다면 요한은 아무 생각이 없었을까?

불러주는 대로 적기만 했을까?

왕정시대에는 적기만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적기만 할 때, 적는 사람은 자기 견해가 들어가지 않도록 해야만 했다.

요한은 자기 생각을 죽이고, 불러주는 대로 적기만 하지 않았을까?

 

주님은 왜 요한계시록을 보내야만 하셨을까?

읽는 독자들을 골탕먹이려고 하신 것은 아닐 것이다.

보통 독자들은 요한계시록을 대하게 될 때 당혹감과 낭패감을 느끼게 된다.

사람들은 어렵다고 말한다.

어렵기 때문에 이 어려움을 풀어줄 누군가를 찾는다.

그런데 그가 찾은 사람이 진짠지 가짠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판단할 수 있는 근거가 무엇인가?

세상에는 요한계시록을 잘 푼다고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 좇아가면 다 망하게 된다.

요한계시록을 주신 분에게 묻는 게 가장 빠른 지름길이 아닐까?

그분이 가장 잘 아시는 분이 아니신가?

 

요한계시록은 고난 받는 성도들에게 위안과 소망을 주려는 목적에서 기록되었다고 말한다.

정말 그럴까?

위로가 목적이라면 고린도후서나 베드로전서가 더 탁월하지 않을까?

3절은 본서의 목적을 밝히고 있다.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

읽고 듣는 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읽고 들은 것을 지키는 데 목적이 있다.

지키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본다.

지킨다.

무엇을 지킨다는 말인가?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고 성경은 말한다.

오늘 순종하는 사람을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

순종에 대해서 말하는 사람은 많지만 순종하는 사람은 찾아보기가 어렵다.

설교하는 사람은 많지만 설교하는 대로 사는 사람은 찾아보기가 어렵다.

종종 인터넷을 방문해서 댓글을 들여다보면 익명성의 그늘 아래서 적개심이 가득한 목소리를 토해내는 것을 들을 수가 있다.

자기 견해가 옳다고 주장하면서 상대방의 견해를 무시하는 것을 보게 된다.

 

1. 지키라고 주신 말씀 “계시록”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요한계시록1장 3절)

 

요한계시록은 그리스도 예수에 관한 예언이라고 그 서두를 시작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이 복이며, 복을 주기 위한 말씀이 요한계시록이라는 말씀이다.

그러나 요한계시록에서 이렇게 이렇게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신 곳이 있는가?

없다 모두 땅이 망하고, 사람이 죽고, 우주가 말려 사라지며,  물이 변하는 등 반복적으로 일어나는 우주의 변화를 설명하는 말씀의 전부가 사람의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내용들이다.

그러나 계시록 22장  6-7절에도

“또 그가 내게 말하기를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된지라 주 곧 선지자들의 영의 하나님이 그의 종들에게 결코 속히 될 일을 보이시려고 그의 천사를 보내셨도다.

보라 내개 속히  오리니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가 복이 있으리라 하더라”

라고 말씀하므로 요한 계시록 전체의 예언의 말씀을 이해한다면

지켜 행해야 하는 말씀으로 이해하고 계시록의 말씀들을 말세에 일어날 현상이 아닌 내가 지켜 행하야 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찾아 궁구하고 하나님께 기도해야 하며, 앞으로 설명되는 마음세상 안에서 일어나는 내중심적인 믿음과 성품의 종말로 풀어가는 계시록을 믿고 이해 해야 한다.

 

지금까지 요한계시록은 지구의 끝날에 일어난 징조라고 말하면서 하나님을 두려워하라고 말해 왔다.

그러나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문맥으로 풀지 않고 자신의 임의로 풀어놓고 사람들을 현혹시킨 결과로 결국은 자신의 지식이나 그 어떤 것을 드러내려는 욕심이 그 믿음이나 열심을 앞선 결과이기도 할 것이다.

 

2. 하나님의 의를 사모하는 자에게 열려있는 말씀

 

“또 말하되 이 책의 말씀을 인봉하지 말라 때가 가까우니라 불의를 하는 자는 그대로 불의를 하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럽고 의로운 자는 그대로 의를 행하고 거룩한 자는 그대로 거룩되게 하라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 대로 갚아주리라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 끝이라 그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이는 저희가 생명나무에 들어가며 문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얻으려 함이로다 개들과 우상숭배하는 자들과 및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마다 성 밖에 있으리라"

 

10-15절까지의 이 말씀을 보면,

사도 요한에게 주신 계시록의 말씀들은 사도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그리고 이 지구가 존재하는 그 날까지 쭉 개봉 된 말씀으로 누구든지 의로움을 찾을 수 있었으나 현대까지 이 말씀이 드러나지 않았던 것은 결국 인간중심적인 열심은 있었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고자 하는 소원은 있었으나 사람이 보는 현상과 하나님이 보시는 마음의 차이를 극복하지 못한 관계로 눈에 보이는 현상 속에서 하나님의 뜻과 말씀을 맞추어 풀고 믿고 행했기 때문이다.

이 말씀의 특징은   불의한 자와 더러운 자를 하나로 하여 15절 말씀으로, 의를 행하는 거룩한 자는 14절로 그 모습을 정의하여 놓으셨고 또 하나는 14절로 정하신 신앙인은 성 안으로 15절로 정하신 신앙인은 성 밖에 살아야 할 신앙인으로 정해 놓은 사실을 주지해야 한다.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 끝이라는 말씀은 천지의 시작과 끝을 정하신 하나님께서 신앙의 시작과 그 끝도 정하셨는데 그 예정함 안에서 하나님의 뜻은 반드시 이루어져 하나님이 정하신대로 반드시 시행하신다는 굳은 결단을 지금 우리에게 전달하시는 말씀입니다.

 

두루마기를 빤다는 것은 의를 위해 하나님이 주시는 천국의 물에 자신을 빨아낸다는 의미로,  하나님이 겉 사람이 입는 옷을 빨라는 것도 아니며 겉사람의 행위를 거룩하게 하라는 것도 아니라, 사람의 성품을 담고 있는 마음의 옷으로 마음속에 있는 것들이 드러나는 성품을 발견하며 하나님의 성품이 있지않고 자기의 욕심을 바탕으로 하는 성품이 드러나는 것을 발견하고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물에 빨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성경은 모두 지구 안에서 일어난 역사다.

그러나 이미 창조의 역사 안에서 사람의 영이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해가며 그 끝에 하나님을 대신하여 제사장으로서 일하는 안식의 주인의 모습까지 밝혀진 상태에서 성경 전체를 지구 안에서 일어난 신앙의 역사라고만 우길 수는 없다.

그러므로 이 말씀들은 이 비밀, 비유, 비사, 수수께끼라고 하신 성경전체가 사람의 마음에 있는 프쉬케인 네페쉬의 상태로 사람의 마음에 있는 영이 프뉴마로서의 루아흐의 영적 상태로 변해가는 과정을 기록하되 감추어두시고 마음을 하나님의 성품으로 변화받기위해 그리스도 예수의 길을 영의 문제로 인식하고 따라가기 위해 몸부림을 치는 자들에게만 공개하기위해 숨겨놓으신  영적인 문제로 인식하고 믿어 따라가야 한다.

 

그래도 육신의 현상이 중요하다고 할 것인가???

하나님의 입에서 하나님의 분신으로 사람의 마음에 존재하는 영과, 그 영을 담고 제대로 키우기 위한 껍데기로 사용하기위해 흙에서 지음받아 부모의 정자와 난자로 유전되는 육체 이 두형태에서 자아의 참 모습이 어떤 것인가???

천국에서 살아가는 것은 어떤 것이고 흙으로 돌아가는 것은 어떤 것인가?? 를 구분하면 이해 될 것이다.

어느분이 성경해석의 방법에서 영해만 하면 안된다고 했다.

영해를 하지않고 영이 살아나는 길을 제시 할 수 있는가?

행동에 관한 율법의 말씀을 우리에게 주시고 그 육체의 행위가 올바르려면 육체의 행위를 올바르게 하려고 애쓰지 말고 그 행위의 말씀을 마음에 맞추고 마음이 먼저 하나님의 성품으로 고쳐지면 행위는 저절로 되어지는 것이라고 말씀하시기 위해 복음을 받아드리면 율법이 완성되는 것이라고 하신 것이다.

계시록은 사람의 마음세상에서 일어나는 또 다른 현상이다.

 

 

요한계시록을 알기 위해서는 해석자의 목적을 알아야 한다 

종교개혁 시대에 발생한 급진적 분파인 재세례파 운동(再洗禮派, anabaptism)은 성경본문을 문자대로 준수하는 것을 주장하며 무폭력 평화 운동을 전개했다
그러나 재세례파에는 무폭력성향(Mennonites)과 폭력주의가 공존했다
토마스 뮌쳐(Thomas Munzer, 1490?-1525)는 폭력으로 이상공동체를 건설하려고 농민전쟁을 일으켰다
재세례파 운동은 평화를 구현하는 것이 목표였지만방법은 무저항과 폭력’ 으로 전혀 달랐다
재세례파에서 요한계시록 해석을 주도했고공통적으로 천년왕국을 주장했다
재세례파가 주창한 천년왕국 이해는 요한계시록을 연구하는 기폭제가 되었다
재세례파가 주장한 천년왕국은 지상에 천년동안의 왕국이 형성된다는 개념이다
전천년기는 재림예수가 통치자이고후천년기에서는 교회가 통치권을 행사한다는 개념이다
무천년기는 고대로부터 그리스도의 통치는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영원하다고 고백하고 있다(cuius regni non erit finis, 시 14513). 

 

요한계시록 연구자들은 칼빈이 요한계시록을 주석하지 않았다혹은 못했다고하면서 요한계시록 연구 필요성을 더욱 부각시키고 있다
칼빈 가장 먼저 주석한 책은 로마서이고가장 많이 설교한 부분은 시편이다
칼빈 당시에 로마 교황주의를 극복한 교리 확립이 우선했기 때문에재세례파들이 주장하는 요한계시록 부분까지 가지 못한 것이다
재세례파들도 요한계시록 주해로 자기주장을 제시하지는 않았다. 

 

외국에서 가장 많은 성경연구주석은 로마서인데한국에서 가장 많이 출판된 성경 연구 분야는 요한계시록이다
한국 교회에 요한계시록 연구자들이 많은 것은 요한계시록에 의해서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서양은 종교개혁의 방법을 따라서 로마서 해석에 집중했다
최근 외국 연구자들도 요한계시록에 대한 주석을 쏟아내고 있다
그것은 세계 교회에 종말 이해에 대해서 긴박한 필요가 요청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많은 연구서가 오히려 피해가 될 확률이 있다고 제시하고 있다
우리의 연구는 교회와 그리스도인에게 유익을 목표로 하고 있다
해석자가 해석의 목표를 밝히는 것을 요구한다
해석자의 목표가 해석자의 해석에 나타나야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바른 해석은 없다
해석자가 자기 목표에 부합하는 해석을 하는 것이 해석자에게 바른 해석이다. 

 

기독교 이단들 중에서 요한계시록을 근거로 한 경우가 많다
거의 대부분 문자적 해석을 근거로 한다
이런 경향은 재세례파 유형을 반복한 것이다
천년왕국을 주장하는 동일한 유형이다. 

 

신약성경은 27권을 정경으로 결정했다(A.D 397년 카르타고 공회의).
27
권은 아타나시우스가 제시한 정경목록이 가장 최초이다(A.D. 376년경). 
카르타고 공회의에서는 순서만 조금 바꾸어 채택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아타나시우스가 제시한 범위는 일치하지만목록에 차이가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아타나시우스와 카르타고에서 결정한 것에서 차이는 아타나시우스의 정경목록에는 바울서신이 14(히브리서)이고 로마서 앞에 있는 것이고카르타고에서 결정한 것은 히브리서를 바울서신 뒤공동서신 앞에 위치시킨 것이다.

 

신약성경은 2세기 중엽에 발생한 말시온(Marcionism)이 자체로 정경목록을 결정했는데(Marcionite Canon-누가복음과 바울서신 10), 교회가 받을 수 없었고영향력이 증가하자 바른 목록을 발표할 수 밖에 없었다
신약 정경 목록을 채택할 때 마지막까지 논쟁했던 성경이 요한계시록이라고 한다
고대 교회 교부들은 요한계시록에서 왜 갈등했고 왜 채택했을까?
세기 믿음의 교부들은 요한계시록이 갖고 있는 모호성에서 파급될 위험을 인지했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 위험성을 감수하고 간직해야 할 가치가 무엇이었을까?를 생각하고그 가치를 세우는 것이 요한계시록을 보는 독자에게 준 최고의 선물이 될 것이다
필자는 요한계시록이 가진 위험성을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상징 어휘에 있고포기할 수 없는 가치를 어린양께서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 명확한 것으로 제시한다. 

어떤 요한계시록 강좌에서 참석자가 강연하는 교수에게 질문했다
요한계시록을 전공한 교수는 요한계시록 기록 당시에 저자와 독자가 충분히 인지해야 할 수 있는 의미였다고 강의했다
참석자 중 한 사람이 요한계시록을 정확하게 이해한 내용이 존재하는가?에 대해서 질문했다
교수는 어디에도 요한계시록을 정확하게 이해한 기록이 없다고 제시했다
즉 현재는 요한계시록 본문을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교수는 당시 저자와 독자가 충분히 인지했었을 것이라고 거의 확증했다
필자는 당돌하게 요한계시록 기록 당시에도 독자들은 계시록의 의미를 잘 파악하지 못했다고 제언한다
그렇기 때문에 정경화에서 빠르게 결정하지 못했다
그런데 왜 결정했을까교회에 유익하다고 평가했기 때문이다. 

 

요한계시록 기록언어(헬라어)는 고전어로 사어(死語)이다
우리나라도 고려 시대나 조선 전기(前期)의 음가(音價)를 알지 못한다
삼국시대 음가는 더더욱 상상할 수 없다
그런데 사어인 헬라어 전문가가 있다는 것은 아이러니하다
가설은 인정할 수 있지만 확정은 불가능하다
고전어 의미를 확정한 선생은 독단의 마왕이다
고전어 사전은 18세기에 형성된 가치이다
사전의 권위는 계시 권위와 비교할 수 없다
사전적 의미가 계시를 주도하거나 판단할 수 없다
사전어학으로 요한계시록을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만약 이해했다면 믿음의 사역자는 반드시 기록해서 보존시켰을 것이다
그렇다면 요한계시록을 이해하는 방법은 딱 하나이다
독자가 자기관점을 갖고서 요한계시록을 스스로 정립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요한계시록을 보는 관점(판단기준)을 명확하게 제시하는 것을 훈련하고 있다. 

 

요한계시록에 대한 관점이 없는 연구자는 요한계시록을 해석할 수 없다
관점이 확인되지 않는 연구자의 글은 전혀 소득이 없을 것이다
수 많은 글에서 유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마치 백사장에서 바늘을 찾는 희열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성경해석은 바른 의미를 찾는 것보다교회를 위한 해석을 추구해야 한다
필자는 왜 공회의에서 요한계시록이 채택될 때에 갈등했을까?에서 착안했다
갈등했다는 것은 일치된 의미를 찾지 못한 것이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교부들이 요한계시록에서 교회와 그리스도인에게 확증된 유익을 부정하지 못한 것이다
그 유익이 어린양께서 받으신 영광으로 생각했다
어떤 글에서도 왜 요한계시록을 채택했는지 읽어보지 않았다
그러나 교회 공회의에서 결정한 것은 한 믿음구원 얻음을 위한 자기부정 그리고 믿음의 대상을 명료하게 하기 위한 결정이었다
요한계시록은 믿음의 대상이 가장 선명하게 드러나는 성경이다. 

 

교부들이 확증한 내용은 아래와 같다고 생각한다
첫째 요한계시록에는 보좌와 어린양의 영광이다.
어린양’ 예수는 세상죄를 지시고 가신다(요한복음). 
그리고 부활 승천해서 하늘 보좌에서 만유를 통치하시며 기도를 받으시며 영광을 받으시는 천상(天上)이 요한계시록에서 명확하게 등장하는 것이다
둘째 교회와 그리스도인이 고난 속에서 결코 물러서지 않고 정진하며 승리하는 모습을 계시한다
셋째 음녀의 위력을 보여주지만하늘에서 쫓겨난 존재이고 영벌에 처할 존재이다
그러나 성도는 음녀에게 박해를 받지만 인내로서 영생에 이른다(마 10:28). 
그래서 이 원리에 부합되도록 요한계시록을 주해하고 이해하려고 한다
요한계시록은 전체 이해를 일목요연하게 세우면 그것을 근거로 전개하는 방식을 분별할 수 있다. 

 

예수께서 십자가 밑에서 요한에게 어머니를 위탁했고요한은 마리아를 모시고 에베소(터키 셀죽,Selcuk)에서 사역했다
에베소에는 마리아기념예배당’(431년 에베소 공회의가 개최되었던)과 사도 요한 기념 교회당’ 유적이 있다
사도 바울과 요한이 사역할 때 에베소는 소아시아의 중심 도시였다
황제 숭배여신숭배(아데미)까지 성행했다
사도 바울의 사역으로 신상을 만들어 팔던 사람들이 존폐에 위협을 받기도 했다(19:13-20). 

사도 요한은 에베소에서 사역하다가 밧모 섬에 유배되었다
밧모 섬에서 계시를 받았지만기록은 에베소로 돌아와서 했을 것이다. 
밧모 섬(Patmos)은 로마 영토였고현재 그리스 땅인데 터키(쿠사다시)에서 훨씬 가깝다
밧모에는 요한이 거주했을 것으로 추측되는 동굴이 있다
사도 요한이 도미티안 황제 때에 유배되었다가, 18개월을 지내고 에베소로 귀환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96). 

 

우리는 왜 요한계시록을 상고해야 하는가? 
칼빈은 왜 요한계시록을 주석하지 않을까
칼빈은 요한계시록 외에도 주석하지 않은 여러 성경이 있다
구약성경 사사기와 잠언은 칼빈 주석에 없다
칼빈 주석에 성경주석이 없는 이유는 칼빈이 죽었기 때문이다
살아있었다면 주석을 진행했을 것이다
저술능력이 있다면 끝까지 전개했을 것이다
칼빈은 시편에 대한 주석과 설교가 많은데칼빈이 시편을 더 사랑해서 주석했다기보다당시 시편을 알레고리로 왜곡해석한 부분이 상당히 많기 때문에 시대적 반응으로 시편 주석과 설교를 많이 했다고 이해하는 것이 좋겠다
우리시대에 요한계시록으로 진리를 왜곡하는 일이 많기 때문에시대의 그리스도인으로 요한계시록을 더 엄밀하게 탐구하여 바른 진리의 길을 제시해야 한다
많은 연구자들의 저술이 혼란을 더욱 증가시키는 것은 연구자들이 최선을 다해서 연구할 뿐명료한 자기 전제를 밝히지 않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사도 요한이 요한계시록을 기록한 목적은 종말의 공포를 주어 교화시키는 목적이나성도를 혼란하게 것은 절대 아니다
요한계시록은 고난 받은 성도에게 위로을 제공하려는 목적은 다분하다. 
그 고난의 현장에 사도 요한이 가장 앞에 서 있었다
교회 지도자는 고난의 삶에서 성도의 본이 되어야 한다
그 모습을 보고 그리스도인들이 그 고난의 길에 동참하려는 목회자 후보생이 속출해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요한계시록에 위로를 목적으로 보지 않고 있다. 

 

요한 사도가 제시한 다양한 어휘들은 1세기 당시 성도들에게 이해가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해 내용을 남겨두지 않았다
그것은 너무나 명료했기 때문에 그랬거나혼잡이 증가할 것이기 때문에 그랬을 것이다
필자는 전자를 제언하고 있다
그들은 고난과 위협 상황에서 굳은 믿음으로 예수를 믿으며 기뻐하며 전도했기 때문이다
세상의 일자기안녕자기이해를 추구하는 사람에게 요한계시록은 도저히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으로 주의 음성을 사모하는 백성들은 감미로운 주의 섭리를 느낄 것이다
칼빈은 악인의 기도를 응답하는 아버지의 자비에 대해서 기독교강요』 3권 20기도 부분에서 제시한다
형통한 악인의 모습을 보는 거룩한 백성은 언제나 낙담과 의심을 제기하기 때문이다
신정론(神正論, theodicy)은 21세기에도 해소되지 않고 있지만그리스도를 믿는 자녀에게 의미 없는 노력에 불과하다.
1
세기 그리스도인들도 애매한 고난에 빠졌지만 자기가 처한 고난의 상황에 대해서 불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주의 백성은 백성이 될 때 지상명령을 부여 받는다.
주의 백성을 자기를 부르신 보좌에 앉으신 어린양과 보좌에서 통치하시는 어린양의 말씀에 순종할 수 밖에 없다
어린양께서 세상을 타락시킨 음녀들을 심판하시겠지만그 안에서 자기 백성이 이겨 복음을 전하는 것을 원하신다
사도 바울은 현재 심판을 강조했지만사도 요한은 최종 심판을 명확하게 제시했다
주의 자녀가 심판받고 있는 악인을 부러워하는 것은 주()를 능욕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주의 백성에게 신정론은 의미가 없다
주님은 자기 자녀의 신음소리에 응답하시며 동행하신다
그리고 속히 오시겠노라고 말씀하셨고주의 자녀는 주님의 오심을 기다린다(계 22:20). 

 

고경태 목사(형람서원, 주님의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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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1장 / 요한계시록이 어려운 이유 / 요한계시록이 쓰여진 목적

1.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The revelation of Jesus Christ.(요한계시록 1:1a)

이 말씀이 중요합니다.

요한계시록 1:1의 말씀을 우리가 두 가지의 관점으로 볼 수 있는데 하나는 소유격입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의 계시다’라는 뜻으로 예수님이 주시는 계시의 말씀이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고, 다른 하나는 목적격입니다.

곧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말씀이다.’라는 뜻입니다.

물론 성경 전체가 예수님에 대한 계시입니다.

하지만 이 요한계시록의 말씀은 아주 특별한 계시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복음서에 기록된 대로 이 땅에 오셔서 3년 동안 사역을 하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고 승천하셨습니다.

그 후에 이 땅에 교회가 생겨났는데 우리가 다 아는 대로 그때부터 주님께서 만왕의 왕, 만유의 주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시는데, 그 주님께서 특별히 교회에 주신 말씀이 바로 이 요한계시록입니다.

2. 요한계시록 1:2을 보면 계시록의 내용이 나타나 있습니다.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과”(요한계시록 1:2a) 

그 내용의 핵심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삼등분이 되어서 나타났습니다.

제일 먼저는 구약성경으로 나타났고, 두번째는 신약성경으로 나타났는데, 이 요한계시록은 아주 특별한 말씀입니다.

요한계시록 10장에 보면 이 <작은 책>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 작은 책이라는 의미는 내용이 별 볼일 없다는 뜻이 아니라 내용이 함축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3. 하나님의 말씀은 먼저는 희미하게 나타났습니다.

이것이 구약인데 그림자같이 나타났습니다.

이 구약의 그림자의 실체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래서 신약은 복음의 실체입니다.

구약의 그림자가 신약에서 실체로 나타난 것입니다.

그래서 구약은 복음의 그림자요, 신약은 복음의 실체입니다.

이제 요한계시록에 가면 그림자와 실체의 모든 진리가 함축이 되어서, 이 십자가의 내용, 그 구원의 내용이, 주님이 이루어 놓으신 내용과 교회에 대한 모든 진리가 함축되어서 액기스로 우리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요한계시록은 말씀 중에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것을 거꾸로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요한계시록을 알면 신약성경이 열리게 되어 있고, 신약성경을 알면 구약성경이 열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계시는 상통합니다.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맥이 뚫려 있고, 계시록부터 창세기까지 또 맥이 뚫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 안에는 길이 있고, 흐름이 있고, 맥이 있습니다. 이

세가지를 우리가 말씀을 먹고 걷는 가운데 발견해야 합니다.

4. 요한계시록의 목적이 무엇인가?
첫 번째는 소망을 주기 위함입니다. 

왜 소망인가?

그것은 조금만 더 참으라는 말씀입니다.

Just hang on! Keep your faith! 힘들어도 믿음을 지키고 조금만 참아라!라는 메시지입니다.

요한계시록을 가지고 겁을 주는 것은 잘못된 해석이고 잘못된 적용입니다.

두 번째는 성도의 Identity(정체성)를 확인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에 대한 정체성인가?

우리가 전쟁을 하면 적군과 아군이 분명히 구분이 됩니다.

그러므로 박해 가운데서 성도는 진정한 정체성이 확인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는 모두가 ‘하나님의 성도, 하나님의 자녀입니다’라는 정체성입니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을 통해서 우리는 나의 신분과 정체성을 발견하고 확인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살아가지만 세상에 속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로마제국의 황제의 그림이 그려져 있는 동전을 사용해야지 먹고 살 수 있는 나라와 문화 속에 살면서 이러한 엄청난 문화적인 충돌과 격동을 거치면서 문제가 생긴 것이 바로 성도들의 정체성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믿지만 네로의 얼굴이 새겨진 돈을 사용하면서 마음에 가책을 가졌고 정체성의 혼란을 일으킨 것입니다.

바로 그러한 가운데 요한은 요한계시록의 말씀을 통해서 성도의 정체성을 확인해 주십니다. 

너희는 성도요,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을 이기는 힘은 우리의 결심이 아니라 우리의 정체성입니다. 

이것이 매우 중요한 것인데, 우리가 주님을 영접하면 제일 먼저 하나님께서 고쳐주시는 것이 바로 나의 정체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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