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인들의 공부법(박희병, 창비, 2004), 2012년 8월에 읽음
배우고 때로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공자)
● 군자가 먹는 데 있어 배부르기를 바라지 않고, 거처함에 있어 편안하기를 바라지 않으며, 일을 부지런히 하고 말을 삼가며, 도가 있는 이에게 찾아가서 자신을 바로잡는다면 가히 학문을 좋아한다고 이를 만하다.
● 배우기만 하고 생각하지 않으면 얻는 게 없고, 생각만 하고 배우지 않으면 위태롭다.
● 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 이것이 곧 아는 것이다.
● 아는 것은 좋아하는 것만 못하고, 좋아하는 것은 즐거워하는 것만 못하다.
● 나는 나면서부터 안 자가 아니요, 옛 것을 좋아하여 부지런히 그것을 추구한 사람일 뿐이다.
● 세 사람이 길을 가면 그 중에 반드시 나의 스승이 있게 마련이니, 훌륭한 사람은 본받고 훌륭하지 못한 사람을 통해서는 자신의 잘못을 고치도록 한다.
● 학문을 하는 것은 산을 만드는 것과 같다. 마지막 흙 한 삼태기를 붓지 않아 산을 못 이루더라도 그 중지하는 것은 내가 중지하는 것이며, 평지에 흙 한 삼태기를 붓더라도 그 나아감은 내가 나아가는 것이다.
천하를 다스리고자 하는 사람은 먼저 그 몸을 다스린다(대학, 중용)
● 대학의 도는 밝은 덕을 밝히고, 백성과 친하며, 지극한 선에 그치는 데 있다. 그침을 안 이후에 뜻이 정해짐이 있고, 뜻이 정해진 이후에 마음이 고요해질 수 있으며, 마음이 고요해진 이후에 처한 바가 편안해지고, 처한 바가 편안해진 이후에 깊이 생각할 수 있으며, 깊이 생각한 이후에 도를 터득할 수 있다. 사물에는 근본과 말단이 있고 일에는 처음과 끝이 있으니, 무엇을 먼저하고 무엇을 나중에 해야 할지를 안다면 도에 가깝다.
● 옛날에 밝은 덕을 천하에 밝히고자 한 사람은 먼저 그 나라를 다스렸으며, 그 나라를 다스리고자 한 사람은 먼저 그 집을 다스렸고, 그 집을 다스리고자 한 사람은 먼저 그 몸을 다스렸다. 그 몸을 다스리고자 한 사람은 먼저 그 마음을 다스렸고, 그 마음을 다스리고자 한 사람은 먼저 그 뜻을 참되게 했으며, 그 뜻을 참되게 하고자 한 사람은 먼저 그 앎을 이루었다. 앎을 이루는 것은 사물을 궁구함에 있다. 사물을 궁구한 후에 앎이 이루어지고, 앎이 이루어진 후에 뜻이 참되게 되며, 뜻이 참되게 된 후에 마음이 바르게 되고, 마음이 바르게 된 후에 몸이 닦이며, 몸이 닦인 후에 집안이 바로잡히고, 집안이 바로 잡힌 후에 나라가 다스려지며, 나라가 다스려진 후에 천하가 평안하게 된다. 천자에서 서민에 이르기까지 모두 자신의 몸을 닦는 게 근본이다. 근본이 어지러운 데 말단이 다스려지는 법은 없다.
● 몸을 닦는 것이 마음을 바르게 하는 데 있다고 한 것은 몸에 분노가 있으면 올바름을 얻지 못하고, 두려움이 있어도 올바름을 얻지 못하며 좋아하고 기뻐함이 있어도 올바름을 얻지 못하고, 근심 걱정이 있어도 올바름을 얻지 못하기 때문이다.
● 사람은 잠시도 도를 떠날 수 없다. 잠시라도 떠날 수 있다면 그건 도가 아니다. 그러므로 군자는 남이 보지 않는 곳에 있더라도 경계하고 삼가며, 남이 듣지 못하는 곳에 있더라도 두려워하고 조심한다. 안 보이는 곳마나 더 잘 드러나는 곳은 없으며, 작은 일보다 더 잘 눈에 띄는 건 없다. 그러므로 군자는 그 혼자 있을 때는 삼가는 법이다.
● 널리 배우고, 자세히 묻고, 신중하게 생각하고, 밝게 분변하고 독실하게 행하여야 한다. 배우지 않으면 모르겠거니와 배울진댄 능하지 못함이 없어야 하며, 묻지 않으면 모르겠거니와 물을진댄 알지 못함이 없어야 하며, 생각하지 않으면 모르겠거니와 생각할진댄 얻지 못함이 없어야 하며, 분변하지 않으면 모르겠거니와 분변할진댄 밝지 못함이 없어야 하며, 행하지 않으면 모르겠거니와 행할진댄 독실하지 않음이 없어야 한다. 남이 한 번 해서 그것에 능하다면 자기는 백 번 할 것이며 남이 열 번 해서 그것에 능하다면 자기는 천 번 할 것이다.
학문이란 안에서 찾는 것이다(정호·정이)
● 학문이란 안에서 찾는 것이다. 안에서 찾지 않고 밖에서 찾는 것은 성인의 학문이 아니다.
● 알면 반드시 좋아하게 되고, 좋아하면 반드시 찾게 되며, 찾으면 반드시 얻게 되리니, 죽는 날까지 공부를 그만두어선 안된다.
● 모르는 것을 부끄러워하여 묻지 않는다면 끝내 모를 것이요, 모른다고 생각하여 반드시 알려고 한다면 마침내 알게 될 것이다.
● 공부하는 자는 그 생각과 포부가 원대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나 실행할 때는 모름지기 자신의 역량을 헤아려 점진적으로 해야 한다. 뜻이 커 마음이 수고로우며 힘은 적은데 소임이 무겁다면 결국 일을 그르치고 말 것이다.
● 생각을 안 하기 때문에 어리석어지고 구하지 않기 때문에 얻지 못하며 묻지 않기 때문에 알지 못한다.
● 널리 배우고, 자세히 묻고, 신중하게 생각하고, 밝게 분변하고, 독실하게 실천해야 한다. 이 다섯 가지 중에 하나라도 빠뜨린다면 올바른 공부가 아니다. 博學之, 審問之, 愼思之, 明辯之, 篤行之, 五者廢其一, 非學也.
공부하는 사람은 기가 가벼워서는 안된다(장자, 송나라 성리학자)
● 사람들은 대게 노성해지면 아랫사람에게 물으려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죽을 때까지 도를 깨닫지 못한다. 또한 남에게 도를 먼저 깨달았다고 자처하기 위해서는 모르는 게 있다고 말하면 안되므로 아랫사람에게 묻지 않는다. 모르는 것을 묻지 않는데서 온갖 병폐가 생기고, 남과 자신을 속이면서 죽을 때까지 도를 깨닫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 마음이 크면 만사가 다 통하고, 마음이 작으면 만사가 다 병이 된다.
● 배움이 이루어지기 전에 변통을 말하기 좋아하면 반드시 우환이 있게 됨을 알아야 할 것이다. 변통이란 가볍게 논의해서는 안된다. 높은 경지에 이르지 않았으면서 성급히 변통을 말한다면 올바른 태도가 아니다.
● 공부하는 사람은 뜻이 작거나 기가 가벼워서는 안된다. 뜻이 작으면 쉽게 만족하고, 쉽게 만족하면 발전이 없다. 또 기가 가벼우면 모르는 것을 아는 체하고 배우지 않을 것을 배운 체한다.
● 박학한 사람은 艱難함을 거쳐 마음이 형통해지도록 해야 한다. 어려움과 험난함을 겪어야 비로소 마음이 형통해진다.
공부는 닭이 알을 품는 것과 같다(주자)
● 만일 아직 학문에 입문하지 못한 상태라면 다그쳐 공부해서도 안되고 쉬엄쉬엄 공부해서도 안된다. 이 도리를 알았다면 모름지기 중단하지 말고 공부해야 한다. 만일 중단한다면 공부를 이루지 못하나니, 다시 시작하자면 또 얼마나 힘이 들겠는가. 이는 비유컨대 닭이 알을 품는 것과 같다. 닭이 알을 품고 있지만 뭐 그리 따뜻하겠는가. 그러나 늘 품고 있기 때문에 알이 부화되는 것이다. 만일 끓는 물로 알을 뜨겁게 한다면 알을 죽고 말 것이며, 품는 것을 잠시라도 멈춘다면 알은 식고 말 것이다.
● 산만한 마음을 수습하는 것이 공부하는 데 긴요하다.
● 학문은 등산에 비유할 수 있다. 사람들은 대부분 높은 곳에 오르고자 하나, 낮은 곳부터 오르지 않으면 결국 높은 곳에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들 있다.
● 학문하는 데는 지극한 정성과 인내가 필요하니, 이 두 가지가 없어서는 안된다. 머리를 굴리며 앞뒤를 따져보는 마음을 가져서는 안된다.
● 공부하는 방법은 다른 게 없다. 다만 책을 숙독하고 정밀하게 생각하기를 오래오래 하다 보면 스스로 보이는 게 있을 것이요. 들은 것을 소중히 하고 아는 것을 실천하기를 오래오래 하다보면 스스로 얻는 게 있을 것이다.
● 문을 나서자마자 길이 천 갈래 만 갈래니, 만일 자기 자신에게 주재하는 마음이 없다면 어떻게 올바로 길을 찾아갈 수 있겠는가.
스스로 깨닫는 것은 일당백의 공부가 된다(왕양명)
● 앎은 실천의 시작요, 실천은 앎의 완성이다. 앎과 실천은 둘로 나눌 수 없다.
● 학문을 깨우쳐주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나 깨우쳐주는 것은 스스로 깨닫는 것보다는 못하다. 스스로 깨닫는 것은 일당백의 공부가 된다. 스스로 깨닫지 못한다면 아무리 깨우쳐주어도 잘 안된다.
학문하는 것은 거울을 닦는 데 비유할 수 있다(이황)
● 이치를 궁구하는 것과 마음을 기르는 것, 이 두 공부는 비록 머리와 꼬리로 서로 이어져 있는 것이기는 하지만 실은 두 가지 공부이니, 절대 둘로 나뉘는 것을 걱정하지 말고 반드시 두 가지를 병행하는 법을 취해야 할 것이다. 후일을 기다리지 말고 지금 당장 공부를 시작할 것이며, 의심하여 머뭇거리지 말고 자신의 형편에 따라 힘을 써야 한다. 마음을 텅 비워 이치를 살필 일이며, 미리 자신의 의견을 정해버려서는 안된다. 차츰차츰 쌓아감으로써 온전히 성숙할 수 있으니 그 효과를 날짜로 따져서는 안되며, 얻지 않고서는 그만두지 말고 죽을 때까지 하는 공부로 삼아야 할 것이다.
● 자기를 위하는 학문이란, 우리가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 도리이고 우리가 마땅히 행해야 할 것이 덕행이라 여겨 비근한 것부터 공부하여 마음으로 깨닫고 몸소 실천하는 학문이다. 남을 위하는 학문이란 마음으로 깨닫고 몸소 실천하는 데 힘쓰지 않고 거짓을 꾸미고 겉치레를 좇아 명성과 칭찬을 구하는 학문이다.
● 무릇 일상생활에서 말을 적게 하고 욕심을 절제하며, 한가하고 고요하고 평온하게 지내야 한다. 그림 감상. 화초 구경, 산수 유람, 물고기와 산새를 완상하는 것 등등의 일도 진실로 뜻을 즐겁게 하고 마음을 기쁘게 할 수 있다면 항상 접하는 것을 싫어하지 말 일이다. 마음과 기운을 늘 조화로운 경지에 두어 어그러지고 착란하여 노여움이 생기지 않게 하는 것이 요체이다. 책을 볼 적에도 마음을 괴롭히는 데까지 이르러서는 안되며 많이 보는 것은 절대 경계해야 한다.
공부하면 성인이 될 수 있다(서경덕)
● 학문에 있어 중요한 것은, 이치를 밝게 보고 일을 정밀하게 처리하는 것이다.
● 그렇다면 어떻게 공부하면 생각도 없고 허물도 없는 경지에 이를 수 있을까? 공경스런 마음을 가지고 이치를 관찰하는 것이 그 방법이다. 공경이란, 마음을 오로지 한 곳에 두어 딴 데에 신경쓰지 않는 것을 말한다. 하나의 사물을 접하면 그 접한 바에 그치고 하나의 일에 응하면 그 응하는 바에 그쳐 다른 사물과 일이 그 사이에 끼여들지 못하게 한다면, 마음이 전일하여 사물이 지나가버리고 일이 끝난 후에 곧 거두어들일 수 있으므로, 그 맑고 깨끗하기가 마치 밝은 거울이 비어 있는 듯할 것이다.
● 단정하게 앉지 않으면 생각이 전일하게 되지 않고 생각이 전일하지 않으면 이치를 궁구할 수 없다.
경은 학문의 시작이요 끝이다(조식)
● 경은 학문의 시작이요 끝이다. 처음 학문을 시작하는 사람으로부터 성현에 이르기까지 모두 경을 주로 함으로써 도에 나아가는 방편으로 삼아야 한다. 학문을 하면서 경을 주로 하는 공부가 부족하면 그 학문은 거짓이 되고 만다. 맹자가 말하기를,
“학문하는 방법은 다른 것이 없다. 놓아버린 마음을 되찾는 것일 뿐이다.”
라 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경을 주로 하는 공부이다. 옛날 뭇 성현들이 남긴 책이 많지만, 이 한 마디가 지극하고 극진하다. 학문하는 사람들이 본심을 잘 거두어들여 오래도록 잃지 않는다면, 온갖 사악함이 저절로 사라지고 모든 이치가 저절로 통할 것이다.
● 사람들은 대부분 불우함을 걱정하지만, 나는 불우함으로 인해 형통할 수 있었다. 여러 번 과거시험에 낙방하여 불우했기에 형통하기를 바라다가 가야 할 길을 찾게 되었고, 그 길을 가다가 본연의 마음을 볼 수 있었으며, 부형의 가르침을 들을 수 있었다. 굶주림 끝에 먹을 것을 얻고 근심 끝에 즐거움을 얻은 셈이니, 나의 불우함을 세상 사람들의 형통함과 바꿀 수 있겠는가? 나는 바꾸지 않으련다.
● 학문이란 모르짐기 스스로 깨침을 귀하게 여긴다. 한갓 책에 의존하여 알게 된 이치일 뿐이고 자기 마음속에서 참되이 깨달은 게 아니라면 결국 아무 소용이 없다. 마음속에서 참되이 깨달은 것은 입으로 말하기 어렵다. 그러므로 학자는 말 잘하는 것을 귀하게 여기지 않는다.
공부를 하지 않으면 아름다운 사람이 될 수 없다(이이)
● 배우지 않는 사람은 마음이 꽉 막히고 식견이 좁다. 그러므로 모름지기 책을 읽고 사물의 이치를 궁구하여 마땅히 나아가야 할 길을 밝힌 다음에야 그 방향이 정확하고 그 실천이 옳을 수 있다.
● 처음 배우는 이는 무엇보다 먼저 뜻을 세워야 한다. 반드시 성인이 되겠노라고 스스로 다짐하고, 조금이라도 자신을 하찮게 여기거나 중도에 물러설 생각을 하지 말아야 한다. 평범한 사람들도 그 타고난 본성은 성인과 똑같다. 비록 그 기질에 있어 맑고 흐리고 순수흐고 잡됨의 차이는 있을 수 있겠지만 참되게 알아 실천하여 잘못된 습관을 버리고 타고난 본성을 되찾는다면, 털끝만큼도 보태지 않더라도 온갖 착함이 다 갖추어질 것이다. 그러니 평범한 사람이라 해서 어찌 성인 되기를 바라지 않을 수 있겠는가?
● 배우는 사람은 반드시 진실한 마음으로 도에 향하고, 세상의 잡된 일로 그 뜻을 어지럽혀서는 안된다. 그런 다음에야 공부하는 기초가 잡힌다, 그러므로 공자께서는 “진실하고 성실함을 으뜸으로 삼아야 한다.”라고 말씀하셨고, 주자는 이를 해석하여 “사람이 진실되고 성실하지 않으면 모든 일이 다 진실하지 못하여 악한 일을 하기 쉽고 착한 일을 하기 어렵다. 그러므로 반드시 이를 으뜸으로 삼는 것이다.”라고 했으니, 반드시 진실함과 성실함을 으뜸으로 삼아 용감하게 공부한 다음에야 성취가 있게 된다.
● 항상 일찍 일어나고 늦게 자며, 반드시 의관을 바르게 하고, 얼굴빛을 엄숙하게 하며, 두 손을 모아 바르게 앉으며, 걸음걸이를 급하지 않고 점잖게 하며, 말을 신중하게 해야 한다. 한 가지 한 가지의 행동을 경솔하게 해서는 안되며, 아무렇게나 지나쳐 버려서는 안된다.
● 몸가짐과 마음가짐에는 아홉 가지 태도보다 더 중요한 것이 없고, 배움에 나아가고 지혜를 더하는 데는 아홉 가지 생각보다 더 중요한 것이 없다.
이른바 아홉 가지 태도라는 것은, 걸음걸이는 무겁게 하고(발을 가볍게 들지 않는다. 그러나 어론의 앞에 나아갈 때는 이에 구애되지 않는다), 손은 공손하게 가지며(손을 아무렇게나 늘어뜨리지 않는다. 아무 할 일이 없으면 마땅히 단정하게 모으고 함부로 움직이지 말아야 한다), 눈은 바르게 뜨며(눈매를 안정시켜서 똑바로 바라보고, 흘겨보거나 곁눈질해서는 안된다), 입은 다물고 있으며(말을 할 때나 음식을 먹을 때가 아니면 입을 움직이지 말아야 한다), 말소리는 조용히 하며(기운을 바르게 가져 재채기나 기침 따위의 잡된 소리를 내지 않는다), 머리는 곧게 들며(머리를 똑바로 하고 몸을 꼿꼿히 하며, 이리저리 돌리거나 기우뚱하게 해서는 안된다), 숨소리를 정숙하게 하며(숨쉬기를 잘 조절해야 하며 소리를 내서는 안된다), 서 있는 모습은 의젓해야 하며(한 쪽으로 기을지 않게 똑바로 서야 하며 덕스러운 모습이 있어야 한다), 얼굴빛은 위엄이 있게 한다(얼굴빛을 단정히 하여 태만한 기색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른바 아홉 가지 생각이라는 것은, 볼 때는 환히 볼 것을 생각하고(보는 데 편견이나 욕심이 없으면 환해서 보이지 않는 것이 없다), 들을 때는 똑똑하게 들을 것을 생각하고(듣는 데 가리는 게 없다면 분명하여 들리지 않는 것이 없다), 안색은 온화하게 가질 것을 생각하고(얼굴빛은 온화하여 노여운 기색이 없어야 한다), 태도는 공손할 것을 생각하고(몸가짐은 단정하고 엄숙해야 한다), 말은 진실될 것을 생각하고(한 마디 말을 하더라도 진실되고 신실해야 한다), 일할 때는 조심할 것을 생각하고(한 가지 일을 하더라도 조심하지 않으면 안된다), 의심날 때는 물어볼 것을 생각하고(마음에 의심나는 일이 있으면 먼저 깨달은 이에게 물어서 모르는 것이 없도록 해야 한다), 화가 날 때는 곤란하게 될 것을 생각하고(화가 날 때는 반드시 자신을 징계하여 이치로써 자신을 억제해야 한다), 이득이 생기면 의리를 생각해야 한다(재물이 생기면 반드시 의로운 일인가 아닌가를 판단하여 의리에 합당할 때만 받는다)는 것이다.
항상 이 아홉가지 태도와 아홉 가지 생각을 마음에 두어 그 몸가짐을 단속해야 하며, 잠시라도 몸가짐과 마음가짐을 함부로 해서는 안된다. 또 이것은 앉은자리 한 쪽에 써 붙여 놓고 수시로 볼 일이다.
● 예가 아니면 보지 말고, 예가 아니면 듣지 말며, 예가 아니면 말하지 말고, 예가 아니면 행동하지 말라. 이 네 가지는 몸을 닦는 데에 중요한 것이다. 예와 예가 아닌 것을 처음 공부하는 사람이 구별하기는 어렵겠지만 모름지기 이치를 궁구하여 밝혀서 아는 것만이라도 힘써 행하면 반쯤은 된 것이다.
● 공부라는 것은 일상생활과 일 속에 있다. 평소에 행동을 공손히 하고 일을 공경히 하며 남을 진실되게 대하는 것, 이것이 곧 공부라고 할 수 있다. 책을 읽는 것은 이 이치를 밝히고자 해서이다.
● 일이 있으면 사리에 맞게 처리하고 책을 읽을 때는 성실한 마음으로 이치를 궁구해야 한다. 그 외에는 늘 고요히 앉아 마음을 가다듬어서 아무러 잡념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고, 정신이 맑아 혼매함이 없도록 해야 한다. 이른바 “공경으로써 마음을 바르게 한다”는 것이 이런 것이다.
● 마땅히 몸과 마음을 바르게 가져 겉과 속이 한결같게 하고, 그윽한 데 있더라도 드러난 곳에 있을 때와 같이 하고, 혼자 있더라도 여러 사람과 함께 있을 때와 같이 하여 자신의 마음을 저 푸른 하늘의 밝은 해처럼 남들이 환히 볼 수 있게 해야 한다.
● 무릇 책을 읽는 사람은 반드시 단정히 앉아 삼가 공경하여 책을 대하며, 마음을 오로지하고 뜻을 극진히 하여 글의 의미를 정밀하게 이해하고 깊이 생각할 것이며, 구절마다 반드시 실천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 만일 입으로만 읽어서 마음으로 체득하지 못하고 몸으로 실행하지 못한다면 책은 책이고 나는 나니 무슨 이로움이 있겠는가?
● 책을 읽을 때는 반드시 한 가지 책을 숙독하여 그 뜻을 다 알아서 완전히 통달하고 의문이 없게 된 다음에야 다른 책을 읽을 것이요. 많은 책을 읽어서 많이 얻기를 탐내어 부산하게 이것 저것 읽지 말아야 한다.
● 벗을 사귈 때는 반드시 학문을 좋아하고 착한 행실을 좋아하며 바르고 엄격하고 곧고 진실한 사람과 사귀어야 한다. 그러한 친구와 함께 지내면서 충고하고 경계하는 말을 겸허하게 받아들여 나의 부족한 점을 고치도록 한다. 만일 게으르고, 놀기를 좋아하고, 나약하고, 아첨을 좋아하고, 올곧지 않은 사람이면 사귀지 말아야 한다.
훌륭한 스승을 만나려면 묻기를 좋아해야 한다(이익)
● 자신의 덕을 날마다 새롭게 하려면 모름지기 훌륭한 스승을 만나야 하고 스승을 만나려면 모름지기 묻기를 좋아해야 한다. 묻기를 좋아하는 것이야말로 덕을 날마다 새롭게 하는 근본이다. 날마다 새롭게 되는 공부는 오늘 묻기를 좋아하고 내일 묻기를 좋아하여 평생토록 부지런히 노력하여 자만하는 마음을 가지지 않는 데 있다.
큰 의심이 없는 자는 큰 깨달음이 없다(홍대용)
● 반드시 인의에 침잠하고 조용히 예법을 행하여, 천하의 부귀도 그의 뜻을 움직이지 못하고, 가난의 근심도 그 학문하는 즐거움을 그만두게 하지 못하며, 천자도 감히 그를 신하로 삼지 못하고, 제후도 감히 그를 벗으로 삼지 못하며, 세상에 나아가 도를 행할 경우 그 혜택이 온 세상에 미치고 세상에서 물러나 숨을 경우 그 도가 천 년 동안 빛을 발하는 사람이야말로 내가 말하는 선비다. 이런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선비라고 말할 수 있다.
● 글을 읽을 때에는 먼저 그 대의를 보아야 하며 자세한 내용은 그 다음에 미루어 생각해야 한다. 또한 반드시 실천을 염두에 두어야지 글귀에 얽매여서는 안된다. 한 구절을 보더라도 그 듯을 알려고 해야 하며, 한 구절을 알더라도 꼭 실천하려 해야 한다. 하나를 알고 하나를 실천하면 눈과 발이 함께 나아가게 될 것이다.
선비가 독서를 하면 그 은택이 천하에 미친다(박지원)
● 글을 읽고 있는 중에는 긴한 일이 아니면 함부로 응대하지 말 것이며, 바쁜 일이 아니면 자리에서 일어나선 안된다. 하지만 부모가 부르면 책을 덮고 즉시 일어나야 한다. 그리고 손님이 오면 읽던 것을 중단하고 손님을 존중하는 뜻에서 책을 덮어야 한다. 또한 밥이 나오면 책을 덮어야 한다. 책을 읽으면 바로 일어나 산보하고 시간이 많이 지나면 다시 글을 읽도록 한다.
학문은 천하의 공변된 것이다(정약용)
● 생각은 담박해야 하나니, 담박하지 않음이 있다면 얼른 생각을 맑게 할 일이다. 낯빛은 엄숙해야 하나니, 엄숙하지 않음이 있다면 얼른 낯빛을 단정히 할 일이다. 입은 과묵해야 하나니, 과묵하지 않음이 있다면 얼른 말을 그칠 일이다. 행실은 진중해야 하나니, 진중하지 않음이 있다면 얼른 행실을 의젓하게 할 일이다.
● 사나이의 가슴 속에는 늘 가을 매가 하늘로 치솟아오르는 기상이 있어야 하며 건곤을 작게 여기고 우주를 자신의 손바닥 안에 있는 것처럼 여겨야 옳다.
글쓰기는 자신을 속이지 않는데서부터 시작한다(김정희)
● 남이야 동쪽으로 가건 서쪽으로 가건 상관하지 말고, 다만 자기 본분을 살펴 맹렬히 힘을 쏟는 것이 옳다.
● 서법은 사람마다 전수받을 수 있지만, 정신과 흥취는 사람마다 자신이 스스로 이룩하는 것이다. 정신이 없는 글은 그 서법이 아무리 볼 만해도 오래 두고 감상하지 못하며 흥취가 없는 글은 그 글자 체가 아무리 아름다워도 고작 글씨 잘 쓰는 기술자라는 말밖에 듣지 못한다. 흉중의 기세가 글자 속과 행간에 흘러나와 혹은 웅장하고 혹은 넉넉하여 막을래야 막을 수 없어야 하는데, 만일 겨우 점과 획에서만 글씨의 기세를 논한다면 아직 한 단계 멀었다 할 것이다.
상등의 학문은 기로 듣는다(최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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