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11
서머나 교회는 그 아름다움과 오랫동안 변함없이 로마에 바친 충성으로 유명한 항구 도시에 자리해 있었다.
이 도시는 왕성한 황제 숭배로 로마에게 충성을 표현했다.
이 도시는 유명한 순교자 폴리갑(폴리카르포스) 주교가 순교한 곳으로 유명하다.
그는 156년경 예수께 충성한다는 이유로 여기서 죽임을 당했다.
일부 유대인이 경제력을 쥔 사람들(오늘날 노조와 비슷한 상인 조직인 상인조합에서 일하는 관리나 신전에서 일하며 은행 역할도 했던 관리였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서머나 교회를 핍박하던 로마 정부 관리와 한 통속이 되어(요한의 눈으로 볼 때) 하나님 백성이라는 유대인의 독특한 정체성을 저버렸을 가능성이 있다.
경제적인 면에서도 영향을 받을 수 있고 법률상 처분을 받을 수도 있었지만, 이 때문에 현실에 순응하며 타협한 이는 분명 하무도 없었다.
이 교회의 과제는 두려워하지 말고 신실함을 지키는 것, 즉 신뢰하고 순종하는 것이었다.
2:12-17
버가모교회 성도들은 사람들을 위압하는 속주 수도의 아크로폴리스가 올려다보이는 곳에서 살았다.
아크로폴리스에는 많은 관청이 있었고, 제우스에게 바친 장엄한 제단과 우뚝 솟은 황제 숭배 신전을 포함하여 많은 종교 시설이 있었다.
필경 이것이 사탄의 권자(2:13)라는 유명한 이미지를 만들어냈을 것이다.
순교자(안디바)가 순교했는데도, 대다수 신자들은 신실함을 지켰다.
하지만 일부 사람들은 다시 우상에게 희생 제물로 바친 음식물을 먹었는데, 이는 안디바와 같은 운명을 피해보려 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예수의 메시지는 현실에 순응하며 타협한 자들에게는 순응하길 그만두고 회개하라고 도전하며, 신실한 자들에게 굳건하라고 독려한다.
2:18-29
두아디라 교회는 상인조합이 많기로 유명했던 도시에 있었다,
두아디라 교회는 그 삶과 증언에서 진보를 이루어갔지만, 서머나와 근처 빌라델비아에서 일어난 것과 같은 경제적 박탈과 사회적 힘(지위)의 상실을 피하려는 욕구를 가졌을지도 모른다.
이 교회의 많은 신자들, 어쩌면 이 교회 신자 대다수가 "이세벨"을 따랐던 것은 서머나와 빌라델비아와 같은 일을 당하지 않으려는 욕구 때문이었을 것이다.
여기서 이세벨은 말 그대로 거짓 선지자일 수도 있고, 현실에 순응하며 타협하는 자세를 상징할 수도 있다.
이 여자와 그 자녀/추종자에게 주는 메시지는 일곱 메시지 가운데 가장 길로 가장 혹독한데, 이는 그만큼 상황이 심각했음을 시사한다.
메시지는 현실에 순응하는 자들에게는 그리 살지 말라고 (암시적으로) 도전하며 신실한 자들에겐 굳건하라고 독려한다.
3:1-6
사데도 버가모보다 소박하긴 해도 위풍당당한 아크로폴리스를 갖고 있었다.
이 아크로폴리스는 치욕스러운 역사를 통해 도시의 정체성을 규정해주는 한 요소가 되었다.
사데는 기습공격을 통해 두 번이나 점령당했으며 난공불락이라 여기던 아크로폴리스에도 군대가 들어갔었다.
요한이 예수로부터 "내가 도적같이 오리"(3:3)라는 말씀을 받아 사용한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었을 것이다.
예수의 이 말씀은 교회 안의 일부조차도 예수의 오심을 거의 기대하지 않을 때 그가 다시 오시리라는 것을 알려준다.
사데 교회의 대다수는 혼수 상태에 빠져 죽은 이와 다름이 없었다.
요한이 적절한 묵시를 사용하여 이 교회에게 깨어나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고 도전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 옷을 더럽히지 않았다는 말을 들은 이도 몇 사람이 있다.
이 수면 상태를 냉담함이 아니라, 어떤 행위를 통해 스스로 자신을 더럽힌 상태, 좋은 평판을 얻는 데 집착하면서도 자기들이 잘못한 것은 하나도 없다는 억지 생각을 하는 상태로 이해해야 한다.
사데 교회의 주된 문제는 무관심이 아니라 말도 안 되는 생각이다.
사데 교회 사람들은 부적절한 행위를 밝혀내어 그만두어야 한다.
3:7-13
빌라델비아는 그리스 문화가 살아 있으면서 또 로마를 철저하게 추종하는 도시였다.
이 도시에 있던 교회도 서머나 교회처럼 도시에 살던 일부 유대인과 갈등이 있었다.
3:4-22
라오디게아 그리스도인들은 그 지역에서 가장 부유한 도시에 살았으며, 그들도 분명 그런 부를 함께 누렸을 것이다.
라오디게아는 상업 중심지요 지리적 요충지였으며 여러 신을 섬기는 신전들이 있었다.
학자들은 이 메시지에서 라오디게아가 부를 누렸음을 암시하는 내용과 더불어, 이곳이 안약을 생산하고 검은 양모를 사용했으며 특히 좋은 물을 공급받지 못했음을 암시하는 내용을 발견했다.
사람들은 종종 요한이 라오디게아 근처 히에라폴리스 온천을 잘 알고 있었으며 라오디게아 밖으로부터 맑은 찬물이 시내로 흘러들었음도 잘 알고 있었다고 주장해왔다.
미지근한 물은 히에라폴리스 폭포로 떨어지던 온천수를 가리키거나 라오디게아 자체에 있던 물을 가리키는 말일 수 있다.
라오디에가 교회의 문제는 뜨겁지도 않고 차갑지도 않고 미지근하다는 것이다.
미지근함은 고대에 무관심을 은유하는 말이었다.
이 본문은 두 극-예수를 따르는 뜨거움과 예수를 거부하는 차가움-과 술에 물탄 것 같은 중간 입장을 담은 스펙트럼을 말하는 게 아니다.
고먼은 이 본문이 서로 대립하는 두 가지 입장을 제시한다고 본다.
그 둘 중 첫 번째는 뜨거운 물과 차가운 물이라는 이미지로 표현된다.
뜨거운 물과 차가운 물은 사람에게 즐거움과 이로움을 준다.
그와 반대로 미지근한 물은 맛도 역겹고 건강에도 좋지 않다.
여기서 미지근하다는 과도한 번영을 누리면서 부족함이 없다 보니, 결국 예수와 나누는 사귐을 완전히 잊어버린 상태를 말한다.
이 교회는 중용을 따르는 교회가 아니라 현실에 철저히 순응하고 타협하는 교회로서 살아남는 데 필요하다면 현실에 순응하는 것도 모자라 아예 그 시대 지배층과 권력자들이 따르는 삶의 방식과 가치관을 모조리 받아들이는 교회다.
이 교회의 문제를 풀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예수를 그 공동체의 삶 속에 다시 모시는 것이다.
그리하려면 이 라오디에가 교회를 가난하게 하고 헐벗게 하고 눈멀게 만든 우상 숭배를 거부해야 한다.
함께 살펴본 일곱 메시지
각 교회는 그 나름의 상황을 반영한 메시지를 받았다.
이 메시지를 통틀어 보면 메시지 전체를 아우르는 한 가지 질문이 있다.
곧 타협하느냐 마느냐가 그것이다.
이 교회들은 황제 숭배를 포함하여 이방 종교의 문화적 규범에 동참하기를 거부하다가 심각한 결과를 맞이한다 할지라도-사회, 경제, 정치면에서 심각한 결과를 감내해야 할지라도-이런 거부 태도를 견지함으로 예수를 신실히 증언하는 증인자, 예수 같은 (그리고 요한 같은) 신실한 증인이 될 것인가?
이들은 요한이 우상 숭배라 이름 붙인 행위, 곧 여러 모양의 현실 타협과 순응 행위에 참여한 니골라당과 발람 추종자와 이세벨 추종자, 그리고 라디오게아 사람들과 한 통속이 될 것인가 아니면 이들과 단절하고-"거기서 나와"-요한처럼, 버가모의 안디바처럼, 그리고 예수 바로 그분처럼 기꺼이 고난을 받을 것인가?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주인 이 일곱 메시지는 죽음을 요구하는 게 아니라 신자를 더립히는 모든 것을 멀리하는 일을 포함하여 제자의 길을 갈 것을 요구한다.
이 값비싼 제자도는 디트리히 본회퍼가 묘사한 그대로 1세기의 많은 그리스도인 깨닫거나 요구했던 것보다 훨씬 더 엄중하다.
요한계시록이 해야 할 일에는 이를 듣는 이와 읽는 이에게 신실한 제자도에는 희생과 동시에 보상이 따른다는 확신을 심어주어야 하는 일도 들어 있다.
일곱 메시지가 이 시대에 던지는 메시지
요한계시록 바르게 읽기-마이클 고먼, 박규태, 상상플러스, 187-195
'묵상 > 요한계시록' 카테고리의 다른 글
1장 1-3절 (0) | 2021.01.30 |
---|---|
마이클 고먼을 따라 읽기7 (0) | 2021.01.27 |
마이클 고먼을 따라 읽기5 (0) | 2021.01.20 |
마이클 고먼을 따라 읽기 4 (0) | 2021.01.19 |
마이클 고먼을 따라 읽기3 (0) | 2021.01.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