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천과 삶/크리스천과 독서

조선의 프로페셔널(안대희 지음, 휴머니스트)

기독항해자 2012. 5. 17. 18:14

조선의 프로페셔널(안대희 지음, 휴머니스트), 2012년 5월에 읽음




1. 여행가 정란(1725~1791): 천하 모든 땅을 내 발로 밟으리라

 조선 최초의 산악인

18세기 후반, 창해일사란 호를 사용한 정란은 그저 여행이 좋아서 조선 천지를 발로 누볐다. 종으로는 백두산에서 한라산까지, 횡으로는 대동강에서 금강산까지, 산천에 자신의 발자국을 남기지 않으면 직성이 풀리지 않는 천생 여행가였다. 그리고 자신이 체험한 내용을 글로, 그림으로 남겼다.

젊은 문학도 신유한을 만나다.

정란은 경상도 군위 사람으로 동래 정씨 명문가 출신이다. 창원부사를 지낸 정광보의 10대손이다. 경상도 출신의 사대부가 전 국토를 샅샅이 뒤지는 여행가가 딘 동기는 무얼까? 그도 처음에는 다른 선비들처럼 경서와 문학 공부에 전념하였다. 스승은 당시 경상도가 배출한 최고의 문사인 신유한이었다. 서얼에다가 경상도 출신인 신유한은 당당하게 문과에 장원급제함으로써 세상을 놀라게 한 수재 중의 수재였다. 신분과 지역의 한계를 극복하고 문과에 장원급제함으로써 신유한은 신화적인 인물이 되었다.

서른 즈음

정란은 세속적 성공에 관심이 없었고, 주어진 틀에 안착하여 살기를 거부했다. 기질적으로 자유분방한 정신의 소유자인 그는 온통 과거공부에 눈이 멀고 이욕에 이전투구하는 악착같은 세상을 떠나 드넓은 세계를 동경하였다. 그에게 여행가의 삶은 추구할 만한 가치가 있지만 누구도 선택하지 않은 인생이었다. 서른의 나이에 그는 과감히 여행길에 올랐다.

산과 예술의 결정체 <불후첩>

정란은 전국을 떠돈 여행가지만 본래 시와 문장에 능한 문인이었다. 그는 여행의 의미를 예술적으로 담는 일에도 주목하여 각지에서 산수유기를 썼고, 화가와 문장가들로부터 자신의 산행을 묘사한 그림과 글씨를 받았다. 이 서첩이 <불후첩>이다. 정란은 자신의 여행 체험을 후세에 전하고 싶어했다. 그래서 서첩을 엮으면서 썩어 없어지지 않는다는 뜻을 지닌 <불후첩>이라는 이름을 달았다.

김홍도의 <단원도>

 김홍도의 그림 가운데 대표작인 단원도는 제목으로는 화가의 운치있는 집을 묘사한 것처럼 보이나 실제로는 정란을 위해 그린 그림이다. 이 그림 상단에는 정란이 쓴 두 편의 시와 김홍도가 그림을 그리게 된 사연을 적은 제사가 실려 있다. 정란은 1780년 묘향산을 거쳐 의주로 해서 백두산 정상에 오르고 금강산을 거쳐 돌아온 뒤 김홍도의 서울 집을 방문하였다. 그해가 신축년(1781년)으로 김홍도가 36세, 정란은 57세였다. 아마 백두산을 유람한 행적을 김홍도에게 전해주고 그림을 부탁하기 위해서 찾아간 듯하다. 그 자리에 화가 강희언도 함께 했다. 단원의 멋들어진 정원 초가집 마루에서 거문고를 뜯는 이가 김홍도이고, 그 옆에서 부채를 부치는 이가 강희언이며, 앞쪽으로 긴 수염에 늙수그레한 이가 정란이다. 화폭 아래쪽 버드나무 휘늘어진 열린 대문 앞에 벙거지를 쓴 채 쪼그리고 앉아 졸고 있는 아이가 정란을 따라다니는 종이고, 그 옆에 비쩍 마른 바로 청노새가 보인다.


여행에 인생을 바친 선비

선비 정란은 남들이 추구하는 삶과 다른 삶을 살았다. 이백 년 전에는 전문적인 여행가의 삶을 그만큼 용기가 필요한 선택이었다. 그렇기에 그의 행위는 종종 비웃음의 대상이 되었다. 이용휴는 수백 년 뒤에는 어떤 평가가 내려질지 기다려보자고 했다.










2. 바둑기사 정운창: 승부의 외나무다리를 걸으며 오른 반상의 제왕

 전라도 보성이라는 곳

정운창은 전라도 보성 출신이다. 20세기 한국 현대 바둑곙서 제1인자의 계보를 이어가는 기사는 모두 호남 출신이다. 조남철은 전북 부안, 김인은 전남 강진, 조훈현은 전남 영암, 이창호는 전북 전주, 이세돌은 전남 신안이다. 고금에 걸쳐 쟁쟁한 기사는 유달리 호남 출신이 많다. 국수의 전통이 백제 이래 조선시대를 거쳐 현재까지도 맥이 닿아 있다.

두문불출 10년

정운창은 이름을 알 수 없는 사촌 형으로부터 바둑을 배우며 5, 6년 동안 문밖 출입을 하지 않았다. 실력을 갈고 닦은 정운창은 시골에선 더 이상 상대가 없었다. 그는 답답하여 견딜 수 없었다. 드디어 서울로 진출하여 국수의 명성을 누리는 자들과 대국할 것을 결심한다. 한양행을 결행하여 보성에서 한양까지 터벅터벅 걸어서 올라왔다. 당시 한양에는 김종귀, 양익분, 변응평 등이 국수로 명성을 누리고 있었다. 전문기사로는 활동하지는 않았지만 뛰어난 바둑실력을 인정받던 훈련대장 이장오와 현령 정박 같은 사대부 기사도 있었다. 정운창이 아무리 뛰어난 실력의 소유자라 해도 처음부터 이런 고수들과 상대할 순 없었다. 이때 정운창은 정박과 솜씨를 겨루어볼 묘수를 냈다. 그가 생각해 낸 꾀가 이옥의 <정운찬전>에 멋지게 묘사되었다.


3. 화가 최북(1712~1786): 내 붓끝에서 세상의 모든 것이 태어난다

 술주정뱅이, 환쟁이, 미친놈

최북은 1712년에 나서 1786년경 세상을 떠, 영조와 정조의 치세를 살았다. 최북은 이름을 북으로 개명하고 자를 칠칠이라 했다. 칠칠이란 호는 파자하여 만들었지만 단순한 파자는 결코 아니다. 칠칠은 당나라의 유명한 신선인 은천상의 호이다. 은천상은 스스로를 칠칠이라 하고 다녀 세상 사람들이 그를 칠칠이라 불렀다. 최북은 은칠칠의 호를 빌려 중의적으로 사용했다. 틀림없이 최북은 칠칠이란 이름에서 현실적 조건에 구애받지 않고 마음대로 꽃을 피우는 신비한 능력을 연상했을 것이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인간이라는 암시로 읽을 수 있는 명명이다. 이는 최북의 그림이 현실의 충실한 모사보다 사의에 기울고, 주제 또한 속된 세상을 벗어나 자연에 접근하는 것과 연결된다.

붓끝에서 모든 존재가 태어난다

호칭이 왜곡되기는 호생관이란 호도 마찬가지다. 호생에서 붓으로 살아간다는 의미가 쉽게 나오기에 붓에 의지해 살아간다는 의미로 대부분의 사람이 파악하였다. 여기에도 선입견이 깊게 들어가 있다. 이 호의 의미는 다른 곳에 있다. 호생관은 명대의 저명한 화가인 정운붕의 호다. 자가 남우인 그는 인물화, 불화, 화훼를 잘 그렸고, 시 또한 잘 지었다. 남종홮풍을 선호하던 최북이 그와 기미가 통하는 남종화 대가의 운치 어린 사연을 본받아 사용한 호가 분명하다.

칼날과 불꽃

최북은 키가 작고 한 눈이 멀었다. 왜 한 눈이 멀었을까? 놀랍게도 본인이 송곳으로 눈을 찔러 애꾸가 되었다. 조희룡이 지은 전기에는 이런 일화가 적혀 있다.

어떤 귀인 하나가 최북에게 그림 한 점을 그려달라고 했다가 얻을 수 없게 되자 최북을 협박하려 했다. 최북이 화가 나서 “남이 나를 저버린 게 아니다. 내 눈이 나를 저버린 게야!”라고 하더니 바로 제 눈 한 쪽을 찔러 멀게 하였다. 늙어서도 안경알 하나만을 걸쳤을 뿐이다.

불같은 성미의 최북이 급기야는 제 눈을 제가 찌르는 돌출행동을 벌였다. 원하지 않는 그림을 그리지 않겠다는 신념을 극단적인 행동으로 표현한 것이다.

거기에 산다

최북은 한 곳에 안주하지 않았다. 그가 즐겨 쓴 호에 거기재가 있는데 ‘거기에 산다’는 뜻을 지닌 기발한 호다. 아마도 머무는 곳이 바로 내 집이란 뜻이리라. 최북의 말년은 비참했고 그의 죽음 역시 참담했다. 그가 죽은 뒤 그에 대한 평가는 사람마다 달랐다. 누가 무어라 하든 그는 온몸으로 개성과 자유를 발산한 예술가였다. 그의 행동은 이해받지 못했으나 그의 예술은 시대가 흐를수록 한결 빛이 난다.


4. 조각가 정철조: 조선의 다비치

 다재다능형 인간

정철조는 명문가 출신의 양반으로, 1730년에 태어나 1781년에 죽었다. 본관은 해주요, 자는 성백, 호는 석치다. 나이 15세 때인 1774년 문과에 급제했다. 정철조는 자신과 부친 정운유, 조부 정필녕 3대가 모두 문과에 급제했다. 특히 부친 정운유는 영조의 신망이 두터워서 대사간을 비롯한 요직을 두루 거치고 공조판서까지 지냈다. 정철조의 윗대만 혁혁한 것이 아니라 동복 형제 역시 명망가들이다. 아우 정후조는 유명한 지리학자고 여자 형제 둘은 첫째는 박고원에게, 둘째는 이가환에게 시집갔다.

벼루에 미치다

정철조는 호가 석치다. 석치란 글자를 풀이하면 돌 석에 바보 치로, 돌에 비친 바보란 뜻이다. 여기서 돌은 벼룻돌이다. 정철조는 벼루 깎는 것을 취미와 예술로 삼은 최초의 한국 사람이 아닌가 한다. 당시에 벼루는 가장 중요한 문방구의 하나다. 문인이라면 벼룻돌에 애착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이전에도 그랬지만18세기 이후에는 유득공, 신위처럼 멋진 벼루를 수집하는 우아한 취미를 뽐내며 자신의 연벽을 토로하는 선비가 많앗다. 이렇게 벼루를 애호하고 수집하는 분위기가 성숙되는 시기에 그런 풍조를 선도하여 주목의 대상이 된 인물이 바로 정철조였다.

정선과 어깨를 겨루다

정철조는 다양한 분야에서 예술적 재능을 발휘하였다. 흠영에 정철조가 자수에도 능했다고 증언한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만능 예술가라고 말해도 좋을 법하다. 그런 예술적 재능이 잘 발휘된 분야가 바로 회화다.

천문학자, 지도학자

박지원의 하들 박종채가 쓴 <과정록>에는 아버지 친구인 정철조를 이렇게 평했다.

석치는 학문과 교양을 지녔고 기예에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하여 무거운 물건을 들어 올리는 인중, 물건을 높이 들어 올리는 승고, 회전하는 물레인 마전, 물을 퍼 올리는 기구 취수와 같은 각종 기계를 마음으로 연구하여 손으로 직접 만들었다. 모두 옛 제도를 본떠 지금 세상에 쓰이도록 시도하였다.

정철조가 행한 과학 연구의 결과 가운데 족적이 남아 있는 것은 지도다. 조선 지도학의 계보를 잇는 아주 중요한 제작자의 한 사람이 바로 그다. 김정호가 <청구도> 범례에서, 참조할 만한 가장 우수한 지도로 정철조, 황엽, 윤영의 지도를 들고 있다는 사실로도 입증된다. 이규경 역시 <오주연문장전산고>에서 윤영, 정철조, 황엽의 <여지도>가 제일가는 지도라고 평했다.


5. 무용가 운심: 검무로 18세기를 빛낸 최고의 춤꾼

박제가, 운심을 기록하다

박제가 쓴 절묘한 산수기 <묘향산소기>에는 검무를 잘 추는 운심이란 기생의 이름이 등장한다.

검무, 무예이자 예술

검무는 무예의 일종으로, 검객이 무예를 연마하는 과정에서 추는 것이다. 유본학과 심능숙이 쓴 검객 전기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이러한 검무에 능했다. 있다.

18세기 공연예술의 절정

이러한 검무는 운심이 춘 검무와 직접적인 연관성은 없다. 운심이 춘 검무는 검객들의 검무와 달리 공연을 위한 춤이었다. 공연을 위한 검무에는 네 명이 추는 검무, 두 명이 추는 검무가 있으며 항장무와 같이 연극의 형식을 띤 검무도 있었다. 검무를 지칭하는 이름도 다양해서 검기무라 불리기도 했다. 검무는 짧은 시기에 공연의 중심이 되었고 그만큼 인기도 얻었다. 정조 시대의 시인인 이기원은 경상 감명에서 여덟 살 난 동기 동혜와 쾌옥이 추는 검무를 구경하곤 장시를 남겼다. 제 키와 맞먹는 칼을 들고 둘이서 추는 쌍검대무였다.


6. 책장수 조신선, 세상의 책은 모두 내 것이니라

 서쾌, 책쾌

서책문화가 발단한 조선시대에는 못 말리는 서치들이 적지 않았다. 자연스레 그들의 기괴하면서도 흥미로운 사연을 기록한 시와 산문이 적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에게 책을 공급해준 책장수나 서점을 묘사한 기록은 드물다 못해 거의 없다. 조선시대에는 대체로 서점공간에서 책의 거래가 이루어지기보다 판매자와 구매자 사이를 연결해주는 중매인을 통해 거래가 이루어졌다. 서적 중개인을 의미하는 서쾌 또는 책쾌라는 책 거간꾼이 그들이다. 이는 부동산 중개인을 옛날에는 가쾌 또는 사쾌라고 부른 것과 같다. 중국에서는 서반, 러시아에서는 오페나, 프랑스르에서는 콜포르퇴르라고 부르는 존재였다. 용케도 18세기 정조 시절의 조신선이란 서쾌가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아마 조선조 서쾌들 가운데 후세에 이름을 당당하게 전한 거의 유일한 사람일 것이다.

조신선은 18세기 중엽 이후부터 19세기 초반까지 서울의 지식집단에 명명이 자자하던 거간꾼이었다. 다산 정약용을 비롯하여 조희룡과 조수삼이 그의 전기를 썼다. 그뿐 아니라 서유영이 쓴 <금계필담>에도 그의 사연이 전하고, 여러 저작에도 그의 인생을 소재로 한 이야기가 실려 있다.

조선의 지식 생산과 유통

현재 책의 거래가 이루어지는 공간인 서점은 근대의 산물이다. 옛날에는 책의 거래를 서쾌가 담당하였다. 큰 서점이 필요했음에도 번듯한 서점이 운영되지 않았으므로, 영세한 보따리 장수가 그 역할을 맡았다. 어째서 서점이 활성화되지 않았을까? 서책의 공급과 수요는 양반 사대부 계층에 집중되었고, 정부에 의해 통제되었다. 조선시대에는 지식의 공급과 유통을 국가가 관장하였다. 지식과 정보를 전하는 가장 중요한 매체가 서적인데, 조선왕조는 정책적으로 서점의 설립을 금하거나 억제하였다. 통제를 용이하게 하기 위한 의도에서 나온 정책인데 그에 따라 서적은 떠돌이 장수인 서쾌가 담당하게 되었다.

책과 조씨가 왔다

조신선도 박제가가 말한 행색을 한 서쾌의 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는 당시 잘 아려진 책 거간꾼으로 그를 직접 만나본 사람들은 모두가 기이한 사람이라는 인상을 받았다고 한다. 조신선과의 인연을 소중하게 간지하고 있던 조수삼은 그와의 인연을 이렇게 회고하였다.


내가 칠 팔 세 때에 글을 제법 엮을 줄 알았다. 선친께서 어느 날 조생에게 <당송팔가문> 한 질을 사주시면서 “이 사람은 책장수 조생이란다. 집에 소장한 책들은 모두 이 사람에게서 사들인 것이다”라고 하셨다. 그의 모습은 사십 남짓 돼 보였다. 손꼽아 보니 벌써 사십년 전 일이다. 그런데 지금도 늙지 않았으니 조생은 보통 사람과 다르다. 그때 나는 조생 보기를 좋아했고, 조생도 나를 사랑하여 자주 들렀다. 나는 이제 머리가 히끗히끗하고 손자를 안은 지도 벌서 여러 해가 되었다. 조생은 장대한 체구에 불그레함 뺨, 검은 눈동자에 검은 수염이 여전하다. 지난날의 조생과 견주어보니, 아! 기이하도다!


신선으로 불린 책장수

조신선이 활약하던 무렵 조선의 학자들이 북경에 가면 반드시 들르는 곳이 있다. 유리창이라는 서점가다. 18세기 중국의 청나라 학자인 이문조가 <유리창서사기>란 글을 통해 그곳 서점의 실상을 묘사하는 중에 노위라는 일종의 브로커를 소개하였다. 중국 지식인들도 서점이나 책장수를 기록하는데 몹시 인색해 조신선과 비슷한 인물을 찾아보기 어려운 데 이 노위가 조신선과 비슷한 인물로 등장한다. 이문조의 글을 통해 보면 노위는 제대로 책을 아는 전문 사서이자 브로커였다. 학자들에게 독서와 연구의 길을 안내할 지식과 능력을 소유한 노인이었다. 노위의 한두 일화는 조신선의 모습과 유사한 구석이 적지 않다. 그들은 책장수라 하여 무시하고 넘길 수 없는, 책의 세계에서 독보적인 길을 개척한 사람들이다. 괴이한 행적, 백 살이 넘는 나이에도 늙지 않는 사람으로 인해 사람들은 그를 신선이라고 불렀다.


7. 원예가 유박: 번잡한 세상을 등진 채 ‘꽃나라’를 세운 은사

 유박(1730~1787)은 영정조 시대의 화훼 전문가다. 본이닌 직접 백화암이라는 화원을 경영했고 그 경험을 바탕으로 <화암수록>이란 화훼 전문서를 지었다. 지금까지 전해오는 이 책은 조선전기에 강희안이 저술한 <양화소록>과 짝을 이루는 소중한 저술이다. 유박은 문화 유씨로 1730년에 태어나 1787년에 죽었다. 자는 화서, 호는 백화암이다.

세상 모든 꽃이 여기서 숨쉰다

꽃과 나무를 향한 유박의 열정은 꿏의 수집에서 두드러졌다. 그는 온갖 꽃을 구해다 심었다. 새로운 꽃이 있다는 소식이 들리면 때와 장소를 불문하고 불원천리 찾아갔다. 심지어는 외국의 선박에서 외국종 꽃을 구해오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그의 화원에는 사시사철 꽃이 끊이질 않았다.

꽃 박물관, 백화암을 짓다

화원을 경영한 지 십 년 가까이 되자 유박은 초가를 개축하여 새로 집을 짓고 백화암으로 이름붙였다. 기록에 따르면, 그는 우화재와 백화암이라는 두 채의 집을 지었다. 하나는 꽃에 파묻혀 산다는 의미이고 다른 하나는 일백 종의 꽃으로 둘러싸인 의미이니, 꽃에 미친 사람의 집 이름으로 썩 잘 어울린다. 이용휴가 지은 시에는 꽃과 더불어 살아가는 유박의 멋이 잘 드러나 있다.

다시 신기한 구경거리를 갖추고자

먼 곳에서 종려나무 사왔다네

시내를 걷다 동산을 건너올 때

작은 수레를 굳이 탈 건가?

낮은 가지가 때로 갓을 치고

떨어진 꽃술이 소매에 들어붙네

이것이 아니면 즐겁지 않아

아침저녁으로 숲을 거니네

집에서 진지 차렸다고 고해도

“천천히 하지” 답하면 그뿐.

꽃부리 먹고 열매를 먹는 그대는

어엿한 태곳적 성인일세.

“조물주는 청복을 아끼건만

어째서 내게만 듬뿍 주셨을까?“

꽃 아래서 때때로 술잔을 들며

스스로 축하도 하고 칭찬도 하네.

동전 구린내와 고기 비린내는

온갖 꽃내음이 씻어주네.

화목품제로 연 꽃 품평회

화원을 경영한 지 거의 이십 년 되던 해인 1772년 이전에 유박은 <화목품제>를 저술했다. 꽃과 나무의 등급을 나누어 평가한 이 저술에는 오랫동안 꽃을 키우고 감상한 체험과 지식의 핵심이 담겨 있다. 이 책에서 유박은 꽃을 모두 9등급으로 나누었다.

1등: 매화, 국화, 연꽃, 대나무, 소나무. 기준은 고표일운

2등: 모란, 작약, 왜홍, 해류, 파초. 지군은 부귀함

3등: 치자, 동백, 사계, 종려, 만년송. 기준은 운치

4등: 화리, 소철, 서향화, 포도, 귤. 기준은 운치

5등: 석류, 복사꽃, 해당화, 장미, 수양버들. 기준은 번화함

6등: 두련, 살구, 백일홍, 감, 오동. 기준은 번화함

7등: 배, 정향, 목련, 앵두, 단풍. 기준은 제각각의 장점 이하 같다

8등: 목근(무궁화), 패랭이꽃, 옥잠화, 봉선화, 두충

9등: 규화(접시꽃), 전추사, 금전화, 창잠, 화양목


8. 천민시인 이단전: 그래 나는 종놈이다 외친 천재 문인

 대작가 이용휴를 찾아가다

1781년 어느 봄날 못생긴 청년 하다가 재야 문단의 권력을 한 손아귀에 쥐고 있던 73세의 대작가 이용휴를 찾아갔다. 그 청년은 소맷자락에 넣어온 시집을 노인에게 건넸다. 노인은 천천히 시집을 훑어보고선 좋다 나쁘다 말도 없이 곁에 있던 벽도화 가지 하나를 꺾어 청년에게 주었다. 청년은 감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부처가 빙그레 웃으며 제자 가섭에게 꽃을 주어 그를 인정한 염화시중의 옛 사연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내 너를 훌륭한 시인으로 인정하겠노라’는 마음이 벽도화 가지로 표현된 것이다. 이용휴로부터 이렇게 격외의 인정을 받은 청년이 다름 아닌 이단전(1755~1790)이라는 천민 시인이다.

호는 필한, 하인놈

이용휴는 이단전이란 이름을 듣고는 남들의 작명과 달라서 놀랐다고 한다. 단은 진실로라는 의미요, 전은 소작인 또는 머슴이란 뜻이니 단전이란 이름은 영낙없는 머슴, 진짜 하인이라는 뜻이다. 이단전은 실제로 남의 집 종이었다. 그는 연암 박지원의 절친한 친구로 정승을 지낸 유언호 집의 종이었다.

놀라운 건 이름만이 아니다. 그는 아호조차도 필한이라고 했다. 필한이란 호가 너무 이상하여 무슨 뜻이냐고 묻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대꾸했다.

“필은 하인이다. 내가 바로 하인놈이니 호를 필한이라고 하는 것이 합당하지 않겠소?”

필은 하(下)와 인(人을) 합친 글자요 한은 천한 사내라는 뜻이니 필한은 하인놈이란 듯이다. 게다가 자까지도 운기 또는 경부라고 썼다. 김매고 밭갈이하는 사람이라고 너스레를 떤 것이다.

애꾸에 곰보, 어버버한 말씨

그는 천출일 뿐만 아니라 용모도 볼품이 없었다. 몹시 왜소한 키에 애꾸였고 곰보가 심하여 생김새가 형편없었다. 깡마르고 파리하여 옷 무게도 견디지 못할 만큼 허약해 보였다. 또 말이 어버버하여 조리가 없었다. 그야말로 인간적 불행을 골고루 갖춘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종이란 신분에는 가당치 않게 시를 짓는다고 문사들을 찾아 다니며 시를 배웠다. 조선시대에 노비들이 자유롭게 창작을 할 수 있는 공간은 어디에도 없었다.

이단전은 시를 잘 지었다. 인간으로나 환경으로나 최악의 조건을 구비한 그였지만 시를 짓는 재능 하나는 하늘이 허락했다. 시를 잘하는 노비로 그의 사대부들 사이에 널리 알려졌다. 하지만 천재적 능력만으로 시를 지은 건 아니다. 그는 엄청난 노력을 기울이는 노력형 시인이었다.


9. 음악가 김성기: 나는 학을 내려앉게 한 현악기의 거장

 김성기(1649~1724)는 숙종 시대의 저명한 음악인이다. 우리 음악의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몇 사람 가운데 하나로 꼽힐 만한 위인이다. 또는 그는 숙종 시대의 가장 뛰어난 거문고와 비파 연주가였다. 또 <어은보>와 <낭옹신보>라는 매우 중요한 악보를 남긴 작곡가이자, 적지 않은 시조를 남긴 저명한 시조작가이기도 하다.

거문고, 비파의 연주자

정내교는 <김성기의 전기>에서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거문고 악사 김성기는 본래 상의원에서 활을 만드는 장인이었다. 성품이 음률을 좋아하여 일터에 나가 물건을 만들지 않고 남의 뒤를 따라다니며 거문고를 배웠다. 거문고 기법의 정수를 터득하고 나자 마침내 활을 버리고 거문고를 전문적으로 연주하였다. 기량이 뛰어난 악공들이라도 모두들 그보다 기량이 뒤졌다. 또 퉁소와 비파도 다룰 줄 알았는데 거기서도 모두 극치에 이르렀다.”

활을 만드는 장인에서 다른 연주자들을 압도하는 최고의 악사로 성장해가는 김성기의 모습이 간명하게 드러나는 구절이다.

배움의 갈증, 도둑 공부

정내교는 그가 남의 두를 따라다니며 거문고를 배웠다고 했다. 그가 바로 스승일 텐데 누군지를 밝히지 못했다. 조수삼의 <추재기이>에는 그 스승이 누군지를 구체적으로 밝혀져 있다.

“거문고 악사 김성기는 왕세기로부터 거문고를 배웠다. 왕세기는 새 음악을 연주할 때면 언제나 비밀에 부쳐 전수하려 하지 않았다. 김성기는 밤이면 밤마다 왕 선생의 집으로 가서 창 뒤에 바짝 붙어 몰래 훔쳐 들었다. 다음날 아침이면 하나도 틀리지 않고 그대로 연주하였다. 왕세기는 의아해서 밤에 거문고 곡을 연주하다가 미처 반도 끝나지 않았을 때 별안간 냅다 창문을 열어젖혔다. 김성기가 감짝 놀라서 땅바닥에 거꾸러졌다. 왕세기는 그제야 그를 크게 기이하게 여기고는 자신이 지은 것을 모조리 김성기에게 전수하였다.”

굴레 벗은 천리마

빼어난 연주 실력을 습득한 김성기는 장악원 악사가 되어 연주가로서 최고의 영예를 누렸다. 음악을 관장하는 최고기관인 장악원 악사가 되었으니 악사로선 최상의 자리로 올라간 셈이다. 그의 명성은 거기에 그치지 않았다. 잔치 자리에 그가 없으면 아무리 많은 악사가 있어도 빛이 나지 않았다는 걸로 보아 연주자로도 인기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음률의 묘리를 터득했고 비파를 잘 타서 많은 악공들 중 으뜸이었죠. 부귀한 사람들이 다투어 초청해서 그의 연주를 듣는 사람이 늘 수십 인이나 되었지요”라는 기록도 전한다.

마포강가의 낚시꾼

최고의 기량을 발휘하여 인기가 높았고 곳곳에 불려다니던 김성기는 그런 생활을 짧지 않게 지속했다. 그러나 그런 생활을 마음껏 즐기는 부류는 아닌 듯하다. 가족도 제대로 돌보지 않고 예술에 심취해 인생을 보내던 그는 당시로선 외곽지대로서 한적하던 마포 강가로 갑작스럽게 집을 옮기고 서울 출입을 끊었다. 새로운 인생의 전기를 아주 파격적으로 감행한 것이다.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모두들 그가 마포로 이주를 감행한 일을 주목했다.

“김성기는 만년에 서강 강가에 집을 얻어 살았다. 작은 배를 사서 삿갓을 쓰고 도롱이를 입은 채 손에는 낚싯대 하나를 쥐고 오가며 물고기를 낚아 먹을 것을 댔다. 그러고는 스스로 호를 조은이라 했다. 바람이 가라앉고 달빛이 환한 밤이 되면 언제나 노를 저어 강 중류로 나와 퉁소를 꺼내 서너 곡조를 연주하였다. 슬프고 원망하는 소리와 맑고 깨끗한 음악이 울려 구름과 하늘을 뚫고 퍼졌다. 강가에서 그 소리를 들은 이들은 다 그 자리를 배회하며 떠나지 못했다.”

호를 낚시꾼이 되어 숨는다는 조은이라고 했고 물고기는 잡은 어부가 되어 숨었다고 해서 어은이라고도 했다.


10. 과학기술자 최천약: 자명종 제작에 삶을 던진 천재 기술자

바늘을 수입한 조선사회

바늘의 수입은 조선시대의 기술 수준이 얼마나 낙후되었는가를 단적으로 드러낸다. 기술자를 몹시 천대한 사회구조 하에서 기술이 낙후되는 것 피할 수 없는 현상이었다.

동래부 출신 무인

최천약은 기술자로는 유례가 드물게 조선왕족실록이나 오성록, 승정원일기를 비롯한 각종 의궤에 산발적으로 등장한다. 최천약의 이름이 사료에 처음 등장하는 때는 신묘년(1711년, 숙종37)이다. 통신사 사행의 일원으로 일본에 다녀왔는데, 이때의 상황을 기록한 <동사일기>에 그의 이름이 적혀 있다. 승정원일기에 동래부 출신의 무인으로 물건을 만드는 데 재주가 있는 연소한 젊은이로 등장한다.

칼을 잡으면 무엇이든 새긴다

영조 치세에 최천약은 그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였고, 그만큼 인정을 받았다. 서평군이라는 든든한 배경과 영조의 절대적 신임을 받는 기술자로서 그는 주목을 받았다. 빼어난 기술을 인정받아 청나라 북경에도 여러 차례 다녀올 기회를 얻었다. 18세기 후반의 학가 강이천 그의 기술에 얽힌 전설을 이렇게 기록했다.

유공이 해동의 금석문과 현판의 탁본을 수집할 때의 일이다. 한성부 현판은 판서 김진규가 팔분체로 쓴 글씨인데 현판이 걸려 있는 문이 너무 높고 컸다. 최천약을 불러 방법을 물었더니 그는 고개를 치켜들고 마치 임모하듯이 베껴 써서 바치는 것이었다. 유공은 자기를 놀린다고 화를 내고는 마침내 사다리를 걸쳐놓고 탁본을 해서 대조해보니 글자가 조금의 차이와 어긋남이 없었다.

시계 전문가

자타가 최천약을 만능 기술자로 공인했지만 그의 능력을 발휘한 특수한 분야가 있었다. 바로 자명종 제작 분야였다. 최천약이 편전에서 영조를 알현하게 된 계기는 부속이 망가진 자명종의 수리였다. 그가 수리한 자명종은 조선 전통의 해시계가 아니라 기계장치로 움직이는 서양식 자명종이었다.

최천약이 새긴 거로구나

영조의 절대적 신임을 받은 최천약을 조정에서는 최대한 활용하고자 했다. 정교한 기술이 요구되는 여사에는 언제가 그가 불려갔다. 십여 종이 넘는 다양한 의궤에 그의 이름과 활약상이 등장한다. 숙종 말엽과 영조 때에 조성된 다양한 옥보, 옥인, 석물 중 그가 제막을 주관한 것이 적지 않다는 사실을 이들 의궤는 입증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