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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평전, 인간의 길을 밝혀준 스승(금장태, 지식과 교양)

기독항해자 2012. 7. 26. 16:54

퇴계평전, 인간의 길을 밝혀준 스승(금장태, 지식과 교양), 2012년 7월에 읽음



1부 생애와 가족배경

1. 인간의 길을 가르쳐 준 스승-퇴계의 평생

퇴계(1501~1570)는 조선시대 전반기의 마지막 단계인 16세기 중반에 활동하였던 인물로서 조선사회의 통치이념이었던 ‘도학’ 곧 ‘주자학’의 체계를 확고하게 정립하였던 도학의 거장이었다. 한국철학사에서 보면 퇴계는 성리학과 수양론을 두 축으로 삼아 ‘도학’의 철학적 수준에 새로운 지평을 열어주었으며, 한국철학의 특성과 방향을 제시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하였던 우뚝한 봉우리였다. 또한 유교전통에서 보면 그는 도학정신을 생활 속에서 실현하여 인격으로 구현하였던 ‘군자’요 ‘선비’의 모범으로서 유교적 인격의 전형을 제시하였던 인물이다. 퇴계의 평생은 배우는 사람들을 위해 인간 심성의 내면을 정밀하게 돌아보고 성찰할 수 있는 눈을 열어 주었다. 또한 인격형성의 실천방법을 친절하게 제시해주며, 우리 사회에 건강한 인격체를 배양해내기 위해 사람들을 따뜻하게 품어 격려해주고 이끌어주었으니, 한마디로 ‘진정한 스승’이었다.

퇴계의 생애는 대체로 출생에서 33세 때까지의 초년 시기는 유교경전과 주자학 연구에 열중하였던 수학기요, 34세부터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가면서부터 49세 때 풍기군수를 사직하고 귀향할 때까지의 중년 기간은 대체로 관직에 나가 활동하였던 사환기요, 50세부터 70세로 생애를 마칠 때까지의 만년 시기는 비록 관직이 더욱 높아졌지만 끊임없이 사퇴하면서 고향 예안에 돌아와 후진을 가르치며 연구와 저술에 전념하였던 ‘강학기’라는 3시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2. 출생과 가족 배경

퇴계는 1501년 11월 25일 경상도 예안현 온계리에서 진사 이식과 박씨 부인 사이에서 6남매의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퇴계가 태어날 때 부친은 39세였고 모친은 32세였다. 그는 태어난 1501년은 무오사화가 일어난 지 3년 뒤요 갑자사화가 일어나기 2년 전이다. 이처럼 퇴계는 사화의 회오리바람이 거칠게 불고 있던 시기에 태어났던 것이다. 퇴계가 태어난 온계리의 집은 퇴계의 조부 이계양이 지은 노송정으로 온계 시냇물의 동쪽이요 용산의 남쪽에 자리잡은 아늑하고 양지바른 곳이다.

2부 배움의 길 세상의 길

1. 학문에 바친 열정과 배움의 길

퇴계는 여섯 살에 글을 배우기 시작하여 읽을 줄 알게 되었다고 한다. 이 때 이웃에 사는 노인의 집에 가서 천자문을 배웠다. 아침마다 세수하고 머리 빗어 용모를 단정히 한 다음 노인의 집에 가서는 반드시 울타리 밖에서 전날 배웠던 것을 가만히 몇 번씩 외원 본 다음에 들어가 그날의 수업을 받았다 한다.

퇴계의 소년 시절 배움의 길에서는 16세까지 경전 중심의 학습단계와 17세 이후의 도학중심의 연구단계로 뚜렷한 변화의 과정을 드러내 주고 있는 사실이 주목된다. 도학의 공부는 주자학을 학문체계의 기준으로 삼고 있으며 성리설을 비롯하여 경학·예학·수양론·의리론·경세론 등을 중요한 연구과제로 삼고 있다.

2. 선배를 따르고 벗을 사귀며

퇴계의 삶에서 안으로 침잠하여 학문을 닦는 배움의 길과 더불어 또 하나의 중요한 영역은 밖으로 세상에 나가서 사람들을 만나는 교유의 길, 벼슬에 나간 관직의 길, 후생을 가르치는 스승의 길을 걸었던 것이다. 먼저 그가 사람들을 만나 어울리는 교유의 길을 보면, 그의 성품이 매우 차분하여 사방으로 활발하게 교휴하기보다 사람과 사귐에 무척 신중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3. 사림파 선비들에 대한 논평

4. 벼슬길에 남긴 자취

퇴계는 27세 때 가을에 경상도 향시에서 진사시의 초시에 수석하고, 생원 2등의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하였고 이듬해 봄 서울에서 치룬 진사시의 회시에서도 2등으로 합격하였다. 진사시에 합격하고 난 뒤로 퇴계는 과거시험에는 뜻을 두지 않자, 넷째 형이 모친에게 권유하도록 말씀드리자, 모친의 권유를 받고 32세 때 다시 서울에 올라와 문과 별시의 초시에 2등으로 합격하였다. 이듬해 33세 때는 잠시 태학에 유학하고 마침내 34세 때 3월 문과 시험에서 을과의 제1인으로 합격하여 벼슬길에 나오게 되었다. 퇴계가 34세 때부터 벼슬길에 나가 관료로 활동하였던 사환의 시기는 크게 보면 34세에서 44세까지 초기사환시기, 45세에서 49세까지 은거준비시기, 50세 이후의 은거위주시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은거하려는 뜻은 초기사환시기에서부터 이미 지니고 있었지만, 은거준비 시기 이후에는 관직활동에 뜻을 잃고 물러나는데 주력하였음을 보여준다.

5. 굳이 물러나려는 까닭

퇴계가 일관되게 물러나려고 애썼던 까닭을 살펴보면 대체로 다섯 가지 이유를 확인할 수 있다. 1) 나서서 활동하기보다 물러나 고요히 독서하고 사색하기를 좋아하는 기질적 성격, 2) 젊어서부터 병이 많아 신체적으로 허약하였다는 건강상의 문제, 3) 본래 학문에 뜻을 세웠으니, 벼슬을 버리고 학문에 전념하고자 하는 학문의 입지, 4) 자신이 헛된 명성을 얻었지만 높은 벼슬을 감당할 식견과 역량이 부족하다고 말하고 있는데, 정치적 역량의 자각, 5) 사화가 거듭 일어나고 세도 권력이 횡포를 부리고 있는 시대의 정치상황에서 선비로서 나아가고 물러남을 판단하는 출처의 의리에 따른 시국의 인식 등을 찾아 볼 수 있다.

3부 스승의 길

1. 스승의 길-가르치는 즐거움

퇴계는 독서를 통해 학문하는 기쁨만큼이나 천하의 영재들을 제자로 가르치는 즐거움도 누렸다. 그는 제자들에게 학문의 길을 열어 주면서 그 방법을 환하고 자세하게 일깨워 주기에 힘썼다. 퇴계는 자신의 학문방법으로 독서법을 소개하여 성현의 글을 그대로 순순하게 받아들이고 자신의 견해를 고집하는 태도를 버리도록 충고하고 있다.

2. 학문적 토론과 비판적 정신

1) 편지에 펼친 학문적 토론

퇴계는 제자들이나 당시의 학자들과 경학·예학을 비롯하여 성리설, 수양론, 의리론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 활발한 토론을 벌였다. 이처럼 그는 그 시대 학문적 토론을 이끌어가는 중심에 자리잡고 있었으며 또한 도학-주자학의 방향을 제시하고 인식을 심화시키는 역할을 주도 하고 있었다.

(1) 기대승과 사단·칠정 논변

(2) 노수신과 훅흥야매잠에 관한 토론

(3) 조목·율곡과 심학도에 관한 토론

2) 나흠순과 왕양명에 대한 비판

3. 향약 조직과 서원 설립

1) 향약의 조직과 풍속교화

퇴계는 56세 때 ‘향립약조’ 28조를 정하여 향촌공동체의 풍속을 교화하는 법규로 삼고자 하였다. 이것이 곧 예안향약이다. 퇴계는 이 ‘향립약조’의 서문에서 향약의 서원으로 고대에 지방행정을 담당하는 향대부의 직분이 덕행과 도덕과 기능으로 인도하고 따르지 않는 자는 형벌로 규찰하였던 사실을 들고 당시 조선사회의 유향소가 바로 옛날 향대부의 역할을 하는 것을 지적하여. 또한 그는 이러한 향촌의 교화가 필요한 근거로서 선비가 도덕의 근본이 되는 효도·우애·충성·신실을 집안에서 닦아서 그 행실이 향촌에 드러난 다음에 나라에 나갈 수 있었음을 들어, 가정과 더불어 향촌이 도덕을 실행하는 것이 중요함을 강조하고 있다.

2) 서원설립을 통한 교육활동

퇴계가 서원교육에 힘썼던 것은 선비를 배양하는 임무가 바로 국가의 사업일 뿐만 아니라, 선비들이 학문과 덕을 닦아 선비공동체를 수립할 필요성을 인식하였기 때문이라 보인다. 그는 조선사회에서 국가가 성균관과 향교를 세워 선비를 양성하고 있지만, 과거 시험공부에 얽매어 있는 현실의 한계를 지적하며, 지방의 선비들이 스스로 서원을 세워 ‘선현을 존숭하고 도의를 강론함’으로써 선비정신을 배양할 필요성을 강조하였던 것이다.

4. 저술을 통해 전해주는 퇴계의 학문정신

1) 천명도설(1553)

천명도설은 본래 정지운의 저작인데, 퇴계는 53세 때 서울에서 정지운과 토론을 거쳐 천면도와 천명도설을 상당부분 수정하였고, 55세 때 고향에 내려와서도 다시 한 차례 정밀하게 수정을 하였다. 그래서 천명도와 천명도설은 원래 정지운의 저작이지만, 퇴계의 수정을 거친 뒤 수정본은 퇴계의 저술 속에 자리를 잡게 되었다.

2) 주자서절요(1556)

퇴계는 주자의 전집인 주자대전 속에서 특히 편지를 중시하여, 48권에 달하는 주자의 편지 가운데 학문과 삶에 절실한 편지들을 선발하여 14권으로 간추려 ‘주자서절요’를 편찬하였다. 그는 55세때 ‘주자서절요’의 편차를 정하고 여러 제자들에게 나누어 베껴 쓰도록 하였으며, 56세 때 편찬을 마쳤고 58세 때 서문을 지었다.

3) 자성록(1558)

퇴계는 58세때 자신이 제자와 후학들에게 보낸 편지들 가운데 남언경·김백영·정유일·권호문·김부륜·이이·황준량·기대승·노수신에게 보낸 편지 22편을 골라서 ‘자성록’을 편찬하고서는 항상 책상 위에 두고 성찰하며 사색하는 자료로 삼았다.

4) 성학십도(1568)

성학십도는 퇴계가 68세의 만년에 선조 임금에게 올렸던 것으로서, 그의 원숙한 철학정신이 응집하여 결정을 이루고 있는 그의 대표작이다. 성학이라는 근원적으로는 ‘성인을 이루기 위한 학문’이라는 뜻으로 학문을 목표를 제시하는 것이며 현실적으로는 ‘성왕이 되기 위해 제왕이 닦아야 할 학문’이라는 양면적인 뜻을 가지고 있다. 성인의 학문으로서는 모든 사람이 닦아야할 학문의 기준이 되는 것이며 제왕의 학문으로서는 특히 군주가 닦아야할 인격적 표준을 제시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4부 생활의 풍경과 인간적 품격

1. 가정을 다스리고 자손을 훈계하며

1) 가족관계의 도리

(1) 부모자식의 도리

유교를 가장 간결하게 정의하여 ‘인간의 자기수련을 통한 사회질서 실현의 방법’ 곧 ‘수기·치인의 도리’라고 할 수 있다. 이때에 한 개인으로서 자신과 인간관계의 사회라는 두 영역이 제시된다. 자신과 사회라는 두 영역을 연결시켜주고 매개시켜주는 영역이 바로 가정이다. 곧 가정은 자신을 형성하는 기반이 되고 사회로 나가는 통로가 된다. 퇴계도 자신의 인격과 학문을 배양하는 뿌리를 가정에 두고 있으며 그 사회적 활동의 출발점도 가정에서 찾고 있다.

퇴계는 “부모가 그 자식을 사랑하는 것을 자애라 이르고 자식이 그 부모를 섬기는 것을 효도라 이른다. 효도와 자애의 도리는 하늘의 본성에서 나온 것으로 모든 선의 으뜸이니, 그 은혜가 지극히 깊고, 그 윤리가 지극히 무겁고, 그 정감이 가장 절실한 것이다.”라고 지적하였다. 효도와 자애의 인륜이 바로 하늘에서 나온 천륜이라는 궁극적 근거를 확인해주고 있는 것이다.

(2) 부부의 도리

부모자식의 관계가 가정의 질서에 기준이 되며 줄기를 이루는 것이라면 남편아내의 관계는 가정의 성립에 기초가 되며 뿌리를 이루는 것이라 대조시켜 볼 수 있다. 퇴계는 가정 안에서 부모자식 사이와 부부 사이라는 두 가지를 핵심적 조건으로 확인하고 어느 한 쪽에만 치우치지 않고 균형을 이루는 것을 강조하며 각각의 상관관계를 해명하였다. 부모자식의 사이가 하늘인간의 관계처럼 수직적 질서의 기준이라면 남편아내의 관계는 인간존재의 형성조건으로서 수평적 조화의 기준임을 드러내고 있다. 그렇다면 하늘인간관계가 절대적 기준이지만, 남편아내의 인간생성을 전제적 조건으로 하는 만큼 생성의 순서에서는 남편아내가 부모자식에 선행하는 것임을 밝히고 있다.

(3) 형제와 친족의 도리

형제는 한 부모로부터 태어나 같은 혈기를 받았으모 가장 친밀한 관계이다. 퇴계는 장횡거가 서명에서 “백성은 나의 동포이다”라고 언급한 사실을 근거로 동포를 형제로 확인하고 있다. 형제는 같은 부모에게서 태어났지만 조상으로 올라갈수도록 형제가 넓어지며 마침내 온 백성을 형제로 인식하는데 이르니, 형제 의식의 확장을 극진히 하고 있다. 가정에서는 형제가 같은 부모의 자녀이지만 세계에서는 백성이 다 함께 하늘과 땅을 부모로 하는 형제의 관계라는 것이다.

2. 고요하고 한가로운 거처

3. 생활 속의 운치와 풍류

1) 산과 물에서 놀고

퇴계는 학문경향에서도 특히 몸과 마음을 단속하는 수양의 실천에 힘썼을 뿐만 아니라, 그의 인품이 지닌 기질적 조건도 한적하고 고요함을 좋아하는 맑은 기상의 인물이었다. 그는 14세 때부터 도연명의 시를 좋아하고 그 사람됨을 흠모하였다.

2) 꽃과 나무를 노래하며

퇴계의 말과 행동에는 언제나 고요하면서 단정한 엄격성과 부드러우면서 화평한 포용성을 지녔지만, 동시에 자연의 그윽한 풍경과 철따라 피는 꽃나무에 까지 세심하게 관심을 기울여 사랑하는 시적 세계의 정겨운 운치를 지녔다. 퇴계는 그가 살던 집 뜰에는 솔, 대, 매화, 국화 등 겨울 추위의 시련 속에서도 고고한 지조를 지켜 절개를 상징하는 꽃과 나무를 심어 벗 삼고 즐거워하는 운치를 보여주고 있다. 퇴계는 꽃나무가 가운데서 특히 매화의 맑고 그윽한 향기에 깊은 애정을 가졌다. 그는 매화를 읊은 많은 시를 남겨 매화시만 107수에 달하여 그 가운데 91수를 ‘매화시첩’으로 편찬하기도 하였다.

3) 노래와 춤으로 감흥을 일으키다

퇴계는 노래와 춤에도 세심한 관심을 기울였다. 그의 생활 속에서 가장 큰 즐거움의 하나는 시를 읊조리는 것이요 시를 읊조리는 것이 이미 노래하는 가영이었다.

4. 인간적 품격과 덕성

1) 자신을 단속하는 절제력

한평생 그의 모습과 태도는 한결같이 단아하고 차분하여 수양에 의해 절제된 몸가짐과 마음가짐을 보여주었다. 글씨도 어지러운 글씨를 싫어하며, 반드시 정자로 쓰는 단정함을 지켰다. 동료 선비들과 모임에서도 다른 선비들이 흩어져 눕거나 다리를 뻗어 쉬기도 하며 풀어져 있었지만 그는 단정한 모습과 자세를 흩트리지 않았다. 우아한 선비로서 그의 기품은 하루 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어려서부터 자신을 단속하여 몸에 배었던 것임을 보여준다.

2) 온화함과 겸허함

이 시대의 대표적 선현들의 인품을 특징적으로 규정한다면, 남명이 강직한 의미를 가장 잘 드러내주고, 율곡은 예리한 지성을 가장 잘 드러내주며, 퇴계는 온화하고 어진 덕을 가장 잘 드러내주는 경우라 비교해볼 수 있다. 그만큼 퇴계는 예법을 엄격하게 지키는 도학자이지만, 예법이나 의리로 남의 허물을 비판하는데 엄격한 인물이 아니라, 누구나 따뜻하게 감싸주는 포용력을 지닌 인격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