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계가 우리에게(이윤희, 예문서원, 2010), 2012년 8월에 읽음
양양 길에서
양양 길 가고 있는 이름 봄 하순이라
동풍은 관청의 버들을 흔들고
기러기 오리들은 못과 내로 흩어지는데
군청 성곽은 높이 웅장하고
다락집 솟을문들이 수풀처럼 우쭐대는구나.
집집이 잘도 수리 정돈하여
앞 가린 주렴들이 반공중에 걸렸으니
이곳은 참으로 번화하여
흉년에도 이러하구나.
예능 익히며 저 사람은 어느 집 도령인가
몸 뒤집으며 멋지게 말달리고
들놀이 아이들은
밝게 웃으며 구불구불 어디로들 가는가.
너희들은 교만과 방탕을 삼갈진대
어찌 하늘의 재앙을 모르고 있는가?
부자가 아침저녁 편안함을 탐하는 동안
가난한 자들은 이미 흩어져 유랑하고
길 가운데 엎어져 죽어도
아내 자식을 구하지 못한다.
높은 벼슬아치들은 어찌 걱정도 없다가
곳간이 비면 할 줄 아는 것이 무엇인가?
가슴 아픈 꼴 볼 때마다
우두커니 서서 한탄만 길구나.
저녁에 돌아오는 말 위에서
한 번 물러나 군수로 나오니하순이라
성글고 게으름이 부끄러운데
군민은 가난하고 봄은 닥쳐 와
마음은 절로 근심에 차네.
동녘 붉은 벼랑에 남은 눈을 지르밟고 나갔다가
저녁노을 풍경 산속에 어지러울 때
신음하며 돌아오네.
봄바람에 잡풀 자라니
사람들은 오히려 그조차 부러워하고,
하늘에 풀려난 새들 한가로워도
나는 함께할 수가 없는데,
여남은 집 작은 마을은 견디다 못하여
별빛 안고 통발 들어 물고기를 잡누나.
이 양반들 거문고 가락 소리
어찌해야 저 민간의 노래 소리를
명랑케 할 수 있을까!
서로 운을 주거니 받거니 노래함
흰머리에 정력은 비록 강하지 못하여도
여러 책을 찾아봄은 남모르게 바라는 것 있음일세.
세상에 나아가고 물러난 일, 같은 학자들의 비웃음 살 만하
일생토록 얻고 싶은 것은 돌아갈 곳 몰라 하지 않음이었네.
고요함 속에서 만물 함께 봄 맞음을 기뻐하건만
옛 성현의 즐거움과 어짊을 이룬 사람 그 누군인가?
서로 갈고 닦아 줄 스승과 벗 없음이 한스러우니
예로부터 무리를 벗어나 혼자 공부하면 쉽게 막히는 사람 된다 하였네.
사물을 연구하고 영심을 간직하니 진리 절로 녹아들어
눈앞에 빛살 쏟아지지 않는 땅 엎구나.
이제야 실천이 참으로 어려움을 알아
어려운 곳에서 어렵지 않으니 차차로 통할 듯도 하구나.
학문은 마땅히 마음공부부터 먼저 하여야 하고
글공부는 하다가 틈나면 시도 또한 익히네.
아홉 길 높이 쌓음 어려운 일 아닌 줄 알려면
평지에서 한 삼태기부터 시작하여야 하리라.
명예와 이욕은 큰 파도처럼 넘실대고 세상살이도 그와 같으니
그 옆 언저리에 붙어 있어 휩쓸려 들어가지 않을 이, 그 누구인가?
이 관문을 뚫고 나면 그제야 잠시 마음이 놓이니
사나이라면 모름지기 땅 위에 사는 선인 되어야 하리.
발을 다치고 불효였음 깊이 걱정한 이는 옛 성현의 제자 악정자였고
연못의 살얼음 조심하라는 지극한 타이름은 예나 이제나 새롭기만 하건만
일찍이 어버이 봉양 잘하는 것이 벼슬살이에 있지 않음 알았더라면
무엇하러 그 해에 힘들여 일을 꼬이게 만들었을까.
어릴 적 집에서 ‘논어’ ‘학이편’을 배우고
늙어지자 참된 맛 가슴을 적시려 하니
어느 누가 아침저녁 나의 잘못 공격하여도
한 일一자 잊지 않고 그 인격 역사에 빛나는 분 섬기네.
안개 속 표범은 깊이 숨어 스스로 얼룩무늬 기르고
악와강에 사는 용의 품성은 하늘나라 살기에 어울리듯
선비의 보배로움은 자리 깔고 앉음에 있으니 어찌 가벼이 일어나 써 버리랴.
마음의 거울 천 번 갈아서 가슴 비치어 시원하네.
예로부터 이제까지 수천 년
이 땅 동쪽 끝, 해 뜨는 변두리에
공·맹·정·주의 책 모두 있었으나
그 영원 정통으로 이어지기에는 인연 없었던 듯 보이네.
자연의 변화 속에는 열흘 붉은 꽃이 없고
꽃이 흐드러지면 열매가 많지 않은데
오늘날 사람들은 앞다투어 글 꽃의 아름다움만 높이니
뿌리와 원줄기 다 없고서야 어디에 쓸 곳이 있으랴.
문장은 진리와 속뜻 내버려 두고 새롭기만을 다투며
경전 풀이는 말꼬리나 이으며 비뚤어지고 곰팡내 나니
눈은 공중에 뜬 꽃에 어리럽고 마음은 속에 낀 안개에 어두우니
가슴 아프구나, 과거 과목이 오늘 사람들 그르침이.
나는 연극 무대 위의 놀음에 오래도록 머리를 묻었다가
몸 돌려 돌아왔으나 도는 예보다 아득히 멀어
먼지 쌓인 책 다시 잡고 늘그막에나 찾으려 하지만
병들고 생각도 힘도 없어 느느니 근심뿐이네.
아침에는 수레 매어 일소를 몰고 저녁에는 옛 책이라.
옛사람들 밭 갈고 책 읽으며 높은 멋 받들었건만
생활 꾸리느라 학업 뺏길 두려움 오늘날 더욱 심해지니
가슴 아프게 하는 것 이욕과 명예만이 아니네.
잔일에 매이던 그 시절 속 시원히 여행 한 번 못 가더니
책 짓는 이제도 가난과 근심의 눈치만 살피지만
마음속 깨달음 있어 기쁘고 즐거운 곳 있을 때만은
맛 좋은 포도주로 원님 자리 바꾸던 그 심정만 하구나.
사람들은 알맹이 없이 무릅쓰기만 하고 있으니 손가락질 받아도 마땅하구나.
알맹이를 얻는 일은 차라리 어린 새가 나는 법 익힘 같은데
답답하구나! 이 말을 누가 알아들으랴.
앉아서 하늘 위에 흰 구름 떠돌아 가는 것만 바라보네.
도산 남쪽에 서당 터를 얻고서
퇴계 시냇가에 웅크려 깃들인지
빛살 같은 세월은 얼마나 흘렀던가.
추운 보금자리 여러 차례 옮겼으나
너무나 허술하여 바람에 쓰러지곤 하였네.
깊은 산속 샘물과 돌, 비록 아쉬워하지만
그 형세 좁아서 끝내 탈인지라 한숨지으며 옮길 곳 찾아서
높고 낮은 곳 아니 다닌 데 없었네.
시내 남쪽에 도산이란 곳 있어서 가까이 숨었으니
아름답고도 뜻밖이로구나.
어제 우연스레 혼자 와 보고는
오늘은 아침부터 다 함께 와 보자 하였네.
이어진 봉오리들 구름 위로 오르고
산허리 끊어져 강가에 기댔으며
푸른 강물은 섬 같은 들판을 거듭 에워싸고
멀리로 멧부리들 뭇 상투 늘어선 듯한데
아래로 한 골짜기 굽어살피니
묵은 빚 갚으려고 바라고 바라다가 이제야 갚은 듯하네.
다소곳 앉아 있는 양쪽 메 사이로는
때맞은 아지랑이 그림 속 들어오는 듯
우거진 푸름에 안개 짙어 구름인 듯
어지러이 울듯불긋함은 비단 융단 말리는 듯
새 울어 아름다운 시 생각나고
샘물 고요해 산 아래 물 솟는 이치 눈에 어리니
마음 느긋이 아름다움 즐김에 족하여
이렇듯 갖추어 주심 대지에 감사하네.
나 이제 벼슬의 굴레 빠져나와
관복일랑 걸어 둔 지 오랜데
숨어 닦음에 어찌 장소가 없으리
땅값은 사들이기에 가볍고
거친 개암나무 덤불 속에 허물어진 옛터 있어서
옛사람의 발바취 오늘도 훈계하고 있느나.
어느 누가 이곳을 차지하였었는지
명예도 책망도 세월 속에 지워졌도다.
서둘러 그려 보나니
담장은 둥글게 둘러쌓고
창문은 깨뜻하고 산뜻이
책과 그림은 현반과 시렁에 넘치고
꽃과 대나무는 느티나무 울타리 사이에 비치게
해와 달은 늦저녁을 깨우치고
몸과 마음은 지킬 만큼 부지런히
속으로 성실하여 세 사지 이로운 벗 바라며
바깥의 부러운 것들 지푸라기인 양 잊으니
이 음악은 저 이름난 흙피리와 대피리의 화음 같구나.
아! 대장부의 어짊이야
쓸모없는 잡초일 수는 없어
님 위하여 남 몰래 노래를 부르나니
태고 적 꾸밈없던 북소리로
장단 한 번 맞추심일랑은 빠트리지 마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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