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법은 장차 올 좋은 일의 그림자일 뿐이요 참 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나 온전하게 할 수 없느니라
그렇지 아니하면 섬기는 자들이 단번에 정결하게 되어 다시 죄를 깨닫는 일이 없으리니 어찌 제사 드리는 일을 그치지 아니하였으리요
1절
율법은 장차 올 좋은 일의 그림자일 뿐이요 참 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나 온전하게 할 수 없느니라
율법의 역할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율법은 장차 올 좋은 일의 그림자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율법은 구약의 제사법을 말합니다.
구약의 제사법은 장자 올 좋은 일의 그림자입니다.
구약의 제사는 다섯 가지로 나누어지죠.
번제, 소제, 속죄제, 속건제, 화목제
이 제사들은 사람들의 짐승을 잡아 드리든가 곡물을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이 제사들을 왜 드리죠.
사람들이 하나님을 알현할 수 있는 자격을 갖기 위해 드리는 것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만나려면 죄가 없어야 합니다.
흠 없는 사람이 되어야만 하나님을 만날 수가 있습니다.
여기서 율법이 하는 역할이 나옵니다.
율법은 사람으로 하여금 죄를 깨닫게 합니다.
죄형법정주의 아시죠.
법 조항이 없으면 죄는 죄가 아니란 뜻입니다.
율법은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이 죄인임을 자각하게 해줍니다.
제사법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의 죄를 깨달은 다음에 그 죄를 처리하는 방법을 말합니다.
짐승을 잡아 그 피로 죄값을 지불하는 것입니다.
원래 죄값은 죄인의 목숨으로 드려야 하는 데 짐승으로 대신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합니다.
짐승을 잡을 때 어떻게 합니까?
제사를 드리려는 사람이 짐승의 머리에 손을 얹습니다.
왜 손을 짐승의 머리에 얹습니까?
자복하고 회개하는 마음으로 손을 얹는 것입니다.
자복은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내가 이런 이런 죄를 저질렀습니다.
회개는 다시는 이런 죄를 짓지 않겠습니다라고 말을 하는 것입니다.
손을 얹는 행위에는 이런 자복과 회개가 내포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죄를 짐승의 피로 덮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인이 하나님께서 나아갈 수가 있습니다.
구약의 제사법은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문입니다.
이 문을 통해서만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제사법은 온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 제사법은 장차 올 좋은 일의 그림자였습니다.
무슨 이야기입니까?
구약의 제사법을 따라 제사를 드린 사람이 다시 죄를 짓지 않나요?
아니죠. 또 다시 죄를 짓습니다.
이 사람은 다시 제사를 드리겠죠.
죄를 지을 때마다 제사를 드려야 합니다.
구약의 제사로는 이 사람이 더 이상 죄를 짓지 않도록 만들지는 못합니다.
해마다 늘 드리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나 온전하게 할 수 없느니라
구약의 제사법은 사람을 온전하게 만들어주지 않습니다.
온전한 사람은 어떤 사람을 말합니까?
온전한 사람은 더 이상 죄를 짓지 않는 사람을 말합니다.
온전한 사람은 항상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더 이상 구약의 제사법을 따라 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죠.
이 사람은 언제나 하나님을 알현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구약의 제사는 사람은 이렇게 온전하게 만들어주지 않습니다.
이 사람들의 삶이 어떨까요?
로마서에 나오는 사도 바울의 말이 이 사람의 상황을 잘 말해줍니다.
로마서 7장 15-24절
내가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내가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것을 행함이라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행하면 내가 이로써 율법이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
이제는 그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더 이상 죄를 짓고 싶지 않은데 그럴 수가 없습니다.
이 사람이 죄를 짓지 않기 위해서는 힘이 있어야 하는데 힘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를 뿌리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죽을 맛이겠죠.
죄를 뿌리칠 수 있는 힘을 구약의 제사법은 사람에게 주지 못합니다.
그러니까 구약의 제사법은 사람이 하나님을 알현하는 임시변통인 것입니다.
2절
그렇지 아니하면 섬기는 자들이 단번에 정결하게 되어 다시 죄를 깨닫는 일이 없으리니 어찌 제사 드리는 일을 그치지 아니하였으리요
무슨 이야기입니까?
온전한 사람은 더 이상 죄를 짓지 않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런데 제사를 드린 사람들은 여전히 죄를 짓고 삽니다.
그래서 매일 제사를 드려야 합니다.
매일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려면 매일 제사를 드려야 합니다.
그 일을 제사장이 대신해 주었습니다.
제사장이 매일 조석으로 번제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죄를 깨닫게 될 때마나 속죄제와 속건제를 드렸습니다.
이렇게 제사를 드린 사람은 하나님을 알현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죄를 자복하고 회개했기 때문입니다.
항상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럴려면 어떻게 되어야 합니까?
하나님의 뜻을 완벽하게 이해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 사람은 전지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100% 아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완벽하게 한다고 해서 항상 하나님의 뜻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에게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살려면 전능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사람이 항상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려면 전지 전능한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전지 전능한 분이 계신데 그분은 바로 하나님이시죠.
죽었다 깨나도 사람은 하나님이 될 수 없죠.
그래서 사람은 완벽하게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 수 없죠.
하나님의 뜻을 살지 못한다는 것은 죄를 짓고 산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이 상태에 있는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장차 올 더 좋은 일이 와야 하죠.
히브리서 기자의 말은 그 더 좋은 일이 이미 왔다는 것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