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누구인가가 어디에서 증언하여 이르되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그를 잠시 동안 천사보다 못하게 하시며 영광과 존귀로 관을 씌우시며
만물을 그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셨느니라
하였으니 만물로 그에게 복종하게 하셨은즉 복종하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어야 하겠으나 지금 우리가 만물이 아직 그에게 복종하고 있는 것을 보지 못하고
장차 올 세상은 누구에게 복종하느냐면 인간에게 복종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질문하고 있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사람은 존귀한 존재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왜 존귀한 존재냐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존귀하게 생각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존귀히 여기십니다.
사람이 하나님께는 존귀한 존재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고귀하게 생각하십니다.
천사를 성장하지 않지만 인간은 성장합니다.
육체적으로 뿐만 아니라 영적으로, 지적으로, 정서적으로 성장합니다.
처음에 만들어진 사람은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백지의 인간이었습니다.
천사들이 보기에 보잘 것 없어 보였습니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까?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실 때, 창조 타락 구속 완성이라고 하는 프레임이 있었을지 않을까요?
하나님이 모르셨다면 전지하지 않죠.
하나님의 통제 밖에 있었다면 하나님은 전능하지도 않죠.
하나님은 전지하시고 전능하십니다.
그러니까 창조 타락 구속 완성의 이 프레임을 하나님은 아셨고 하나님의 통제 안에 있는 것입니다.
오늘 내가 당하고 있는 이 고통과 고난이 나를 완성해 가시는 하나님의 계획의 한 부분이라는 뜻입니다.
욥이 그것을 우리에게 증언해 주고 있습니다.
욥이 지금은 우리가 해답을 모를지라도 이 육체를 벗는 날 우리가 알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무엇이기에 그를 생각하십니까?
그냥 생각하는 것 아닙니다.
그를 소중하게 생각하십니다.
하나라도 잃어버리고 싶지 않으십니다.
우리 한 명, 한 명 소중합니다.
찬송가 가사 중에 이런 찬송가가 있습니다.
벌레만도 못한 내가..
아닙니다.
벌레만도 못하게 우리를 못하게 창조한 것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존귀하게 만드셨습니다.
그래서 그를 소중하게 생각하십니다.
얼마나 소중하게 생각하느냐면,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어줄 정도로 소중하게 생각한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만날 때 우리가 소중한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가 진정으로 하나님을 만났다면, 사람을 절대로 업신여기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못 가졌다고, 못 배웠다고 무시하면 안 됩니다.
우리가 사람을 무시할 때 누구를 무시하는 거냐면 그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진정한 크리스천들은 아무도 차별하지 않습니다.
야고보서 2장 1~9절
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너희가 가졌으니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말라
만일 너희 회당에 금 가락지를 끼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오고 또 남루한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이 들어올 때에
너희가 아름다운 옷을 입은 자를 눈여겨 보고 말하되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소서 하고 또 가난한 자에게 말하되 너는 거기 서 있든지 내 발등상 아래에 앉으라 하면
너희끼리 서로 차별하며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냐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들을지어다 하나님이 세상에서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상속으로 받게 하지 아니하셨느냐
너희는 도리어 가난한 자를 업신여겼도다 부자는 너희를 억압하며 법정으로 끌고 가지 아니하느냐
그들은 너희에게 대하여 일컫는 바 그 아름다운 이름을 비방하지 아니하느냐
너희가 만일 성경에 기록된 대로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하신 최고의 법을 지키면 잘하는 것이거니와
만일 너희가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면 죄를 짓는 것이니 율법이 너희를 범법자로 정죄하리라
다음 절을 보겠습니다.
그를 잠시 동안 천사보다 못하게 하시며 영광과 존귀로 관을 씌우시며
현재 인간의 상태입니다.
현재 인간은 천사보다 못합니다.
그런데 잠시 동안만 입니다.
인간의 상태를 잘 설명하는 성경 구절이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3장 24~29절(개역한글)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몽학선생 아래 있지 아니하도다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입었느니라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
여기에 보면 몽학선생이 나옵니다.
몽학선생이 누구냐면 예전 로마제국시대에 로마가 지중해 연안을 정복했습니다.
그렇다고해서 로마의 시민들이 제국의 모든 사람들보다 더 지적인 것은 아니었습니다.
지적으로 로마 시민들은 알렉산드리아나 아테나 사람들보다 떨어졌습니다.
그래서 로마 시민들은 가정 교사로 알렉산드리아나 아테나 사람들을 고용했습니다.
이 때 가정 교사들은 노예들이었습니다.
이들 가정 교사들에게 교육을 받는 사람들은 로마 시민의 자제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커서 일등 시민이 될 사람들이었습니다.
아직은 아니었습니다.
아직은 몽학 선생들 밑에서 공부를 해야만 하는 풋내기들일 뿐입니다.
갈라디아서에 바울은 율법은 몽학선생이라고 말합니다.
몽학 선생은 바르게 성장하도록 가르치고 안내하는 교사들입니다.
율법은 우리가 바르게 성장하도록 이끄는 교사들과 같습니다.
그런데 히브리서는 우리에게는 율법이라고 하는 몽학선생이 있을 뿐만 아니라
또 다른 몽학선생이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천사들입니다.
천사들이 하는 역할은 우리가 바르게 하나님 나라의 시민으로 자라도록 도와주는 존재들입니다.
사람들은 지금은 잠시 동안 천사들보다 못한 것처럼 보입니다.
지적으로도 천사들보다 딸립니다.
로마의 시민의 자녀들이 몽학선생들인 노예들보다 지적으로 딸렸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어느 시점에 가면 영광과 존귀의 관을 쓸 날이 오게 될 것입니다.
그때는 교사와 제자의 관계가 아니라 주인과 노예의 관계가 되는 것입니다.
관계의 역전이 일어나는 때가 오게 됩니다.
사람은 어떤 존재냐면 존귀한 존재들입니다.
그리고 만물이 사람들에게 복종하게 될 것입니다.
원래 만물이 사람에게 복종하게 창조되었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타락한 이후에 만물이 온전히 사람에게 복종하지 않게 된 것입니다.
사람이 온존히 하나님께 복종하게 될 때에 만물도 사람에게 온전히 복종하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