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중·후기 지성사 연구(신병주, 새문사), 2012년 7월에 읽음
성리학의 주류였던 이이학파나 퇴계학파의 흐름이 아닌 비주류였던 남명학파와 화담학파의 흐름을 따라서 저자가 연구한 것을 집대성한 책이다. 남명학파와 화담학파는 성리학 뿐만 아니라 다양한 학문에 관심을 갖고 연구 발전시켰으며 후세에 영향을 주었다. 특히 말업이라고 천시했던 상업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여 상업의 발달을 추구한 것도 따지고 보면, 다 그들이 살고 있던 환경의 영향이라고 아니할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그들이 비주류였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 아닌가 여겨진다.
제1장 조선중기 남명학파의 활동과 그 역사적 의미
남명학파의 범위
남명학파는 퇴계학파, 화담학파, 율곡학파 등과 함께 조선중기를 대표하는 학파였다. 경상우도에서 처사적 삶을 지킨 조식(1501~1572)의 학풍을 계승한 학자군으로서 남명학파에서 배출된 주요 인물로는 정인홍, 오건, 최영경, 곽재우, 김우옹, 정구 등을 꼽을 수 있다. 남명학파는 남명이 강학의 중심지로 삼았던 김해의 산해정이나 합천의 뇌용정, 지리산 덕산의 산천재 등지에서 남명과 학문적 인연을 맺은 학자들이 주류를 이루었다.
경의지학의 계승
남명의 학문은 ‘치용실천’ ‘반궁체험’ ‘반구자득’ 등의 표현에서 보이듯 실천성에 무엇보다 중점을 두었다. 남명이 이론논쟁에 별다른 중점을 두지 않고 ‘학자들은 모름지기 배운 것을 실천해야 함’을 강조한 것은 그의 사상의 핵심이 ‘경의’에 있기 때문이다. 남명이 경의를 강조한 것은 창벽 간에 ‘경의’ 두 글자를 붙여 놓고 ‘이 두 글자가 천지에 일월이 있는 것과 같다’고 한 것, 경의검에 ‘내명자경 외단자의’라고 새긴 것, 죽음에 이르러서도 제자들에게 마지막 가르침으로 ‘경의’를 선택한 것에서 뚜렷이 나타난다.
“경의 두 글자는 지극히 긴요하고 절실하니, 배우는 사람들이 공부가 익고 익으면 가슴 속에 일물의 가리움이 없게 되는 것인데 내가 이 경지에 이르지 못하고 죽는다.”
수양을 강조하는 ‘경’은 성리학의 정착과 함께 사림파 학자들이 체득한 개념이지만, 실천성을 강조하는 ‘의’와 함께 ‘경의’를 해석하고 경과 의를 동시적으로 해석한 것은 남명 사상의 핵심이다. ‘의’를 중시한 학풍은 남명학파의 지역적 기반인 경상우도의 학풍을 특징짓는 용어가 되기도 하였다.
남명학통의 강화운동
광해군대에 정인홍은 남명에 대한 학통강화를 통해 북인의 학파적 결속력을 강화하고 정치적으로 우위에 서려고 했다. 그러나 그의 직선적인 정치관과 스승 남명에 대한 철저한 존숭 의식 때문에 퇴계를 비난한 행적은 오히려 반대세력의 결집을 강고하게 하였다. 남명의 문묘종사운동을 시도하면서, 이언적과 이황을 비판했을 때 사류들 대부분이 정인홍에게 동을 돌리고, 성균관 유생들은 그를 ‘청금록’에서 삭제하자는 주장까지 하였다.
붕당정치기의 남명학파
남명학파의 활동은 붕당정치의 전개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남명의 사후인 1575년에 최초로 동인과 서인으로 붕당이 형성되었을 때 남명학파는 퇴계학파와 함께 동인의 모집단을 형성하였다. 그리고 1589년 기축옥사로 말미암아 동인이 남인과 북인으로 분립할 때 남명학파는 화담학파와 함께 북인의 중추세력이 되었다. 기축옥사는 정여립의 역모라는 정치적 사건이라는 측면이외에 사상적으로 사람을 분기시켰다.
남명학파 활동의 역사적 의미
주자성리학이 점차 사상계의 주류로 정착하고 정치에서의 타협과 보합을 중시하는 붕당정치가 형성되면서, 처사적 삶과 비판자의 입지를 강조했던 남명의 사상은 주류적 흐름에서 밀려나게 된다. 이것은 남명학파에서 퇴계학파로 이탈하는 학자를 배출하게 하는 한 원인이 되기도 했다.
제2장 화담학과 근기사림의 사상
서경덕 연구의 의의
16세기를 대표하는 사건이 사화는 당시의 지식인 학자들에게 많은 좌절감을 안겨 주었다. 정치적 모순 속에서도 정치에 적극 나서 학문적 소양을 실천해야 한다는 학자들이 나타나는가 하면, 산림에 은거하는 처사의 입장을 고수하면서 현실비판의 입장을 취하는 학자들이 나타났다. 서경덕은 생애의 대부분을 사화의 시기에 살았으며 이러한 시대적 조건 속에서 그는 처사의 삶을 선택하였다. 화담(1489~1546)는 개성을 중심으로 학문활동을 했으며 그의 명망은 인근에 전파되어 개성을 중심으로 서울·경기지역의 학인들이 모여들어 ‘화담학파’라고 할 수 있는 문인집단이 형성되었다. 그의 학풍을 계승한 문인들은 16세기 후반에서 17세기 초반에 걸쳐 조선사회에 학문적 전통을 확립시키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허엽과 박순은 각각 동인과 서인의 주축인물로 활약하였으며, 민순·박지화·이지함·서기 등은 각기 특색 있는 학풍을 정립하며 화담학파의 위상을 올리는 데 기여하였다.
화담학의 특징
화담은 ‘기’를 중심으로 자신의 성리철학을 이론적으로 정리했을 뿐만 아니라 다양한 학문을 절충하였다. 역학에 특히 조예가 깊었으며 ‘해동이적’이나 ‘해동전도록’을 비롯한 도가서와 ‘택당집’과 같은 저술에서는 도가적 본위기가 상당히 언급되었다. 화담학의 특징은 성리학을 본령으로 하면서도 상수학이나 도가사상 등을 보합·절충해 나가는데 있었으며 이러한 학풍은 문인들에게도 널리 계승되었음이 확인된다. 화담의 사상에서는 리보다는 기를 중심으로 사물을 해석하고, 주자성리학보다는 소옹이나 장재 등 북송 시대 성리학자들의 사상에 경도된 측면이 나타나는 것도 주목된다.
1) 주역과 상수학에 대한 관심
화담이 주역에 관심이 깊었다는 것은 먼저 ‘복재’라는 그의 호와 ‘가구’라는 그의 자에서 나타난다. 복재는 주역의 복괘에서 가주는 주역 ‘계사전’의 ‘유친즉가구 유공즉가대’라는 말에서 따온 것으로, 화담의 주역에 대한 심취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2) 절충적 학풍과 신분적 개방성
서경덕은 ‘자득’을 중시하면서 자신의 독창적인 학설을 세워 나갔기 때문에 기존의 학설에 구애되지 않았으며 자신에게 필요한 학문과 사상은 적극 포용·흡수하였다. 상수학이나 도가사상에 관심을 보인 것은 개방적이고 절충적인 학풍에서 연유한 측면이 크다.
서경덕은 성리학 이해에 있어서 하나의 학설에 구애되지 않고 자득을 통해 독창적인 영약을 개척해 갔으며, 문호를 널리 개방하여 많은 사람들이 신분에 구애 없이 학문을 배울 수 있게 하였다.
화담의 문인과 지역적 기반
허엽과 박순은 동인과 서인의 영수로 추대될 만큼 정치적으로 명망이 높았던 인물이며 민순은 전형적인 산림학자로 분류할 수 있는 인물이다. 이지함·박지화 등은 성리학 이외에 다양한 학문과 사상에 관심을 가졌던 학자이며, 차천로의 부친인 차식과 최립은 문장가로 명망이 높았다. 또한 문인 중에는 차식과 차천로 부자, 최자양과 최립 부자, 박민헌과 박여헌 형제 등과 같이 부자나 형제가 화담의 문하에서 수학한 것이 나타난다.
화담문인의 지역적 분포와 관련하여 주목된 현상은 근기지역을 중심으로 하면서도 해상을 기반으로 한 학자가 다수 나타나고 있는 점이다. 이지함이 해안가인 보령과 한강의 토정에서 주로 활동한 것을 비롯하여, 남포의 서기, 나주와 무한의 박순, 통천의 최자양 등 화담의 문하에서 해안과의 연관성이 유독 눈에 띈다.
근기지역 화담문인의 사상
1) 붕당형성기의 화담문인
서경덕 당대에는 붕당이 형성되지 않았지만, 서경덕의 문인들은 동서분당과 남북분당기에 붕당의 주축을 형성하였다. 서경덕의 수문으로 평가받는 박순과 허엽은 각각 서인과 동인의 영수로 추대되었는데, 이것은 학파를 중심으로 정파가 형성되던 정영화된 붕당정치의 틀을 벗어난 것이다. 달리 해석하면 서경덕의 문하에서는 그만큼 자유로운 학문선택과 정치참여가 가능했다고도 할 수 있다.
2) 문인들의 다기성
철학 분야의 연구에서는 서경덕의 공부론에 경과 주정이 함께 강조되는데, 서경덕의 제자들에게 주정이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서경덕이 경보다는 주정에 비중을 둔 것과도 연관이 있다. 정과 경의 이념은 수양론의 요체로서 성리학에서 중요시한 개념이다. 원래 정은 수양론으로 주자周子 이래로 중요시 되었으나 주자朱子에 이르러서는 정의 논리가 선에 들어갈 위험성이 있어서 경으로서 이를 대신한 것이다. 따라서 수양론으로서 정은 경보다는 불교적인 참선의 논리와 유사한 점이 많으며, 화담학파의 주정적 경향은 이들 학파가 주자성리학의 입장을 절대시하지 않음을 의미한다.
서경덕의 문인들 중에는 스승의 학풍을 계승하여 처사적 삶을 지키면서 도가사상에 심취한 학자가 많았다. 화담이 성리학자이면서도 도가사상을 절충한 것과 같이 이들에게도 성리학 이외에 다양한 학문과 사상을 절충하여 보합하려는 측면이 두드러지고 있다. 이러한 입장을 보인 대표적인 학자로는 박지화를 들 수 있으며 이지함·서기 등도 화담학파 중 도가적 성향을 강하게 보인 인물로 지적된다.
3) 이지함과 상업 중시경향
화담학파의 사상적 특징에서 돋보이는 개방성은 신분적 개방성뿐만 아니라 학문이나 사상의 수용에 있어 실용에 필요한 모든 사상을 포용하는 사상적 개방성까지 포함한다. 화담학파에게서는 상업을 비롯한 말업을 중시한 사상적 개방성이 두드러졌으며, 구체적인 실천을 통하여 국부와 이용후생을 꾀했다는 점이 주목된다.
이지함은 천문·지리·의학·복서·산수 등에 두루 능통하였으며 이러한 박학풍을 바탕으로 적극적인 사회경제정책을 실시하여 일반 백성들의 빈곤한 삶의 문제를 해결하려 하였다. 이지함은 정통 주자성리학에서 극히 대립적인 것으로 인식되던 의와 리를 상호보완적인 것으로 이해하였으며, 이러한 인식의 바탕 위에서 상업이나 수공업 등 말업을 중시한 인물이었다. 이지함은 덕과 재물은 본말에 비유하면서 ‘대개 덕은 본이고 재물은 말입니다. 그러나 본말은 어느 한쪽이 치우치거나 폐지되어서는 안 됩니다. 본으로써 말을 제어하고 말로써 본을 제어한 하우에 사람의 도리가 궁해지지 않습니다’라고 하여 본업과 말업의 상호보완을 강조하였다.
화담학의 영향
서경덕의 학풍을 계승한 침류대 학사들은 주자성리학만을 고집하지 않고 노장사상이나 양명학 등 다양한 사상에 경도된 모습을 보였으며 표용적이고 개방적인 학풍은 후대의 실학풍의 기반을 형성하는데도 일정한 영향을 미쳤다.
제3장 대곡 성운의 학풍과 처세
성운은 누구인가?
대곡 성운(1497~1579)은 16세기에 처사형 사림의 입지를 지킨 대표적인 인물이다. 성운은 조선중기 성리학의 이론탐구보다는 실천을 강조한 대표적 학파인 남명학파의 종장인 남명 조식과 가장 친했던 벗으로서, 조선중기 ‘처사형 사림’의 주요 인물로 분류할 수 있으며, 그의 학풍과 처세관도 조식과 유사한 점이 많다. 성운은 성수침의 종제로서 원래 경사인이었으나 당시의 정치현실에 회의를 느끼고 속리산에 은거하였다. 특히 1545년의 을사사화로 그의 형 성우가 희생되자 출사를 통한 현실정치 참여를 포기하는 대신에 은거의 삶을 통하여 자신을 수양하는 비판적 지식으로서의 입지를 지켜 나갔다.
시대적 배경과 교유 관계
성운이 살아가던 시대는 4번의 사화가 일어난 시기였다. 15세기 후반 이후 조선사회에서는 성리학의 이념을 자리를 잡아가면서 사림파 학자들이 다수 배출되었으며 이들은 학문적 이상을 정치에 실현시키기 위하여 중앙정계의 진출을 모색하였다. 이러한 사림파들의 성장은 정계에 포진하고 있던 훈척들에게는 큰 위협이 되었다. 16세기 초반 50여 년간 연속된 사화는 사림파들의 학문적·정치적 성장에 대한 기존의 집권세력인 훈척들의 정치적 반격이었다. 이러한 훈척들의 반격은 새로운 시대 사상으로 대두된 성리학의 이념을 정치현실에서 실천하려고 했던 지식인 학자들에게 커다란 충격을 던져 주었다. 사화라는 부정적 정치상황을 목도한 사림들은 출사는 단념하는 대신에 처사의 삶을 선택하면서 현실비판자의 입지를 지켜 나가는 경향이 커졌다. 이들에게 있어서 모순과 비리로 가득찬 중앙의 정치현실에의 참여는 곧 성리학의 이념인 공도론을 훼손시키는 것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조식 이외에 성운과 친밀한 교분을 유지한 인물은 서경덕, 이지함, 성제원 등 당대의 처사형 사림들이었다.
제4장 토정 이지함의 학풍과 사회경제사상
지역적 배경과 교유 관계
1) 지역적 배경
이지함의 주된 활동 지역은 출생지인 충청도 보령에서 서울의 마포를 연결하는 곳이었다. 특히 고향인 보령은 친가, 외가를 아울러 그의 일족들이 크게 이름을 떨친 곳이었다. 이지함은 아산과 포천에서 잠시 현감을 지내기도 했으나 주로 충청도와 서울의 마포 일대에서 활동했다.
2) 교유 관계
이지함은 지역적 기반으로 말미암아 서인계 인물과도 폭넓게 교유했지만 그의 학풍과 행적은 오히려 북인계 학자와 유사한 측면이 많다. 이지함은 북인 학통의 원류가 디는 조식, 서경덕과 교분이 깊었을 뿐 아니라 이발, 최영경 등 후대에 북인으로 활동하는 그들의 문인들과 교유가 깊었다.
3) 문인 관계
이지함은 후생을 가르치기를 좋아하였으며 이지함의 명성을 듣고는 많은 사람들이 몰려왔는데, 그 문인 중에서 특히 주목되는 인물은 조헌과 서기다. 조헌은 이지함을 가장 존숭하는 스승으로 생각했으며 이지함 또한 조헌이 동인과 서인의 분립기에 과격한 언론을 말미암아 정치적으로 어려움을 겪을 때도 오히려 조헌에 대해 ‘지금 세상에 초야에서 인재를 보기가 드문데, 조헌만은 안빈낙도하여 명예와 이익을 버리고 지극한 정성으로 임금을 사랑하며 나라를 걱정하고 있으니 옛날 사람 중에서 찾는다 해도 실제로 그와 짝할 만한 이가 드물다. 이 사람을 빼놓고 나는 다른 사람을 모른다’고 극구 칭찬하였다. 서기는 이지함과 가까운 지역에 살면서 그의 명성을 듣고 찾아와 그의 제자가 되었다.
학풍과 현실관
1) 학풍 형성의 배경
조선의 조정에는 국초부터 학문과 행실이 탁월한 학자들을 유일이라는 형태로 등용시켜 이들의 학문적 재질을 국정에 반영하려고 했다. 조선초기의 학자 정도전이 쓴 ‘경국대전’에는 유 등용의 기준이 제시되어 있는데, 이 기록에서 주목되는 점은 유일등용의 기준으로 ‘법률과 산학에 정밀하고 이치에 통달하여 백성을 다스리는 일에 합당한 사람, 지모나 도력이 깊고 용기가 삼군에 가히 장수가 될 만한 사람, 사어에 능숙하고 돌멩이를 던지는 일에 솜씨가 있어 군무를 담당할 만한 사람, 그리고 천문·지리·복서·의약 중 혹 한 가지 재주 가진 사람’ 등 다방면에 능력을 가진 인재들을 찾는 점이다. 이지함의 경우에는 이러한 기준에 상당히 부합되는 인물로 평가된다.
처사형 학자들의 학풍과 사상은 일정한 인맥과 교육관계를 통해 전파, 계승되어 나갔다. 특히 이지함이나 서경덕, 정렴 등 16세기의 사상계에서 이단적 성향을 보인 학자들은 사우관계나 혈연관계를 통해 사상적 지향과 현실에의 대응자세를 같이하는 각각의 그룹을 형성하였다. 이들 처사형 학자들의 학풍과 사상은 16세기 이후 사상계에서 하나의 주요한 흐름을 형성하였으며 허목 등 근기남인 학자들에게도 가학 등을 통해 학풍이 계승되었다.
2) 학풍의 특징
이지함의 학풍에서 우선 주목되는 것은 학문의 다양성이다. 유사에 의하면 그는 천문·지리·의약·복서·법률·산수·관상·비기에 이르기까지 통하지 않는 곳이 없었다고 할 정도이다.
사회경제사상
1) 말업의 중시
이지함의 경제사상에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급과 국부의 증대로 요약될 수 있다. 백성들 나누나가 생산활동에 전념하여 재화와 부를 창출하자는 것이었다. 이지함은 현실의 문제점을 타계할 수 있는 방책으로 크게 세가 대책을 제시하였다.
이지함은 먼저 제왕의 창고는 세 가지가 있음을 전제하고 도덕을 간직하는 창고인 인심을 바르게 하는 것이 상책이며, 인재를 뽑는 창고인 이조와 병조의 관리를 적절히 하는 것이 중책이며, 백가지 사물을 간직한 창고인 육지와 해양개발을 적극적으로 하는 것을 하책으로 정의하였다. 그러나 이지함이 중점을 둔 것은 하책이었다. 즉 당면한 현실에서 상책과 중책은 기대하기 어려운 실정이므로 하책을 적극적으로 실시할 것을 강조하였다. 이지함이 하책을 강조한 것은 결국 자원의 적극적인 개발과 연결되며 당시로서는 혁신적인 말업관과도 연결된다.
2) 사회경제사상의 의의
이지함이 적극적인 말업관을 제시한 이면에는 의와 리를 정통성리학의 관점에서 해석하지 않고 백성의 생활에 유용한 것인가를 기준으로 놓고 보는 입장이 바탕이 되는 것이 주목된다. 백성들에게 도움이 된다면 리利도 적극 도입해야 한다는 사상은 말업을 농업과 동등하게 중시하는 것과도 이어진다.
제5장 17세기 전반 북인관료의 사상-김신국, 남이공, 김세렴을 중심으로-
북인 연구의 필요성
17세기 전반의 조선사회는 왜란과 호란을 체험하고 그 후유증을 극복하기 위하여 다양한 방법의 국가 재정비 방향이 모색되고 추진되는 시기로서 그 역사적 의미가 주어진다. 이러한 관점에서 정치사, 경제사 분야의 연구는 어느 정도 이루어졌으나, 17세기 전반의 사상사에 대한 기존의 연구성과는 극히 부진한 실정이다.
북인관료의 존재와 역할
북인은 동인 중 이황 문인이 떨어져나간 상태에서 이루어진 정파로, 서경덕과 조식의 문인이 주축을 이루었으나 학연의 순수성은 떨어지며 그 구성원은 다기하였다. 북인은 선조와 광해군대에 정치적 쟁점이 있을 때마다 그 이해관계에 따라 분기하여 대북, 소북, 육북, 골북, 중북, 유당, 남당 등으로 분립되기도 하였다.
광해군 후반 정국을 주도해 나간 대북정권의 정치 중 가장 주목되는 것은 무엇보다도 새로운 왕통의 확립 가능성을 모두 제거하고자 하는 목적 아래 행해진 일련의 정치적 참극이다. 임해군의 살해, 영창대군의 폐서와 증살, 영창대군의 외조 김제남의 사사, 인목대비의 폐위가 그것으로서 성리학적 윤리관에서 패륜으로 간주된 것이 직시되면서도 광해군의 왕권안정으로 위해 대북정권이 그와 같은 극단적인 방법을 자행한 것은 회·티변척을 계기로 한 북인정권의 사림계로부터의 지지기반 상실과도 많은 관련이 있다. 결국 폐모살제로 대표되는 패륜행위와 명에 사대의 예를 취하지 않는 중립적인 외교정책으로 인하여, 성리학적 명분론에 충실했던 서인들에게 인조반정의 명분을 제공하고 몰락하게 된다.
인조대 이후에도 활약하는 북인관료로는 김신국, 김시국, 남이공, 남이웅, 김세렴 등을 들 수 있다. 김신국, 남이공은 소북의 영수로서 선조·광해군대에는 청류의 범주에 들어가는 인물이었다. 이들은 광해군대에 정계의 핵심적 위치에 있었음에도 인조반정 이후에도 호조판서 등 중앙의 요직을 맡으면서 광해군대의 정책을 일관성 있게 추진하여 갔다. 북인계 인물로서 인조대 실무관료로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김세렴은 유형원의 스승으로서 그의 학문에 크게 영향을 주어 실학적 기반을 조성했다는 측면에서 또한 관심의 대상이 된다.
사회경제정책론
1) 국방론과 군제개혁론
북인계열이 선조대 후반 이래로 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하게 된 주요한 계기는 임진왜란시에 강력한 주전론을 전개하면서 의병활동에 적극적이었기 때문이다. 북인의 학문적 연원으로 소급할 수 있는 조식의 경의지학은 성리학을 하학 중심으로 인식하고 실천의 측면에서ㅏ 중점을 주는 데 큰 영향을 미쳤으며 이를 계승한 정인홍, 곽재우의 의병 주도는 북인세력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시켰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형성된 북인계열의 무와 병법 중시경향은 광해군과 인조대의 김신국, 김세렴의 사상에 잘 드러나고 있다.
2) 은광개발과 주전론
광해군대에 북인이 중심이 되어 정국이 운영되면서 나타난 중요한 특징으로는 전란을 체험한 후에 국부를 증대하기 위한 방안으로서 상업적 유통을 중시한 것을 들 수 있다. 호패법, 양전사업, 대동법 등이 시행되고 은광개발과 주전론도 활발히 제기되었다. 인조대에도 북인관료와 최명길, 조익 등 서인관료가 중심이 되어 이러한 시책을 계속 추진해 나갔다.
제6장 17세기 중·후반 소론 학자의 사상-윤증·최석정을 중심으로-
제7장 17세기 중·후반 근기남인 학자의 학풍
제8장 18세기 이익의 학풍과 성호사설
학문 형성의 배경
18세기를 대표하는 실학자 이익(1681~1763)은 그의 호 성호처럼 별과 같이 쟁쟁한 실학파 학자들을 모이게 한 호수와 같은 학자였다. 경기도 안산의 첨성촌을 무대로 실학을 연구하고 후학들을 가르친 그의 학문은 조선 후기 실학이 만개되는 기반을 제공하였다. 이익이 주로 활동한 18세기는 17세기부터 점차 제기된 실학 추구의 학풍이 보완, 발전되어 가는 시기로서 실학이 하나의 학파로서 성립을 보게 되었고 이익은 바로 그 중심인물이었다.
이익은 유형원에게 큰 영향을 받았다. ‘반계선생문집서’, ‘반계수록서’, ‘반계유선생전’을 저술 한 것은 이러한 존숭의식이 구체적으로 나타난 것이며 성호사설 곳곳에서도 유형원의 제안을 언급하였다.
이익의 학문과 사상은 그가 처한 불우한 환경과 선배 남인 학자들의 영향에서 성립된 것으로, 정치·경제·사회·풍속·자연·역사·문학·철학 등 여러 방면에 걸쳐 비판적이고 창의적인 의견을 제시하여 ‘성호학’이라 불린 만한 독자적인 사상체계를 형성하였다.
이익의 학문에서 또 하나 두드러진 것은 서양에 대한 적극적인 인식이다. 이익은 주자성리학을 신봉하는 대부분의 유학자들과는 달리 불교나 천주교와 같은 이단 학문에 대해서도 무조건 배척하지 않고 옳고 그름을 따쳐 취사선택할 수 있는 사상적 기반을 확보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서양의 과학 기술을 적극적으로 탐구할 수 있는 사상적 토대도 아울러 갖추고 있었다. 바로 이러한 실학사상을 바탕으로 다방면의 서양 과학 기술을 적극적으로 탐구한 결과 서양의 과학 기술이 중국의 그것보다 우수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이익의 문하에서 서학이나 천주교에 경도된 학자가 나오는 것도 스승의 이러한 학문적인 기반과 무관하지가 않다.
성호사설의 구성과 주요 내용
성호사설은 이익이 40세 전후부터 책을 읽다가 느낀 점이나 제자들의 질문에 답한 내용을 기록해 두었다가 그의 나이 80세 되었을 때 집안 조카들이 정리해 편찬한 책이다. 사설이란 ‘자질구레하고 번잡한 글’이란 뜻으로 이익이 자신을 최대한 낮추어 이렇게 표현한 것일 뿐, 실제 이 책에는 천문, 지리, 역사, 관제, 군사, 경제, 풍속, 문학, 종교, 음악, 생활사 등 매우 다양한 내용들이 포함되어 있다.
1) 천지문
천지문은 천문과 역사, 지리에 관한 내용을 중심을 이루고 있다. 일월, 성신, 풍우, 뇌진, 조석, 일식, 일귀 등에 관한 내용을 비롯하여 단기강역, 삼한, 한사군, 예맥, 울릉도, 여진, 대마도 정벌에 이르는 당댱한 역사와 지리에 관한 내용들로 채워져 있다. 이중에는 지구가 둥글다는 것, 지구의 아래위에 사람이 살고 있다는 것 등 서양의 과학 수준을 흡수한 내용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든데, 주로 중국의 고전을 인용하면서 자연의 변화상을 서술해 나가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2) 만물문
만물문에서는 의복과 음식, 곤충과 동물, 식물에 관한 관찰 기록을 비롯하여 망원경, 조총, 자명종, 안경 등 당시 중국을 통해 수입된 서양 물품의 도입 배경과 기능을 비롯하여 두부, 목장, 담배, 술 등 생활사에 관한 기록과 생, 가야금, 속악 등 음악 관련 기록, 화총, 병기, 화전 등 군사 무기 등 다양한 내용들이 실려 있다. 남초로 불렸던 당시의 담배 이야기도 관심을 끌며 술에 대한 해악을 강하게 주장한 것도 주목된다.
담배에 대해서는, ‘우리나라에 담배가 많이 유행한 것은 광해군 말년부터 시작되었는데, 세상에 전하기로는 남쪽 바다 가운데 있는 담파국이라는 나라에서 들어온 까닭에 속칭 담파라 한다’는 것임을 기록하고 있다. 이어 누가 자신에게 담배란 것이 사람에게 유익한 것인지를 질문하자, ‘담배란 가래침이 목구멍에 붙어 뱉어도 나오지 않을 때 유익하고 구역질이 나면서 침이 뒤끓을 때 유익하며, 먹은 것이 소화가 안 되고 동작이 나쁠 때 유익하고 가슴이 조이면서 신물이 나올 때 유익하며, 한겨울에 추위를 막는데 유익한 것이다.’라 하여 담배가 가지는 유익함에 대해서도 기록했지만 안으로는 정신을 해치고 밖으로 듣고 보는 것까지 해쳐서 머리가 희게 되고 얼굴이 늙게 되며 이가 일찍 빠지는 등 그 해가 이로움보다 훨씬 심각함을 지적하였다. 이외에 담배의 냄새가 고약한 점, 재물을 없애는 점, 담배 구하기에 급급한 세태 등 세 가지를 가장 큰 문제점을 지적하였다.
술에 대해서 성호는 ‘나는 술이라는 음식이 단 한 가지라도 유익이 된다는 점을 알지 못하겠다.’고 하면서 단호하게 술에 대한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였다. 이익은 주 항목에서 자신도 젊어서는 술을 많이 마셨음을 고백하고, 자식과 손자에게도 자신이 죽은 후에 제사에 예만 쓰고 술을 쓰지 말라고 하고 있다. 술이란 정신을 어지럽히며, 재정에도 손해가 된다는 것이 주된 이유였다.
이수광 또한 술에 대해서는 철저히 부정적이었다. 지봉유설의 식물부, 주와 같은 항목에서는 ‘내가 보기에 세상 사람으로 함부로 술을 마시는 사람이 일찍 죽지 않는 자가 드물다. 또 죽지 않는다고 해도 또한 병으로 폐인이 된다. 또 그밖에도 화를 불러 자기 몸을 망치는 자가 이루 셀 수 없다. 혹 말하기를 술이 사람을 상하는 것이 여색보다 심하다고 하니 그 말은 진실로 그렇다’는 등의 표현으로 술의 폐단을 강하게 언급하였는데, 성호가 곡식의 낭비를 금주의 주요 원인으로 지적하였다면 이수광은 건강을 술의 폐단의 주요 원인으로 꼽고 있다.
3) 인사문
인사문은 당시의 정치와 제도, 사회와 경제, 학문과 사상, 혼인, 제례, 인물, 사건 등에 관한 내용을 다루고 있다. 성호의 사회제도에 대한 비판 의식이 가장 많이 담겨 있는 부분이다.
이익은 선비가 평생 생업에 종사하지 않고 오로지 독서만 하는 것이 세무에 무익하고 가무에도 보탬이 없다고 하여 실학자로서의 입장을 분명히 하였다. 이러한 점은 ‘육두’에 잘 나타난다. 즉 농사를 하지 않는 자 중에는 6가지 좀이 있는데, 노비, 과업(과거제도), 벌열, 기교, 승니, 유타(게으름뱅이)의 여섯 가지를 당시 사회의 대표적인 폐단으로 적시하고 구체적으로 그 문제점을 지적하였다. 특히 노비에 대해서는 ‘노비를 대대로 천하에 전하는 것은 고금에 없는 일이다’라고 하여 강력하게 노비제도의 존속을 비판하였다.
4) 경사문
경사문에서는 유교 경전에 관한 내용, 불교 노장사상, 민간신앙에 대한 내용을 언급하고 있다. 이 부분에는 성호의 경사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함께, 역사에 대한 그의 인식도 구체적으로 드러나 있다.
경사문 역시 중국의 역사에 관한 성호의 견해가 주를 이루고 있지만 우리 역사에 관한 내용을 다수 포함되어 있어서 성호의 사론을 엿볼 수 있다. 성호는 역사 서술이 매우 어려운 작업임을 서술하고 자료의 엄밀한 고증을 중시했다.
성호의 역사에 대한 광범한 이해와 문헌고증학적인 자세는 제자인 안정복에게 이어져 조선후기를 대표하는 역사서 ‘동사강목’이 탄생할 수 있는 바탕이 되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5) 시문문
시문문은 우리 나라와 중국의 역대 시문을 정리한 부분이다. 경서와 역사, 시와 문장 등에 대한 성호의 학문적 깊이가 나타나 있는데, 대략 중국측 시문의 비중이 2/3 정도를 차지한다. 시문에 관한 내용 중에도 상당수가 시문의 교감이나 시구의 고증에 관한 것이 중심을 이루고 성호의 박학과 함께 고증적인 그의 학문 태도를 엿볼 수 있다.
성호사설의 학술사적 위치
지봉유설을 계승한 성호사설의 백과사전적인 학풍은 안정복(1712~1791)의 잡동산이, 조재삼(1808~1836)의 송남잡지, 이규경(1788~1860년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 최한기의 명남루총서 등의 저술에 영향을 주면서 백과사전적인 학풍이 조선후기에 자리를 잡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제9장 19세기 중엽 이규경의 학풍과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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