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정약용 유배지에서 만나다(박석무, 한길사), 2012년 7월에 읽음
오늘의 현실을 헤쳐 나가기 위해 우리는 다산을 만나야 한다!
다산 정약용은 참으로 인간다운 사람이었다. 귀양지에서 어린 막내아들의 죽음을 듣고 한없이 눈물을 흘리며 목메어 울기도 하고, 자신보다 더 훌륭한 학식과 인품을 지니고도 더 외롭고 쓸쓸하게 유배살이를 하다 세상을 떠난 둘째형 정약전의 부음에 통곡하며 형님이 그리워서 애태우기도 했다. 병들어 굶어죽어가는 백성들의 참담한 모습을 보고 삶의 의욕마저 잃었던 그의 뜨거운 인간애에 대해 마음을 기울여야 한다.
사상가, 학자, 선각자라는 위치에서 현자의 지위까지 오른 다산이라는 큰 인간을 통해서 우리의 삶을 되돌아보는 기회도 가져야 한다. 과거에 장원급제한 명문 집안의 출신으로 먼먼 바닷가 낯선 타향에서 시골의 백성들과 스스럼없이 어울려 지내며 그들의 아픔을 위로해주고, 그들이 당하는 질곡의 삶을 해방시키기 위해 한없는 애정으로 지혜를 짜내던 대승적인 실천정신을 배워야 한다. 오늘의 현실을 헤쳐 나가기 위해 우리는 다산을 만나야 한다.(출판사 서평)
1. 흑산도 아득한 곳 바다와 하늘뿐인데
다산의 스승 성호 이익
다산이 가장 존숭하고 가장 큰 영향을 받은 실학자는 성호 이익이다. 성호는 1681년에 태어나 여든세 살의 일기로 1763년에 세상을 떠난 분이니 다산이 태어난 다음해에 타계했다. 다산은 생전에 그를 뵐 수는 없었지만 그의 문하에서 배운 제자들을 통해 그의 가르침을 듣고 그가 남긴 저술들을 읽으며 그의 실학논리를 기초로 해서 자신의 학문을 새롭게 수립했다. 성호야말로 다산 학문의 원조였다.
신유년의 종교재판
신유사옥은 고약한 사건이다. 조선 후기에 봉건왕조의 교조적인 지도이념인 유교, 즉 성리학이라는 학문과 사상으로는 역사를 통째로 담을 수 없다는 여러 징후들이 나타났다. 서양의 종교이자 사상인 천주교와 교리가 중국을 통해 유입되면서 역사의 변동성과 사회의 운동성이 새롭게 감지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시대와 역사의 변혁기를 제대로 포착하고 가장 발빠르게 파악했던 일군의 학자들이 다름 아닌 남인 계열 가운데 신서파였다.
신유박해의 발단은 여러 가지 원인에서 찾을 수 있다. 그 가운데 성호 이익의 서학 소개와 이해도 불행한 역사를 발단시키는 중요한 모티브라 할 수 있다. 성호가 특히 서양의 과학사상에 깊은 관심을 갖고 매우 긍정적인 평가를 내린 점은 후배 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성호의 ‘발천주실의’는 신앙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를 분명하게 피력하긴 했지만, 그 논리에는 상당히 긍정적인 요소가 있음을 인정했다. 우파의 선해 학자들은 부정적인 측면을 강조해 서학의 반대에 철저한 입장이었으나 권철신, 이가환, 이벽, 이승훈 등의 좌파 계열 후배 학자들은 긍정적인 측면에 더 매료되어 서학 수용의 신서파 그룹을 형성하기에 이른다.
2. 내 의지를 밝히다
사도세자가 죽은 해에 태어나다
다산이 태어난 임오년 5월 13일에는 영조의 아들로 세자에 책봉되어 임금의 대리청정을 맡아보던 사도세자가 폐세자가 되어 뒤주에 갇히는 사건이 일어났다. 뒤주에 갇혀 비참하게 죽음을 맞은 사도세자의 사건은 조선 후기의 정치사는 요동치게 만든 대형 사건이었다. 이 사건으로 시파와 벽파의 싸움이 배태되어 혈투가 계속되었고, 이 혈투의 연장선상에서 신유사옥의 대화론도 발발했다.
다정한 벗 이벽을 잃고
1784년 3월에는 이승훈이 영세를 받고 북경에서 귀국하여 본격적으로 천주교가 번지기 시작했다. 같은 해 4월 15일 다산은 형수의 4주기 제사를 마치고 서울로 가는 배를 타고 오던 중, 형수의 친정아우인 이벽에게서 천주교 관계서적을 받아 읽게 되고 천주교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다. 책을 읽은 사실, 뒤에 이벽과 상종하면서 더 많은 책을 읽고 서교인 천주교에 마음을 기울인 일, 이것이야말로 다산 일생에서 맞이한 가장 큰 사건 가운데 하나였다.
3. 세상살이 구불구불 위험해지네
수원화성을 축조하다
다산은 스물여덟의 나이로 과거에 합격한 뒤 임금의 명령에 따라 배다리 역사에 대한 규제를 올려 큰 공을 세웠다. 임금은 이 일을 기억하고 성 쌓는 규제를 올리라고 명령했다. 다산은 중국의 윤경이 지은 보약이라는 책과 서애 유성룡이 지은 성설이라는 책을 참고해 가장 좋은 방법의 성제를 기술하여 임금에게 바쳤다. 임금은 이어 궁중에 비장해둔 중국 책 ‘도서집성’과 ‘기기도설’을 다산에게 내려보내 무거운 물건을 끌고 가고 위로 올리는 방법에 대한 설명서를 보내라고 지시했다. 다산은 정조대왕에게 ‘기중가도설’을 지어 바쳤다. 도르래나 수레바퀴 등을 이용해 무겁고 큰 물건을 편하게 옮기거나 위로 올릴 수 있는 방법을 창안해 낸 것이다.
정조시대를 조선시대의 문예부흥 시대라고 말한다. 이 시기에 다른 어떤 시기보다 높은 수준의 문화가 창출되었다. 화성은 정조시대의 문화유산 가운데 대표적인 상징물이다. 그런데 세계문화유산으로도 기록된 화성은 바로 다산의 학문적 업적의 결과물이라고도 할 수 있다.
공서파, 공격의 활줄을 당기다
1795년인 을묘년은 정조대왕의 아버지 사도세자가 살아 있으면 회갑을 맞는 해다. 생전에 효도를 하지 못한 정조는 그것을 원통하게 여기면서 돌아가신 사도세자를 위하는 일에는 온갖 정성을 다했다. 양주에 있던 아버지 묘소를 수원으로 옮기고 화상을 새로 쌓아 신도시를 건설하는 등 아버지를 위하는 일에는 못할 것이 없을 정도였다.
정조는 채제공, 이가환, 정약용 등을 그의 옆에 두고 그들에게 중요한 일을 맡겨 시파의 영향력이 커졌다. 새해가 시작되자 다산은 정3품 당상관으로 승진돼 통정대부 동부승지에 임명되었고 이가환은 공조판서에 임명됨으로써 정경의 위계에 올랐다.
이해 4월에 중국인 주문모(1751~1801) 신부가 복장을 위장하고 국내로 들어와 몰래 숨어서 천주교를 전교하다가 발각되는 사간이 있었다. 주문모는 피신하여 체포하지 못했지만 그를 국내로 맞아들인 지황, 윤유일과 그를 집에 숨겨주었던 최인길 등 세 사람은 체포되어 장살당하고 말았다.
이 일을 기회로 삼아 공서파가 들고 일어났다. 천주교 문제는 정치의 정면으로 부상했다. 더구나 남인 시파이자 신서파가 판서와 승지의 지위에 오르자, 세력이 확대되는 것을 감지한 반대파는 공격의 활줄을 강하게 당기기 시작했다.
신도들이 순교하는 데 나만 무사할 수는 없다
1795년 5월 12일 최인길, 지황, 윤유일이 장살당하면서 세상은 시끄러워졌다. 신유사옥 때까지 전교 활동에 열심히던 주문모 신부는 신도들이 수없이 순교하는데 자신만 무사할 수는 없다고 여기고, 1801년 3월 12일 의금부에 스스로 찾아가 자수하였다. 4월 13일 주 신부는 한강 가의 새남터에서 참수당했으니 이때 그의 나이 마흔아홉살이었다. 주 신부가 자수하면서 천주교 문제는 더욱 확대되어 왕실의 송씨, 신씨 부인 등이 입교한 사실이 드러나 3월 17일 사약을 받고 죽었으며 이때 귀양가 있던 강화도의 은언군도 연좌에 걸려 함께 사약을 받고 죽어야 했다.
4. 자상하신 임금님 말씀이 절로 눈물 흐르네
천주교 성지 천진암
천진암은 지금의 광주시 퇴촌면에 있는 조그마한 절이다. 이제는 천주교 성지가 되었다. 한국 천주교 발상지라고 하여 거대한 성당의 터가 닦이고 온갖 기념비와 묘소들이 들어차 있다. 그러나 그 때 다산이 찾은 천진암은 고향 근처에 있는 작은 절, 이름 그대로 작은 암자였다. 기해년(1779년) 겨울에 이곳에서 당대의 학자 권철신이 학문토론회를 개최한 적이 있다. 그리고 젊은 청년 이벽이 눈 속에 찾아와 함께 독서를 했던 추억도 있다. 이벽은 서른 두 살의 아이로 1786년에 이미 세상을 떠났다.
마과회통을 저술하다
옛날 송나라의 범중엄이라는 정치가는 “나가 글을 읽고 도를 배우는 것은 천하의 인명을 살리기 위함이다. 그렇지 않다면 황제의 의서를 읽어서 의약의 오묘한 이치를 깊이 연구하는 것 또한 사람을 살리는 것이다”라고 했으니 옛사람의 인자하고도 넓은 마음이 이와 같았다. 근세에 몽수 이헌길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은 뜻이 뛰어났으나 공명을 이루지 못해 사람을 살리려 해도 할 수 없었다. 그는 홍역에 관한 책을 홀로 탐구해 수많은 어린이를 살렸으니 나도 그 가운데 한 사람이다. 내가 이미 이헌길로 말미암아 살아났기 때문에 마음 속으로 은혜를 갚고자 했으나 어떻게 할 방법이 없었다.
몽수의 책을 가져다가 근원을 찾고 근본을 탐구한 다음, 중국의 홍역에 관한 책 수십 가지를 얻어서 이리저리 찾아 조례를 갖추었는데, 그 책의 내용이 산만하게 뒤섞여 근사하고 찾기에 불편했다. 홍역은 병의 속도가 매우 빠르고 열이 대단하므로 순식간에 목숨이 왔다갔다하니, 세월을 두고 치료할 수 있는 병과는 다르다.
이에 세밀하게 나누고 유별로 모아 눈썹처럼 정연하고 손바닥을 보듯 쉽게 하여 환자들이 책을 펴면 처방을 구하고 찾기에 번거롭지 않게 했다. 무릇 다섯 차례 초고를 바꾼 뒤에 책이 비로소 이루어졌으니, 아아, 몽수가 아직 살아 있다면 아미 빙긋이 웃으며 흡족하게 생각할 것이다.
아아! 병든 사람에게 의원이 없어진 지 오래되었다. 모든 병이 다 그렇지만 홍역이 더욱 심한 것은 어째서인가. 의원이 의원을 업으로 삼는 것은 이익을 의해서다. 홍역은 대개 수십 년 만에 한 번 발생하니, 이 홍역 치료를 업으로 삼으면 기대할 만한 이익이 없다고 하여 하지 않으며, 환자를 만나서는 치료하지 못하는 것도 부끄러운 일인데, 더구나 억측으로 약을 써서 사람을 죽게 하니 정말 잔인한 일이다.
궁벽한 시골 사람이 진실로 병의 증상을 살피지 않고 이 책을 함부로 믿고 그대로 강하고 독한 약재를 투여한다면 실패하는 경우가 없지 않을 것이니, 이 또한 내가 크게 두려워하는 것이다.
(마과회통서)
5. 귀양살이 타향살이
유배지 장기로 떠나다
장기현은 본디 경주부의 속현이다. 경북의 영일만, 즉 토끼꼬리의 장기곶이 포함되는 지역이다. 본디 지금의 군명인 영일현과 흥해현과도 인접한 곳으로 한때는 영일군으로 통합되어 이름도 없어진 곳이다. 신라 때에 처음 현으로 설치되었는데, 이름은 지답현이었다. 그후 경덕왕 때에 기립현이라 고치고, 고려 때에는 장기현으로 바뀌어 경주부의 속현이 되었다. 한때는 바다와 접한 요새지라는 이유로 무신 가운데 높은 벼슬아치만을 보내 고을을 맡도록 했으나 나중에는 현감이 다스렸다. 1895년 갑오경장으로 온갖 제도가 바뀌면서 장기군으로 승격되어 군수가 일을 보았으며 나중에 포항이 시로 승격되고 영일군에 합해져 장기현은 이름을 잃고 영일군 지행면으로 바뀌었다. 그러다가 최근에는 영일군이 포항시와 통합되어 포항시 장기면을 바뀌었다.
장기마을에 새겨진 다산의 시혼
마현리, 그곳은 다산이 가장 비참한 시절을 보낸 유배지였다. 그러나 그곳은 다산의 사상과 문학정신에 새로운 활력소를 불어넣어준 곳이기도 하다. 노동요, 풍속시, 우화시 등을 포함하여 리얼리즘의 수법에 손색이 없는 불후의 시들이 그곳에서 저작되었다는 점만으로도, 마현리는 다산 일생에서 영원히 분리될 수 없는 다산 문학의 산실이다.
6.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
장기에서 강진으로
10월 20일 저녁에 경상도 장기에서 압송되어 27일에 서울의 감옥에 갇히고 11월 5일에 ‘황사영 백서’ 사건에 혐의 없음을 인정받고 귀양지가 바뀌어 11월 21일 전라도 나주읍의 북쪽 5리 지점에 있는 밤남정에 도착해 다산과 그의 둘째형 정약전은 생시의 마지막인 동숙을 하게 된다.
사의재기
사의재란 내가 강진에서 귀양살이하며 살아가던 방이다. 생각은 마땅히 맑아야 하니 맑지 못하면 곧바로 맑게 해야 한다. 용모는 마땅히 엄숙해야 하니 엄숙하지 못하면 곧바로 엄숙함이 엉기도록 해야 한다. 언어는 마땅히 과묵해야 하니 말이 많다면 곧바로 그치게 해야 한다. 동작은 마땅히 후중해야 하니 후중하지 못하다면 곧바로 더디게 해야 한다. 이런 이유로 그 방의 이름을 ‘네 가지를 마땅하게 해야 할 방’(四宜之齋)이라고 했다. 마땅함이라는 것을 의에 맞도록 하는 것이니 의로 규제함이다. 나이 들어가는 것이 염려되고 뜻을 둔 사업이 퇴폐됨을 서글프게 여기므로 자신을 성찰하려는 까닭에서 지은 이름이다.
폐족이기 때문에 더 큰 인물이 될 수 있다
폐족으로서 잘 처신하는 방법은 오직 독서하는 일 한 가지밖에 없다. 독서라는 것은 사람에게 가장 중요하고 깨끗한 일일 뿐만 아니라 호사스러운 집안 자제들에게만 맛을 알도록 하는 것도 아니고 촌구석 수재들이 심오함을 넘겨다 볼 수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반드시 벼슬하던 집안의 자제로서 어려서부터 듣고 본 바도 있는데다 중년에 재난을 당한 너희들 같은 젊은이들이 진정한 독서를 하기에 가장 좋은 것이다. 그네들이 책을 읽을 수 없다는 것이 아니라 뜻도 의미도 모르면서 마냥 책만 읽는다고 해서 독서를 한다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집안의 학문 전통을 이어야 한다
독서를 하려면 반드시 먼저 근본을 확립해야 한다. 근본이란 무엇을 일컫는가. 학문에 뜻을 두지 않으면 독서를 할 수 없으며, 학문에 뜻을 둔다고 했을 때는 반드시 먼저 근본을 확립해야 한다. 근본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오직 효제가 그것이다. 먼저 효제를 힘써 실천함으로써 근본을 확립해야 하고 근본이 확립되고 나면 학문은 자연스럽게 몸에 배어들고 넉넉해진다. 학문이 몸에 배어들고 넉넉해지면 특별히 순서에 다른 독서의 단계를 강구하지 않아도 괜찮다.
7. 다산학이 우뚝 서다
유배지에서 온 편지
세상의 옷이나 음식, 재물 등은 부질없고 가치 없는 것이다. 옷이란 입으면 닳게 마련이고 음식은 먹으면 썩고 만다. 자손에게 전해준다 해도 끝내 탕진되고 만다. 다만 몰락한 친척이나 가난한 벗에게 나누어준다면 영원히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의돈(춘추시대 노나라의 대부호)의 창고 속에 감춰둔 것은 지금이야 흔적조차 없지만 소부(황제에게서 받은 황금을 나누어준 한 나라 때의 벼슬아치)의 황금은 지금까지도 이야기가 전해온다. 또한 금곡(진나라 때 부호 석숭의 별장)의 화려하던 장막도 이제 티끌로 변했지만 범중엄이 보릿배에 보리를 실어 친구를 도왔던 일은 아직도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린다.
왜 그런가. 형태가 있는 것은 없어지기 쉽지만 형태가 없는 것은 없어지기 어렵기 때문이다. 스스로 자기 재물을 사용해 버리는 것은 형태를 사용하는 것이고, 재물을 남에게 나누어 주는 것은 정신적으로 사용한 것이 된다. 물질로써 물질적인 향락을 누린다면 닳아 없어질 수밖에 없고, 형태 없는 것으로 정신적인 향락을 누린다면 변하거나 없어질 이유가 없다.
무릇 재화를 비밀리에 숨겨두는 방법으로 남에게 시혜하는 방법보다 더 좋은 것이 없다. 시혜해버리면 도적에게 빼앗길 걱정이 없고 불에 타버릴 걱정이 없고 소나 말로 운반하는 수고도 없다. 그리하여 자시가 죽은 후 꽃다운 이름을 천 년 뒤까지 남길 수도 있다. 자기 몸에 늘 재화를 지니고 다니는 방법에 그러한 것도 있으니 세상에 그처럼 유리한 게 어디 있겠느냐. 꽉 쥐면 쥘수록 더욱 미끄러워지는 것이 재물이니 재물이야말로 메기 같은 물고기라로나 할까.
여유당 뒷산에 잠들다
다산은 일흔다섯 살인 1836년 2월 22일 진시에 마현리의 집에서 운명해 같은해인 4월 1일 집 동산에 장사 지냈는데, 그의 유명을 좇아 장례를 치렀으니 여유당이 있던 뒤편의 자좌 언덕이다. 지금도 다산은 그곳에 누워 있다. 부인 홍씨는 일흔 여덟 살의 일기로 1838년에 세상을 떠나 다산과 합장해 함께 지하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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