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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유학의 거장들(한형조, 문학동네)

기독항해자 2012. 7. 23. 11:24

조선 유학의 거장들(한형조, 문학동네), 2012년 7월에 읽음



『조선 유학의 거장들』. 이 책의 저자는 동양과 서양, 전통과 현대, 서구철학과 유불선을 아우르는 폭넓은 사유의 대가이다. 유려한 글쓰기로 우리 철학의 지평을 열어가고 있는 한형조 교수가 10년 만에 신간을 내놓았다. 21세기인 지금도 알게 모르게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조선 유학과 그 핵심 두뇌들을 심층 해부한다. 조선 유학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넓고 깊은 학문이다. 조선 유학의 거장들이 펼쳐 보이는 핵심 아이디어 역시 그 깊이가 짐작하기 어려워 마치 수수께끼와 같다. 이 책은 주기(主氣)와 주리(主理), 이학(理學)과 기학(氣學)과 같이 오래된 학문을 통해 조선 유학 최고수들의 개성의 심층과 연대의 풍경을 보여준다.

1. 1554년 금강산, 청년 율곡과 어느 노승과의 대화

주자학은 본시 불교와의 대결의식에서 태어난 학문이다. 불교를 모르면 주자학을 이해할 수 없다. 율곡은 불교를 거쳤기에 주자학의 문제와 해결, 그리고 독특한 이론 체계를 더 깊고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유교와 불교는 도무지 화해할 수 없는 차이에 불구하고, 근본 지형을 공유하는 바 있다. 둘 다 특히 주자학이 그렇다. 둘 다 ‘발견의 체계’이기 때문이다. 발견의 모델은 이루어져야 할 모든 것이 “이미 자신 속에서, 본유를 통해 완성되어 있다”는 발상에 토대를 두고 있다. 인간의 일은 그럼, 뻣뻣해지고 가려진 본성의 소외를 극복하여 본래의 빛과 힘을 회복하려는 노력으로 집약된다.

주자학이 발견의 시스템을 채택하게 된 것은 불교의 압도적인 영향 탓이다. 주자는 불교의 도전을 극복하고, ‘새로운 유교’를 형성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기획을, 불교를 따라 발견의 시스템 위에 정초했다.

불교를 왜 한마디로 무의 기획이라 부르는가. 불교는 일체의 부정을 통해 깨달음을 얻고 불성의 해방과 자유를 노린다. 그 래디컬한 부정은 기본적으로 1)자아의 준동을 향해 있지만, 동시 2)그것이 표상하고 있는 세계를 이미지 혹은 환망으로 거부한다. 3)일체의 인습과 외적 영향력으로부터 자유롭고자 하고, 4)가족과 사회의 책무를 떠나 완전한 고독 속에 머물고자 한다. 그를 위해 5)모든 사회적인 것의 토대인 언어의 영향력을 무의식의 차원에서까지 배제하고자 한다. 이들이 무의 기획을 구성하는 코드들이다.

유교는 이와 반대편에 있다. 1)자아의 준동을 경계하는 점에서는 불교와 손잡는다. 그러나 2)자아가 비어 있더라도 사물과 인간들의 세계는 실재한다는 것, 그리고 3)사회의 구조와 연관 메커니즘을 이해하고 적응하는 것이 중요하며, 4)본성의 발견과 실현은 가족과 사회의 책무 속에서만 가능하기에, 5)세계를 정확히 표현하고 올바른 가치관을 담고 있는 적절한 언어의 습득이 인간의 길에 결정적이라는 것을 믿는다.

유교와 불교는 공히 발견의 기획으로서 1)목표와 2)조건을 공유하고 있지만, 3)방법과 4)활약의 측면에서는 전혀 다른 길을 잡고 있음을 확연히 알 수 있다.

율곡은 세계를 단순히 환상으로, 즉 의식의 구성물로 환원하는 불교에 동의하지 않는다.

불교는 무아를 성취하자면 즉 자아의 영향력을 줄이고, 그 감옥으로부터 해방되자면, 일체의 소리와 색깔을 찬단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그들은 육신을 죽은 재처럼 여기고 감각에 상처입지 말라고 촉구한다. 이 실천적 관점에서 제창된 표어가거 “사물은 없다”이다.

율곡은 그러나 이 모든 풍경, 바깥의 사물들은 역력히 실재한다고 말한다. 율곡이 제사한 유교의 핵심 키워드는 다름 아닌 “지식”이다. 이 키워드가 유교와 불교를 가르는 분수령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율곡은 말한다. 자유란 지식을 향한 그 격심한 고투의 극점에서, 이제 더 이상 생각할 필요도 없고, 힘써 노력한 필요가 없는 지점에서 비로소 획득되는 것이다.

2. 퇴계의 성학십도, 주자학의 설계도

주자학을 읽는 어려움은 크게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대상 현상계가 아닌, 그 누메나의 세계를 지시하고 묘사하는 언어들은 까다롭고 미끄럽기 마련이다. 정신의 보이지 않는 지형과 그 훈련을 다루는 언어들은 사물의 표면적 관계나 그 분류에 익숙한 일상적인 사유를 끝없이 곤혹에 빠트린다.

체험 그 언어들은 단순한 설명 혹은 묘사에 그치지 않고, 심신의 훈련과 더불어 형성되는 의미의 체험적 지층을 갖고 있다. 즉 개념들은 깊이를 갖고 있다. 그래서 발화자와 듣는 자를 고려하지 않고는 이 개념의 적실성과 정당성을 객관적으로 논하기 어렵다.

역사 체험과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이들 개념들은 수많은 사상과들의 개성적 해석에 노출되고 다양화되었다. 그들은 새로운 개념을 창안하기보다, 오랜 용어에 자기만의 의미와 뉘앙스를 부영하는 방식을 택했다. 그래서 이견은 해소되지 않고 겉돌기 쉽다. 조선 유학의 논쟁이 해결되지 않는 이유가 여기 있다.

주자의 학문은 가깝게는 당말에서 북송에 걸친 새로운 유교 운동의 다양한 갈래를 종합한 것이었지만, 멀리는 유교 불교 노장의 세 주류적 전통을 이기라는 새로운 정식으로 통합시킨 것이었기도 하다. 주자학이 그렇게 절충적이었기 때문에 같은 주자학을 표방하면서 퇴계와 남명, 율곡이 갈라질 수 있었고 또 그 이후의 수많은 이론적 차이와 학문적 논란을 야기시켜 나갔다.

성학십도는 주자학의 호한한 집성 가운데 군더더기는 다 털어내고 골자만 남긴 저작이라 워낙 압축적이고 함축이 깊어 문의를 시추하기도 쉽지 않다. 성학십도 가운데 주자학의 이념과 성학의 설계도는 제1,2,3,4,5도, 즉 전반부에 집약되어 있다. 제1태극도는 우주의 근원에 대해 설파하고 있고, 제2서명도는 인간의 우주적 위상에 대하여, 제3소학도는 인간의 현실적 타락에 대하여, 제4대학도는 사회적 책임의 스케일에 대하여 적고 있다. 여기까지가 설계에 해당한다. 제5백록동규도는 구체적 실행 덕목과 그 실천에 대해 적고 있다. 퇴계는 이 다섯 그림을 총괄하여 “천도에 근본하여 인륜을 밝히고, 덕업에 힘쓸 것을 밝혔다”고 적었다. 주자학은 인간의 책무를 개체적 생물학적 관점에서가 아니라 우주적 지평에서, 그 영원의 활동과 의미의 연관하에서 읽고 있다. 제6부터는 ‘마음의 학문’을 다룬다. 위 5도까지가 성학의 설계도였다면, 제6도에서 10도까지는 그 설계도에 따라 집을 짓는 일에 해당한다. 제6심통성정도는 마음의 우주적 기능과 구조에 대한 설명이고, 제7인설도는 이 우주적 마음이 어떻게 인간을 빌려 사랑과 자기절제로 표출되는지를 적고 있고, 제8심학도는 그런 마음의 개발에 관련된 항목들을 열거하고 있다. 제9경재잠도와 제10숙흥야매잠도는 실제 마음의 수련 방법을 담고 있다. 제9는 상황과 영역별 수련이고, 제10은 시간적 순서에 따른 수행지침이다. 제9경재잠도는 마음의 안과 밖에서, 그리고 고요할 때와 활동할 때 등 각 상황에 따라 이 마음을 유지하고 강화시키는 방법을 적고 있고, 제10숙흥야매잠도는 잠에서 깨어나서부터 잠자리에 들 때까지 시간의 진행에 따라 마음을 경건하게 성찰하고 집중하고 휴식하는 법을 가르치고 있다.

3. 남명 조식, 칼을 찬 유학자

남명은 욕망을 제압하는 ‘몸의 직접 수련’을 강조한다. 이 밖의 일은 두루 ‘한가한 사업’이라, 공부에 방해가 된다고 생각했다. 제할 집사로 가장 먼저 든 것은 역시 문학이다. 문학은 과거를 위한 도구이자, 문인들의 교유 수단이었다. 남명는 선비들의 시 짓기가 큰 장애라고 생각했다. 그 자신 시를 폐하다시피 했고, 제자들에게 시황계를 주어 작시를 금했다.

유학은 본시 문이재도라 하여, 문장을 진리를 담는 그릇으로 인식한다. 그래서 그토록 소중히 여기는 것이다. 그런데 이 본래의 기능이 타락하면 문장이 진리와 독립하여 1)그 자체가 목적인 기예로 전락하거나, 2)과거시험 등의 세속적 수단으로 변질되고, 아니면 3)선비들의 교양과 취미를 위한 수작에 동원되었다. 남명은 이 셋 모두를 미워했고, 그래서 문학을 버렸다.

남명의 공부법

작은 공부를 소홀히 하지 마라

학문은 일상적 행위를 습관에서 출발한다. 논어를 펴면 너무나 익숙한 구절, “배우고 때로 익히면 또한 즐겁지 아니한다”를 만난다. 여기서 배움이란 이론이 아니라 일종의 기술이다. 초보 목수가 대패질하는 법을 배우고, 어부가 고기 잡는 법을 익하는 것과 같은 차원이 것이다. 다만 그 기술이 군자불기라, 농사나 진법이 아니라 ‘삶의 기술’이란 차이가 있다. 맨먼저 익혀야 하는 기술은 쇄소응대다. 아침이 일어나 마당을 쓸고 물을 뿌리며, 이부자리를 갠다. 그리고 가정과 사회에서 적절한 위상과 관계에 따라 타자와 만나는 절도를 훈련한다. 집안의 어른이 부르면 얼른 일손을 놓고 달려가 공손히 말씀을 기다린다. 그리고 남 앞에서 자신의 의견을 표현하는 일정한 예의와 법도를 익힌다. 공경과 예절은 우가가 생각한 학문, 즉 삶의 기술의 기초이고 토대이다. 쉬워 보이지만, 제대로 익히기에 어렵고도 어려워 평생을 배워야 하는 기술이다.

4. 인물성동이론의 논점과 해법

율곡의 주기적 체계는 간헐적이고 지속적으로 반발과 비판, 그리고 회의의 표적이 되었다. 이 경향을 주기에 대한 주리의 도전이라는 이름으로 포괄 수 있다. 이 움직임에 크게 네 가지가 갈래가 있다.

1) 퇴계학파에 의한 지속적 회의와 도전이 있다. 이 흐름은 나중 서학과 연결되어 힘을 얻는다.

2) 기호 학맥 가운데서도 인간의 초월적 신성을 강조한 낙론계열 그리고 농암을 종장으로 하여 낙학에 동조하는 사람들

3) 소론의 여러 사상가들과 이들 가운데 양명학에 경도한 사상가들

4) 간재에 대립한 한말 화서와 노사학파 그리고 한주학파가 있다.

5. 군사 정조, 다시금 주자학을 외치다

정조는 다산과는 달리, ‘주자학 안에서’ 새 학문을 정초하고자 했다. 그는 유학의 모든 경전에 대해 질문을 던지고 기존의 대답을 점검하며, 자신의 의견을 밝혔다. 던지는 질문만 보더라도 그가 가진 경학적 지식이 조선의 제왕 가운데 가히 일인자임을 알 수 있고, 조선의 학자 가운데 세워도 다섯 손가락을 양보하지 않는다.

표준의 주석을 세우겠다는 정조의 뜻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는 경학의 모든 문제들에 대해 끊임없이 묻고 토론했지만 해결된 것보다 그렇지 못한 것이 더 많았다. 경학의 어떤 문제들은 지엽적이고 어떤 문제들은 근본적이다. 어떤 문제들은 해결이 보였지만 걸음을 내딛지 못했고, 어떤 문제들은 주자학, 나아가 유학의 근본을 뒤흔들기 때문에 감히 제기하지 못했던 것도 있다.

주자학은 너무 복잡한 이론 체계와 방만한 주석의 결합으로 구성되어 있다. 학문의 목표가 결국 행검을 닦고 실무를 돕는 데 있다면 복잡하고 난해한 이론 체계는 도움을 주기보다 오히려 방해가 되기 쉽다. 주자학은 유학의 정맥을 회복하기 위해 불교와 도교와의 사상적 대결에 몰두하느라 정치한 사유를 자랑하고 이론은 치밀해졌지만, 이와 더불어 모호한 난맥 또헌 커질 수밖에 없었다. 조선 유학의 역사가 그 점을 확연히 알려주고 있다. 퇴율의 사단칠정, 인심도심에서 촉발되어 인물성동이론에 이르기까지 주자학이 제기한 이론적 문제들은 정조 당대까지 근원적 해결을 보지 못했다.

6. 주자학과 다산 그리고 서학이 갈라지는 곳

주자학의 신학적 지평

유학자들은 대체로 서학을 이질적인 종교문화적 전통으로 바라본다. 18,19세기 유교와 서학의 조우가 박해와 순교로 끝난 것이 그 이질성의 생생한 역사적 증거이겠다. 여기에 근대 이후 서구화의 전면에서 기세를 얻은 기독교가 유교의 문화와 가치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데서 오는 대치와 긴장이 가세했다. 그렇지만 유교와 서학 사이는 생각보다 가까울 수 있다.

17세기 이래 동서 교섭이 시작되면서 유교와 서학을 접목하는 사상적 실험이 있었다. 처음에는 마테오 리치가 시작했고 또 조선에서는 다산 정약용이 자신의 경학을 본격적으로 시도해본 바 있다. 다산이 서학의 영양을 깊이 받았다는 것은 숨길 수 없는 사실이다. 이때 서학의 카운터파트로서의 유학은 어디까지나 공자와 맹자가 창도한 ‘오래된 유학’이었지, 조선 유학의 유규한 전통이었던 ‘새로운 유학’, 즉 주자학이 아니었다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리치는 주자학의 형이상학 너머에서 오래된 유학의 신학과 손잡으려 했고, 다산은 자신의 경학에서 주자학의 이론체계를 망치로 부수면서 오래된 유학을 찬양했다.

라이프니치는 선교사들의 보고를 통해 주자학을 자연 신학의 일종으로 파악했다. 그는 선교사들의 부정에도 불구하고 중국을 직접 방문하지 않고도 철학적 통찰력만으로도 주자학이 신학의 기반 위헤 서 있다는 것을 간파했던 것이다.

조선유학의 간명한 역사

보수적인 유학자들이 들으면 놀라겠지만 주자학의 중심 논제는 근본적으로 종교적이고 신학적인 것이었다. 퇴계와 율곡은 이, 즉 영원한 비인격적 의지이자 존재의 의미의 근원이 과연 실재하느냐를 두고 의견이 갈렸던 것이 아니다. 둘 다 그것이 우주에 편만함을 확인했다. 둘의 차이는 그 위상과 성격, 특히 그것의 직접적 권능에 관한 것이었다. 진정 이가 ‘영원한 의지’로서 우주를 움직이고 생명을 빚어내는 권능을 가지고 있느냐, 아니면 ‘영원한 의미’로서 인간의 생리를 통해 구현되기를 기다리는 숨은 신이냐 하는 것이었다. 퇴계는 의지의 직접적인 역사를 믿었고 율곡은 의미가 직접 행사하지는 않는다고 믿었다. 이 차이에서 이른바 주리와 주기가 갈라졌다.

주자학에서 기는 이를 증현하지만 그것은 대체로 비자각적으로 그리고 불완전하게 일어난다. 이 우주적 질서의 의미를 자각하고 그것을 완전히 구현할 수 있는 것은 천지가 가장 맑은 기를 타고난 인간에게만 가능하다. 그것도 가장 맑고 순수한 기를 타고난 성인의 몫이다. 그렇지 않은 범인은 자각적 주체적 수련을 통해 자신의 기를 정화하고 교정함으로써 이 경지에 다가설 수 있다. 그럼으로 영원의 그분은 우리에게 다가오거나 손을 내밀지 않는다. 다만 우리만이 주체적으로 그분에게 다가갈 수 있다. 그분은 ‘그냥 거기 계신’ 무언이고 무위의 주재이기 때문이다.

율곡의 생각은 곧 회의와 반발에 부닥쳤다. 이의 주재가 가려져 있다면 그리고 인간을 향해 적극적으로 발언하지 않는다면 그 구재는 결국 있으나 마나 한 것이 아니냐. 따르든 거스르든 아무런 응답도 없고, 상도 벌도 없는 그런 임재를 누가 두려워하겠는가.

다산과 서학 사이

새로운 유학인 주자학을 떠나 오래된 유학인 공맹의 유학과 손잡으려는 시도는 일찍이 동방 전도의 주역인 예수회 선교사 마테오 리치가 선택한 전략이다. 리치는 주자학을 신학적 지점에서 읽지 않았다. 그는 이기론을 과도하게 자연학적 지평으로 밀어놓고 나서 주자학을 비판했다. 리치의 해석에서 이는 주재로서의 영광을 박탈당했다. 이 ‘부당한 탈신학화’가 성호 문하에서 서학을 역비판하는 중요한 논거였음을 잊지 않아야 한다. 리치는 선교사 가운데 누구보다도 유교적 전통에 대한 이해가 깊었으나 주자학의 전통이 갖고 있는 신학적 지평을 무지로 간과하거나 혹은 고의로 무시함으로써 지식인들을 설득하고 감복시키는 데 실패했다. 신후담과 안정복은 리치의 신학적 변증에 대해 주자학의 신학으로 맞섰다.

7. 실학, 혹은 흔들리는 이학의 성채

1)주자학의 구상은 이학이다. 이는 궁극적 절대존재로서 세계를 변전시키는 주체이며, 생명의 궁극적 의미를 현시한다. 조선의 유학사는 이 이학의 전통을 충실히 지셨다. 오랫동안의 논쟁은 그 이의 성격과 위상 즉 주재를 둘러싸고 전개되었다. 여기서 이의 유위, 즉 실질적 역사를 주장하는 사람들을 주리, 그렇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주기로 부른다.

2)양란을 거치면서 노론의 득세와 함께, 율곡의 주기가 주류적 사고로 자리잡았다. 주기는 기의 일탈과 불안전을 다스리기 위해 외면적 규율에 특히 의존한다. 그래서 전통적 가치와 규범을 공고화하는 보수적 태도에 기운다. 예를 정비하고 예학을 심화시키며 그것을 사회적으로 정착시켜나가는데, 이윽고 예를 둘러싼 정치적 혈전인 예송까지 일으켰다. 이 주기의 중심에 저항하는 주변의 세력들이 포진하는데, 그 주리적 반발에 크게 네 가지 갈래가 있다.

(1)퇴계 계열 남인들에 의한 지속적 도전. 이 갈래 가운데 하나가 서학으로 이어졌다. 서학은 주리의 극단적 형태이다. 성호학파와 다산

(2)기호 학맥 가운데서 농암을 종장으로 하는 낙론 계열, 처음에는 주변이었다가 나중에 정치사회적 중심세력으로 등장한다. 북학파가 거기서 성장한다. 홍대용과 박지원

(3)소론의 여러 사상가들, 그리고 그 갈래 가운데 하나가 양명학으로 기울었다.

(4)한말의 주리파들, 화서와 노사학파. 그리고 영남의 한주학파.

실학은 주리의 흐름에서 피어난다.

3)실학은 이의 주재성을 회의하고 부정하는 지점에 있다. 이와 함께 사유의 지형이 이학에서 기학으로 이동한다.

8. 한말 유학의 선택, 저항 또는 은둔

9. 혜강 최한기의 기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