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셨은즉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우리가 어디까지 순종할 수 있습니까?
진정한 순종은 십자가까지입니다.
십자가는 사형틀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죽음의 자리입니다.
십자가는 그냥 고난이 아닙니다.
십자가는 죽음입니다.
십자가는 내가 죽는 자리입니다.
내 안에서 내가 살면 그리스도는 사시지 않습니다.
이것은 근대 사상과 맞지 않습니다.
근대 사상은 자기를 높이는 것입니다.
근대 사상은 자아를 높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려면 내가 죽어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말했습니다.
십자가는 스스로 죽는 자리입니다.
그래야 순종입니다.
마지못해 하는 것 아닙니다.
기꺼이 하는 것입니다.
자아를 죽이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상대방을 높이고 나를 낮추어야 합니다.
6월이면 지방선거가 있습니다.
나오는 후보들마다 자기가 그 자리에 가장 적합한 사람이라고 높입니다.
그리고 상대방을 낮춥니다.
상대방의 흠집을 찾아내 상대방을 깝니다.
상대방의 좋은 점을 찾아서 상대방을 높이는 사람들은 없습니다.
오늘 세상은 이렇게 상대방을 딛고 위로 올라가려는 사람들 투성이입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의 진정한 제자들은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기독교는 현대 사상과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기독교 단체 안에도 수많은 선거들이 있습니다.
교단마다 총회장을 선거로 뽑습니다.
나온 후보마다 자기를 뽑아달라고 말합니다.
자기가 그 자리에 가장 적합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기독교 연합 단체의 회장 자리도 선거로 뽑습니다.
모두 자기가 적합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한 교회의 담임목사 자리도 이력서를 받습니다.
다 내가 그 자리에 적합한 사람이라고 말하는 서류들입니다.
이렇게 사람을 뽑는 게 합리적일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하는 사도 바울의 말과는 맞지 않는 것 같습니다.
좋은 자리, 높은 자리는 누구가 순종하는 게 쉬워 보입니다.
그래서 그런 자리는 많은 사람들이 나섭니다.
그렇지만 낮은 자리는 가려고 하지 않습니다.
말석은 더더군다나 가지 않으려 합니다.
거기는 내가 아닌 제가 갔으면 하고 바랍니다.
복음성가 가사 중에 초가삼간도 나는 만족하네라는 내용이 있습니다.
오늘 초가삼간을 만족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오늘 내게 주신 환경을 만족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대부분 다 더 나은 환경을 바랍니다.
그래서 그것을 기도의 제목으로 끊임없이 올립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는 데 목적이 있지 않습니다.
오늘 교회가 세상의 소금이 아닙니다.
오히려 썩고 부패하여 냄새를 풍깁니다.
욕망덩어리의 모임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