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사무엘상

23장 1~5절

기독항해자 2017. 9. 23. 16:34

사람들이 다윗에게 전하여 이르되 보소서 블레셋 사람이 그일라를 쳐서 그 타작 마당을 탈취하더이다 하니

이에 다윗이 여호와께 묻자와 이르되 내가 가서 이 블레셋 사람들을 치리이까 여호와께서 다윗에게 이르시되 가서 블레셋 사람들을 치고 그일라를 구원하라 하시니

다윗의 사람들이 그에게 이르되 보소서 우리가 유다에 있기도 두렵거든 하물며 그일라에 가서 블레셋 사람들의 군대를 치는 일이리이까 한지라

다윗이 여호와께 다시 묻자온대 여호와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일어나 그일라로 내려가라 내가 블레셋 사람들을 네 손에 넘기리라 하신지라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그일라로 가서 블레셋 사람들과 싸워 그들을 크게 쳐서 죽이고 그들의 가축을 끌어 오니라 다윗이 이와 같이 그일라 주민을 구원하니라


오늘은 본문을 중심으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삶에 대해서 나누고자 합니다.

1절에 보면 그일라라는 동네 이름이 나옵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그일라에 쳐들왔습니다.

그리고 그곳의 타작 마당을 탈취하였습니다.

타작 마당을 탈취한 것이 아니라 타작 마당에서 타작하고 있던 곡식을 탈취한 것입니다.

블레셋 족속은 해양 민족입니다.

이 말은 무슨 뜻이냐면 해적이란 뜻입니다.

물고기를 잡아먹는 어부들이 아닙니다.

무역을 통해 생계를 이어가는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주로 다른 사람들의 물건을 빼앗아서 먹고 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은 농사를 짓지 않았습니다.

곡식도 다른 사람들이 농사를 탈취하여 해결하였습니다.

블레셋이 이스라엘 민족을 완전히 정복하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블레셋은 이스라엘 민족이 열심히 땀을 흘려 일군 곡식이 필요했습니다.

이스라엘이 곡식을 타작할 때가 되면, 올라와서는 이스라엘을 적당히 손보고, 다 빼앗아가는 것이 아니라

적당히 남겨주고 나머지를 빼앗아 갔습니다.

그러니까 그일라에 블레셋이 쳐들어온 것은 연례행사였습니다.

그일라가 어디일까요?


지도를 보면 그일라가 헤브론에서는 북쪽이고 베들레헴에서는 남쪽인 것을 확인할 수가 있습니다.

그일라는 유다지파 땅입니다.

그일라는 뜻이 요새입니다.

그러니까 그일라는 요새였다는 뜻이죠.

그일라는 일찍부터 요새화 되어 있었고 성벽과 성문이 있던 도시였습니다.

이스라엘은 중앙산악지역의 도시들을 점령하여 살고 있었습니다.

그일라는 중앙산악지역 보다는 서쪽으로 치우쳐 있는 중산간지역에 있는 도시였습니다.

해발 약 450미터 정도의 고지에 있는 도시였습니다.

그일라는 지정학적으로 아주 중요한 도시였습니다.

그일라를 점령하면 효과적으로 블레셋으로부터의 침입을 방어할 수 있고

유다지역을 보호할 수가 있었습니다.


다윗은 블레셋의 손아귀에 들어간 그일라를 회복하고 싶었습니다.

그렇지만 객관적인 상황은 그가 움직일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사울왕에게 쫓기는 신세였습니다.

누구를 도와줄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습니다.

다윗이 그일라를 치자고 하자 그를 따르던 사람들의 반대에 부딪쳤을 것입니다.

다윗은 따르던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입니까?

다윗이 아둘람 굴에 피신하고 있을 때 모여든 사람들입니다.


사무엘상 22장 2절

환난 당한 모든 자와 빚진 모든 자와 마음이 원통한 자가 다 그에게로 모였고 그는 그들의 우두머리가 되었는데 그와 함께 한 자가 사백 명 가량이었더라


잘 훈련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한마디로 오합지졸이었습니다.

주류가 아니라 밀려난 비주류인생들이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매사에 부정적이고 비관적인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나중에 다윗의 용사들이 됩니다.

이들이 아직은 용사가 아니었습니다.

그저 훈련되지 않은 오합지졸들이었습니다.

그들을 믿고 나가기에는 위험부담이 컸습니다.

객관적으로는 블레셋을 정복하는 것이 불가능했습니다.

그런데 다윗에게는 믿음으로 골리앗을 넘어뜨린 경험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 번도 지지 않은 승리의 경험이 있었습니다.

다윗이 혼자라면 믿음으로 그일라를 향해서 달려나갔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따르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의 의사를 무시해서는 이제는 안 되었습니다.

다윗은 반대하는 사람들을 향해서 하나님의 뜻을 물어보자고 제안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2절에 보면 하나님의 뜻을 물어 보았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가서 블레셋 사람들을 치고 그일라를 구원하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은 다윗에게 어떻게 말씀하셨을까요?

다윗에게는 하나님의 뜻을 전해주는 하나님의 선지자 갓이 있었습니다.

이번에도 하나님은 선지자 갓을 통해서 말씀하셨을까요?

잘 모르겠습니다.

어떻게 하나님은 다윗에게 말씀하셨을까요?

그냥 무심코 읽어갈 때는 문제가 되지 않는 구절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말씀하신 방법을 생각하니 어려운 말씀입니다.

우리도 종종 다윗처럼 하나님의 뜻을 구할 때가 있습니다.

어떤 선택을 할 때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경우가 우리에게도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도 성경의 기록처럼 분명한 하나님의 인도가 있었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블레셋을 치고 그일라를 구원하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다윗의 이런 생각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이 아닙니다.

바로 다윗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가 어떤 일을 결단할 때 반대하는 사람은 누구냐?

나와 가장 가까운 사람들입니다.

사실 나와 관계없는 사람들은 내가 무엇을 하든 아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반대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나와 가까운 사람들은 나의 결정이 그들의 삶에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나의 결정으로 인해 그들의 삶이 흔들린다면 사람들은 반대를 하게 됩니다.

그일라를 치는 일은 무모한 일입니다.

그것은 비합리적인 계획입니다.

그러니 반대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우리가 이길 수 있는 싸움만 한다면, 그것은 어떻게 하나님의 역사라고 믿을 수 있습니까?

내가 한 일이라고 말하겠죠.

그러니 사람들은 이길 수 있는 싸움만 하려고 합니다.

내가 이길 수 없는 싸움이라면 사람들은 처음부터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이길 수 있는 싸움을 통해서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할 수가 없습니다.

무모한 싸움을 해서 승리를 해야, 하나님의 역사라고 말할 것입니다.


우리는 확실히 이길 수 있는 싸움만 하고 싶습니다.

무모한 싸움에 목숨 걸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하지 못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하려면 무모한 싸움을 해야 합니다.

무모한 싸움을 하려면 목숨을 걸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가는 일은 목숨을 걸고 하는 일입니다.

소명을 받아 나서는 일은 목숨을 걸고 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삶은 목숨을 거는 삶입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하는 일은 목숨을 거는 일입니다.

목숨을 건 사람들에게는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목숨을 건 사람들은 건성건성하지 않습니다.

목숨을 건 사람들은 죽기살기로 합니다.

목숨을 걸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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