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 만큼 보이고 보는 만큼 느낀다(최영도, 기파랑), 2012년 7월에 읽음
최영도 변호사의 유럽 미술관 기행『아는 만큼 보이고 보는 만큼 느낀다』. 수백 점 수천 점씩 전시되어 있는 유럽의 미술관에서 작품들을 다 보려고 욕심을 냈다간 자칫 아무 것도 기억에 안 남을 수 있다. 저자는 미술 감상은 양이 아니라 질이라고 강조하면서, 여유롭고 능숙하게 미술관을 산책하는 법을 보여준다. 이 책은 루브르 박물관과 오르세, 오랑주리, 마르모탕, 피티, 우피치, 프라도 미술관에서 핵심적인 작품들만 선정해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다. 특이한 점은 일본국립서양미술관인데, 여기에는 19세기 중엽 사실주의부터 20세기 초 프랑스 근대미술의 주요한 흐름에 속하는 작품 365점이 전시되어 있어 범주에 포함되었다. 저자는 어려운 전문 용어 대신 재미있는 주제와 쉬운 해설로 독자들에게 미술 작품 감상의 길을 안내하고 있다.
미술가가 아닌 비전문가의 눈으로 보고 있기 때문에, 비전문인도 쉽게 따라갈 수가 있다. 미술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것을 알려주는 길라잡이와 같다.
마쓰카타 컬렉션(일본국립서양미술관)
1910년대 말에서 1920년대 초에 걸쳐 파리에 호방한 동양인 한 사람이 나타나 큰 파문을 일으켰다. 마쓰카타 고지로(1865~1950)라는 일본인이었다. 1865년 메이지 천황의 원훈이며 총리대신을 역임한 마쓰카타 마사요시의 3남으로 태어나, 당시 가와사키 조선소 사장으로 재임 중인 사업가였다. 그는 제1차 세계대전 전후에 조선 붐을 타고 벌어들인 막대한 자금을 쥐고는, 신사복 정장에 실크햇을 쓰고 신사용 지팡이를 휘두르며 호기 있게 파리 화랑가를 휩쓸고 다녔다. 그는 파리 뿐만 아니라 런던과 유럽의 주요 도시들에서도 미술품을 사들였다. 마쓰카타는 파리 교회 지베르니에 있는 모네의 집에도 찾아가 그와 친교를 맺었다. 일본문화에 경도되어 우키요에(에도 시대 말기에 유행한 서민적 풍속을 그린 다색 목판화)를 광적으로 소집하던 모네는 아끼던 자기 작품 18점을 우키요에와 교환했다. 마쓰카타는 장차에 일본에 설립한 미술관을 ‘공락미술관’이라 이름 짓고 부지를 선정하여 건물설계도 의뢰했다.
마쓰카타 파산 후 마쓰카타 컬렉션은 거친 파도를 만나 다양한 운명에 처하게 된다. 마쓰카타 컬렉션은 일본으로 가져온 것, 런던에 갖다 둔 것, 파리에 보관한 것 등 세 가지로 분류된다. 일본으로 가져왔던 수백 점의 회화 등은 마쓰카타의 파산으로 부채를 정리하기 위해 거의 전부 은행으러 넘어갔고, 은행이 이를 매각한 탓에 흩어져 버리는 운명이 되었다. 그중 일부는 ‘이시바시 컬렉션’으로 들어가 1952년 브릿지스톤 미술관이 개관되면서 일반에게 공개되었다. 그밖에도 많은 서양근대회화작품들이 일본의 기업이나 미술애호가들의 손으로 넘어갔다. 런던에 보관되어 있던 수집품은 1939년 창고에 불이나서 아깝게도 전부 소실되고 말았다. 남은 것은 마쓰카타가 고율의 관세에 격분해 프랑스로 돌려보낸 것을 비롯해 파리 국립로댕미술관에 보관시키는 것뿐이었다.
1945년 전쟁이 끝난 후 프랑스 정부는 마쓰카타 컬렉션을 적국의 자산이라는 이유로 몰수했다. 마쓰카타는 1950년 여든다섯 살에 파란 많은 일생을 마감했다. 마쓰카타 컬렉션은 1951년 9월 8일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의 체결로 일단 프랑스 국유재산으로 편입되었다. 그러나 일본국 전권대사 요시다 시게루는 프랑스 전권대사에게 마쓰카타 컬렉션을 돌려받고 싶다고 요청했다. 마쓰카타 컬렉션은 국제교섭의 무대에 올려져 그때부터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파릉사는 마쓰카타의 유지를 실현하고자 하는 일본 측 관계자들과 여러 해애 걸쳐 절충을 거듭한 끝에 다음과 같은 까다로운 조건을 제시했다. “그 수집품은 위대한 예술가들이 제작한 인류 공동의 문화유산이므로 전쟁으로 인해 모든 시설이 파괴된 일본에 그냥 돌려 보낼 줄 수 없다. 그러므로 첫째 그 미술품을 수장하고 전시함에 어울리는 미술관을 건립할 것, 둘째 그 미술관은 프랑스 정부가 추천하는 건축가에 설계를 위촉하고 프랑스 정부관리가 감리토록 해야 할 것”이라 했다.
일본정부는 도쿄국립박물관, 도쿄예술대학. 도쿄도미술관 등이 모여 문화벨트를 형성하고 있는 우에노 공원 옆 부지를 제공하고 대대적인 모금운동을 벌였다. 건물 설계는 20세기 최고의 건축가 중 한 사람이여 국제적으로 명성이 드높은 스위스 태생의 프랑스 건축가 르 코르뷔지에(1887~1965)에게 위촉했다.
루브르 박물관
루브르는 건물의 총 면적이 약 20만m², 소장품은 약37만여점, 전시장의 길이가 약20km나 된다. 런던의 영국박물관,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생트페테르부르크의 에르미타주 박물관과 더불어 세계 최대의 박물관 중 하나다. 루브르의 모든 유물을 자세히 보려면 일생 동안 보아도 다 보지 못한다고 한다. 루브르의 소장품은 런던의 영국박물관과 더불어 그 대부분이 제국주의시절 식민지나 약소국가에서 약탈해 온 문화재다. 루부르의 소장품은 고대 이집트 유물관, 고대 오리엔트 유물관, 고대 그리스·에르투리아·로마 유물관, 회화관, 조각 전시관, 공예품 전시관, 그래픽 아트관 등 8개 전시관에 나뉘어 있다. 전시된 유물만 대충 보려고 해도 아마 1주일간 하루 종일 부지런히 뛰어다녀도 모자랄 것이다.
오르세 미술관(프랑스국립근대미술관)
1973년 조르주 퐁피두 대통령은 1900년 파리만국박람회 당시 철도역으로 건축하여 사용하다가 1939년부터 폐역으로 방치되어 있던 건물을 국가 기념물로 지정하고 미술관으로 개조하기로 결정했다. 그 후 프랑수아 미테랑 대통령은 이탈리아 건축가 가에 아울렌티를 기용하여 그 건물을 미술관 용도로 개조했다. 그리고 죄 드 폼 국립미술관 등의 인상주의 회화를 비롯한 19세기의 시각적 미술품들을 옮겨다가 196년 12월 9일 오르세 미술관을 개관했다. 규모는 약 4만 5천m², 전시 작품만 약 4천여 점이다. 이 미술관은 1848년 3월 혁명에서 1914년 제1차 세계대전 발발 전까지 프랑스 미술의 진수를 보여주는 곳으로, 시기적으로는 루브르 박물관과 퐁피두 예술문화센터의 현대미술관을 이어주는 프랑스 국립근대미술관이다.
오랑주리 미술관
이 미술관은 원래 튈르리 정원 안에 있는 식물원 건물에 1827년 개관되었다. 르누아르, 세잔, 드랭, 루소, 마티스, 피카소, 모딜리아니, 로랑생, 위트릴로 등 인상파에 1930년까지의 근대회화가 중심을 이루고, 특히 모네의 수련 연작들 중 가장 큰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클로드 모네는 말년에 수련을 그리는 일에만 집착했다. 모네는 1883년 파리 서쪽 약 84km 지점, 노르망디와 일 드 프랑스의 경계에 있는 지베르니로 이사해, 세상을 떠날 때까지 42년간 그곳에 거주했다. 그는 1893년 특별한 열정으로 그곳 정원 연못에 수련을 가꾸기 시작하면서 그 신비로운 세계에 몰입하여, 죽을 때까지 무려 300여 점의 수련을 그렸다.
마르모탕 미술관
18세기 중엽에 건축관 마르모탕 미술관 건물은 1882년 주식 브로커와 석탄 광산으로 부자가 된 쥘 마르모탕(1829~1883)이 매수하여 저택 겸 수집품 보관소로 사용하다가 1883년 아들 폴에서 상속되었다. 폴 마르모탕(1856~1932)은 나폴레옹 시대의 미술품을 수집해 아바지의 컬렉션에 추가하고 저택을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개조했다. 그러나 자식이 없던 폴은 1932년 저택과 모든 미술품을 박물관의 설립을 목적으로 프랑스 미술 아카데미에 유증했고 1934년 그 저택에 이 미술관이 개관되었다.
루마니아 태생의 의사 조르주 드 벨리오는 화가가 많이 사는 아르장퇴유에서 개업을 하고 회화작품들을 수집하여 자신의 땅에게 상속했다. 1957년 벨리오의 딸 빅토린 도놉 드 몽쉬 부인은 아버지로부터 상속한 모네의 대표작 ‘인상, 해돋이’를 비롯하여 마네, 모네, 피사로, 시슬리, 르누아르 등 인상파 화가들의 작품 20여 점을 이 미술관에 유증했다. 이에 고무된 클로드 모네의 둘째 아들 미셸 모네는 1966년 아버지의 유작 66점과 아버지의 수집품인 피사로, 르누아르, 카유보트, 시슬리의 작품들을 마르모탕에, 지베르니의 저택과 정원을 프랑스 미술 아카데미에 유증했다. 그리하여 마르모탕은 세계적인 인상주의 미술관이자 가장 대표적인 모네 회화의 미술관이 되었다. 이 미술관은 수집가들이 자신의 컬렉션을 아낌없이 나라에 쾌척하여 이룩된 것이다.
피티 미술관, 팔라티나 미술관
피티 궁 안에 있는 피티 미술관은 팔라티나 미술관을 비롯하여 마차박물관 등 도합 7개의 미술관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중 회화와 조각 컬렉션으로 이루어진 2층의 방 33개가 팔라티나 미술관이다. 팔라티나 미술관은 메디치 가문의 레오폴도 추기경과 대공자 페르디난도의 양대 컬렉션을 주축으로, 이 궁전에 살던 로랭, 사보이 가문의 통치자들이 수집한 미술품으로 조직되어 있다. 팔라티나 미술관은 우피치 다음 가는 규모와 내용의 장대한 회화 컬렉션으로서, 라파엘로 11점, 티치아노 14점, 루벤스 10점을 비롯하여 카라바조 등 르네상스와 바로크 시대 대가들의 걸작을 다수 소장하고 있다.
피티 궁전의 회화나 미술공예품들은 메디치 일족의 사람들이 사저를 장식하기 위해 사적으로 수집한 것으로, 우피치에 있는 공적인 수집품과는 구별된다.
우피치 미술관(르네상스 미술의 보물창고)
1546년 이후 코지모 1세는 피렌체 여러 곳에 산재되어 있는 13개 동의 행정관청을 베키오 궁 근처의 한 건물에 모두 통합하여, 좀 더 가까이에서 효율적으로 통제하고 싶어 했다. 그리하여 1559년 당시 화가, 미술사가이며 동시에 가장 탁월한 건축가 겸 도시설계가였던 조르조 바자리를 베키오 궁과 아느로 강 사이에 신축할 새 사무소 우피치의 건축책임자로 임명했다. 바자리는 동관과 서관이 평행으로 나란히 선 두 개의 3층짜리 건물을 남쪽에서 ㄷ자 모양으로 연결한 3면 빌딩을 설계하고 바자리의 회랑도 설치했다. 건축공사는 1560년부터 1580년까지 20년이나 걸렸다. 1574년 코지모 1세와 바자리가 모두 죽은 후, 1581년 베르나르디노 부온탈렌티가 완성했다.
1584년 프란체스코 1세는 동관 3층에 마니에리스모 문화를 집대성한 8각형의 방 ‘트리부나’를 완성하고 베키오 궁과 메디치 궁에 산재돼 있던 국부 코지모, 호화왕 로렌초, 코지모 1세의 수집품 등 메디치의 가장 값진 보물들을 진열했다. 페르디난도 1세는 로마의 빌라 메디칭 소장되어 있던 모든 미술품을 우피치로 옮겨왔다. 1631년 페르디난도 2세는 아내 비토리라 델라 로베레가 친청 부모인 우르비노의 마지막 공작 부부에게서 상속한 티치아노의 ‘우르비노의 비너스’ 등 60여 점의 명화, ‘우르비노의 유산’을 켈렉션에 추가했다. 171년 코지모 3세는 ‘메디치의 비너스’ 등 고전시대의 조각들을 로마에서 옮겨왔다.
우피치의 소장품은 13세기부터 18세기까지의 회화가 주류를 이루는데, 이탈리아 미술 특히 피렌체의 르네상스 미술이 압권이다. 모든 작품은 44개의 전시실에 거의 시대순과 지역별로 진열되어 있다.
프라도 미술관(세계 최고의 회화관)
1785년 카를로스 3세는 건축가 후앙 데 비야느에바의 설계를 채택하여 자연과학박물관을 착공하고, 페르디난도 7세는 1819년 11월 10일 이 건물을 왕립 프라도 미술관으로 개관했다. 건물은 에스파냐 신고전주의 양식을 대표하는 걸작이었으나, 개관 당시의 소장품으로는 에스파냐 화가들의 회화 311점에 불과했다. 그러나 이사벨라 여왕, 카를로스 1세, 펠리페 2세, 펠리페 4세, 카를로스 4세 등 역대 왕들이 개인적인 기호에 따라 열성적으로 수집한 왕실 컬렉션에, 법령에 의해 각 지방의 교회와 수도원에서 모아들인 진귀한 회화들이 추가되어 소장품이 풍성해졌다.프라도는 1868년 혁명으로 이사벨라 2세 여왕이 국외로 망명한 뒤 국가에 귀속되어 국립미술관이 되었다. 현재 프라도의 소장품은 대부분이 회화로 모두 3만여 점에 달한다, 유럽의 여러 미술관들이 회화 외에 조각, 공예 등 여러 장르의 미술품들을 종합적으로 수집 전시해 놓은 박물관 적 성격인데 비해 프라도는 거의 회화작품으로만 이루어진 회화관임을 특징으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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