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서양 사상 수용사(이광래, 열린책들), 2012년 7월에 읽음
저자는 이 책의 1장 첫 문장에서 문화의 본질은 <잡종화hybridization>에 있다고 말한다. <문화 융합cultural metamorphosis은 시작부터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현상이다. 문화에서 수용이 곧 변용일 수밖에 없는 이유도 그것이다. 수용된 타자는 이미 타자 그 자체일 수만은 없고 수용되면서 전화(轉化)되어 변용된 일체(一體)를 실현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선의 지배층이 새로운 외부의 문화 유입과 그것에 대한 변용을 모색하던 내부의 움직임에 대항한 방식은 원시적인 탄압과 쇄국의 고수였다. 집권층의 서학에 대한 스트레스는 수차례에 걸친 천주교도 박해로 증상을 드러내었고 변화하는 세계를 오로지 주자학적 세계관으로만 해석하려는 고집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서학 알레르기는 조선의 지성사와 사회 발전에 치명적이었는데 <이유는 그 병적 징후가 너무나 많은 신진 지식인을 희생시켰기 때문이다. 나아가 서학 루트를 통한 신지식의 공급 차단으로 인해 조선 실학사의 신진대사가 더 이상 불가능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1. 이문화의 접촉에서 수용까지
문화에는 순종이 있을 수 없다. 문화의 본질이 잡종화에 있기 때문이다. 배양한다는 의미 자체가 단일 품종의 단순 배양이 아니라 다품종의 복합 배양을 더욱 바람직한 것으로 간주하듯이 문화도 애당초부터 순수한 것이라기보다 복잡하고 복합적일 수밖에 없다. 이처럼 문화 융합은 시작부터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현상이다. 문화에서 수용이 곧 변용일 수밖에 없는 이유도 그것이다. 수용된 타자는 이미 타자 그 자체일 수만은 없고 수용되면서 전화되어 변용된 일체를 실현하기 때문이다.
천주실의와 동아시아의 문화 변형
천주실의는 본래 신에 대한 참된 토론의 중국어역이다. 신에 대한 참된 토론이라고 했듯이, 이 책의 서술 방식은 소크라테스의 문답식 대화처럼 중숙 선비와 서양 선비 사이의 문답식 토론으로 전개된다. 그 내용은 신에 대한 토론이라고 했듯이 한마디로 말해 신에 대한 것이다. 마테오 리치는 그것을 순전히 천주교 교리로만 전개한 것이 아니라 될 수 있는대로 사서육경과 관련시켜 서술하려고 했다. 마테오 리치가 이 책을 출판하려는 진정한 의도는 천주와 상제의 유사성이나 동질성을 고증하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단지 유교 사회에 초월적 절대자에 대한 거부감이나 배타적 이질감을 줄이거나 해소하려는 수단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그보다는 오히려 천주의 존재 증명·인간의 영혼 불멸·자유 의지와 구원에 대한 절대적 신앙과 같은 기본적인 교리를 유교 사회의 입맛에 맞게 번안하고 각색하여 전달하려는 데 그 목적이 있었다.
천주실의와 조선
임진왜란 초기인 1593년 12월 28일 예수회원인 세스페데스가 대마도를 거쳐 경남 웅도에 발을 디딤으로써 처음으로 이 땅에 천주교의 포교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조선에 천주교와 서양 문화가 본격적으로 소개되기 시작한 것은 부경사행원들에 의해서였다. 조선에 천주실의에 대해 가장 먼저 언급한 사람은 이수광이다. 그는 ‘지봉유설’에서 천주실의 8편 가운데 2·4편을 제외한 6편의 내용을 간추려서 소개하고 있는 것으로 직접 읽어 보았음이 틀림없다. 1621년에 펴낸 어유야담에서도 유몽인은 <제목을 천주실의라고 했는데 천주는 상제를 말하며 실이란 공이 아닌 것을 말하는데 이것은 노자와 부자의 공과 무를 물리친 것이다>라고 하여 이수광과는 달리 8편 모두를 소개하고 있다.
천주실의에 대한 단순한 소개가 아니라 그것에 대한 사상적·종교적 논쟁이 본격적으로 전개되는 것은 이익의 ‘천주실의발’로부터 시작하여 그의 제자들인 성호학파에 의해서였다.
2. 서교의 유입과 사상 지도의 변화
이익의 보유론적 서교 의식
성호 이익(1681~1763)이 참고한 20여종의 한역 서학서 가운데 서교에 관하는 것은 마테오 리치의 ‘천주실의’와 판도하의 ‘칠극’뿐이다. 이익은 도덕 수양이라는 유학의 궁극적 목적에 도움이 된다면 그 방법을 누구로부터든 기꺼이 차용하려 하였다. 그는 서교를 무조건 배척하기보다는 소교의 소악적덕의 방법이 유가의 극기복례에 도움이 된다는 실용적·보유적 인식에서 그것에 허심탄회하게 접근하였다.
이벽의 서교수용론
그가 언제부터 그리고 왜 천주를 신앙하고 서교로 회심하게 되었는지를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러나 1777년 겨울 주어사 천진암에서 열흘 이상 계속되었던 강학회의 말미에서 서민들에게 서교를 소개하고 전도하기 위해서 천주공경가를 발표한 것으로 미루어 보아 그는 적어도 그 이전부터 서교에 대한 돈독한 신앙과 지식을 가지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본래 이 강학회는 상호 인척 관계에 있던 남인 신서파에 속하는 녹암 권철신 문하의 신예 지식인들이 주자학을 공부하고 성호의 학문을 계승하기 위해 모인 집회였다.
그러나 권철신을 비롯하여 이벽·이승훈·정약전·정양용·이윤하·김원성 등의 면모에서 알 수 있듯이 참가자들은 유학의 정도를 재조명하여 조선 유학의 침체를 극복하자는 본래의 목적과는 달리 시간이 지날수록 쇄도하는 이문화에 비해 유교 문화의 한계와 모순을 실감하거나 확인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이들의 구문화에 대한 상황 인식은 별다른 거부감 없이 신문화론 신교설로 교체되는 분위기로 전환되었다. 따라서 강학회의 중심 역할도 권철신에서 이벽으로 바뀔 수밖에 없었다.
강학회를 계기로 이벽의 서교 계명 운동은 본격화되기 시작했다. 1783년경에 그는 이미 자신의 집에서 중인·양반 신분의 친구들을 상대로 교리 강학과 종교 의식을 집행하기 시작했다. 그해 말 그는 이승훈을 중국에 보내 그곳의 선교사들에게 영세를 받도록 권유하는가 하면 이듬해 봄 이승훈이 영세를 받고 귀국하자 자신의 집에서 <가성직자계급>을 조직했다. 이 단체는 최초의 자생적 성직자 조직이었고 이벽이 죽은 뒤에도 권일신이 <주교>라는 명칭을 받아 지도자가 되었다. 또한 1785년에는 김범우의 집에서 이벽을 중심으로 이승훈·정약전·정약종·정약용·권일신 부자 등이 모여 한국 최초의 천주교회를 창설하기도 했다. 이 종교 집회에서도 설교는 역시 이벽이 담당했다.
그러나 양반과 중인 등 수십 명이 참석했던 이 집회는 유생들의 고발로 인해 오래가지 못했다. 1786년 김범우는 결국 최초의 순교자가 되었고 같은 해에 이벽도 33세의 나이로 병사하고 말았다. 그러나 이들의 죽음을 대가로 하여 학문적 수용의 단계를 넘어 종교적으로도 자발적·주체적으로 수용되는 일대 전기를 맞이했다.
유학자가 쓴 최초의 천주 찬가-천주공경가
어와세상 벗님네야 이내말씀 들어보소 집안에는 어른있고 나라에는 임금있네 내몸에는 영혼있고 하늘에는 천주있네 부모에게 효도하고 임금에는 충성하네 삼강오륜 지켜가자 천주공경 으뜸일세 이내몸은 죽어져도 영혼남아 무궁하리 인륜도덕 천주공경 양혼불멸 모르면은 살아서는 목석이요 죽어서는 지옥이라 천주있다 알고서도 불사공경 하지마소 알고서도 아니하면 죄만점점 쌓인다네 죄짓고서 두려운자 천주없다 시비마소 아비없는 자식봤나 양지없는 음지있나 임금용안 못뵈었다 나라백성 아니런가 천당지옥 가보았나 세상사람 시비마소 있는천당 모른선비 천당없다 어이아노 시비마소 천주공경 믿어보고 깨달으면 영원무궁 영광일세
정약용의 서교 습합적 신관
다산 정약용은 한국의 가장 위대한 사상가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는 조선 시대를 대표하는 경학자일 뿐만 아니라 조선 실학의 집대성자이기도 하다. 특히 고종은 그와 같은 시대에 살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여 ‘여유당전서’를 모두 편찬하게 하고 그가 죽은 지 75년 뒤인 1910년에도 그에게 정이품에 해당하는 정헌대부 규장각제학의 자리와 함께 문도공이라는 시호를 내릴 정도였다.
다산이 서교주의자인지 아니면 배교주의자인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을 수 있다. 1801년 서교 신자에 대한 대탄압이 시작되던 신유박해의 기운이 돌자 다산은 미리 자벽문을 당국에 제출하여 겉으로 서교와 인연을 끊었기 때문이다. 또한 수많은 그의 기록 가운데 그가 직접 수야론자이거나 서교주의자임을 자인하는 대목도 발견할 수 없다.
그럼에도 그를 배교주의자라고 할 수 없는 이유 그리고 그의 자벽문과는 달리 그가 비서교주의자일 수 없는 이유 더구나 그가 근본적으로 서교주의자일 수밖에 없는 이유들은 더욱 명백하다.
다산은 자신의 사상에 가장 커다란 영향을 미친 자로서 이벽을 내세우기에 주저하지 않았다. 중용을 비롯한 유학에 대한 지도는 물론이고 서교에 대한 영향도 이벽에게서 받았음을 그의 ‘자찬묘지명’에서 분명히 밝히고 있다. 그는 이벽을 따라 다니면서 서교를 듣고 서교서를 읽음으로써 1786년 이벽이 죽은 뒤 정미년(1787)부터 신유박해 이전까지도 자신의 마음이 서교에 경도되어 있었음을 고백하고 있다. 순조원년의 신유박해 때 이가환의 처형 직전인 2월 3일 심문 기록도 이벽으로부터 다산에게 이어진 수야 계보를 증언하고 있다. 이벽의 집을 집회 장소로 하고 이승훈을 영세자라 하여 이벽·정약용·권일신 형제 등이 세례를 받았다는 것이다.
정약전의 천주 찬가-십계명가
세상사람 선비님네 이 아니 우수운가 사람살자 한평생의
무슨귀신 그리많소 아침저녁 종일토록 합장배례 주문외고
있는 돈 귀한재물 던져주고 받쳐주고 (중략)
허위허례 마귀미신 믿지마고 천주믿세 하늘위에 계신천주
(중략) 죄짓고서 우는자요 천지신명 왜찾느뇨
음양태극 선비님네 상재상신 의론하쇼 말을일러 달라시대
이모두가 천주시네 천주일러 거룩하사 대고말고 논치마소
(중략) 세상사람 벗님네야 이내말씀 들어보소 인간세사
희로애락 인생칠십 고래희락 옛말부터 일컬으고 남녀칠세
부동석도 일곱부터 성장일세
일곱날중 엿새간은 근면노력 다하고서 일곱째날 고요히
천주공경 하여보세 갑론을박 쉬지않고 논쟁구절 무용일세
천지고금 만물지사 부모효도 으뜸일세 부모효도 모르고서
불효자식 되고나면 죄중에서 제일크고 죽은후에 지옥가네
(중략)
3. 서학 속의 실학·실학 속의 서학
조선의 지식인들이 ‘천주실의’를 비롯한 한역 서교서들을 언제부터 접하게 되었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1610년대에 이미 이수광·유몽인·허균에 의해 ‘천주실의’와 서교에 관해 간략하게나마 소개되는 것으로 보아 한역 서교서들은 그 이전에 이미 유입되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각종 서교서들을 통해 서양의 종교와 사상이 조선에 본격적으로 소개되는 것은 정두원이 1631년 7월 북경에서 돌아오면서 중국의 이지조가 편찬한 ‘천학초함’(1629)을 가져오면서부터이다. 마테오 리치 등의 예수회원들에 의해 번역 출판된 한역 서학서들이 연구의 편의를 위해 종류·윤리에 관한 이편 9편과 과학·기술에 관한 기편 10편을 합쳐 총 52권으로 체계있게 편집된 이 총서는 조선에 도입되면서부터 일부 지식인들에게 지대한 관심을 불러 일으켰기 때문이다.
홍대용의 실증 실학
홍대용(1731~1783)은 18세기 조선의 최고의 수학자이자 천문학자였다. 그의 실용적인 수학 교재인 ‘주해수용’은 서양의 대수학을 동양에 처음으로부 소개한 책이다. 이 책은 4율(비례)법·약분법·면적법·체적법 등과 같이 근대 수학의 용어를 사용함으로써 종래의 산법과는 다른 특징을 나타낸다. 그러면서도 이 책은 실제 생활에 필요한 수학적 지식만을 대상으로 한다는 점에서 저자가 애당초부터 이용후생용 수학서임을 밝히고 있다.
박지원의 실용 실학
박지원(1737~1805)의 실학 사상은 중상주의적 경제 실학에 기초한다. 그는 누구보다도 중상적 생산과 유통, 그리고 기술 혁명을 통한 조선의 근대화를 강조한 실학자였다. 그는 ‘책을 읽고 실용을 알지 못하면 그것을 학문의 연구라고 말할 수 없다. 학문 연구를 귀하다고 하는 것은 그 실용에 있다’고 하여 학자로서의 사명이 공리공론이 아닌 실용 학문에 있음을 분명히 했다.
박제가의 민중 실학
박제가(1750~1815)의 실학 사상의 관문은 이용후생이다. 또한 상업·무역·화폐 유통·공업·교통 운수·국방 등을 거쳐 돌아오는 그 귀착점도 이용후생이다. 그것은 민중을 위한 이용후생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그가 생각하기에 이용후생은 정치의 근본이다.
4. 동도서기론에서 동서통합론까지
5. 쇄국과 개화의 사이
서구 사상의 충격과 개혁설
198년 9월 23일자 ‘황성신문’의 논설을 보면 ‘개물성무하여 화민성속을 개화라 위하나니라’하여 개화가 이 두 구절의 머리글자를 합쳐 만든 용어임을 밝히고 있다. 그것은 ‘사람이 아직 알지 못하는 것을 개발하고 이루고자 하는 것을 이루게 한다’는 뜻과 ‘백성을 교화하여 훌륭한 풍속을 만든다’는 뜻을 합쳐 ‘새로운 것을 개발하고 국민을 교화한다’는 의미였다. 우리나라에서 개화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한 이는 1881년 조사일본시찰단의 일원으로 3개월간 일본을 다녀온 박정양이다.
유길준은 1895년 후쿠자와 유키치의 도움으로 ‘서유견문’을 출판한 것도 후쿠자와의 ‘서양사정’과 마찬가지로 당시의 진보된 서구 문명을 조선의 민중에게 소개하여 계몽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처럼 ‘서유견문’은 그 저술 동기와 목적, 그리고 내용에서도 후쿠자와 유키치의 ‘서양사정’의 영향을 받은 것이지만 ‘견문’이라는 용어에서도 시사하듯이 한국인 최초로 서양의 근대적 정치·사회·학문·종교·교육 제도 등 다양한 문명과 문화를 직접 조사하여 소개한 일종의 문명론적 개화사상서라는 데 커다란 의미가 있다.
계몽과 기독교의 영향
첫째 조선사회에서 기독교회가 전개한 국민 계몽 운동 가운데 가장 큰 공헌은 교육 사업이었다. 1910년 8월 10일자 관보 제4556호에 나타난 전국 학급 학교의 숫자를 보더라도 관·공립학교가 80개 교인데 비해 기독교 단체들이 세운 사립학교는 무려 755개 교에 달할 정도였다.
둘째, 기독교가 조선 사회의 개혁에 끼친 공적으로서 간과할 수 없는 것은 성경의 한글 번역으로 인한 한글 보급과 국어의 발달일 것이다. 서양의 선교사들이 조선 사회의 선교 활동을 위해 우선 선택한 방법이 곧 성경의 한글 번역 사업이었다. 우리 나라에서 최초로 번역된 성경은 존 로스 등이 번역한 것이다. 중국의 만주 지방에서 선교활동을 하던 로스와 맥킨타이어 목사는 이응찬, 백홍준, 김진기, 이성하, 서상륜 등의 도움을 받아 누가복음, 요한복음을 1882년 처음으로 심양의 문광서원에서 한글로 출판한 이래 1886년까지 신약성서 전권을 ‘예수성교전서’라는 이름으로 출판해 낸 것이다. 그 뒤 한문식 문장이나 사투리의 표현 등을 바로잡아 새로운 ‘신약성서’가 출판된 것은 1904년 언더우드, 아펜젤러, 스크랜튼, 최병헌, 이창식 등이 조직한 성서위원회와 성서번역위원회의 공동 번역에 의해서였다. 이들은 1900년부터 구약성서의 번역에 착수하여 1911년에 마침내 ‘신구약성서’를 완역하여 출판한 것이다. 유교식 한문 교육의 전통에만 매달려 온 조선 사회의 우리말로 된 이러한 성서의 보급은 단순히 종교적 의미를 넘어 일종의 문자 혁명이었다. 그것은 한글판 성서가 일반 대중에게 얼마나 빠른 속도로 보급되었는지를 살펴보면 쉽게 알 수 있다. 한글판 신구약성서는 그것이 완역 출판되던 그해만도 26만 부의 판매 부수를 기록했고, 1924년에는 60만부, 1936년에는 86만부를 넘어서는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또한 한글성서의 보급이 이처럼 급속도로 증가한 것은 국어에 대한 새로운 관심과 반성의 계기를 만들기도 했다. 그것은 국어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나 우리말 사전의 편찬 등 국어의 발달을 위한 여러 가지 사업들을 촉발시켰기 때문이다.
셋째, 서구의 기독교가 조선 사회의 민중들에게 베푼 혜택이자 조선의 근대화를 위해 헌신적으로 앞장선 분야는 서양 의술의 도입과 의료 사업의 전개였다.
서양 철학의 본격적 연구
20세기 들어서 최초로 본격적인 서양 철학서를 저술한 사람은 평생 동안 퇴계의 주리론으로 일관해 온 유학자 이인재(1870~1929)였다. 그는 궁벽한 향곡의 사림임에도 불구하고 서양의 제도와 문물이 밀려오던 당시에 서양의 그것들이 그토록 흥성하게 된 근본적인 이유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는 유림의 구학문인 유학과 경사를 강론하면서도 무엇보다 서양의 예학을 두루 섭렵해야만 당시의 세상 물정을 제대로 가늠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이 시비도 올바르게 가를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6. 역사의 질곡과 <철학을 위한 변명>
인류의 정신사를 보면 피지배 하의 지식인들은 대개 세 가지 양상으로 그들의 지적 태도를 나타내 왔다. 첫째는 로마 지배 하의 그리스 철학자들처럼 현실 외면·현실 도피적인 소극적 철학을 지향하는 경우(에피큐로스학파·스토아학파)이고, 둘째는 나치 지배 하의 프랑스 지식인처럼 적극적인 저항 정신을 발휘하는 경우(마르크 블로흐, 시몬느 베이유)이며, 셋째는 지배 이데올로기에 동화되는 경우(라틴 아메리카의 철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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