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천과 삶/크리스천과 독서

조선의 슈퍼스타 토정 이지함(이태복, 동녁)

기독항해자 2012. 6. 15. 11:05

조선의 슈퍼스타 토정 이지함(이태복, 동녁), 2012년 6월에 읽음

『조선의 슈퍼스타 토정 이지함』은 450여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여전히 사랑받고 있는 토정 이지함의 삶과 생각을 새롭게 조명한 책이다. 조선 사회에서 방외 인물 또는 기인으로 저평가돼온 이지함의 숨겨진 면면을 파헤쳐, 불세출의 경략가로서 그의 진면목을 재평가한다. 평전의 딱딱한 형식을 피하면서도 여러 자료들을 충분히 소화해내어 토정 이지함의 참모습을 오늘의 현실에서 되살려냈다.

1. 신랑 도포를 거지들에게 나눠주다

지함이 장가를 간 다음날, 밖에 나갔다가 들어왔는데 도포가 없어진 채였다. 집안사람들이 왜 옷차림이 그러냐고 묻자, 지함은 태연스럽게 무악재 넘어 홍제교를 지나가다 세 명의 거지 아이들이 추위에 떨고 있어서 도포를 찢어 나눠주고 왔다는 거였다. 당연한 일을 했는데 왜 놀라느냐는 듯이 쳐다보아서 신부와 집안 사람들이 모두 할 말을 잃었다.

2. 종실의 사위

지함의 신부는 종친인 모산 수 이정랑의 딸이다. 장인 이정랑은 태종 이방원에게 왕의 자리를 내줬던 정종의 증손이다. 정종의 집안과 한산 이씨 집안 사이에는 일찍부터 세교가 있어왔다. 목은 이색이 이성계의 요청으로 정종이 태어날 때 이름을 지어주었는데 이후로 혼인관계과 이어져왔던 것이다. 지함도 혼인을 하면서 당시의 관습대로 처가살이를 하게 된다. 모산 수 이정랑의 고향집은 충주였는데, 한양에 집이 있고 광릉, 모산에도 산장이 있었다. 지함은 장인의 집이 있던 한양의 삼개(마포)에다가 신혼살림을 차셨다.

4. 과거에 뜻을 두지 않고 백성을 품다

지함은 성리학을 기본으로 하면서도 이론에 치우치는 관념적인 경향을 경계하고, 실제 사물의 이치와 운행의 원리를 찾아 백성 구제의 실천적 방도를 찾는 데 각별한 관심을 기울였다.

5. 부모님 산소가 바닷물에 잠길 터이니

6. 장인 역모 사건과 안명세의 옥사

7. 슬프구나, 조선의 백성이여-1550년 전후의 조선사회1

지함의 나이 서른 전후에서 쉰 사이, 즉 명종이 즉위한 1545년에서 사망한 1567년까지 약 22년 동안 벌어진 가장 큰 사건은 자연이 몰고 온 대재앙이었다. 잇따른 가뭄과 홍수 피해로 기근을 피해간 것이 몇 년이 채 되지 않았다. 거의 매년 극심한 가뭄과 홍수로 굶어 죽는 사람들이 길거리에 즐비했고, 기근이 극심할 때는 열 집에 아홉 집이 빌 정도였다.

8. 외척 세력의 발호와 사치-1550년 전후의 조선사회2

문정왕후 세력이 기근에 따른 근본적인 대책을 세우고 부패를 청산하여 국방력의 강화에 힘쓰는 대신 자신들의 안위를 빌면서 고관대작들의 부정부패를 방치하고 사치한 생활을 즐기자 나라의 기강이 무너지고 사치와 환락이 독버섯처럼 번져갔다. 조정 대신과 고을 수령들의 부패와 사치가 극성을 부리니 법과 원칙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연이은 기근에 살 길이 막막한 백성들은 난민이 되거나 도적이 되어 거리를 떠돌았다. 이러니 자연히 국경의 경계도 아무 의미가 없었다.

9. 지함을 둘러싼 사회환경-1550년 전후의 조선사회3

10. 토정, 역사의 무대에 등장하다

한양에 올라와서 지함이 먼저 한 일은 마포 강가에 토정을 짓는 일이었다. 백성들과 자주 만나고 구제사업을 본격적으로 추진할 공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조선시대 삼개나루는 팔도의 조운선이 집결하는 곳이어서 물산이 풍부했고, 그에 따라 사람이 끊임없이 드나들었다. 자신에게는 천길낭떠리지 위에 선 것처럼 엄격했지만, 백성과 뜻 있는 선비들에게 한없이 따뜻했던 지함은 삼개나누터에 토정을 짓고는 백성들과 함게 호흡하며 험난한 세상의 파도를 헤쳐나갔다.

11. 고기 잡아 쌀로 바꿔 백성들에게 나눠주다

지함은 생선을 상고들에게 팔아 쌀과 보리를 샀다. 토정 앞마당에 곡식이 산더미처럼 쌓였다. 배를 타고 고생한 사람들에게 일한 만큼 먼저 나눠주고, 아녀자들과 아이들에게도 골고루 남김없이 주었다. 지함은 정자를 짓자마자 삼개나루터 앞에 있는 밤섬에 백성들과 함께 건너가서 말 목장 빈터에 박씨를 심었다. 몇 달 후 밤섬에 박이 주렁주렁 열렸다. 지함은 박을 갈라 속을 파내고 죽을 쑤어 백성들에게 먹이고, 바가지는 상인들에게 팔아 곡식을 샀다. 그러곤 그 곡식마저 백성들에게 전부 나눠줬다. 배를 이끌고 출항할 때마다 연안의 빈 섬에 박을 심고 소금을 생산할 수 있도록 갯벌을 다졌다. 지함은 이렇게 수시로 선단을 꾸려서 굶주리는 백성들과 함께 바다로 나가 고기를 잡아와서 곡식으로 바꿔놓고 백성들에게 아낌없이 나눠줬다.

12. 소금을 만들어 곡식과 바꾸자

소금은 이성계 시절부터 조정이 관리하는 전매품으로서 고관대작이나 개인이 소유할 수 없었다. 그러나 다른 분야에서와 마찬가지로 소금도 궁궐의 내수사나 왕족들, 고관대작들이 조금씩 사유화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규모가 크지는 않았다. 15세기 후반에 이르면 염전과 어장은 농토와 마찬가지로 개인 간 거래가 가능했다. 소금을 쉽게 만들 수 있는 곳은 어김없이 이미 왕족과 권문세가들의 목록에 올라 있었다. 아무 데나 가서 소금을 만들 수 없었다는 얘기다. 지함은 서해안의 섬 지역에서 소금을 만들 수 있는 곳이 아직도 많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 곳은 권문세가의 입김이 닿지 않는 곳이기도 했다. 지함은 주인 없는 그런 곳에 염전을 만들기로 했다.

13. 상업으로 백성들의 숨통을 열어주라

양반들에게 물건을 팔아 이문을 남기는 일은 천한 짓이었다. 본업인 심성을 갈고 닦아 배우는 길과 말업인 이문을 남기는 장사는 결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본언이 부실해져서 백성들이 굶주린다면, 말업을 통해서 백성을 살릴 수 있다면 말업이면 어떤가? 오히려 말업을 적극 권장해서 살 길을 열어줘야 한다.

14. 백성들의 병을 치료

지함은 굶어 죽는 백성들을 보다 못해 고기를 잡고 소금을 구워서 수만 섬의 곡식으로 바꿔 백성들을 살려내는 일만 한 것이 아니다. 대다수 백성들이 제대로 먹지 못해서 지극히 허약했기 때문에 각종 질병에 쉽게 걸렸다. 지함에 관한 여러 기록에서 의술이 매우 정통했고 여러 난치병 환자들을 치료했다는 사례로 볼 때, 병에 걸린 백성들을 어떻게 치료해서 구제할까 하는 문제는 당연히 지함의 주된 관심사였을 것이다.

15. 천문관상으로 백성들을 어루만지다

지함은 역학과 복술, 관상을 깊이 탐구하여 백성들에게 세상은 길한 일만 있는 것도 아니고 흉한 일만 있는 것도 아니다, 조심해서 흉한 일을 피하면 길한 때가 온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16. 신분의 벽을 넘어서

토정에 찾아온 손님은 그가 고관대작이든 천한 갖바치나 백정, 역관, 의원, 병졸, 아전이든 누구에게나 열려 있었다. 지함은 그냥 만나는 사람에 대한 차별만 무너뜨린 것이 아니었다. 그 자신이 양반을 상징했던 의관을 벗어던졌다.

17. 지함과 교류했던 인물들

지함은 조선 팔도의 고명한 학자나 산중에 숨어 사는 기인들을 찾아다녔으나 그들의 세계에 머무르지는 않았다. 청년 시절에 화담 서경덕을 만나기 위해 개성의 송악산 화담산방을 찾아가 역학을 비롯해 학문하는 법을 배웠으나 이때도 몇 개월 머무르지 않았다. 지리산의 도인 위한조로부터 천문, 지리와 복서를 배웠으나 그를 따라 산 속에 숨어들지 않았다.

18. 지함의 조상들

지함의 집안은 목은 이색을 중시조로 하는 한산 이씨다. 목은의 아버지 이곳은 충숙왕 때 수재과에 제2명으로 급제한 뒤 이제현의 문하에서 수업했다. 그러나 권세가에게 줄을 대고 재물을 바치지 않으면 벼슬길이 열리지 않는 고려 조정의 현실에 좌절하여 정동행성의 시험에 제3명을 급제하고, 이어서 원나라 제과에 2갑으로 합격하여 금의환향했다. 문명을 날린 이곡은 원나라에게 고려의 처녀들을 갖다 바치는 공녀제 폐지를 주장해 이를 관철시켰다. 이곡의 아들 이색도 이제현의 문하에서 공부하고 원나라의 제과에 사실상 장원으로 급제하며 성균관 대사성, 국정을 총괄하는 문하시중을 맡아 고려말 문신들의 구심점이 되었다.

19. 조선 팔도에 신망이 넘치다-포천행 전후1

지함이 마포나루터에 토정을 짓고 백성들을 구제한다는 소문이 퍼지자 조선 천지에 그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백성들은 토정 이지함 선생에 관한 얘기라면 입에 거품을 물 정도로 신이 나서 떠들었다. 이렇게 지함의 명성이 높아지자 조정에서 그에게 벼슬길에 오르기를 권유했다. 그러자 지함은 더러운 소리를 들었다고 해서 귀를 씻고 고향으로 내려가 버렸다.

20. 살가죽만 남아서 죽음이 임박한 백성들-포천행 전후2

21. 바다와 육지의 창고를 열어 백성의 생업을 마련해 주자-포천 상소문

지함은 나라를 부흥시키는 대책 수립에 보탬이 되길 바라면서 죽기 일보 직전의 상황이므로 상중하의 대책을 얘기하고 시급한 현안에 대한 방책을 건의했다. 우선 포천의 양곡 부족 문제와 관련하여 조정 신료들은 경창이나 인근 고을의 양곡을 빌려 쓰라고 했지만 이는 근본 대책이 못 된다고 비판했다.

22. 왜구 2~3만이 침입하면 이 나라는 무너질 것이다-아산 상소문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니 근본이 튼튼해야 나라가 편안하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나라 밖에는 강성한 적이 도사리고 있고 나라 안에는 억울한 백성이 허다하니 장차 위급한 일을 당하면 이 나라를 어떻게 구제할 수 있겠습니까? 근본이 튼튼히 다져지지 않으면 나라의 안녕을 기약할 수 없으니 이에 대한 대비를 늦추어서는 아니 됩니다. 언제나 사태는 작은 문제를 소홀히 하는 데서 일어나고, 재앙은 생각지도 않게 엉뚱한 데서 터질 것입니다.

23. 무능한 조정, 대파국을 앞두고

아산현에서 벌어지고 있는 군역의 실상을 낱낱이 들어 연좌제의 폐지와 군적 정비, 군역 경감 등을 주장한 지함의 시무책은 결국 유야무야되고 말았다. 지함은 자신이 품었던 웅대한 구상을 포천과 아산에서 조금 드러내 보였으나 선조와 조정 대신들은 그 본의를 알지 못했다. 성리학의 형식 논리에 빠져 공자, 맹자와 같은 성인들의 진정한 뜻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던 그들은 “성군이 돼야 할 군왕은 의와 인을 말할 뿐, 이를 말하는 것은 소인에 지나지 않는다”는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25. 지함의 시와 논설

사람은 누구나 안으로는 슬기롭고 강해지를, 밖으로는 부유하고 존귀해지는 네 가지 소원을 갖고 있다. 그런데 존귀해지는 것은 벼슬하지 않은 것보다 존귀한 것이 없고 탐욕을 부리지 않는 것보다 부유한 것은 없다. 강함도 다투지 않는 것보다 강한 것이 없고 슬기로움도 알지 않는 것보다 신령스러운 것이 없다. 그러나 알지 못하면서도 슬기롭지 못한 경우가 있는데, 이는 심성이 혼미하고 어리석은 탓이다. 다투지 않으면서도 강하지 못한 경우는 심성이 나약한 탓이다. 따라서 탐욕을 부리지 않는데도 부유하지 못한 것은 심성이 가난한 탓이요 벼슬을 하지 않아도 존귀하지 못하는 것은 심성이 천박한 까닭이다. 그러므로 아는 것이 없으면 슬기롭고, 다투지 않으면 강하고, 탐욕을 부리지 않으면서도 부유하고, 벼슬을 하지 않으면서도 존귀해지는 것은 오로지 대인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26. 지함이 이윤이었다면

지함이 웅대한 포부를 펼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지 불과 14년이 안 돼 임진왜란이라는 엄청난 참화가 벌어졌다. ‘폭군도 백성을 이토록 곤궁하게 만들지 않았을 것이다’, ‘왜구의 무리가 2~3만명만 침입해도 나라가 무너질 것’이라고 지함이 경고한 그대로였다. 백성들은 도성을 떠나는 선조에게 돌팔매질을 하고 궁궐에 불을 질렀다. 왜군은 큰 저항 없이 한양을 점령했다. 너무나 당연한 결과였지만 참담하기 그지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