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 사람이 기브아에 와서 사울에게 말하여 이르되 다윗이 광야 앞 하길라 산에 숨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매
사울이 일어나 십 광야에서 다윗을 찾으려고 이스라엘에서 택한 사람 삼천 명과 함께 십 광야로 내려가서
사울이 광야 앞 하길라 산 길 가에 진 치니라 다윗이 광야에 있더니 사울이 자기를 따라 광야로 들어옴을 알고
이에 다윗이 정탐꾼을 보내어 사울이 과연 이른 줄 알고
다윗이 일어나 사울이 진 친 곳에 이르러 사울과 넬의 아들 군사령관 아브넬이 머무는 곳을 본즉 사울이 진영 가운데에 누웠고 백성은 그를 둘러 진 쳤더라
1절에 보면 십 사람이 등장합니다.
십 사람이란 십 동네 사람이란 뜻입니다.
예전에 시집 온 사람을 이름으로 부르지 않고 출신 지역을 붙여 부른 적이 있습니다.
개성댁, 춘천댁이라고 불렀죠.
개성 출신, 춘천 출신이란 뜻입니다.
십 사람이니까 십 출신의 사람입니다.
십 동네를 잘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의 이름이 나와 있지 않습니다.
이 사람이 사울왕을 찾아 왔습니다.
왜 왔습니까?
다윗이 숨은 곳을 신고하기 위해 왔습니다.
왜 신고하러 왔습니까?
신고하면 자기에 좋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이득이 되지 않은 일에 나서지 않습니다.
자기에게 이득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예전에 간첩 신고를 하면 그 포상금이 엄청났습니다.
간첩 신고에 대한 5대 신고를 정리한 것이 있어 퍼왔습니다.
1. 1967년 용대리 사건
인제군 북면 용대리에 거주하고 있는 이상근씨는 간첩을 발견했습니다.
그는 무장공비를 집으로 유인해 시간을 끌고 아내에게 신고를 부탁하게 됩니다.
연락을 받은 7789 수색중대는 즉시 출동해 무장공비 2명을 사살했습니다.
이에 3군단 군단장인 박춘식은 보상으로 14평 기와집을 포함해 닭장, 외양간을 비롯해 식기, 장롱, 양복장과 같은 기구 50점, 탈곡기를 선물하였고 소 2마리, 돼지 2마리, 토끼 10마리를 포상했습니다.
2. 1980년 3월 23일
황중해 일병과 김범규 이병은 한강에서 새벽 철책 근무를 서고 있는데, 근무 교대를 앞두고 황 일병은 멀리서 움직이는 두 개의 물체를 포착하게 됩니다.
무장공비라는 사실을 직감한 황중해 일병은 후임에게 지원을 지시하고 자신은 무장공비를 향해 사격을 가해 총격전이 시작되었습니다.
이후 무장공비는 투입된 20여명의 소대원의 지원사격으로 무장공비 3명이 사살되었습니다.
이에 처음 현장에 있던 2명은 충무무공훈장과 시계, 1,613만원을 받았습니다.
지금으로 보면 작은 금액일지 모르지만, 80년대 기준으로 31평 대치동 아파트가 1,847만원인 것을 감안하면 엄청난 금액을 포상금으로 받았습니다.
3. 1980년 5월 23일
새벽 5시 서울역 앞에 있던 여관에서 종업원으로 일하던 두명의 여성은 1시간 넘게 역 주변을 서성거리는 의문의 남성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를 수상하게 여긴 그들은 근처에 있던 경찰관에게 그 사실을 말했으며, 경찰이 그에게 다가가 신분확인을 요청하자 경찰관에게 독침을 쏘며 저항하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저항 끝에 붙잡힌 수상한 남성은 신원확인이 되지 않은 간첩 첩보원으로 확인되어 두 여성은 포상금으로 5,050만원을 받았습니다.
원래 포상금이 기본 3천만원이였으나, 5월은 간첩 자수 기간으로 2천을 더 받았다고 합니다.
또한, 간첩 지갑에 있던 현금 193만원의 추가 보상도 진행되었습니다.
4. 1980년 6월 20일
대천 앞바다에서 어선으로 가장한 배는 무장간첩이 타고 있었습니다.
이를 본 해저호 선원들은 신속하게 신고해 12명이 572만 6천원을 받았으며, 도망가는 간첩선 퇴로를 발견한 용현호 선원 3명은 88만원을 포상받았습니다.
포상식이 끝난 그들은 민간인으로 처음으로 카퍼레이드로 영광을 이어갔습니다.
5. 1996년 9월 18일
강릉에서 택시를 운전하는 이진규씨는 새벽 해안을 달리고 있었습니다.
바다에서 희미한 불빛을 내는 돌고래 모양의 물체를 발견하게 됩니다.
이를 목격한 이진규씨는 이상한 느낌이 들어 근처로 가보니 시커먼 물체에서 나오는 비병을 듣게 됩니다.
놀라서 도망친 그는 차를 끌고가 파출소에 이 사실을 알리게 되었습니다.
확인결과 검은색 물체는 북에서 온 잠수함으로 26명의 무장간첩이 타고 있었습니다.
이 사건은 전국을 떠들썩 했던 49일 동안 소탕작전이 벌어진 강릉 무장공비 침투 사건으로 최초 목격한 택기기사는 포상금으로 9,450만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작년까지만 해도 간첩 신고 포상금은 최고 5억원, 간첩선 신고 포상금은 최고 7억 5천만원까지 지급했습니다.
올해부터는 대폭 인상되어 간첩, 이적사범, 간첩선 가릴 것 없이 모두 최고 20억원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이 십 사람이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가장 빠른 이동 수단을 동원해서 사울에게 달려갔을 것입니다.
그게 포상금이었든 아니면 관직이었든, 무엇인가 그에게 이득이 되기 때문에 다윗을 신고한 것입니다.
이 말은 곧 간첩신고를 하면 포상금을 준다는 것을 공개적으로 모든 국민이 알 수 있도록 알리는 것처럼, 다윗이 숨은 곳을 알리는 사람에게 포상금을 준다거나 다른 댓가를 주겠다는 것이 모든 이스라엘 사람에게 알려진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지도를 보면 십황무지가 어디냐면 바란 광야보다는 상당히 북쪽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물론 기브아로부터는 상당히 먼 거리에 있는 유다지파의 땅입니다.
왜 다윗이 이렇게 깁숙히 올라왔을까요?
안전한 바란광야를 떠나서 십황무지로 온 것일까요?
다윗은 지난 번에 사울을 살려준 일로 사울의 추격이 완화되었을 것이라고 추측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모험을 감행한 것일테죠.
그렇지만 사울의 다윗에 대한 추격은 더욱 강화된 것입니다.
다윗의 숨은 곳에 대한 신고를 받자 사울은 급히 군사를 이끌고 다윗을 생포하러 십 황무지로 달려갔습니다.
사울왕은 전에 다윗이 그의 목숨을 살려준 것을 잊어 버렸습니다.
부러 잊어버린 것입니다.
생각에서 지워버린 것입니다.
양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럴 수가 없습니다.
양심을 저당잡힌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일이 벌어졌습니까?
사울이 다윗을 잡기 위해 십황무지로 온 일이 다윗에게 발각된 것입니다.
다윗은 확실히 알기 위해서 정탐꾼을 보냈습니다.
간첩이죠.
첩자라고도 하고 세작이라고도 합니다.
손자병법에 보면 지피지기면 백전불태라고 했습니다.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고 했습니다.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 아닙니다.
적의 힘이 막강하면 싸워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 아니라 백번불태인 것입니다.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게 바로 적의 정보입니다.
정확한 정보가 중요합니다.
그래서 정보를 알기 위해 간첩을 보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5절에 보면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다윗이 일어나 사울이 진 친 곳에 이르러 사울과 넬의 아들 군사령관 아브넬이 머무는 곳을 본즉 사울이 진영 가운데에 누웠고 백성은 그를 둘러 진 쳤더라
사울왕이 군대의 수만 믿고 방비를 소홀히 한 것입니다.
자기의 힘을 과신하고 다윗의 힘을 과소평가한 것입니다.
지피지기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은 것입니다.
다윗은 사울의 진영을 알아보기 위해 정탐꾼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사울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사울은 위태롭게 되게 됩니다.
다시 한 번 죽음의 위기를 겪게 됩니다.
다윗이 딴 마음만 먹으면 사울은 이생의 삶을 끝내게 되는 위기를 맞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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