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르되 네가 보는 것을 두루마리에 써서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등 일곱 교회에 보내라 하시기로
하나님은 요한에게 네가 보는 것을 두루마리에 쓰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시대에 두루마리는 어떤 것일까요?
양피지일까요, 아니면 파피루스일까요?
출애굽기 24장 4절
모세가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기록하고 이른 아침에 일어나 산 아래에 제단을 쌓고 이스라엘 열두 지파대로 열두 기둥을 세우고
성경이 기록된 재료로 가장 많이 사용된 것은 강가나 늪 지대에서 자라는 갈대의 종류인 파피루스(Papyrus)라는 식물이었습니다.
기원전 3000년 전, 이집트인들은 사초과 식물인 파피루스를 종이 대용으로 사용했습니다.
파피루스는 종이(paper)라는 낱말의 어원이기도 합니다.
파피루스는 나일 강가에서 많이 자라던 풀의 이름인데, 이 풀로 만든 고대 이집트의 종이 역시 파피루스라고 했습니다.
당시에는 요즘과 같은 질 좋은 종이를 만들 수 없었기 때문에 파피루스는 지금의 종이처럼 부드럽지 않고 뻣뻣했습니다.
하지만 당시의 사람들에겐 문자를 기록할 수 있는 더없이 훌륭한 종이였습니다.
고대 이집트의 수학지식을 적어놓은 길이 5.5m 폭 0.33m의 두루마리가 있는데, 이것을 린드 파피루스라고 부릅니다.
이것은 기원전 1700년 무렵에 작성된 것이라고 합니다.
파피루스는 적정한 조건에서 보관하면 수천 년 동안 읽을 수 있는 상태로 보존할 수 있다고 합니다.
과학자들은 이를 '영구적인 종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그 조건을 맞추는 게 쉽지 않습니다.
파피루스는 나일강의 건조한 기후에 적합한 재료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성경을 영어로 바이블(Bible)이라고 부르는데, 원래 파피루스라는 단어가 그리스 시대에 비브로스(Biblos)로 불려지다가 프랑스어를 거쳐 지금의 바이블이라는 단어로 변했습니다.
파피루스 외에 양피지나 송아지 가죽, 염소 혹은 사슴의 가죽을 공들여 만들어서 거기에 기록하기도 했습니다.
현존하는 사본들 중에 가장 오래되고 가장 값진 것은 송아지 가죽에 기록된 것입니다.
그 외에도 진흙이나 돌, 그리고 금속 등에도 기록되었습니다.
그러면 요한은 파피루스에 기록했을까요?
400년대까지 파피루스는 이집트뿐만 아니라 그리스-로마에까지 가장 보편적인 필기 용지로 쓰였습니다.
그러니까 파피루스가 요한이 기록한 종이일 가능성이 아주 높습니다.
플리니우스는 파피루스로 종이를 제조하는 법에 대해 기술하였는데 줄기 속의 섬유층을 제거하고 세로로 길쭉한 조각으로 잘라 이들을 나란히 놓은 다음 그 위에 다른 조각들을 직각으로 교차시킵니다.
이렇게 2층으로 쌓은 시트를 풀이 죽게 압축시킵니다.
말리는 동안 아교 같은 수액이 시트를 서로 접착시킵니다.
마지막으로 시트를 망치로 두드린 다음 햇볕에 말립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종이는 순백색을 띠는데 잘 만들어진 것은 반점 · 얼룩 및 다른 결함 등이 없습니다.
시트를 풀로 붙여 두루마리로 만드는데, 대개 하나의 두루마리에 시트가 20개 이상은 들어가지 않습니다.
파피루스는 8, 9세기에 다른 식물 섬유로 종이를 제조하게 되기 전까지 이집트의 아랍인들이 재배하였고 문방구를 만드는 데 사용하였습니다.
3세기경에 이르러 유럽에서는 파피루스가 저렴한 벨럼으로 대체되기 시작했지만 12세기경까지는 책이나 공문서를 만들기 위해 간간이 쓰였다고 합니다.
이제 확실히 요한이 요한계시록을 기록한 종이는 파피루스라고 보아도 틀림없을 것입니다.
초기 로마 제국은 두루마리를 사용했습니다.
두루마리는 주로 파피루스지로 이루어졌습니다.
이집트와 그리스인들이 사용했던 파피루스지(紙)는 곧이어 코덱스로 대신하게 되었습니다.
코덱스(codex)는 책자 모양으로 철해져 있었으며, 오늘날 서적의 원형입니다.
그리고 파피루스지는 양피지로 대체되었습니다.
양피지는 양가죽뿐 아니라 송아지 등의 가죽으로 만들었는데 글씨를 쓰기에 보다 적합한 표면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코덱스는 종이 코덱스가 나오기까지 양피지 코덱스가 주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요한은 양피지를 사용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파피루스에는 어떤 잉크가 쓰였을까요?
사용된 잉크는 기름의 그을음에 고무 용액을 섞어서 만든 검은 잉크와 빨간 진흙이나 산화철로 만든 빨간 잉크를 사용하였습니다.
필사도구는 끝이 뾰족한 나무 막대기를 연필모양으로 다듬어 사용하였습니다.
양피지가 파피루스지를 대체합니다.
양피지는 소, 양, 염소의 가죽으로 만든 재료입니다.
양피지 이름은 처음 사용된 지역 소아시아의 페르가몬에서 유래하였습니다.
양피지를 만드는 법은 소, 양, 염소 가죽을 벗겨서 기름과 털을 제거한 후 석회로 소독하고 무두질을 한 다음에 펼쳐 말려서 광택을 내어 사용했습니다.
양피지의 장점은 가죽이라 견고하여 보존을 오래할 수 있고 양면에서 글을 쓸 수가 있다는 점입니다.
단점은 비싸고 무겁다는 점입니다.
파피루스를 대신해 양피지 코덱스가 성경을 필사하는 중요한 재료로 쓰이게 됩니다.
어디에서나 오래 보관할 수 있다는 한 가지 이유만으로도 충분합니다.
필기구가 펜과 잉크라는 오늘날의 필기구로 정착된 것은 기원전 2000년 경 갈대펜이 등장하면서부터입니다.
먹즙을 찍어 문자를 기록하는 방법을 발명함으로써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게 된 것입니다.
풀이나 갈대의 끝을 풀어서 사용하던 초기의 형태는 점점 변화되어 줄기를 쪼개거나 한쪽 끝을 경사지게 깎은 다음 안쪽에 먹이 잘 흘러내리도록 홈을 내어 사용하는 방식등으로 발전하였습니다.
길게 평소에 궁금하던 부분을 다루었습니다.
당시에 성경 기자들은 무엇을 가지고 기록을 했을까?
그들은 적절히 그 시대의 문화 산물들을 사용했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바로 이해하려면 문화사를 공부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등 일곱 교회에 보내라 하시기로
요한은 본 것을 기록하여 소아시아 일곱 교회에 보내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요한은 일곱 개의 두루마리를 준비하여 일곱 교회에 편지를 보낼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어마어마한 재정이 소요되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달랑 한 편의 편지를 써서 일곱 교회에 보냈을 것입니다.
요한은 요한계시록의 전체 내용을 써서 보낸 것도 아닙니다.
요한은 일곱교회에 관련된 부분만 보냈을 것입니다.
그게 합리적인 추론입니다.
요한계시록을 서간 형태로 보냈다면 그것은 어마어마한 양이었을 것입니다.
파피루스에 얼마 정도의 글을 쓸 수 있을까요?
주후 2-8세기 경에 쓰여진 파피루스 사본 76점이 이집트의 사막에서 발견 되었습니다.
이 중에 가장 오래된 사본이 요한복음의 단편이었습니다.
주후 125년에 쓰여진 것으로 학자들은 추정합니다.
요한복음 사본은 한 면에 요한복음 18장 31-33절이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다른 면에는 18장 37-38절이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요한이 계시록을 기록할 때 파피루스 한 면에 달랑 2절 내지 3절만 기록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을 20장을 엮어 두루마리를 만들었습니다.
이 시대에 성경을 기록한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 일을 나이 많은 요한이 했습니다.
요한이 이 일을 직접 할 수 있었을까요?
당연히 조수가 필요했을 것입니다.
우리는 사도 바울이 직접 성경을 기록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대필자가 있어 사도 바울이 불러주는 것을 대필자가 기록했습니다.
그리고 그 끝에 사도 바울이 큰 글자로 서명을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요한계시록도 그렇게 기록되었다는 것을 충분히 합리적인 추론으로 가능합니다.
요한이 요한계시록을 보낸 곳은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입니다.
요한이 직접 전달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언제 전달했을까요?
전달한 내용은 무엇일까요?
우리가 요한계시록 전체를 적어 보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관련 부문을 파피루스 두루마리나 혹은 양피지 두루마리였을 것입니다.
양피지는 고가였고 아직 코덱스가 나오기 전이니까 두루마리 형태였겠죠.
양피지는 장점이 양면에 다 기록할 수 있었다는 점입니다.
파피루스에 기록할 때보다는 더 많은 글자를 적어 넣을 수가 있었습니다.
어쨌든 일곱 교회에 보낸 내용은 여기서부터 요한계시록 3장까지의 내용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봅니다.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는 어떤 동네였을까요?
이곳에 등장하는 지역들은 다 소아시아 지역에서 유명한 도시들이었습니다.
유명한 도시들에는 다 유대인들이 모여 사는 지역들이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회당을 중심으로 옹기종기 모여 살았습니다.
유대인들에게는 안식일에 걸을 수 있는 거리가 겨우 900여 미터만 허락되었습니다.
물론 유대인들이 걸을 수 있는 거리에 대한 다른 자료들도 있습니다.
가장 잘 알려진 것은, 아마도 약 1킬로미터 정도의 “안식일에 걸을 수 있는 거리”에 관한 지침일 것입니다.
안식일에 걸을 수 있는 거리로 여호수아 3장 4절에 근거하여 2000규빗으로 규정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전도를 할 때 회당으로 갔습니다.
회당은 항상 열려 있었습니다.
요즈음 교회들은 예배시간에 맞추어 문을 개방합니다.
다른 시간에 문을 닫아 겁니다.
여러 가지 이유로 이런 일이 일어납니다.
유대인들은 하루에 세 번 기도했습니다.
세 번 기도할 때 회당에 나와 기도했습니다.
회당은 기도의 집이었습니다.
당시는 아직 교회가 유대교로부터 분리되기 이전입니다.
1차 분리는 주후 70년에 예루살렘이 멸망할 때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완전한 분리는 아닙니다.
완전한 분리는 주후 132년 바르코바 반란때의 일입니다.
그러니까 교회와 회당이 완전히 분리하기 이전의 상황입니다.
부분적인 갈등은 있었을 것입니다.
교회가 급성장할 수 있는 배경은 당시 디아스포라 유대인은 800만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 중에 순수한 유대인은 400만 정도였습니다.
나머지 400만은 개종한 유대인이었습니다.
이방인이 유대인으로 개종하려면 할례를 받아야 하는 과정을 거쳤습니다.
그래서 개종하지 않고 경건한 이방인으로 남은 이방인들이 많았습니다.
당시 로마 제국의 인구는 8000만 정도였다고 합니다.
유대인은 그 10%에 해당하였습니다.
상당히 많은 유대인들이 로마제국내에 흩어져 살았습니다.
기독교인들은 개종의 조건으로 할례를 받는 것을 없앴습니다.
할례 때문에 유대교로 개종하지 못하던 이방인들이 대거 교회로 들어올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입니다.
점점 교회는 유대교로부터 분리되면서 따로 집회를 가졌을 것입니다.
처음부터 따로 집회를 가진 것은 아닙니다.
그러다가 교인도 늘어나고 분위기가 점점 회당으로부터 분리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게해서 모임 장소를 유력한 성도의 집으로 하였습니다.
기독교인들도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중요한 문제로 대두되었을 것입니다.
예전에 교회는 한 동네에 하나만 있었습니다.
그 교회들은 첨탑이 높게 솟았습니다.
사방에서 볼 수 있는 높이입니다.
그 거리만큼 이동할 수 있는 거리란 뜻입니다.
아마도 그 거리는 오리 정도였을 것입니다.
2km 이상 벗어나지 않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