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성이 진영으로 돌아오매 이스라엘 장로들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어찌하여 우리에게 오늘 블레셋 사람들 앞에 패하게 하셨는고 여호와의 언약궤를 실로에서 우리에게로 가져다가 우리 중에 있게 하여 그것으로 우리를 우리 원수들의 손에서 구원하게 하자 하니
이에 백성이 실로에 사람을 보내어 그룹 사이에 계신 만군의 여호와의 언약궤를 거기서 가져왔고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하나님의 언약궤와 함께 거기에 있었더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지게 됩니다.
그들은 모여서 왜 그들이 전쟁에서 지게 되었는지 토론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한 가지 결론을 얻었습니다.
그것은 법궤가 그들과 함께 있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법궤를 실로에서 전쟁터로 가져오자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법궤는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입니다.
법궤만 있으면 그들은 전쟁에 승리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이런 믿음을 주술적인 믿음이라고 부를 수가 있습니다.
오늘날도 이런 믿음이 공공연하게 행해지고 있습니다.
개업을 하는 집에 갈 때, 성경 구절이 쓰여 있는 족자를 선물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그런 족자들의 내용을 보면, 다 번성에 관한 약속들입니다.
마치 그 족자가 있음으로 그 사업이 번성할 것이라는 착각을 합니다.
사실은 이런 신앙은 유아기의 신앙입니다.
성숙한 신앙인의 자세는 아닙니다.
송구영신 예배를 드릴 때, 성경 구절을 적어 놓은 것을 전교인들에게 나누어 줍니다.
무작위적으로 적어 놓은 성경 구절에는 번성과 축복에 대한 내용들이 대부분입니다.
마치 그 성경구절이 번성과 축복을 가져다 줄 것처럼 착각하게 만듭니다.
이런 신앙을 주술적인 믿음 혹은 미신적인 믿음이라고 부릅니다.
퇴마사들이 사용하는 십자가도 주술적인 믿음입니다.
기독교를 공인했던 로마의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기독교를 공인하게 된 배경이 십자가를 그려 넣은 깃발을 가지고 전쟁터에 나가 승리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 신앙을 주술적인 믿음이라고 합니다.
성경적인 믿음이 아닙니다.
중세시대에 십자군들이 이슬람과 전쟁하러 나갈 때, 십자가를 앞세우고 나갑니다.
성경적인 믿음이 아니라 주술적인 믿음입니다.
로마 카톨릭교회 안에는 이런 믿음이 여러 가지 형태로 존재합니다.
사람들이 성모 마리아상 앞에 기도를 합니다.
이런 믿음을 성물 숭배라고 합니다.
미신적인 믿음입니다.
법궤에 어떤 힘이 있었을까요?
우리는 잘 모릅니다.
우리는 법궤를 더 이상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법궤가 어떤 힘이 있었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저는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법궤는 그냥 궤일 뿐입니다.
궤는 상자를 뜻합니다.
그냥 십계명을 기록한 돌비를 담아 놓은 궤일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궤를 특별히 구별하셨습니다.
이것을 거룩이라고 부릅니다.
하나님께서 거룩하게 하신 것입니다.
궤의 본질이 바뀐 것 아닙니다.
궤는 궤일 뿐입니다.
이 궤는 법궤입니다.
이 안에는 하나님의 법이 기록된 돌비가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법궤도 아니고 돌비도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법입니다.
하나님의 법은 우리가 순종해야 할 말씀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 말씀을 오늘의 현실에서 살아내는 것입니다.
여기서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란 말이 적용됩니다.
순종하는 삶이 없다면 법궤는 주술적인 대상일 뿐입니다.
마찬가지로 순종하는 삶이 없다면 성경 말씀을 기록한 족자는 주술적인 대상일 뿐입니다.
그러니까 족자에 기록한 성경 말씀을 우리가 살아내야 합니다.
그게 바른 믿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