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어찌 그 보응을 피하리요 이 구원은 처음에 주로 말씀하신 바요 들은 자들이 우리에게 확증한 바니
하나님도 표적들과 기사들과 여러 가지 능력과 및 자기의 뜻을 따라 성령이 나누어 주신 것으로써 그들과 함께 증언하셨느니라
천사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따라 공정한 보응이 이루어졌습니다.
하물며 주께 하신 말씀을 따라 공정한 보응이 이루지지 않을 것이냐고 반문하고 있습니다.
주께서 하신 말씀은 큰 구원에 관한 말씀입니다.
큰 구원에 관한 말씀은 우리들에게 신약성경을 말합니다.
물론 히브리서가 쓰일 당시에는 신약성경은 아직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신약성경의 기초가 되는 예수님의 말씀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들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히브리서가 쓰일 당시에는 예수님은 이 세상에 계시지 않았습니다.
히브리서가 쓰일 당시에는 예수님이 하신 일과 하신 말씀만 남아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목격한 목격자들이 있었습니다.
목격자들 중에는 예수님이 하신 일과 말씀을 기록하는 사람들이 생겼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행적과 말씀을 목격한 목격자들이 나이가 들어 자연사하거나 순교하는 일이 생겨 점점 그 수가 줄어들게 된 것입니다.
여기저기에서 예수님이 하신 일과 말씀을 기록하는 일이 생겼습니다.
지금처럼 교통과 인쇄술이 발달한 시대가 아닙니다.
기록은 주로 필사를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기록을 할 때 주로 기억에 의존해서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기록마다 약간씩 차이가 났습니다.
같은 사건도 사람마다 기억하는 바가 다 다릅니다.
보는 관점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큰 구원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을 말합니다.
이것은 처음에 주로 말씀하신 바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왜 십자가에 죽으셨야만 했을까요?
그리고 왜 예수님은 부활하셔야만 했을까요?
전능하신 하나님은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실 수 있으셨습니다.
아담이 범죄한 이후에 하나님은 다시 시작하실 수 있으셨습니다.
리셋 버튼을 누르고 다시 시작하시면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충분히 하나님이 말씀을 잘 듣는 존재를 새로 만드실 수가 있으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이미 그런 존재들을 만드셨습니다.
그게 바로 동물들입니다.
동물들은 하나님께 반항하지 않습니다.
동물들은 입력된 본능대로 삽니다.
그러니까 동물들은 하나님께 감사하지도 않습니다.
동물들은 반역하거나 반항하지 않고 있는 것을 만족하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인간을 달리 만드셨습니다.
왜 인간을 달리 만드셨느냐면 하나님 나라를 이루시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이루기 위해서는 백성이 필요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으로 작정하신 것입니다.
동물계도, 천사계도 아닙니다.
인간계를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으로 작정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하나님 나라가 법이 아니라 사랑으로 다스려지는 나라가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우리는 법이 절대적인 나라를 역사로부터 배웠습니다.
법이 절대적인 나라는 공포국가가 됩니다.
따라서 이 나라는 노예들만 있게 됩니다.
하나님 나라는 율법이 다스리는 나라가 아닙니다.
성경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속성 중에 하나가 사랑입니다.
우리는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서 완전한 사랑을 봅니다.
하나님은 이 사랑이 하나님 백성들 가운데서 완전하게 되기를 바라셨습니다.
사랑은 어떻게 옵니까?
경험을 통해서 옵니다.
사랑은 체험을 통해서 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완벽합니다.
그런데 에덴 동산의 아담은 이 사랑을 모릅니다.
에덴 동산은 하나님이 아담을 사랑하셔서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아담은 이 에덴 동산에서 만족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아담은 하나님에게 사랑이 아니라 반역을 돌려 주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때 리셋 버튼을 누르시고 다시 시작하실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렇게 되면 하나님은 다시 시작하고 인간은 반역하고 하나님은 리셋 버튼을 누르시고
이렇게 무한 반복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의도하신 나라는 이루어질 수가 없습니다.
결국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 아니라는 뜻이 되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시지만 하나님이의도하신 나라를 이룰 수 없는 변수가 생깁니다.
바로 인간입니다.
에덴 동산의 아담 곧 인류는 사랑을 모르는 존재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존재들에게 사랑을 심어주시길 원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람은 이 땅에서 사랑을 배워가는 존재들입니다.
부모들의 사랑을 통해 사랑을 배웁니다.
선생님들의 사랑을 통해 사랑을 배웁니다.
남녀간의 사랑을 통해 사랑을 배웁니다.
부모가 되어 자식들에게 사랑을 베풂으로 사랑을 배웁니다.
선생님이 되어 제자들이 사랑을 베풂으로 사랑을 배웁니다.
그렇다고 해서 충분한 사랑은 아닙니다.
사랑의 완성은 다른데 있습니다.
바로 원수를 사랑하는 데 있습니다.
배반하는 사람까지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 사랑을 심어주기 위해서 갈보리 십자가가 필요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배우기 위해서는 추락이라고 하는 과정이 필요했습니다.
이것을 타락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반역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하나님을 배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등을 돌리는 것입니다.
인간이 이렇게 등을 돌릴 때 하나님은 무력해 보이십니다.
왜 개입하지 않으셨을까?
그게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심어주시고 싶은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과 사랑을 주고 받는 사이가 되고 싶으신 것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의 결정판입니다.
누가복음은 탕자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또 이르시되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그 둘째가 아버지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버지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
그 후 며칠이 안 되어 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낭비하더니
다 없앤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그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한 사람에게 붙여 사니 그가 그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그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아들이 이르되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하나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
맏아들은 밭에 있다가 돌아와 집에 가까이 왔을 때에 풍악과 춤추는 소리를 듣고
한 종을 불러 이 무슨 일인가 물은대
대답하되 당신의 동생이 돌아왔으매 당신의 아버지가 건강한 그를 다시 맞아들이게 됨으로 인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았나이다 하니
그가 노하여 들어가고자 하지 아니하거늘 아버지가 나와서 권한대
아버지께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하나님은 둘째 아들이 집을 나갈 때 붙잡지 않았습니다.
충분히 붙잡을 수가 있었습니다.
이 아들이 어떻게 될 것인지를 아버지는 알았습니다.
그런데 왜 아버지는 붙잡지 않으십니까?
이 아들이 아버지의 사랑을 깨닫게 되는 것은 타락을 통해서입니다.
추락해 보니까 아버지의 사랑이 비로소 보이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사랑을 배우는 존재들입니다.
우리는 집에서 부모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배웁니다.
우리는 학교에서 선생님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배웁니다.
우리는 사랑을 줄 수 있는 존재로 자라가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