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요한계시록

1장 7절

기독항해자 2021. 3. 5. 12:03

볼지어다 그가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 사람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것이요 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로 말미암아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 

 

볼지어다 그가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그랜드종합주석은 이것을 이렇게 해석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종종 구름은 하나님의 영광을 가견적으로 나타내 주는 상징물로 언급되어 있다.

그러므로 이것은 자연계의 구름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의 현현을 나타내는 어떤 상징으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를 문자적으로 해석하여 자연계의 구름으로 보는 것 또한 틀린 이해는 아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일어나는 현상이나 재림의 형태에 관해 언급한 것을 무조건적으로 타당한 근거없이 상징적으로만 이해하는 것은 옳은 태도가 아니기 때문이다.

더욱이 주님이 승천하실 때에도 승천하시는 주님을 구름이 가리웠으며 천사는 그 모습 그대로 주께서 다시 오실 것이라고 증거하였기 때문에 이것을 근거없이 상징적으로 해석하려는 태도는 결코 옳지 못하다.

적그리스도의 사주를 받은 자들이 본절을 이상하게 해석하여 사람들을 미혹시켜 왔고 또한 미혹시키고 있음을 볼 때 오히려 이것을 문자적으로 보는 것이 더 건전하고 바람직한 이해 자세라고 여겨진다."

 

구름을 상징으로 볼 것인가 아니면 문자적으로 해석할 것인가, 이것이 요한계시록을 해석하는 이들의 다툼이었습니다.

그랜드종합주석은 구름을 문자적으로 취합니다.

왜냐하면 역사적으로 구름을 상징으로 취한 사람들 중에 이단으로 흘러간 사람들이 많이 있었기 때문이란 것입니다.

"적그리스도의 사주를 받은 자들이 본절을 이상하게 해석하여 사람들을 미혹시켜 왔고 또한 미혹시키고 있음을 볼 때 오히려 이것을 문자적으로 보는 것이 더 건전하고 바람직한 이해 자세라고 여겨진다."

적그리스도의 사주를 받은 자들은 누구를 가리키는 것일까요?

적그리스도의 실체가 무엇일까요?

 

다음백과는 그리스도의 적에 대해 이렇게 풀이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교 종말론 문헌에 맨 먼저 나타난 듯한 그리스도의 적이라는 명칭은 먼저 〈데살로니카인들에게 보낸 둘째 편지〉에서 '저 불법의 사람'으로 암시되기는 하지만 처음으로 언급된 곳은 〈요한의 편지〉이다(Ⅰ요한 2:18, 22, Ⅱ 요한 7).

마지막 때에 강력한 통치자가 나타나 하느님을 적대시하리라는 관념은 보다 오래된 것으로 그리스도교가 유대교로부터 받아들인 것이다.

유대교 종말론은 마지막 때에 일어날 하느님과 악마 사이의 전투를 묘사하는 이란과 바빌로니아 신화에서 영향을 받았다.

〈구약성서〉에서 이러한 투쟁에 관한 유대교의 관념은 마카베오 시대 초기(BC 168경)에 쓰인 〈다니엘〉의 예언에 나타난다.

그리스도의 적의 모형으로 나타난 역사적 인물은 유대인의 박해자 안티오코스 4세 에피파네스였는데 그는 이 관념에 지속적인 영향을 끼쳤다.

그뒤 이 인물의 성격은 여러 가지 형태로 재연되었다.

그는 거인족 군대의 선두에 선 강력한 지배자로 나타나기도 하고 3명의 지배자(다니 7:8, 24의 '세 뿔')를 죽이고 성도들을 박해하고(7:25), 하느님의 성전을 황폐화시키는 자로 나타나기도 한다.

후대에 하느님의 적인 폭군은 여러 가지 위기상황에 적용될 수 있는 예언의 인물이 되었다.

또한 유대교와 그리스도교 묵시문학 작가들은 황제 네로(68 죽음)를 그리스도의 적으로 생각했다.

 

그리스도의 적에 대한 그리스도교적인 관점은 〈데살로니카인들에게 보낸 둘째 편지〉 2장에 나타난다.

여기서 그리스도의 적은 표징과 기적을 행하는 유혹자로 하느님의 영광을 차지하려는 자로 나타난다.

이 '불법의 사람'은 특히 유대인들 사이에서 신뢰를 얻게 되는데 그 이유는 유대인들이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불법의 사람'으로 묘사되었던 그리스도의 적에 대한 이러한 견해는 그리스도교에 한동안 널리 받아들여진 것 같다.

유대인이 그리스도를 믿지 않았기 때문에 그 형벌로 그리스도의 적을 믿게 되었다는 사상은 〈요한의 복음서〉에 나타나 있다(요한 5:43).

〈요한의 묵시록〉에서 그리스도의 적은 기적을 행하는 자, 사주자로 나타난다.

중세에 그리스도의 적에 대한 관념은 강력한 역사적·정치적 요인으로 발전했으며 위기의 시대에는 더욱 그러했다.

12세기말에 요아킴 피오레는 성령의 제3시대가 1260년에 시작될 것이라고 예언했고, 그의 추종자들은 그리스도교인 황제 프리드리히 2세를 그리스도의 적과 동일 인물로 생각했다.

그뒤 다른 추종자들은 교회의 우두머리인 교황 보니파시오 8세와 요한 12세를 그리스도의 적으로 간주했다.

교황·황제같이 적대자들은 서로 상대를 그리스도의 적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그리스도의 적이 누구이고 언제 도래하는가, 또한 이에 앞서 일어나는 '시대의 표징', 즉 자연의 대변혁, 전쟁, 전염병, 기근 및 다른 재앙에 대한 강렬한 관심이 지속되었다.

14, 15세기에 설교가들은 사람들을 회개시키기 위해 그리스도의 적의 도래를 널리 경고했다.

종교개혁 기간에 종교개혁가들, 특히 마르틴 루터는 교황 개인을 공격하지 않고 교황제 자체를 그리스도의 적이라고 공격했다.

악이 교회의 우두머리에게서 구현되고 성직자를 '그리스도의 적의 몸'으로 본 이러한 의식은 교황제를 불신하고 명예를 손상시킬 가장 강력한 무기였다.

종교개혁 이후 그리스도의 적을 강조하는 일은 점차 줄어들었다.

몇몇 현대 개신교 신학자들은 그리스도의 적을 그리스도의 주권에 저항하거나 거절하는 것, 교회와 국가의 정치권력을 신격화하는 것 등으로 해석했다.

섭리신학과 전(前)천년 왕국 신학에는 마지막 날에 나타날 그리스도의 적에 대한 예언이 강하게 남아 있다."

 

적그리스도에 대해 잘 설명해 놓은 블로그 글이 있어 옮겨 놓습니다.

 

"성경 종말론에서 적그리스도의 등장은 늘 관심의 초점이 되어 왔다. 

적그리스도(antichrist)란 말은 접두사 anti 대신하여 과 반대의 두 가지의 뜻이 있는 점에 비추어 그리스도의 지위를 대신하는 자와 그리스도를 반대하는 자를 동시에 지칭한다. 

이 용어가 오직 요한서신에만 나오지만, 적그리스도에 관련된 가르침은 성경 도처에 나오고 있다. 

 

과거주의에 따르면 요한 계시록 13장의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은 이교로마(고대 Rome제국) 적그리스도, 짐승의 7머리는 제1세기 로마의 네로 황제 등 7 황제를 상징하는 것으로 본다.

7머리를 7왕으로 보는 근거는 17:9, 10에서 “7이라고 하고 있기 때문이다. 

 

리베라(Ribera, c. 1590) 이래 미래주의 자들은 대체적으로 고대 로마제국이 미래에 부활하고 마지막 세계 제국 지도자가 일어나 요한계시록 예언들을 성취시킬 것으로 본다[, 드와이트 펜테코스트, 세대주의 종말론(대한 기독교서회, 1998, 455-467)]. 

과거주의와 미래주의를 결합시킨 래드(George Ladd)는 고대 이교 로마제국을 적그리스도의 선구자격으로 본다. 

이 같은 미래주의 독법은 다니엘과 요한계시록이 역사주의적 연속성을 함축하고 있는 묵시문학 구조와 문맥을 무시하고 예언의 초점을 흐릴 뿐이다. 

과거주의나 미래주의 독법은 13장 첫째 짐승이 다니엘 7장의 작은 뿔에 뿌리를 두고 구축된 예언이란 점을 무시하고 있다. 

지역적으로 한정된 고대 로마제국이라는 시각은 요한계시록 13장에 나오는 전 세계적 투쟁을 완벽하게 설명할 수 없다.

 

사도요한은 초기교회 시대에 사도들의 원복음에서 교리적으로 도덕적으로 빗나간 많은 적 그리스도가 등장 하였다고 한다(요일 2:18, 19, 22; 4:2-3).

많은 적그리스도가 사도 요한 시대에 존재했다. 

사도 요한의 적그리스도 판단 표준은 메시야가 되신 예수와 그의 속죄하는 죽음에 관한 사도들의 가르침을 수용하는 여부에 두었다. 

기독론은 사도적 구원 복음의 초석이 된다. 

요한은 하나님에 관하여 차원 높은 지식을 지녔다는 주창자들의 과오와 처음부터 있어온 사도적 신앙 사이에 선을 명확히 하였다. 

또한 거짓 영의 가르침을 분별하도록 요청 하고 있다(요일 2:22; 4:2,3; 요이7). 

그는 이 사람들이 다른 복음을 전하는 거짓 선자자 적그리스도라고 하며 당대 신자들에게 성령의 기름 부음바 되었다는 확신으로 일깨운다(요일 2:20, 27).

 

사도 요한의 이 같은 신약성경의 사도적 원복음 기별 이탈을 적그리스도 여부를 판단하는 원리로 보는 것에 입각하여 종교개혁자들도 자기 시대의 적그리스도를 변별하여 중세 교황권을 예언상의 적그리스도로 보았다.

바울은 데살로니가후서 2장에서 배교(apostasia)하는 일 불법의 사람(멸망의 아들)”의 등장을 예고하였다.

누가 어떻게 하여도 너희가 迷惑되지 말라 먼저 背敎하는 일이 있고 저 不法의 사람 곧 滅亡의 아들이 나타나기 에는 그 날이 이르지 아니하리니”(3).

바울은 사람들이 진리에 대하여 귀를 막고 허탄한 이야기를 좇을 때가 다가오고 있다고 경고했다. 

영적 반역인 배교는 바울 당시에 미래적인 사건이고 재림에 앞서는 종교적 징조에 속한다. 

배도하는 일에 관한 예언은 바울의 시대에 그 기미가 보여 부분적으로 성취되었고, 암흑시대에는 그보다 훨씬 더 성취되었다. 

그러나 그 예언의 완전한 성취는 그리스도가 오기 직전 시대에 일어난다.

3절의 불법한 자 7절에서 그 묘사가 이어지고 있다. 

불법한 자 악한 자”(9)와 동일한 존재이다. 

불법한 자 무법자를 가리킨다. 

헬라어 호 아노모스(ho anomos), 문자적으로 법이 없는 []”이다.

악한 자가 된다.

불법의 사람”(3) 혹은 불법의 비밀”(7)에 대한 언급이다.

4절에서는 그 정체를 규명하고 있다.

그는 對敵하는  이라고 불리는 모든 것과 崇拜함을 받는 것에 對抗하여 그 위에 自己를 높이고 하나님의 聖殿에 앉아 自己를 하나님이라고 내세우느니라.”

여기에 나오는 묘사에 따르면 신적 대권을 가진 자로 자기를 높일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을 예배하도록 사주(使嗾)하면서 좌정하고 있다. 

이 무법자의 정체는 이교 로마 권세의 뒤를 잇는 참람된 세력에 대한 다니엘의 예언( 7:8, 19-26)과 표범과 비슷한 짐승이 하는 일에 대한 요한의 묘사( 13:1-10)와 매우 유사하다. 

이것은 다니엘과 바울과 요한이 동일한 세력, 즉 교황권에 관하여 말하고 있다는 결론에 이르게 한다(GC 49-54, 356, 579). 

많은 주석가는 적그리스도,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자 혹은 그리스도의 자리에 서는 자라는 말을 여기에 묘사된 세력에 적용한다. 

다니엘서와 요한계시록의 관련 본문 주석은 동 세력의 신원 확인을 위하여 필수적이다.

더 넓은 의미에서 보면 여기에 묘사된 세력은 오랫동안 지극히 높은 자와 비기고자( 14:14) 분투해온 사단으로 볼 수 있다.

사단은 자기 자신을 하나님처럼 만들고 자기의 세력에 반대하는 모든 자를 죽이기 위하여 혼신의 힘을 다하여 활동한다. 

오늘날 세상은 그 앞에 굴복하고 있다. 

그의 권세는 하나님의 권세로 받아들여진다”(4T 14).

하늘에서 시작한 반역을 완수하려는 적그리스도의 결의는 불순종하는 자녀들 가운데서 계속 역사할 것이다”(9T 230).

이 시대에 적그리스도가 참 그리스도처럼 나타날 것이며, 그때 하나님의 율법은 전적으로 무효화될 것이다.그러나 이 모든 반역의 진짜 지도자는 빛의 천사로 가장한 사단이다. 

사람들은 기만당할 것이며, 그를 하나님의 자리에 높이고 신으로 섬길 것이다”(목사와 복음 교역자에게 보내는 증언, 62).

최후의 큰 기만이 미구에 우리 앞에 공개될 것이다. 

적그리스도는 우리의 눈 앞에서 놀라운 이적을 행할 것이다”(GC 593).

요컨대, 적그리스도는 교황권일 뿐 아니라, 더욱 중요하게도 그는 마지막 날 직전에 그리스도로 가장하는, 최고의 적그리스도 곧 사단 자신이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그리스도 교회가 인간이 세운 전통에 맞지 않는 주장이나 가르침을 마귀의 작품인 이단으로 보고, 교회가 그것을 발본색원해야 하는 거룩한 책무를 지고 있다고 보았다(Summa Theologiae, -, 9.11, a 3). 

교황 Leo 세 이래 교마교회는 이단 징치를 국정의 한 목표로 포함시키고, 종교재판소들을 통하여 선량한 성도들을 박해한 중세 어두운 역사의 선봉에 섰었다. 

이는 적그리스도의 무법적 활동이었다. 

그 결과 12-13세기에 남 프랑스 반 로마교회 신자들인 알비파(Albigense), 발도파(Walenses), 17-18세기의 프랑스의 칼뱅파 신교도 위그노파(Huguenots) 등이 대량 학살을 당하였다. 

특히 1572 8 24일 성 바돌로매 축일을 기점으로 약 2개월간 파리를 중심으로 프랑스지역에서 약 7만 명의 개신교도들이 처참하게 학살당하였다. 

이 일이 교황 Gregory 13세의 승인 하에 일어난 것이다. 

이들 모두는 하나님의 말씀 예수의 증거 때문에 학살당하였다(GC271).

 

적그리스도를 그리스도와 은혜의 복음을 반대한 자들로 보기 시작한 것은 루터와 칼뱅에 이르러서였다. 

이들 종교개혁자들은 자기들이 살던 시대에 그리스도의 권위와 복음을 대체 모조한 유사 그리스도교(중세 교황권)와 거짓 복음교사를 성경 예언에 따른 적그리스도의 실체로 보았다. 

이들은 오직 믿음, 오직 성경, 오직 그리스도의 원리를 참 복음신앙과 유사 신앙을 판가름하는 원리로 제시하였다.

이런 점에서 적그리스도 개념의 핵심을 복음적 테스트인 그리스도의 권능에 둔 알트하우즈(Althaus)는 적그리스도를 신조화 하여 과거나 현재 또는 미래 어느 것에 한정시키는 일을 반대하였다. 

그는 요한계시록 18장이 이사야 13, 34장과 에스겔 27장의 바벨론, 에돔, 두로를 하나님 교회의 원수의 표상으로 적용한 것처럼 각 시대 하나님 백성들은 자기 시대에 변절된 복음을 주목하여 적그리스도를 판별할 것을 역설한다(Die Letzten Dinge, 283; Hans LaRondelle, How to Understand the End-Time Prophecies of the Bible, 318)

 

적그리스도에 관한 정체는 역사적으로 계속 발전되어왔다는 전망에서 이해하여야 한다. 

특히 다니엘서 7장의 작은 뿔의 활동과 데살로니가후서 2장의 불법한 자,” 그리고 요한계시록 13:1-10에 나타난 표법 같은 짐승의 정체를 읽어내야 한다. 

불행하게도 오늘날 대부분의 신학자들이 이 같은 사도 요한의 해석, 묵시문학적 예언 및 종교개혁자들의 역사적 이해를 잊고 있다. 

그들은 적그리스도를 세속 전제국가 체제나, 무신론 국가에서 찾고 있다. 

세상에는 많은 적그리스도 세력이 있어 왔으나, 다니엘 7, 데살로니가후서 2, 요한계시록 13장의 적그리스도는 하나의 특성을 지녔다. 

, 하나님의 언약의 법을 변개 하고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에 토대를 둔 사도적 복음을 위조 대체한 특성이라는 점이다."

출처: https://ockam.kr/564 [순례자의 여로에서]

 

두 개의 글을 통해 적그리스도가 무엇을 뜻하는지 대충 알 수가 있습니다.

정확히 안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인간의 지식 중에 정확한 것이 얼마나 될까요?

오늘 옳다고 말한 지식이 얼마 안 있어 틀린 것으로 판명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러니 내가 가진 지식이 옳다고 말하면 말하는 사람이 전지한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아무도 전지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내가 아는 지식이 옳다 말할 수가 없습니다.

내가 아는 지식을 우리는 성경에 비추어서 판단해야 합니다.

문제는 성경이 우리가 이해하기에는 명료하지 않습니다.

신학적으로는 명료하다고 말합니다.

명료하다면 누구나 읽고 깨달아 알 수 있습니다.

왜 성경이 명료하지 않느냐면, 우리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시간적으로 너무 멉니다.

공간적으로 너무 멉니다.

시간과 공간의 갭을 줄여야만 성경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가 알고 있는 언어와는 다른 언어로 쓰여 있습니다.

그래서 번역상의 문제가 발생합니다. 

많은 설교자들의 설교를 들여다보면 오류가 많은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모르면 용감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모르기 때문에 저런 오류를 범하는 것입니다.

알면 좀더 신중할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그랜드종합주석 편집자들은 오류를 범하지 않기 위해 나름의 전략을 짠 것입니다.

그랜드종합주석은 해석하기가 어렵고 첨예하게 대립하기 때문에 위험성이 적은 이론을 취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문제는 무엇을 지지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상징인지 실제인지?

1세기 성도들이 보고 있던 구름이 뭘까요?

우리는 그들이 무엇을 보고 있는지 모릅니다.

예수님이 그들 앞에서 들려올라갈 때 공중으로 올라가셨습니다.

구름이 예수님을 가렸습니다.

예수님이 구름층을 통과하여 승천하신 것입니다.

그것을 1세기 신자들은 구름을 타고 가신 것으로 본 것입니다.

비행기를 타고 가다보면 비행기 아래로 구름이 흐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비행기가 이륙할 때 구름층을 뚫고 공중으로 올라서 아래로 구름을 내려다보면서 납니다.

그런데 오늘 읽은 본문의 말씀은 예수님이 구름을 타고 오신다고 말합니다.

구름층을 통과해서 오신다는 뜻이겠죠.

실제로 구름을 타고 온다는 말은 아닐 것입니다.

물과 똑같은 성분의 구름을 말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면 그 구름은 무엇일까요?

모릅니다.

예수님은 구름 속으로 들어가셨으니까 구름 타고 올라가셨다고 말한 것입니다.

 

각 사람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것이요

각 사람의 눈이 그를 볼 것입니다.

그를 찌른 자들도 볼 것입니다.

각자가 행한 대로 받을 것입니다.

믿음대로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믿으니까 우리는 괜찮을거야!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믿음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우리는 믿음을 정의할 때 헬라식으로 이해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금과옥조처럼 떠받듭니다.

그래서 예수님과 관계 없는 사람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이 참 많이 있습니다.

교회를 다닌다고, 주일에 예배를 드린다고 난 구원받은 사람이야!

혹시 착각하며 살지 않습니까?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것은 믿음대로 산다는 뜻입니다.

믿음대로 행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예수님처럼 살아야 합니다.

우리 각자가 대면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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