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가 글을 쓰려면 먼저 글을 쓰는 목적이 있을 것이다.
모든 글에는 다 목적이 있다.
목적이 없는 글은 논지를 잃게 되고 결국 잡문에 불과하게 된다.
우리가 요한계시록의 목적을 발견하려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요한계시록은 서신서다.
서신서지만 묵시문학에 속하기도 한다.
서신서라는 것은 독자가 특정되어 있다는 뜻이다.
소아시아 7 교회가 요한계시록의 수신자들이다.
보내는 이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요한은 대필자이다.
그렇다면 요한은 아무 생각이 없었을까?
불러주는 대로 적기만 했을까?
왕정시대에는 적기만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적기만 할 때, 적는 사람은 자기 견해가 들어가지 않도록 해야만 했다.
요한은 자기 생각을 죽이고, 불러주는 대로 적기만 하지 않았을까?
주님은 왜 요한계시록을 보내야만 하셨을까?
읽는 독자들을 골탕먹이려고 하신 것은 아닐 것이다.
보통 독자들은 요한계시록을 대하게 될 때 당혹감과 낭패감을 느끼게 된다.
사람들은 어렵다고 말한다.
어렵기 때문에 이 어려움을 풀어줄 누군가를 찾는다.
그런데 그가 찾은 사람이 진짠지 가짠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판단할 수 있는 근거가 무엇인가?
세상에는 요한계시록을 잘 푼다고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 좇아가면 다 망하게 된다.
요한계시록을 주신 분에게 묻는 게 가장 빠른 지름길이 아닐까?
그분이 가장 잘 아시는 분이 아니신가?
요한계시록은 고난 받는 성도들에게 위안과 소망을 주려는 목적에서 기록되었다고 말한다.
정말 그럴까?
위로가 목적이라면 고린도후서나 베드로전서가 더 탁월하지 않을까?
3절은 본서의 목적을 밝히고 있다.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
읽고 듣는 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읽고 들은 것을 지키는 데 목적이 있다.
지키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본다.
지킨다.
무엇을 지킨다는 말인가?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고 성경은 말한다.
오늘 순종하는 사람을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
순종에 대해서 말하는 사람은 많지만 순종하는 사람은 찾아보기가 어렵다.
설교하는 사람은 많지만 설교하는 대로 사는 사람은 찾아보기가 어렵다.
종종 인터넷을 방문해서 댓글을 들여다보면 익명성의 그늘 아래서 적개심이 가득한 목소리를 토해내는 것을 들을 수가 있다.
자기 견해가 옳다고 주장하면서 상대방의 견해를 무시하는 것을 보게 된다.
1. 지키라고 주신 말씀 “계시록”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요한계시록1장 3절)
요한계시록은 그리스도 예수에 관한 예언이라고 그 서두를 시작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이 복이며, 복을 주기 위한 말씀이 요한계시록이라는 말씀이다.
그러나 요한계시록에서 이렇게 이렇게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신 곳이 있는가?
없다 모두 땅이 망하고, 사람이 죽고, 우주가 말려 사라지며, 물이 변하는 등 반복적으로 일어나는 우주의 변화를 설명하는 말씀의 전부가 사람의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내용들이다.
그러나 계시록 22장 6-7절에도
“또 그가 내게 말하기를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된지라 주 곧 선지자들의 영의 하나님이 그의 종들에게 결코 속히 될 일을 보이시려고 그의 천사를 보내셨도다.
보라 내개 속히 오리니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가 복이 있으리라 하더라”
라고 말씀하므로 요한 계시록 전체의 예언의 말씀을 이해한다면
지켜 행해야 하는 말씀으로 이해하고 계시록의 말씀들을 말세에 일어날 현상이 아닌 내가 지켜 행하야 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찾아 궁구하고 하나님께 기도해야 하며, 앞으로 설명되는 마음세상 안에서 일어나는 내중심적인 믿음과 성품의 종말로 풀어가는 계시록을 믿고 이해 해야 한다.
지금까지 요한계시록은 지구의 끝날에 일어난 징조라고 말하면서 하나님을 두려워하라고 말해 왔다.
그러나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문맥으로 풀지 않고 자신의 임의로 풀어놓고 사람들을 현혹시킨 결과로 결국은 자신의 지식이나 그 어떤 것을 드러내려는 욕심이 그 믿음이나 열심을 앞선 결과이기도 할 것이다.
2. 하나님의 의를 사모하는 자에게 열려있는 말씀
“또 말하되 이 책의 말씀을 인봉하지 말라 때가 가까우니라 불의를 하는 자는 그대로 불의를 하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럽고 의로운 자는 그대로 의를 행하고 거룩한 자는 그대로 거룩되게 하라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 대로 갚아주리라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 끝이라 그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이는 저희가 생명나무에 들어가며 문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얻으려 함이로다 개들과 우상숭배하는 자들과 및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마다 성 밖에 있으리라"
10-15절까지의 이 말씀을 보면,
사도 요한에게 주신 계시록의 말씀들은 사도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그리고 이 지구가 존재하는 그 날까지 쭉 개봉 된 말씀으로 누구든지 의로움을 찾을 수 있었으나 현대까지 이 말씀이 드러나지 않았던 것은 결국 인간중심적인 열심은 있었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고자 하는 소원은 있었으나 사람이 보는 현상과 하나님이 보시는 마음의 차이를 극복하지 못한 관계로 눈에 보이는 현상 속에서 하나님의 뜻과 말씀을 맞추어 풀고 믿고 행했기 때문이다.
이 말씀의 특징은 불의한 자와 더러운 자를 하나로 하여 15절 말씀으로, 의를 행하는 거룩한 자는 14절로 그 모습을 정의하여 놓으셨고 또 하나는 14절로 정하신 신앙인은 성 안으로 15절로 정하신 신앙인은 성 밖에 살아야 할 신앙인으로 정해 놓은 사실을 주지해야 한다.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 끝이라는 말씀은 천지의 시작과 끝을 정하신 하나님께서 신앙의 시작과 그 끝도 정하셨는데 그 예정함 안에서 하나님의 뜻은 반드시 이루어져 하나님이 정하신대로 반드시 시행하신다는 굳은 결단을 지금 우리에게 전달하시는 말씀입니다.
두루마기를 빤다는 것은 의를 위해 하나님이 주시는 천국의 물에 자신을 빨아낸다는 의미로, 하나님이 겉 사람이 입는 옷을 빨라는 것도 아니며 겉사람의 행위를 거룩하게 하라는 것도 아니라, 사람의 성품을 담고 있는 마음의 옷으로 마음속에 있는 것들이 드러나는 성품을 발견하며 하나님의 성품이 있지않고 자기의 욕심을 바탕으로 하는 성품이 드러나는 것을 발견하고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물에 빨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성경은 모두 지구 안에서 일어난 역사다.
그러나 이미 창조의 역사 안에서 사람의 영이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해가며 그 끝에 하나님을 대신하여 제사장으로서 일하는 안식의 주인의 모습까지 밝혀진 상태에서 성경 전체를 지구 안에서 일어난 신앙의 역사라고만 우길 수는 없다.
그러므로 이 말씀들은 이 비밀, 비유, 비사, 수수께끼라고 하신 성경전체가 사람의 마음에 있는 프쉬케인 네페쉬의 상태로 사람의 마음에 있는 영이 프뉴마로서의 루아흐의 영적 상태로 변해가는 과정을 기록하되 감추어두시고 마음을 하나님의 성품으로 변화받기위해 그리스도 예수의 길을 영의 문제로 인식하고 따라가기 위해 몸부림을 치는 자들에게만 공개하기위해 숨겨놓으신 영적인 문제로 인식하고 믿어 따라가야 한다.
그래도 육신의 현상이 중요하다고 할 것인가???
하나님의 입에서 하나님의 분신으로 사람의 마음에 존재하는 영과, 그 영을 담고 제대로 키우기 위한 껍데기로 사용하기위해 흙에서 지음받아 부모의 정자와 난자로 유전되는 육체 이 두형태에서 자아의 참 모습이 어떤 것인가???
천국에서 살아가는 것은 어떤 것이고 흙으로 돌아가는 것은 어떤 것인가?? 를 구분하면 이해 될 것이다.
어느분이 성경해석의 방법에서 영해만 하면 안된다고 했다.
영해를 하지않고 영이 살아나는 길을 제시 할 수 있는가?
행동에 관한 율법의 말씀을 우리에게 주시고 그 육체의 행위가 올바르려면 육체의 행위를 올바르게 하려고 애쓰지 말고 그 행위의 말씀을 마음에 맞추고 마음이 먼저 하나님의 성품으로 고쳐지면 행위는 저절로 되어지는 것이라고 말씀하시기 위해 복음을 받아드리면 율법이 완성되는 것이라고 하신 것이다.
계시록은 사람의 마음세상에서 일어나는 또 다른 현상이다.
요한계시록을 알기 위해서는 “해석자의 목적”을 알아야 한다 종교개혁 시대에 발생한 급진적 분파인 재세례파 운동(再洗禮派, anabaptism)은 성경본문을 문자대로 준수하는 것을 주장하며 무폭력 평화 운동을 전개했다.
요한계시록 연구자들은 칼빈이 요한계시록을 “주석하지 않았다? 혹은 못했다”고하면서 요한계시록 연구 필요성을 더욱 부각시키고 있다.
외국에서 가장 많은 성경연구주석은 ‘로마서’인데, 한국에서 가장 많이 출판된 성경 연구 분야는 ‘요한계시록’이다.
기독교 이단들 중에서 요한계시록을 근거로 한 경우가 많다.
신약성경은 27권을 정경으로 결정했다(A.D 397년 카르타고 공회의).
신약성경은 2세기 중엽에 발생한 말시온(Marcionism)이 자체로 정경목록을 결정했는데(Marcionite Canon-누가복음과 바울서신 10권), 교회가 받을 수 없었고, 영향력이 증가하자 바른 목록을 발표할 수 밖에 없었다. 어떤 요한계시록 강좌에서 참석자가 강연하는 교수에게 질문했다.
요한계시록 기록언어(헬라어)는 고전어로 사어(死語)이다.
요한계시록에 대한 관점이 없는 연구자는 요한계시록을 해석할 수 없다.
교부들이 확증한 내용은 아래와 같다고 생각한다.
예수께서 십자가 밑에서 요한에게 어머니를 위탁했고, 요한은 마리아를 모시고 에베소(터키 셀죽,Selcuk)에서 사역했다. 사도 요한은 에베소에서 사역하다가 밧모 섬에 유배되었다.
우리는 왜 요한계시록을 상고해야 하는가? 사도 요한이 요한계시록을 기록한 목적은 종말의 공포를 주어 교화시키는 목적이나, 성도를 혼란하게 것은 절대 아니다.
요한 사도가 제시한 다양한 어휘들은 1세기 당시 성도들에게 이해가 되었을 것이다.
고경태 목사(형람서원, 주님의교회) <저작권자 ©크리스찬타임스,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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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1장 / 요한계시록이 어려운 이유 / 요한계시록이 쓰여진 목적
1.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The revelation of Jesus Christ.”(요한계시록 1:1a)
이 말씀이 중요합니다.
요한계시록 1:1의 말씀을 우리가 두 가지의 관점으로 볼 수 있는데 하나는 소유격입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의 계시다’라는 뜻으로 예수님이 주시는 계시의 말씀이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고, 다른 하나는 목적격입니다.
곧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말씀이다.’라는 뜻입니다.
물론 성경 전체가 예수님에 대한 계시입니다.
하지만 이 요한계시록의 말씀은 아주 특별한 계시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복음서에 기록된 대로 이 땅에 오셔서 3년 동안 사역을 하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고 승천하셨습니다.
그 후에 이 땅에 교회가 생겨났는데 우리가 다 아는 대로 그때부터 주님께서 만왕의 왕, 만유의 주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시는데, 그 주님께서 특별히 교회에 주신 말씀이 바로 이 요한계시록입니다.
2. 요한계시록 1:2을 보면 계시록의 내용이 나타나 있습니다.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과”(요한계시록 1:2a)
그 내용의 핵심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삼등분이 되어서 나타났습니다.
제일 먼저는 구약성경으로 나타났고, 두번째는 신약성경으로 나타났는데, 이 요한계시록은 아주 특별한 말씀입니다.
요한계시록 10장에 보면 이 <작은 책>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 작은 책이라는 의미는 내용이 별 볼일 없다는 뜻이 아니라 내용이 함축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3. 하나님의 말씀은 먼저는 희미하게 나타났습니다.
이것이 구약인데 그림자같이 나타났습니다.
이 구약의 그림자의 실체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래서 신약은 복음의 실체입니다.
구약의 그림자가 신약에서 실체로 나타난 것입니다.
그래서 구약은 복음의 그림자요, 신약은 복음의 실체입니다.
이제 요한계시록에 가면 그림자와 실체의 모든 진리가 함축이 되어서, 이 십자가의 내용, 그 구원의 내용이, 주님이 이루어 놓으신 내용과 교회에 대한 모든 진리가 함축되어서 액기스로 우리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요한계시록은 말씀 중에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것을 거꾸로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요한계시록을 알면 신약성경이 열리게 되어 있고, 신약성경을 알면 구약성경이 열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계시는 상통합니다.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맥이 뚫려 있고, 계시록부터 창세기까지 또 맥이 뚫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 안에는 길이 있고, 흐름이 있고, 맥이 있습니다. 이
세가지를 우리가 말씀을 먹고 걷는 가운데 발견해야 합니다.
4. 요한계시록의 목적이 무엇인가?
첫 번째는 소망을 주기 위함입니다.
왜 소망인가?
그것은 조금만 더 참으라는 말씀입니다.
Just hang on! Keep your faith! 힘들어도 믿음을 지키고 조금만 참아라!라는 메시지입니다.
요한계시록을 가지고 겁을 주는 것은 잘못된 해석이고 잘못된 적용입니다.
두 번째는 ‘성도의 Identity(정체성)를 확인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에 대한 정체성인가?
우리가 전쟁을 하면 적군과 아군이 분명히 구분이 됩니다.
그러므로 박해 가운데서 성도는 진정한 정체성이 확인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는 모두가 ‘하나님의 성도, 하나님의 자녀입니다’라는 정체성입니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을 통해서 우리는 나의 신분과 정체성을 발견하고 확인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살아가지만 세상에 속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로마제국의 황제의 그림이 그려져 있는 동전을 사용해야지 먹고 살 수 있는 나라와 문화 속에 살면서 이러한 엄청난 문화적인 충돌과 격동을 거치면서 문제가 생긴 것이 바로 성도들의 정체성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믿지만 네로의 얼굴이 새겨진 돈을 사용하면서 마음에 가책을 가졌고 정체성의 혼란을 일으킨 것입니다.
바로 그러한 가운데 요한은 요한계시록의 말씀을 통해서 성도의 정체성을 확인해 주십니다.
“너희는 성도요,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을 이기는 힘은 우리의 결심이 아니라 우리의 정체성입니다.
이것이 매우 중요한 것인데, 우리가 주님을 영접하면 제일 먼저 하나님께서 고쳐주시는 것이 바로 나의 정체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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