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울이 오기 전날에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알게 하여 이르시되
내일 이맘 때에 내가 베냐민 땅에서 한 사람을 네게로 보내리니 너는 그에게 기름을 부어 내 백성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삼으라 그가 내 백성을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서 구원하리라 내 백성의 부르짖음이 내게 상달되었으므로 내가 그들을 돌보았노라 하셨더니
사무엘이 사울을 볼 때에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보라 이는 내가 네게 말한 사람이니 이가 내 백성을 다스리리라 하시니라
오늘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삶에 대해서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전통적인 교회에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에 대해서 위험스럽게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이단들이 무엇을 들었다는 데서 출발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이 완성된 후에는 하나님은 더 이상 말씀하시지 않는다고 가르칩니다.
성경만으로 충분하다고 가르칩니다.
그런데 장로교에서 가르치는 구원의 서정에 보면 소명에 대해서 말합니다.
이 소명에는 두 가지가 있는 데 그 중에 한 가지가 유효적인 소명입니다.
사람이 구원을 받는 것은 하나님의 유효하신 부르심이 있었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되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 사건 만으로 구원이 충분하지 않다는 뜻이 될 것입니다.
이것은 정통 장로교인이라고 하면 큰 일날 소리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 만으로 구원이 충분하다고 한다면 소명은 불필요한 일이 됩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은 구원의 충분 조건이 아니라 필요 조건이죠.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이 없다면 구원은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이 구원의 필요조건인데 이 구원이 우리의 구원이 되려면 충분조건이 충족되어야 합니다.
그 충분조건이 바로 하나님의 개별적인 부르심, 그것을 소명이라고 부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중심과 부활이 객관적인 사건이라면, 소명은 주관적인 체험입니다.
소명은 지극히 개인적인 일입니다.
그러니까 제3자는 알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제3자가 이 사람이 구원받은 사람인지 아닌지 알 수 있는 결과가 있습니다.
소명을 받은 사람은 중생하게 됩니다.
중생한 사람에게는 두 가지 결과가 일어납니다.
첫번째는 회심입니다.
회심은 방향전환입니다.
과거의 죄된 삶과 단절하는 것입니다.
마음대로 살던 삶을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삶으로 방향을 전환하는 것, 이것이 회심입니다.
그래서 중생한 사람은 달라집니다.
그런데 요즘은 다르지 않아요.
목사들도 다 불신자와 하등 다를 것이 없습니다.
구별하는 것이 어렵습니다.
예전에는 신자와 불신자가 진짜 달랐습니다.
삶이 달랐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전혀 다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더할 때도 있습니다.
두번째는 믿음입니다.
믿어지는 것입니다.
무엇이 믿어지느냐면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이 믿어집니다.
오늘 교회의 문제는 이 믿음을 지나치게 강조하다 보니 회심을 놓치고 있는 것입니다.
믿음을 단지 동의 수준으로 떨어뜨린 것입니다.
믿음은 내가 동의하는 것 아닙니다.
믿음은 내 전생애를 던지는 것입니다.
저도 오랫동안 부목사로 있을 때 새가족부를 담당한 일이 있습니다.
믿음을 이렇게 지적인 동의 수준으로 떨어뜨렸습니다.
그래서 입으로 믿는다고 말하지만 행동으로는 안 믿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 사람들을 행동(행위) 불신자라고 말합니다.
야고보서 기자가 이 행동 불신자들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을 야고보서에서 읽을 수가 있습니다.
자 우리가 구원받는 것은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유효한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기 전에 일어나는 일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전도자들이 전해주는 복음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들을 때, 중생의 사건이 일어납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에게는 이 복음을 들을 귀가 없기 때문입니다.
귀가 없으니까 들어도 믿을 수가 없습니다.
복음을 듣을 때, 성령께서 역사하셔서 중생하게 하십니다.
그러면 이 사람에게 귀가 열리는 일이 일어납니다.
사실 중생, 소명, 회심, 믿음은 순서적으로 일어나는 것 같지만 논리적인 순서이지, 시간의 순서는 아닙니다.
동시에 일어나는 사건입니다.
이런 일이 사람들이 연출해서 일어나는 일이 아닙니다.
성령께서 주도하셔서 일어나는 일들입니다.
여기에 기독교의 신비가 있습니다.
자, 구원의 서정에 있어서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살아가면서 일어나는 일들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수많은 문제들에 봉착하게 됩니다.
어디로 가야할지 선택해야 하는 문제가 발생합니다.
예를 들면 직업을 선택한다고 할 때, 우리는 어떤 선택 기준을 가지고 그것을 선택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저는 목사입니다.
제가 목사가 된 것을 부르심이라고 합니다.
소명이라고 말합니다.
소명은 뜻이 부르심입니다.
구원의 소명에 대해서 말할 때 소명은 지극히 주관적인 체험이라고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이 소명도 주관적인 경험입니다.
내가 목사가 된 것은 하나님의 소명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내가 목사로 부르심을 받았는지 어떻게 알 수가 있습니까?
내가 결정하고 선택한 것입니까?
그렇게 결정하고 선택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것을 성경은 거짓 선지자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이 없는데도 자신이 결정하고 선택하여 목사가 됩니다.
이렇게 해서 목사가 될 수도 있습니다.
누구가 신학대학원에 가서 공부를 하고 안수를 받으면 목사가 될 수 있습니다.
소명과 상관 없이 될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목사가 된 사람과 자신이 결정하고 선택하여 목사가 된 사람은 외적으로는 구분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증명해 보일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소명의 문제는 내 문제일 뿐입니다.
나는 목사로 소명을 받았는지 어떻게 알 수가 있습니까?
소명을 부르심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을 거시는 것입니다.
이 문제를 좀더 들어가기 위해서 요한복음 10장으로 가겠습니다.
1~5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엑 이르노니 문을 통하여 양의 우리에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요
문으로 들어가는 이는 양의 목자라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자기 양을 다 내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 오되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 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하느니라
27
내 양는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
자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는 살아 있는 생생한 관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생각하게 하시고 생각을 통해서 말씀하십니다.
이것을 내면의 소리 혹은 내적 음성이라고 부릅니다.
뉴에이지자들이 이것을 가져가 버렸습니다.
뉴에이지자들이 내면의 소리, 내적 음성을 따라 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하나님의 음성, 하나님의 인도라고 부릅니다.
우리는 새로운 계시를 듣는 게 아닙니다.
오늘 나의 삶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일을 결정할 때 경험과 지식을 기준으로 판단하고 결정할 수가 있습니다.
이것을 합리적인 선택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이렇게 결정하지 않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결정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무엇을 달라고 만 기도하는 것 아니잖아요.
만약 우리의 기도가 무엇을 달라고 만 기도하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달라고 할 때마다 주시는 분이십니까?
대다수의 성도들은 선택해야 할 때, 기도하고 결정을 합니다.
무엇을 결정할지는 지극히 개인적인 일입니다.
제3자는 가타부타 말할 수가 없습니다.
그 사람의 자유이기 때문입니다.
본문의 말씀은 하나님의 음성 듣는 삶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울이 오기 전날에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알게 하여 이르시되
내일 이맘 때에 내가 베냐민 땅에서 한 사람을 네게로 보내리니 너는 그에게 기름을 부어 내 백성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삼으라 그가 내 백성을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서 구원하리라 내 백성의 부르짖음이 내게 상달되었으므로 내가 그들을 돌보았노라 하셨더니
사무엘이 사울을 볼 때에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보라 이는 내가 네게 말한 사람이니 이가 내 백성을 다스리리라 하시니라
사무엘 선지자가 자기 마음대로 사울에게 기름을 부은 것 아닙니다.
하나님의 구체적인 지시를 받고 기름을 부은 것입니다.
사무엘 선지자가 누구처럼 자행자지하며 살지 않았습니다.
사무엘 선지자는 항상 하나님께 묻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았습니다.
자 이 말씀이 하나님이 사무엘에게 말씀하셨는데 더 이상 우리에게 말씀하시지 않는 분으로 들리십니까?
그러면 성경을 읽어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과거에 사무엘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도 사무엘처럼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분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야 하지 않습니까?
그래야 성경이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이 되는 것 아닙니까?
오늘 나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