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천과 삶/크리스천과 독서

명품의 탄생(이광표, 산처럼, 2009)

기독항해자 2012. 8. 29. 11:57

명품의 탄생(이광표, 산처럼, 2009), 2012년 8월에 읽음



이 책은 조선시대부터 지금까지의 컬렉션의 역사와 대표적인 컬렉터들의 삶을 소개하는 데 초점을 맞춘다. 조선 전기의 안평대군부터 문화르네상스를 꽃피웠던 19세기와 식민지시기, 문화재가 위험에 처했던 6ㆍ25, 전문화ㆍ대형화ㆍ국제화되고 있는 현대의 컬렉션 경향과 감동적인 기증 사례, 그리고 최근의 경매 현상까지 컬렉션의 개괄적인 역사를 다룬다. 또한 조선시대와 근대, 현대 등 각 시대마다 대표적인 컬렉터들을 조명하고 있다. 


제1부 컬렉션이란 무엇인가

컬렉션, 그 낭만적인 수집욕

작품을 수집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개인적인 취향의 발로다. 그러다 보니 컬렉션이란 행위에는 다양한 이유가 있다. 순수하게 작품 감상을 위해 켈렉션을 하는 사람도 있고, 수집 자체를 즐기는 사람도 있을 수 있고, 투자 목적으로 즉 돈을 벌기 위해 작품을 모으는 사람도 있다. 이 밖에도 무언가 또 다른 이유를 가지고, 혹은 그 어떤 목적을 위해 켈렉션을 하기도 한다.

컬렉션의 문화적 의미

켈렉션에는 수집 행위가 이루어지는 그 시대의 사회적·문화적 의미가 반영된다. 켈렉션의 동기는 지극히 개인적이지만 각각의 컬렉터의 수집에는 자신도 모르게 그 시대의 문화적 정서와 유행 등이 반영되어 독특한 취향이 풍겨나는 것이다. 그러한 개인적인 수집 취향이 여러 사람들에게 확산되면 그것은 한 시대의 수집 문화의 특징으로 자리잡을 수 있게 되고 그것은 나아가 미술과 문화의 한 특성이 된다.

컬렉션은 박물관, 미술관을 통해 사람들과 만난다. 이는 단순한 공개가 아니라 이를 통해 반영구적인 생명을 얻는 것이라고 해도 좋다. 이처럼 문화재와 미술품은 관객과 만날 때 그 진정한 가치를 발한다. 그렇지 않은 경우, 문화재나 미술품 자체는 귀하고 소중한 것이라고 해도 사회적인 가치를 부여받기는 어렵다. 고립되어 있는 예술은 사회적·문화적 의미를 확보하기 어렵다는 말이다.

제2부 컬렉션의 시작

한국의 컬렉션, 첫 발을 디디다

조선시대 왕실 컬렉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어진과 어필이었다. 유교 국가 조선에서 왕비와 왕비의 초상인 어진은 가장 상징적이고 의례적인 것이었기에 이를 잘 보관하는 것은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왕실에서는 일반적인 서화도 모았다. 사가에서 진상을 받기도 했고 무역을 통해 중국의 서화가 궁중으로 흘러들기도 했다. 또한 왕이 직접화가인 화원들에게 그림을 그리도록 해 수집하는 경우도 있었다.

안평대군, 몽유도원도를 낳다.

조선 전기의 대표적인 인물은 세종의 셋째 아들인 안평대군. 그는 자신이 꿈에서 본 도원을 안견에게 얘기해 그 유명한 몽유도원도를 그리게 한 장본인이다. 시와 그림과 글씨에 조예가 깊었던 안평대군은 옛것을 즐겨 수집했던 사람이었다. 그는 중국 송대와 원대의 회화 수십 점과 화가 안견의 작품을 다수 수집했다.

안평대군은 또한 단순한 컬렉터가 아니라 안견의 후원자이기도 했다. 안견의 작품을 36점이나 소장하고 있었다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안견의 팬이자 후원자였음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다. 안견의 작품을 구입하는 것은 물론이고 안견 작품의 진정한 감상자이자 비평가로서 안견에게 많은 조언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점은 컬렉터의 진정한 면모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낭선군, 컬렉션의 새로운 전기

17세기의 대표적인 컬렉터로는 낭선군 이우가 꼽힌다. 그는 선조의 열두번째 아들 인흥군의 장남이다. 낭성군은 문화, 학문, 예술 등 다양한 분야에 심취하여 이를 두루 감상하면서 각 분야에 영향을 미친 인물로 평가된다. 그는 선원록, 열성어필 등을 편찬했으며 시와 서예에 능했던 예술인이자 서화를 수장했던 컬렉터이기도 했다.

제3부 컬렉션과 조선 후기 문화르네상스

18~19세기 조선의 수집열기

18세기 단원 김홍도의 그림 가운데 ‘포의풍류도’라는 작품이 있다. 벗, 벼루, 서책, 생황, 호로병 등이 있는 방에 앉아 비파를 연주하는 선비의 모습을 그린 것이다. 자화상인지 아닌지를 놓고 논란이 있지만 조선 후기의 고동서화 애호풍조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흥미로운 작품이 아닐 수 없다. 조선 후기 18세기 전후의 고동서화 컬렉션이 활발하게 이루어졌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그림이라고 할 수 있다.

서책에 미친 사람들

수집대상이 다양했지만 당시 사람들이 가장 선호했던 컬렉션의 대상은 역시 책과 골동품, 당대 서화였다. 18~19세기 서책 수집에 있어 대표적인 인물 가운데 한 명은 조선 후기의 문인화가이자 평론가였던 담헌 이하곤(1677~1724)이다. 이하곤은 남종문인화풍의 그림을 그렸고 그림 비평에도 일가견이 있어 공재 윤두서(1668~1715)의 자화상, 정선의 그림 등에 대해 비평을 남기기도 했다. 실학자인 서유구(1764~1845) 역시 빼놓을 수 없는 장서가였다. 서유구는 그의 저서 ‘임원경제지’에서 금석, 골동, 서화를 어떻게 감상, 감별하는지, 책은 어떻게 구입하고 감별하고 수장해야 하는지 등에 관해 소개해놓았다. 선비 관료였던 심상규(1766~1838)도 대단한 장서가였다. 심상규는 정조의 총애를 받았던 문신으로, 문장이 간결하면서도 깊이 있고 필법이 뛰어난 것으로 유명했다.

미술시장이 만들어지다

18세기 미술계의 두드러진 변화 가운데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주문에 의한 창작이다. 당시 주문자이자 후원자들은 권세, 경제력, 문화 감식 능력을 지닌 양반들이었다. 화가들로서는 주문이 들어오고 자신들의 작품을 즐기고 감상하려는 사람이 늘어나는 데에야 신이 나서 그림을 열심히 그리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상품으로서의 미술의 유통이 활발해지고, 나아가 화가와 후원자의 관계가 형성되는 것이다. 이는 화가와 후원자의 네트워크로 이어져 미술의 발달을 가져왔다.

고동서화의 수집 열기는 주문 생산으로 이어져 작가들의 창작 욕구를 북돋아주었고, 감식안과 비평 능력을 지닌 컬렉터들이 등장하면서 미술의 수준을 끌어올렸다. 켈렉터들은 후원자 겸 비평가 역할을 했다. 이런 분위기에 힘입어 단원 김홍도와 겸재 정선 같은 걸출한 화가가 탄생할 수 있었고 결국 18세기 문화르네상스의 원동력이 된 것이다.

화랑가로 자리잡은 청계천변 광교

미술 거래가 활발해지면서 고동서화를 판매하는 점포까지 생겨났다. 가게들은 17세기 후반 지금의 청계천 광교와 수표교 부근에 등장하기 시작해 18세기 후반 무렵 성행했다. 광교 일대에서의 미술품 및 골동품 거래는 19세기 말까지 지속됐다. 국내 화가들의 작품 또는 전해오는 작품이나 골동품의 거래가 많았다. 중국 청나라 북경의 고동서화 거리인 유리창에서 구입해 들여온 중국의 고동서화도 광교 일대에서 활발히 거래됐다.

전문 컬렉터의 출현

미술작품의 유통, 미술시장의 형성은 컬렉션으로 이어진다. 18세기에는 이미 수집자계층, 즉 컬렉터층이 존재했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용어가 사용됐다. 수집뿐만 아니라 후원자의 개념도 형성되어 있었다. 화가는 화지자, 수집가는 축지자, 감상하는 사람은 상지자라고 불렀다. 컬렉션의 대상이었던 고동서화 가운데 고동은 주로 중국의 청동기 출토품, 와당 벼루, 필세, 인장 등이었다.

18세기는 미술을 둘러싼 여러 여건의 변화로 인해 본격적인 컬렉터들이 등장한 시기였다. 18세기 컬렉션을 주도한 세력은 서울 경기 지역의 경화세족이었다. 18세기부터 19세기 초까지의 대표적인 서화 컬렉터로는 사천 이병연, 상고당 김광수(1699~1770), 석농 김광국(1727~97), 능호관 이인상(1710~60), 남공철, 이하곤 등을 들 수 있다.

19세기에는 예술 창작뿐만 아니라 고동서화의 컬렉션에 있어서 중인 출신 여항문인들의 활동이 활발했다. 18세기에도 경화세족과 함께 김광국과 같은 중인들도 컬렉션에 관심을 기울였지만 중인들의 움직임은 19세기 들어 더욱 두드러졌다. 여항문인은 역관, 의원 등의 기술직 중인 등 중서층 중심의 문인들을 일컫는다. 중인 출신의 시인인 유최진(1793~1869), 중인 출신의 역관이자 서화가이며 추사 김정희로 하여금 ‘세한도’를 그리게 한 우선 이상적(1804~65), 중인 출신의 의원이자 화가인 고람 전기, 중인 출신의 서리이자 시인인 나기(1828~74), 중인 출신의 역관이자 서화가인 역매 오경석(1831~79) 등이 19세기의 대표적인 중인 컬렉터였다.

김광수, 컬렉터로서의 자의식(자찬묘비명)

좋은 가문에 태어나 번잡하고 호사스러움을 싫어하여 법과 구속을 벗어나 물정에 어둡고 편벽됨에 빠졌다. 괴기한 것을 좋아하는 고칠 수 없는 벽을 가져 옛 물건과 서화, 붓과 벼루, 그리고 먹에 몰입했다. 돈오의 법을 전수받지 않았어도 꿰뚫어 알아서 진위를 가려내는 데 털끝만큼도 어긋남이 없었다. 가난으로 끼니가 끊긴 채 벽만 덩그라니 서 있어도 금석문과 서책으로 아침저녁을 대신했으며 기이한 물건을 얻으면 가진 돈을 당장 주어버리니 벗들은 손가락질하고 식구들은 화를 냈다. (……) 몸이 늙어 죽음과는 종이 한 장 차이이지만 뼈는 썩을지라도 마음은 사라지지 않으리 시시콜콜한 생몰연대는 토끼의 뿔 같은 것 이름과 자를 대지 않아도 나인 줄을 알리라

고람 전기, 창작에서 거래까지

오경석의 친구였던 고람 전기도 19세기를 대표하는 컬렉터다. 그는 재주가 많아 약포를 경영했던 의원이었고 문인화에 빼어난 서화가였으며 그림을 수집하는 컬렉터인 동시에 그림을 파는 중개인이기도 했다. 전기는 계산포무도, 매화초옥도와 같은 문인화로 특히 유명하다.

컬렉션과 조선 후기 문화르네상스

18~19세기 컬렉터들은 주문창작에 그치지 않고 당대의 화가들과 함께 어울리면서 문화적 감성을 주고받고 작가들의 상상력과 창작 욕구를 끝없이 자극했다. 이들은 화가들과 함께 시회를 만들어 모임을 갖고 그 장면을 그림으로 그리도록 했다. 이런 모습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흔적이 당시에 유행했던 아회도다.

제4부 컬렉션과 민족문화의 수호

일제의 문화재 약탈과 경매

이왕가박물관과 총독부박물관 컬렉션

이왕가박물관은 1909년 11월 1일 대한제곡의 제실박물관이란 이름으로 설립됐다. 그러나 그 역사는 190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08년 순종이 덕수궁에서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창덕궁의 바로 옆인 창경궁에 설치한 것이었다. 이후 고려자기, 금속공예품, 조선시대 회화 등 고미술품을 집중 수집해 이듬해인 1909년 11월 1일 창경궁의 동물원, 식물원과 함께 일반인 관람을 허용하면서 공식 개관한 것이다.

제실박문관이 문을 열 때는 창경궁의 양화당, 명정전과 그 행각, 경춘전과 통명전 등 창경궁의 주요 전각을 전시실로 사용했다. 이어 1911년 3월에는 창경궁의 자경전 자리에 이왕가 박물관의 전용 건물을 세웠다. 이왕가박물관은 이후 1938년 덕수궁으로 옮겨갔고 이때 덕수궁의 근대일본미술 진열관과 창경궁 이왕가박물관을 합쳐 이왕가미술관으로 개편했으며 광복 이후 1946년에 덕수궁미술관으로 이름을 바꾸었고 1969년에는 국립중앙박물관에 통합했다.

오타니의 중앙아시아 컬렉션

오타니컬렉션은 일본 교토의 명찰 니시혼간지의 주지 오타니 고즈이가 1902년 9워부터 1910년까지 세 차례에 걸쳐 중앙아시아를 탐험하면서 약탈해온 중앙아시아 유물을 말한다. 이 가운데 1,400여점을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현재 서울 용산의 중앙국립박물관에 남아 있는 중앙아시아 유물은 대부분이 오타니의 컬렉션이다.

오구라의 한국 문화재 컬렉션

오구라 다케노스케. 그는 일제강점기 때 한국에서 우리의 문화재를 약탈하고 수집한 사람이다. 동경제국대학을 졸업한 오구라는 일본에서 우편과 관련된 일을 하다가 한국으로 건너왔다. 경부철도를 다닌 뒤 대구에서 대구전기회사를 설립했다. 이 회사는 얼마 지나지 않아 대흥전기, 남선합동전기로 발전을 거듭해 1910년대 당시 조선에서 제일가는 전기회사가 됐다. 오구라는 자신의 부를 토대로는 1921년경부터 조선의 유물을 수집하기 시작했다. 이후 30여 년에 걸쳐 다양한 경로를 통해 유물을 수집했다. 그는 유물을 수집하면서 “일본의 고대사 가운데에는 의외로 조선의 발굴품과 고미술품을 근거로 하여 비로소 명확해질 수 있는 부분이 많다는 사실에 놀랐다”고 말하기도 했다.

현재 도쿄국립박물관에 소장 중인 오구라 컬렉션의 유물은 모두 1,110건이다. 그 가운데 대부분이 우리의 문화유산으로 일제강점기 때 약탈하고 수집한 것들이다. 오구라 컬렉션 가운데는 일본의 중요문화재로 지정된 8점, 중요미술품으로 인정된 31점이 포함되어 있다. 오구라 컬렉션은 신석기·청동기시대로부터 삼국시대, 통일신라시대, 고려시대, 조선시대의 문화재들을 망라한다.

컬렉션, 민족문화를 지키다

3.1운동 33인의 한 사람이자 서화비평가였던 위창 오세창과 해외로 반출된 우리 문화재를 지키기 위해 엄청난 재산을 기꺼이 바친 간송 전형필, 일본에 가서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를 찾아온 소전 손재형, 밀반출되는 조국의 문화재를 안타까워하며 평생 백자를 수집한 뒤 말년에 국가에 기증한 수정 박병래 등.

오세창, 근대 컬렉션의 큰 산

위창 오세창은 20세기 전반을 대표하는 언론인이자 서화가, 전각가이며, 서화이론비평가이자 컬렉터였다. 그는 전통 문화에 대한 이해와 연구와 창작 그리고 고서화 수집에 혼신을 다 했는데 이는 모두 민족 정신의 발로였다. 그가 민족 대표 33인으로 3·1운동을 이끌었다는 것은 이러한 그의 정신세계를 잘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전형필, 한국미술사를 완성하다

일제에 의한 문화재 약탈이 극성을 부리던 일제강점기, 간송 전형필은 막대한 사재를 털어 우리 문화재를 수집함으로써 민족 정신을 앞장서 지켜낸 인물이었다.

손재형, 세한도를 찾아오다

조선시대 문인문화의 정수로 꼽히는 추사 김정희 세한도는 1844년 59세의 김정희가 유배지 제주도에서 그린 것이다. 자신을 잊지 않고 책을 보내주는 제자 이상적을 위해 그련 보낸 그림이다. 경성제국대학 교수였던 일본인 후지쓰카 지카시, 세한도를 구입한 뒤 1943년 이 그림을 갖고 일본으로 귀국했다. 손재형은 일본에 건너가 100일씩이나 일본인 소장의 집을 드나들고 모리를 조아려서 세한도의 반환을 이루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