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기말 파리, 시각문화의 폭발-구경꾼의 탄생(바네사 R. 슈와르츠, 노명우·박성일, 마티), 2012년 6월에 읽음
세기말 파리에서의 대중문화의 형성을 '구경꾼의 탄생'이라는 측면에서 조명하는 책. 감시에 대한 욕망과 평행하게 진행되는 관음의 욕망에 휘말린 구경꾼의 새로운 대중문화를 다루고 있다. 구경의 대상이 아니라 구경의 주체로 등장하는 군중의 대중문화 분석을 통해 근대의 형성을 살펴본다. 이 책은 도시 생활의 구경거리화와 대중문화 출현의 상호 관련에 주목한다. 세기말 파리에 등장한 구경거리에 몰입한 다양한 구경꾼들의 모습을 분석하고 있으며, 세기말 파리를 단지 감상적인 벨에포크로 바라보는 대신에 예술적 성과에 필적하는 기술적 정복의 세계로서의 파리를 묘사하고 있다.
1. 대로와 정기간행물 그리고 일상
도시의 삶과 시각성의 연계는 19세기에 등장한 새로운 현상은 아니지만, 파리에서는 일상의 삶이 대중 소비를 위한 구경거리로 고양되었다. 오스망화(Haussmannization)로 알려진 도시의 재설계와 함께 이러한 특징들은 도시의 모더니티를 형성시켰고. 이에 따라 파리는 메트로폴리스의 전형이 되었다.
대중언론
19세기 후반기에 대중언론은 대로 위의 삶을 문학적 관음증으로 기록한 일종의 시나리오였다. 현대의 저널리즘, 특히 대량으로 유통되는 일간신문은 스펙터클로서 도시의 경험을, 기분전환으로서 바라보기의 경험을 정당화하는 원천으로 기능했다. 대로처럼 언론은 특히 일상을 선정적으로 만듦으로서 공동의 기쁨과 도시의 개인 거주민들을 ‘파리 사람’으로 변형시킨 공동의 정체성을 진작시켰다.
2. 시체를 구경하는 산보자들
공공장소에서 발견된 신원미상의 시체를 보관하는 장소였던 모르그는 익명성이라는 지극히 도시적인 경험을 대표한다. 익명성은 자유가 증대하면 소외도 증대할 가능성을 포함하고 있었다. 누군가가 죽었는데 그 사람이 누군지 모른다는 사실은 결국 도시에서만 가능한 일이다. 다른 유럽 도시들에도 모르그가 있었다. 하지만 유일하게 파리에서만 사람들은 커다란 유리 진열장 속에 전시된 시체를 주 5일 동안 자유롭게 볼 수 있었다. 이곳에서 공무원들과 대중매체는 신원미상의 시체들을 확인하는 엄숙한 업무를 대규모의 다양한 구경꾼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볼거리로 만들어냈다. 19세기 파리에서 유행하던 모르그 방문은 구경거리화된 현실세계의 일부였던 것이다.
지하감옥에서 모르그로
200년 동안 모르그의 주요한 목표는 경찰관할구역 내에서 발견된 신원미상의 시신을 보관하는 것이었다. 그러던 중 관리자들은 시체를 공개전시하면 시원 확인에 도움이 될 거라고 확신하게 되었다. 1800년 경찰당국은 모르그 공개전시의 기치를 설명하는 포고령을 발표했는데 여기서 그들은 실종된 사람의 신원을 밝히는 것이야말로 사회질서 유지에 필수적인 일이라고 주장했다.
모르그와 대중
모르그 전시를 흥미롭게 만든 것은 전시된 시체들이 실제 인간의 육신이라는 점이다. 이는 현실이 소설가의 상상보다 더욱 풍부한 이야기 거리를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마이야르는 “모르그의 실제 드라마가 당신의 모든 발명들보다 천 배는 더 충격적일 것이다”라고 주장했으며 “실제 삶이 이렇게 극적인데 누가 소설을 필요로 하겠는가”라고 덧붙였다. 마세 역시 모든 사건들의 현실성이야말로 모르그의 역사를 쓰기에 충분한 조건이라고 말하면서 이점에 동의했다. 전시실, 커튼, 모르그 바 끝에 늘어선 줄, 밀랍 가면, 의자에 앉은 시체들, 신문의 삽화, 이 모든 것들은 모르그를 둘써싼 현실이 재현되고 매개되고 조직되고 구경거리화된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보여준다.
3. 3차원의 신문, 밀랍인형 박물관
밀랍 박물관은 모르그의 구경거리화된 현실을 너무나 사실처럼 재현했기 때문에 구경의 즐거움을 불러일으켰다. 밀랍 박물관은 당시 인기를 누리던 시체 전시라는 내용에 박물관이라는 새로운 형식을 결합하여 절묘한 방식을 만들어냈다. 밀랍박물관은 19세기 후반 파리에서 벌어진 현실의 구경거리화를 반영했고 또한 촉진했다. 밀랍 박물관의 개관은 ‘실물을 세부적으로 꼼꼼하게 재생하여 대중의 관심을 끌어모으는’ 시설의 탄생을 뜻한다. 또한 이 박물관은 파리의 대중언론이 개척했고 광범위한 대중의 인기를 끌었던 현실의 구경거리화를 상업적으로 이용하려 하였다.
초창기의 밀랍 전시관
오락거리로서 밀랍 조형물이 19세기 후반에 처음 등장한 것은 아니다. 16세기 이후 밀랍은 해부학자들이 선호하는 재료였으며, 18세기 동안 밀랍 전시는 해부학이나 종교적 도상이라는 전형적 사용법을 넘어서 당시 발흥하던 상업 영역에서 활용되기 시작했다. 앙투안 베노아가 서로 어울리는 배경에 따라 몇 개의 인물상을 조화롭게 배치한 왕실가족은 프랑스에 등장한 초기 밀랍 전시의 대표적인 예이다.
3차원 신문. 밀랍 박물관
그레뱅 박물관은 신문의 절충적인 성격을 모방하면서 무용수와 여배우, 거리의 건달과 같은 일시적인 유명인부터 대통령, 왕, 탐험가 등의 전통적이며 역사적 인물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인물들과 장면을 전시했다. 그레뱅 박물관은 신문에 대립하지 않고 신문을 모델로 삼아 박물관으로서의 입지를 보다 강화했다. 그레뱅 박물관의 분류체계는 문화면, 가십란, 잡보기사와 같은 신문의 표제에 부합했다. 그레뱅 박물관은 속보 형식과 지속적인 전시물의 교체를 통해 신문을 모방했다.
밀랍 박물관이 재현하는 현실
밀랍 박물관은 신문이 재현했던 것처럼 세상을 묘사해냄으로써 시사적이며 미학적인 사실성을 동시에 보여주었다. 그레뱅 박물관은 단순히 현실을 재현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재현된 현실을 또 다시 재현하고 있었다. 가령 신문은 현실을 일상의 소비를 위해 포장하고 선정적으로 다루었지만, 사람들은 신문이 사실을 다룬다고 생각하면 읽는다. 그레뱅 박물관은 이러한 신문의 사실성을 다시 재현해낸 것이다.
4. 현실의 재현과 디오라마 광풍
초기 파노라마와 디오라마
파노라마를 처음 고안한 사람은 스코틀랜드 화가 로버트 바커라고 전해진다. 그는 1790년대 빚 때문에 감옥신세를 지다가 독방 벽에 수직으로 떨어지는 빛의 효과를 보고 파노라마를 생각해냈다고 한다. 두 개의 그리스어-전체를 뜻하는 판과 풍경을 뜻하는 호라마-로 이루어진 파노라마라는 단어는 ‘전체 풍경’을 의미한다. 사람들은 거대한 원형그림을 세워놓고 천장 틈새에서 들어오는 자연광을 그림에 비추어 자연의 환영을 보여주는 장치를 만들어냈다. 관람객들은 어두운 통로로 들어와서 방 한가운데 있는 플랫폼 위에 선 채 끝이 보이지 않는 커다란 그림으로 둘러싸였다. 파노라마는 이처럼 관객이 서 있어야 하는 위치를 지정해주었다. 커다란 그림 앞에서 선 관객들은 화면 외부에 존재하는 모든 시각적 준거점을 잃어버리기 때문에 실제 크기나 거리를 판단할 없게 된다. 오직 원형의 그림만이 관객이 느끼는 깊이감을 결정할 뿐이다. 이러한 상황에 놓임으로써 관객은 파노라마 효과를 경험하게 되었다. 시각적 착시로 준거점을 잃어버린 관객들은 파노라마를 단순히 현실의 재현이 아니라 현실의 대체로 느꼈던 것이다.
세기말 파노라마 매니아
파노라마나 그와 유사한 오락거리들은 시각적 착시에 의존하거나 신문이나 밀랍 박물관 같은 다른 사실적 장르를 흉내내거나 기계적으로 움직임을 조정하는 등의 다양한 방식으로 사실성을 창출했다.
5. 입체 신문에서 빛의 신문으로
영화는 이동하는 시선을 구체화했고, 구경거리의 사실성을 유지하기 위해 서사를 사용했으며, 현실을 매우 기술적이고 매개된 방법으로 재현했을 뿐 아니라 새로움과 급속한 변화를 좌지우지했다.
입체신문에서 빛의 신문으로
영화는 도시적 맥락에서 출현했지만 1896년부터 1901년 사이에 지방을 순회하는 장터의 오락거리로 엄청난 인기를 확보했던 것 같다. 순회 흥행사가 새로운 오락거리에 해당하는 영화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사실영화와 현실
초창기 사실영화는 일상적인 현실을 기록하기보다는 사람들이 매개되고 구경거리가 된 현실에 익숙해져 있는 특정한 레퍼토리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실제로 사실영화의 주제는 대중언론이 현실을 구경거리로 재현하는 방식을 모방했던 밀랍 전시 주제의 전통을 따랐다.
영화와 밀랍 전신의 엇갈린 운명
1914년에 들어서자 그레뱅 박물관은 파리에 남아 있는 유일한 밀랍박물관이었다. 1880년대와 1890년대에 걸쳐 파리에는 12개 정도의 밀랍 박물관이 생겼다고 사라졌다. 영화가 등장하다 밀랍 박물관은 더 이상 최신의 사실적 오락물도 아니었고 사실적으로 보이지도 않았다. 더욱이 사람들은 영화 전용관을 선호하기 시작했고 결국에는 다른 어떤 볼거리보다 영화에 열광했다.
6. 시각적 쾌락과 구경꾼의 탄생
영화와 영화적 경험은 연속이자 동시에 단절을 표시한다. 영화는 현대적 삶과 관련된 핵심 요소들이 새로운 방식으로 교차하는 장소였다. 영화는 획일적이면서도 끊임없이 변화하면서 점점 불어나던 대중 수용자인 관객과 현실을 구경거리로 전환시키려는 기술적 시도를 결합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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