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이 성읍을 향한 비탈길로 올라가다가 물 길으러 나오는 소녀들을 만나 그들에게 묻되 선견자가 여기 있느냐 하니
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있나이다 보소서 그가 당신보다 앞서 갔으니 빨리 가소서 백성이 오늘 산당에서 제사를 드리므로 그가 오늘 성읍에 들어오셨나이다
당신들이 성읍으로 들어가면 그가 먹으러 산당에 올라가기 전에 곧 만나리이다 그가 오기 전에는 백성이 먹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가 제물을 축사한 후에야 청함을 받은 자가 먹음이니이다 그러므로 지금 올라가소서 곧 그를 만나리이다 하는지라
그들이 성읍으로 올라가서 그리로 들어갈 때에 사무엘이 마침 산당으로 올라가려고 마주 나오더라
우리에게 일어날 일은 반드시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을 우리는 모를 뿐입니다.
사람들은 피하려고 하지만, 결국에 맞닥치게 됩니다.
그러니까 세상에는 우연이란 없습니다.
우리는 필연의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운명론이라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삶에는 두 가지 영역이 있습니다.
하나는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영역이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영역이 있습니다.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영역은 우리가 최선을 다해서 해결해야 하는 문제들입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영역은 우리가 받아들이고 하나님께 맡겨야 하는 영역입니다.
사람들은 통제할 수 없는 영역의 문제를 가지고 안달복달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게 염려, 걱정, 두려움의 감정입니다.
이 세상에 우연이란 없습니다.
시작은 당나귀를 잃어버린 데서 출발을 했습니다.
사울과 사환이 당나귀를 찾아서 곳곳을 살피며 다녔습니다.
그리고 라마까지 오게 된 것입니다.
집을 출발하면서 라마에 와서 사무엘 선지자에게 당나귀의 형편을 물어볼 것을 계획하고 나선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당나귀를 잃어버린 일이 발단이 되어 사울은 여기까지 마라에 오게 된 것입니다.
이전까지 사울은 라마와 무관한 삶을 살았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을 모른 체 살았던 삶이었습니다.
11절입니다.
그들이 성읍을 향한 비탈길로 올라가다가 물 길으러 나오는 소녀들을 만나 그들에게 묻되 선견자가 여기 있느냐 하니
사울과 사환이 성읍을 향한 비탈길로 올라갔다고 했습니다.
라마는 고지대란 뜻입니다.
높은 곳이니까 올라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반대편에서 물을 길으러 나오는 소녀들을 만나게 됩니다.
물은 낮은 곳에 있습니다.
그러니까 물을 길으려면 낮은 곳으로 내려와야 합니다.
우리 인생에는 이렇게 올라갈 때도 있고 내려가야 할 때도 있습니다.
올라가는 길은 힘이 듭니다.
올라가야만 볼 수 있는 게 있고 누릴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리고 낮은 곳으로 가야만 얻을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생명수입니다.
생명수는 낮은 자만이 누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사울과 사환이 비탈길로 올라가다고 물 길으러 나오는 소녀들을 만났습니다.
성경을 읽어가다 보면, 물 길으러 나오는 소녀들과의 썸씽을 여러 군데서 만날 수가 있습니다.
대표적인 썸씽이
아브라함의 종과 리브가의 만남이 있습니다.
그리고 야곱과 라헬의 만남도 우물에 일어났습니다.
모세와 십보라를 만난 것도 우물이었습니다.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을 만난 것도 우물이었습니다.
12, 13절입니다.
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있나이다 보소서 그가 당신보다 앞서 갔으니 빨리 가소서 백성이 오늘 산당에서 제사를 드리므로 그가 오늘 성읍에 들어오셨나이다
당신들이 성읍으로 들어가면 그가 먹으러 산당에 올라가기 전에 곧 만나리이다 그가 오기 전에는 백성이 먹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가 제물을 축사한 후에야 청함을 받은 자가 먹음이니이다 그러므로 지금 올라가소서 곧 그를 만나리이다 하는지라
우리는 다시 한 번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은 우연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마침 이 날은 산당에서 예배가 있는 날이었습니다.
사무엘 선지자는 라마 뿐만 아니라 몇 곳의 거점 도시를 순회하면서 나라를 다스렸습니다.
그러니까 사무엘 선지자가 다른 곳에 있다가 라마로 돌아온 것입니다.
자, 여기에 산당이 나옵니다.
산당은 중앙 성소를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사시대에 중앙 성소는 실로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엘리 제사장 때 법궤를 빼앗긴 후에 중앙 성소라고 할 수 있는 곳이 존재하지 않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궤는 기럇여아림에서 방치된 채로 오랫동안 있었습니다.
우리는 사무엘 선지자가 하나님의 궤를 옮겨오지 않은 이유를 알 수가 없습니다.
나중에 다윗왕이 하나님의 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겨오게 됩니다.
하나님의 궤와 성막은 분리되었고 성막은 어디로 간 지 알 수가 없습니다.
놉 땅으로 성막에 옮겨갔는데, 놉 땅으로 바로 오지 않은 것 같습니다.
처음 성막은 길갈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길갈에서 실로로 옮겨 왔습니다.
실로가 황폐된 후에는 놉 땅으로 가기 전에 길갈에 머물렀을 것이라고 추정하기도 합니다.
어쨌든 오랫동안 성막과 하나님의 궤는 이스라엘의 신앙의 중심이 아니었습니다.
무슨 일인지 모르지만 사무엘 선지자는 산당 중심의 예배를 드렸습니다.
나중에 이 산당은 영적 부패의 온상이 됩니다.
아이러니 그 길을 사무엘 선지자가 열어 놓았다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시작은 좋은 뜻으로 출발을 합니다.
그렇지만 세월이 흘러 좋은 뜻은 사라지고 관행만 남아 부패의 온상이 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것은 아마도 사무엘 선지자가 직계 제사장 가문의 출신이 아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산당 중심의 예배와 중앙 성소의 예배가 대립하게 된 것은 사무엘 선지자로부터 시작된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