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가 그에게 이르되 네가 언제까지 취하여 있겠느냐 포도주를 끊으라 하니
사람들은 사람의 외양을 보고 그 사람을 판단합니다.
사람들은 외양과 내면이 일치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자신의 판단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나중에 사람들이 자신의 판단이 틀렸음을 알고 후회하게 됩니다.
우리는 사람의 내면을 즉각적으로 알 수가 없습니다.
사람의 내면을 알려면 오랜 동안 친밀한 관계를 유지해야 합니다.
이런 말이 있죠.
'열 길 물 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알 수가 없다.'
우리가 사람의 속을 알 수 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어떤 문제가 발생하였을까?
한 번 생각해보고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사회라는 것 자체가 아예 없었을 것입니다.
매일 만인대만인의 투쟁이 벌어졌을 것입니다.
어쨌든 우리가 다른 사람의 속을 알 수가 없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의 속을 알 수가 있다면 소통이라는 것도 없었겠죠.
내가 마음이 떠올리자마자 모두가 내 생각을 압니다.
그러니 무엇을 말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습니다.
사실 아무도 내 마음을 모르는 것이 감사한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의 생각을 들여본다는 일이 얼마나 끔찍한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오랫동안 경험을 쌓다보면 대충 다른 사람의 생각을 읽을 수가 있습니다.
이러다보면 우리는 억측을 하게 됩니다.
엘리 제사장은 경험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엘리 제사장도 경험에 비추어서 사람을 평가하였습니다.
외모를 보고 사람을 판단한 것입니다.
엘리 제사장이 기도하는 한나의 모습을 유심히 보았습니다.
대충 본 것이 주목해서 바라보았습니다.
이렇게 기도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한나가 기도하는 모습과 비슷한 모습을 여러 번 보았습니다.
바로 술 취한 모습의 사람들입니다.
술 취한 모습의 사람들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유대인 탈무드에 술에 관한 이야기가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최초에 사람이 포도나무를 심고 있는데 악마가 찾아와서 물었답니다.
"사람님, 사람님.... 뭘 하고 계십니까?"
"보다시피 나무를 심고 있소.
이 나무에는 대단히 달콤하고 맛있는 열매가 열리는데 그 열매를 짜서 즙을 마시면 아주 행복하게 된다네"
"아! 그렇다면 저도 사람을 위하여 한몫 하게 해주십시오. 그렇게 좋은 나무에 비료를 주겠습니다."
그리고 악마는 양과 사자, 그리고 돼지와 원숭이를 죽인 뒤에 그 피를 비료로 뿌렸다고 합니다.
그 네 마리의 동물의 피로 자란 나무가 바로 포도나무이고, 그 즙이 포도주랍니다.
술을 마신 사람이 처음에는 양처럼 순하다가 곧 사자처럼 포악해지고 거기서 더 마시면 돼지처럼 더러워졌다가 나중에는 원숭이처럼 남에게 희롱꺼리가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한나의 어떤 모습이 술취한 사람의 모습이었을까요?
술 취한 사람들은 횡설수설합니다.
두서 없이 말을 합니다.
그리고 혼잣말을 합니다.
이 모습이 한나의 모습이 아니었을까요?
술 먹는 사람에게는 특별히 일곱가지 고난이 있다고 합니다.
1. 다툼:술에 취하면 쓸데없는 말을 하여 시비를 일으키고 폭력을 일삼는다.
2. 원망:술에 취하면 좋지 않은 생각들로 꽉 차 존비(존비)를 가리지 않는다.
3. 이유없이 상함:영혼을 위한 일로 몸이 상하면 영광이지만 술취해 다투다 몸이 상하면 부끄러움을 당한다.
4. 병을 얻음:술은 만병의 근원이다.
5. 방탕:마음조차 방탕하여 주색을 탐하다 패망한다.
6. 어지럼증:바로 걷지 못하고 몸을 가누지 못한다.
7. 술에 종노릇함:조그만 일해도 술을 찾을 정도로 인이 박힌다.
술이 사람을 미치게 하여 아픈 줄도 망신당하는 줄도 돈이 없어지는 줄도 다 알지만 술의 사슬에 묶인 양 벗어나지를 못한다.
그러기 때문에 술독에 빠진 사람들은 죽으러 도살장에 끌려가듯 다시 술집으로 향한다.
이 시대가 영적인 암흑기입니다.
영적인 암흑기의 특징 중 하나가 술취한 사회란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무언가 사람들은 세상의 것에 취해 살아갑니다.
어떤 사람들은 권력에 취해서 살아갑니다.
어떤 사람들은 부와 돈에 취해서 살아갑니다.
오늘 교회는 부와 돈에 취해 놀아나고 있습니다.
부와 돈에 취해 놀아나는 교회에 대해서 성경을 어떻게 말하고 있습니까?
요한계시록 3장 16, 17절
-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오늘 한국 교회는 재물도 늘고 돈도 많아졌지만 영적인 부요함은 점점 사그러져 가고 있습니다.
엘리 제사장의 시대가 바로 이런 시대가 아니었을까요?
비록 술 취하지는 않아지만 다른 세상 것에 취해 영적인 부요함을 잃어버린 시대 말입니다.
우리는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고 외모로 취해서는 안 됩니다.
가난하다고 사람을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가난한 사람에 대한 나의 태도가 하나님에 대한 태도라고 성경은 분명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잠언 14:31 가난한 사람을 학대하는 자는 그를 지으신 이를 멸시하는 자요 궁핍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자는 주를 공경하는 자니라 |
잠언 17:5 가난한 자를 조롱하는 자는 그를 지으신 주를 멸시하는 자요 사람의 재앙을 기뻐하는 자는 형벌을 면하지 못할 자니라 |
하나님은 가난한 사람과 하나님을 동일시합니다.
가난한 사람은 사회적 약자를 말합니다.
사회적 약자에 대한 태도가 바로 하나님에 대한 태도입니다.
가난한 사람을 멸시하는 것은 하나님을 멸시하는 행동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