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하여 이르되 만군의 여호와여 만일 주의 여종의 고통을 돌보시고 나를 기억하사 주의 여종을 잊지 아니하시고 주의 여종에게 아들을 주시면 그의 평생에 그를 여호와께 드리고 삭도를 그의 머리에 대지 아니하겠나이다
한나의 기도를 좀 더 살펴보고 가겠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한나의 기도를 이상적인 기도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한나의 기도가 응답받았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한나의 기도를 흉내내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렇게 기도할 수 있습니다.
한나의 기도가 이상적인 기도는 아닙니다.
교과서적인 기도도 아닙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절박한 기도입니다.
믿음의 기도도 아닙니다.
브닌나와 한나 중에 누가 더 축복받은 사람입니까?
우리는 한나가 더 축복받은 사람이라고 부릅니다.
'더'란 말에는 공평하지 않다는 뉘앙스가 있습니다.
한나가 더 축복받아야 할 이유가 있습니까?
한나가 사무엘을 낳기 전까지는 누가 더 축복받은 사람이었습니까?
브닌나가 더 축복받은 사람이었겠죠.
하는 일마다 잘 되고, 자식도 잘 낳고! 아닙니까?
혹시 하나님께서 한나가 이 기도를 하도록 여기까지 인도해 오셨다고 생각하지는 않으십니까?
서원하여 이르되 만군의 여호와여 만일 주의 여종의 고통을 돌보시고 나를 기억하사 주의 여종을 잊지 아니하시고 주의 여종에게 아들을 주시면 그의 평생에 그를 여호와께 드리고 삭도를 그의 머리에 대지 아니하겠나이다
한나가 고통이라고 했습니다.
한나는 충분히 행복할 수 있는 조건이 넘쳐 났습니다.
경제적으로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남편의 사랑을 듬뿍 받았습니다.
감사할 수 있는 조건이 넘쳐 났습니다.
그런데 단 하나의 고통으로 인해 불행했습니다.
이게 사람입니다.
가진 것보다는 갖지 못한 것으로 인해 사람들은 불행해 합니다.
우리는 충분히 감사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한나처럼 우리도 갖지 못한 것으로 인해 불행해 합니다.
그러니까 한나가 브닌나보다 더 믿음이 좋은 사람이라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브닌나에게 억울한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한나라고 하는 여인을 통해서 사무엘이라고 하는 선지자를 보내시기 위해서 준비시킨 것입니다.
왜 한나냐고 물으면 우리는 할 말이 없습니다.
한나에게 자격이 있어서라고 말할 수가 없습니까?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일 뿐입니다.
그런데 한나의 기도에 남다른 점이 있습니다.
서원하여 이르되 만군의 여호와여 만일 주의 여종의 고통을 돌보시고 나를 기억하사 주의 여종을 잊지 아니하시고 주의 여종에게 아들을 주시면 그의 평생에 그를 여호와께 드리고 삭도를 그의 머리에 대지 아니하겠나이다
출애굽기 2장 21~23절
우리를 기도하는 게 있습니다.
고통입니다.
고통이 없으면 이렇게 기도하지 않습니다.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 것입니다.
기도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갑니다.
고통이 없으면 사람은 이렇게 기도하지 않습니다.
삶이 넉넉하고 재정이 풍성해지면 사람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집니다.
언제 우리가 간절히 기도합니까?
고통이 있을 때 사람들은 간절히 기도합니다.
믿음이 좋기 때문에 사람들이 간절히 기도하는 것 아닙니다.
고통으로 인해 절박하기 때문에 기도합니다.
고통이 견딜만하면 기도하지 않습니다.
출애굽기 2장 22,23절은 하나님을 어떻게 소개하고 있습니까?
그들의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 그의 언약을 기억하사 이스라엘 자손을 돌보신 분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한나의 기도를 자세히 들여다보시기 바랍니다.
한나가 무엇을 기도하고 있습니까?
그녀의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 기억하사 돌보시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고통 앞에 우리는 무너질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기도의 무기가 있고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