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천과 삶/크리스천과 독서

선비의 탄생(김권섭 지음, 다산 호당)

기독항해자 2012. 5. 14. 20:14

선비의 탄생(김권섭 지음, 다산 호당), 2012년 5월에 읽음



퇴계 이황(1501~1570)

 퇴계 이황은 11월 25일 경북 안동시 도산면 온혜리에서 태어났다. 흔히 진보 이씨 혹은 진선 이씨로 불리는 집안이다. 그의 조상은 고려 공민왕때 홍건적의 침입을 물리친 공으로 일개 지방의 벼슬아치에서 선비 집안으로 신분이 상승했다. 하지만 그리 주목 받는 집안은 아니었다. 퇴계의 부친 이식은 어려서부터 학문에 정성을 쏟았다. 그는 의성 김씨와 혼인을 했는데 장인인 김한철은 일찍 죽었고 처가에는 모아 놓은 책이 많았다. 이식의 장모는 사위가 책을 좋아하는 것을 알고 그 책을 모두 물려주었으며 이식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학문을 닦았다. 이식은 의성 김씨 부인과의 사시에 2남 1녀를 두었지만 부인은 29세에 일찍 세상을 떠났다. 후에 그는 춘천 박씨를 두 번째 아내로 맞아들여 네 아들을 얻었는데 막내가 퇴계였다. 퇴계가 태어나던 해 부친은 40세의 나이로 진사시험에 합격했다. 그러나 퇴계가 태어난 지 7개월만에 부친이 별세했기 때문에 퇴계는 아버지 없이 성장해야 했다. 서른셋에 남편을 잃은 박씨 부인은 전처의 아이들을 포함해 6남 1녀와 거년스러운 살림을 떠맡은 고달픈 삶을 살았다. 하지만 그녀는 굴복하지 않았다. 오히려 학문을 좋아했던 남편의 가르침대로 자녀들을 길러냈다. 조선시대 양반 가문에는 조식, 정약용처럼 아버지에게 학문을 배우는 사람이 많았다. 반면에 퇴계나 서포 김만중은 아버지의 가르침을 전혀 받지 못했지만 이런 인물들에게는 훌륭한 어머니가 존재한다.

남명 조식(1501~1572)

 남명 조식은 음력 6월 26일에 오늘날의 경상남도 합천군 삼가면 외토리에 해당하는 경상도 삼가현 토동에서 태어났다. 남명의 본관은 창녕이며, 시조는 신라 진평왕의 사위로서 왜적을 물리친 공으로 창성 부원군에 봉해진 조계룡이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명문 가문으로 겨운 명맥만 유지하던 그의 집안은 아버지 조언형과 숙부 조언경이 모두 과거에 급제함으로써 중흥기를 맞이하였다. 삼가 판현에서 태어나고 자란 남명의 부친은 그곳에서 멀지 않은 토돝에 기반을 둔 인천 이씨 이국의 딸을 아내로 맞아들였다. 남명의 외가에 와서 지내던 그의 부모가 어느 날 용이 방으로 들어오는 꿈을 함께 꾸었다. 그날부터 남명의 모친에게 태기가 있었다. 남명이 태어났을 때 그의 부친이 33세였으므로 당시 풍습으로 보면 남명은 늦둥이인 셈이다. 남명은 다섯 살 때 아버지를 따라 한양에 가서 성장하였는데 어렸을 때부터 누가 말하지 않아도 스스로 공부에 힘쓰고 행동이 드레졌다.

남명이 27세이던 1526년에 그의 아버지가 58세를 일기로 세상을 등졌다. 이때에는 부모가 돌아가시면 산소 옆에 임시로 집을 지었는데 이를 여묘, 여막이라고 한다. 이 여막에서 일정 기간 동안 지내는 의식을 시묘살이라고 불렀다. 조선시대는 효를 충과 더불어 최고의 덕목으로 여겼고, 이러한 절대적인 효 사상에서 시묘살이가 생겼다. 시묘살이는 공자가 돌아가셨을 때 제자들이 3년 동안 심상을 지낸 데서 시작되었다. 우리 나라는 고려 말에 정몽주가 어버이 상을 당하며 3년 동안 여막살이를 한 이후 사대부들 사이에 널리 퍼졌다.

율곡 이이(1536~1584)

 율곡 이이는 12월 26일 새벽에 강릉부 북평촌, 지금의 오죽헌에서 태어났다. 그의 본관은 덕수인데, 고려 시대 중랑장을 지낸 이돈수가 시조이다. 이돈수가 풍덕군 덕수현 출신이기 때문에 덕수를 본관으로 삼았다. 율곡의 조상은 고려 시대에 대대로 벼슬을 했으며, 조선을 건국한 태조의 둘째 사위가 율곡의 5대조이다. 부친인 이원수는 착실하고 꾸밈이 없었다. 너그럽고 겸손한 성품을 지닌 그는 6품 벼슬인 사헌부 감찰을 역임했다. 율곡은 친가보다는 외가의 영향을 더 많이 받은 것으로 보인다. 율곡이 외가에 태어났으며 여섯 살이 되어서야 한양의 본가로 갔다는 사실도 이를 뒷받침한다. 모친 신사임당은 진사를 지낸 신명화의 딸로 1523년에 이원수와 혼인했다. 율곡을 이야기하려면 모친 사임당을 빼놓을 수 없다. 그런데 사임당만큼이나 율곡의 생애에 영향을 많이 미친 사람이 외할머니인 용인 이씨 부인이다. 이씨 부인은 신명화와 혼인하여 신사임당을 포함해 딸 다섯을 낳았으며 남편을 극진히 받들고 집안일을 돌보는 데 소홀함이 없었다.

사임당은 ‘중국 고대 주나라 문왕의 어머니인 태임을 본받는다’는 뜻이. 이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신사임당은 자녀 교육에 남다른 열의를 가지고 있었다. 사임당을 말할 때면 그녀의 빼어난 예술적 재능을 빼놓을 수가 없는데, 그녀가 그러한 재능을 갖게 된 것은 주변 환경 때문이다. 사임당의 외조부는 학문과 예술에 관심이 많았다. 그는 무남독녀 외동딸을 혼인 후에도 친정에서 부모와 함께 살도록 했다. 그런 까닭에 율곡의 외할머니는 시댁의 간섭을 받지 않은 자유로운 상태에서 정신적 평안함을 누릴 수 있다. 그런 여유가 사임당에게까지 좋은 영향을 미쳤던 것이다. 사임당은 슬하에 4남 3녀를 두었는데 예술적인 기질은 매창과 막내 아들 이우가, 학자적 성향은 이이가 물려 받았다.

송강 정철(1536~1593)

 송강 정철은 12월 6일 한양의 장의동(현재의 종로구 청운동 일대)에서 4남 3녀의 막내로 태어났다. 그는 영일 정씨 가문으로 고려 시대 때 현감을 지난 정극유의 12대손이다. 그의 조상은 조선에 들어와서도 대대로 높은 관직을 지냈지만, 조부 때부터는 벼슬을 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큰 누이가 인종의 후궁이 되어 대궐에 들어가면서 부친에게 왕실 친척들의 친목을 도모하는 돈령부의 판관 벼슬이 내려졌다. 그리고 막내누나도 왕실인 계림군과 혼인하면서 송강의 집안은 나날이 윤택해졌다. 송강은 17세이던 1552년에 문화 유씨를 아내로 맞아들였다. 유씨 부인은 유강항의 딸이자, 사촌 김윤제의 외손녀이다. 송강은 사촌의 주선으로 유시와 혼인한 것인데, 사촌은 송강의 생애에서 빼놓을 수 없는 스승이기도 하다. 송강문학논고의 저자 최대호 교수에 따르면 송강은 한 시 763수를 남겼는데, 다른 사람들과의 교제를 다룬 작품이 307수나 된다. 그중 동갑내기 친구인 율곡과 관련된 한시가 15수일 만큼 두 사람의 관계는 각별했다. 송강이 동갑내기인 율곡 이이를 처음 만난 것은 21살 때인 1556년이었다. 이후 두 사람은 학문과 시국을 논하면서 평생 동안 우정을 나누었다. 율곡은 차분하고 원만한 성품을 지닌 반면 송강은 다혈질이고 사방에 적을 많이 만들었다. 송강이 동인들에게 공격당할 때마다 율곡은 송강의 바람막이가 되었다. 그런 까닭에 송강은 늘 율곡을 그리워했다.

난설헌 허초희(1563~1589)

 난설헌 허초희는 양천 허씨로, 초당 허엽의 딸이다. 초당은 청주 한씨와의 사이에서 아들 악록 허성과 두 딸을 얻었다. 하지만 한씨가 요절하자 둘째 부인으로 강릉 김씨를 맞아들였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아들 허봉, 딸 허초희, 막내아들 허균을 낳았다. 초당은 화담 서경덕의 제자였으며 비교적 자유분방한 분위기에서 자녀를 가르쳤다. 그는 하들 허봉이 서자 출신인 손곡 이달과 섞사귀는 것을 허락했을 뿐만 아니라, 손곡에게 허초희와 허균을 가르치도록 했다. 이는 양반은 서자와 위아랫물지던 관습과 크게 다른 것이었다. 난설헌은 이처럼 혈통보다는 실력을 중시한 개방적인 분위기에서 자랐다.

난설헌은 15살 무렵 김성립과 혼인했으나 가정생활이 원만하지 않았다. 그녀는 남편과의 불화, 시어머니의 간섭, 친청 오빠의 유배와 사망 때문에 지칠 대로 지쳤다. 그러나 이보다도 연이은 자녀들의 죽음이 그녀를 더욱 힘들게 했다. 그녀는 27살을 넘기지 못하고 그때까지 겨우 지탱했던 육신을 지상에 내려놓았다.

27살에 요절한 난설헌은 죽기 직전에 자기가 그동안 써 모았던 시를 모두 불태웠다고 한다. 그런데도 오늘날 난설헌의 시가 전해지는 것은 동생인 교산 허균 덕분이다. 교산은 누이와 여섯 살 터울이다. 난설헌이 죽었을 때, 교산은 고향집에 남아 있는 작품과 자기가 기억하는 작품을 모두 모아서 누이의 작품집을 만들려고 했다. 시를 모두 정리한 교산은 당대 최고의 유학자인 서애 유성룡에게 발문을 부탁했다. 교산은 누나에 대해 남다른 자부심을 지니고 있었다. 그 자부심이 아니었다면 불타버린 시를 되살리려고 자기가 암송하던 시에다 고향 집에 남아 있던 글을 보태고, 유성룡은 물론 중국의 사신에게까지 발문을 얻어내는 일을 해내지 못했을 것이다. 동생 교산 덕택에 난설헌은 오늘날 돋나는 여류 시인으로 남을 수 있었다.

교산 허균(1569~1618)

 교산은 허엽 대감의 막내아들로 태어났는데, 그가 겨우 열두 살 때 아버지가 상주에서 객사했기 때문에 교산은 아버지의 가르침을 제대로 받지 못했다. 교산보다 21살 많은 맏형 허성이나, 18살 터울인 하곡 허봉이 사실상 아버지 약할을 했지만, 교산을 엄하게 교육한 것은 아니다.

1588년 둘째형 허봉이 사망하고 이듬해 누나 난설헌이 죽은 후로는 맏형 허성이 교산의 바람막이가 되어 주었다. 돌출 행동을 잘하고, 규율을 가볍게 여겨 늘 지탄을 받았던 교산에게 아버지 같은 맏형이 있다는 것은 정말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나 형이 사망하면서 그 바람막이를 잃어버린 교산은 결국 1618년에 형장에서 처형되었다.

교산은 딸과 아들을 낳았는데, 아들은 임진왜란 때 갓난아기로 죽었으며 딸은 훗날 이사성의 아내가 되었다. 그 딸이 낳은 이필진은 교산의 문집 ‘성소부부고’를 보존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교산은 44세이던 1612년에 절친한 친구 석주, 그리고 유일하게 남은 혈육인 맏형 허성을 잃고 외톨이가 되었다. 맏형은 대궐 안에서, 석주는 대궐 밖에서 교산을 지켜주던 사람들이었다. 그들을 잃은 후 교산은 살벌한 바람이 휘몰아칠 것을 감지하고 일부러 권력자인 이이첨과 가까워졌다. 이이첨이 추천하여 사신이 된 교산은 중국에 두 번이나 갔다 왔다. 이 덕분에 광해군의 신임을 얻은 교산은 48세에 형조판서까지 벼슬이 올랐다. 더욱이 교산의 딸이 동궁의 후궁으로 책봉될 가능성이 커지면서 교산의 위세는 더욱 높아졌다. 그러자 이이첨이 은근히 교산을 경계하기 시작했는데 교산만은 그런 사실을 몰랐던 듯싶다. 이이첨은 교산을 앞세워 인목대비 폐비론을 들고 나왔다. 교산은 이이첨의 사주에 따라 여론을 몰아가는 데 앞장섰다. 그런데 영의정 기자헌이 폐비론을 격렬하게 반대하고 나섰다. 그러나 폐비론이 우위에 서면서 기자헌은 유배를 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때 교산이 폐비론을 빌미로 역모를 꾸민다는 상소가 올라왔다. 상소를 올린 사람은 기자헌의 아들 기준격이었다. 기준격의 상소는 교산을 죽음으로 몰고 가는 계기가 되었다. 교산을 껄끄럽게 여기던 이이첨이 그를 제거할 음모를 꾸몄고 일은 이이첨의 계획대로 진행되었다. 교산은 길거리에서 사형당했으며 ‘역적’이라는 팻말 위에 목이 매달린 채 시장 바닥에 전시되었다.

고산 윤선도(1587~1671)

 고산 윤선도는 전라남도 해남에 기반을 둔 해남 윤씨 사람으로 한성부 연화방(종로구 연지동)에서 태어났다. 그는 윤유심의 둘째 아들이지만, 종가에 종손이 없었기 때문에 8살 때 큰아버지 윤유기의 양자로 들어갔다. 윤유기는 본래 고산의 작은 아버지였으나, 큰집에 아들이 없어서 양자로 들어간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에게도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다시 고산을 양자로 들인 것이다. 이로써 고산은 해남 윤씨의 종손이 되었다.

고산은 22세때 양모를, 23세 때 생모를 여의었고, 26세 때는 생부마저 건강아 몹시 위중해졌다. 고산은 생부의 임종이 다가오자 “서모가 아버님을 모신 지 여러 해 되었으므로 재산을 나누어 주는 게 좋겠습니다.”라고 말씀드렸다. 고산은 스스로 종이와 붓을 가져다가 서모에게 노비와 논밭이 충분히 돌아가도록 적었다. 아버지는 그 해를 넘기지 못했다.

고산은 1616년 최고 권력자인 이이첨을 탄핵하는 ‘병진소’를 올렸다가 이이첨 일파의 미움을 사서 1617년에 함경도 경원으로 유배되었다. 1618년에 고산은 유배지를 경상도 기장으로 옮기게 되었다. 당시 함경도 지방에는 유배 온 사람들이 많았는데, 이들이 반란을 일으킬까 우려한 조정이 이런 결정을 내린 것이다.

고산은85세에 사망했으므로 당시로서는 대단히 장수한 편이었다. 85년을 살면서 고산은 세 번이나 유배되는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고 네 명의 아들을 가슴에 묻었는데, 둘은 본처에게서, 둘은 첩에게서 얻은 아들이다.

고산은 시조와 한시를 잘 썼기로 유명하지만, 그가 남긴 산문 중에 우리의 가슴을 치는 글도 적지 않다. 그 중에서 25살 때 지은 ‘상우부’는 우정에 관한 고산의 생각이 담긴 글이다.

고산은 사교적이지 않아서 친구나 스승, 제자가 많지 않았다. 또 여럿이 어울려 놀기보다는 한적한 곳을 즐겼고, 이런 성품 때문에 스승을 두지 않고도 여러 분야에 걸쳐 독보적인 경지에 다다를 수 있었다.

다산 정약용(1762~1836)

 다산 정약용은 경기도 광주군 초부면 마현리에서 정재원의 막내 아들로 태어났다. 정재원이 다산을 낳은 것은 사도세자의 죽음을 둘러싼 정치 상황에 염증을 느끼고 농사를 지으며 살겠다는 생각으로 고향에 돌아왔을 무렵이다. 그래서 다산의 이름을 귀농이라고 지었다. 다산의 본관은 압해인데, 압해는 전라도 나중에 석한 지역이기 때문에 흔히 나주 정씨라고 한다. 다산의 어머니는 조선 중기를 대표하는 문인화가 공재 윤두서의 손녀이고, 윤두서는 곤산 윤선도의 후손이다. 고산 윤선도는 다산의 외가 쪽 조상이 된다. 다산은 얼굴 모습과 수염이 공재를 많이 닮아서 제자들에게 “내 몸과 마음의 근원은 외가에서 받은 것이 많다”라고 말하였다.

다산은 슬하에 6남 3녀를 두었는데, 4남 2녀가 어려서 죽었다. 예전에는 의료 시설이 부족하고 마땅한 의약품이 없어서 어린 자녀를 잃는 일이 많다. 하지만 다산은 그 고통을 너무 많이 겪었다. 다산은 여섯 명의 자녀를 잃었는데, 막내인 농장을 잃었을 때 가장 슬퍼했다. 막내는 다산이 강진에 유배되었을 때 죽었기 때문에 마지막 모습조차 볼 수 없었다.

다산이 남긴 저서 중에 대표적인 의학서로 마과회통이 있다. 사람들 중에는 다산이 자녀를 잃은 슬픔 때문에 이 책을 지었다고 말한다. 마과회통은 마진을 치료하는 방법을 탐구한 책이지 천연두 피료법을 기술한 저작물은 아니다. 마과회통은 홍역에 관한 정보, 그 원인과 주요 증상, 처방 등 여러 가지 내용을 매우 세밀하게 나누고 이전 사람들의 이론과 처방을 검토함으로 방대한 마진학을 담은 역작이다.

다산의 고향 마을과 유배지 강진은 지금도 가깝게 느껴지지 않는 거리지만 조선 후기에는 한없이 멀었다. 다신은 집에서 보내는 편지며 옷과 음식을 받을 때마다 그리움에 몸을 가누기 힘들었다. 아내가 혼례식을 치를 때 입었던 낡은 치마 여섯 폭을 보내왔다. 유배생활이 10여년이나 지난 1813년의 일이었다. 다산은 그 치마를 일정한 크기로 잘라 두 아들에게 주는 글을 적었다. 그리고 남은 치마에는 매화나무에 앉은 새를 그리고 딸이 행복하기를 바라는 시를 적어서 시집간 딸에게 주었다.

추사 김정희(1786~1856)

 추사 김정희는 충청남도 예산 용궁리의 경주 김씨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조선 후기의 명문가로, 영조의 계비인 정순황후가 추사의 11촌 대고모였다. 추사의 증조할아버지가 영조의 둘째딸인 화순옹주와 혼인하여 월성위에 봉해졌기 때문에 흔히 그의 가문을 월성위라고 부른다. 추사의 부친인 김노경은 막내아들인데, 그의 맏형인 김노영에게 아들이 없어서 추사가 8살 때 양자로 가게 되었다. 열두 살 때인 1797년에 추사는 양부인 김노영을 잃었다. 추사의 생모는 1801년에 불과 서른넷의 젊은 나이로 사망했다.

큰아버지 김노영의 양자가 되어 경주 김씨 문중의 종손이 된 추사는 부인에게서 아들을 얻지 못했다. 그러던 중 55세에 제주도에 위리안치 당하자, 유배 중에 죽기라도 하면 대가 끊어질 것을 크게 걱정했다. 그래서 유배된 지 2년째인 1841년에 13촌 되는 상무를 양자로 들였다.

추사가 15살 무렵부터 초정 박제가에게 학문을 배웠을 것으로 추정된다. 추사가 실학자다운 면모를 지니게 된 데는 초정의 가르침이 적지 않았다. 추사에게는 중국인 스승이 두 명 있었는데 완원과 옹방강이 그들이다. 운대 완원은 경학과 금석, 천문 지리 등 다방면에 뛰어난 대학자였다. 완원은 추사에게 자기가 직접 교정한 내용이 담겨 있는 책 등을 선물하면서 ‘완당’이라는 호를 내려 주었다. 완원보다 더 가깝게 지낸 중국인 스승은 담계 옹방강이었다. 옹방강은 탁월한 감식력을 가진 당대 최고의 금석학자였다. 옹방강은 추사에게 귀중한 탁본과 책 등을 선물로 주었으며 추사의 생부인 김노경의 당호 ‘유당’을 친필로 써주기까지 하였다.

추사가 남긴 글씨와 그림이 한둘이 아니고 그 중에 오늘날 우리 나라 예술사에 기념비적인 작품도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지만, 특히 ‘세한도’를 빼놓을 수 없다. 이 그림은 크기가 작고 몇 번의 붓질만으로 이루어져 있다. 소박한 집 한 채와 나무 네 그루만 덩그러니 그려져 있어 구도도 매우 간략하다. 그러나 바로 이러한 절제미 때문에 이 작품은 기교를 배제하고 선비의 내면세계를 응축해서 표현하는 문인화의 특성을 가장 잘 집약해 놓은 작품으로 평가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