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천과 삶/크리스천과 독서

도산 안창호 평전(이태복, 동녘)

기독항해자 2012. 5. 8. 16:17

도산 안창호 평전(이태복, 동녘), 2012년 5월에 읽음


저자 이태복

저서 (총 11권)민주화운동의 전설적 인물. 1950년 충남 보령시 천북 출생이다. 천북초, 예산중, 성동고, 국민대 법과, 고려대 노동대학원을 졸업하였고, 순천향대 사회복지대학원 명예박사이다. 1971년 반독재 민주화운동으로 제적하였고, 군복무 후 용산지게꾼을 거쳐 전국 공장 현장 경험했다. 1977년 도서출판 광민사를 설립하였고, 한국 최초의 노동문제 입문서 『한국노동문제의 구조』『노동의 역사』등 20여권 양서를 편찬하였다. 1981년 전국민주노동자연맹, 전국민주학생연맹 사건으로 8년을 투옥하였고, 1986년 엠네스티 인터내셔널이 '올해의 양심수'로 선정하였다. 1988년 10월 석방, 12월 특별사면 복권되었다. 1989년『주간노동자신문』을 창간, 1999년『노동일보』를 창간, 사회복지단체 '인간의 대지'를 설립하였다. 2001년 그리스도신학대학교 객원교수를, 2001년 청와대 복지노동수석을, 2002년 보건복지부 장관에 취임하였다. 2002년 연세대 사회복지대학원, 국민대 행정대학원 객원교수를, 2003년 한서대 노인복지학 초빙교수를, 2009년 사)인간의 대지 이사장, 5대거품빼기범국민운동본부 및 5대운동본부 상임대표를 지냈다. 청와대 수석과 보건복지부장관이라는 정부 고위직을 지냈으면서도 국민들의 고통을 줄이기 위한 캠페인을 적극 조직하고 여론화에 동분서주하면서 대한민국의 활로찾기에 고심하고 있다.『세상의 문앞에서』(옥중서한집)『전환기의 노동운동』『우리시대의 희망찾기』『기백이 있어야 희망이 보인다』『쓰러져도 멈추지 않는다』『대한민국은 침몰하는가』『사회복지정책론』, 2006 (심복자 공저) 『도산 안창호 평전』등의 저서가 있다.


출판사 서평

훌륭한 인격을 따라 배우고 싶은 인물을 갖지 못한 사회는 지극히 불행한 사회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도산이 있다. 세상을 떠난 지 68년이 되도록 제대로 평가받기는커녕 오해와 편견에 가린 도산을, 오늘의 현실에서 되살려내기 위해서는 특별한 노력이 필요하다. 가장 시급한 작업이 도산 안창호의 일생을 온전하게 복원하는 일이다. 전문 연구자가 아닌 한 운동가가 도산의 평전을 쓴다는 것이 무리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운동가의 자세와 감각으로, 도산의 삶 전체 모습을 되살릴 수 있기를, 그리하여 도산 안창호의 삶의 자세를 따라 배우려는 이들이 많아지기를 간절히 바라며 이 책을 감히 세상에 내놓는다.


22년 만에 다시 든 펜

22년 전인 1984년 늦봄, 전주교도소에 수감되어 있을 때 지은이 이태복은 단식투쟁 끝에 담당검사에게 볼펜을 써도 된다는 허락을 받았다. 안창호 평전을 쓰기 위해서였다. 이태복은 도산을 사표로 삼고 민주화운동을 했다. 그런 지은이에게 같이 갇혀 있던 양심수들은 도산 안창호를 개량주의자, 부르주아민족주의자로 치부하면서 연구할 가치도 없는 사람으로 매도했다. 지은이는 일방적인 찬양이나 비난을 넘어, 치열한 실천으로 독립운동과 공화국 건설, 인물 키우기 사업을 펼쳤던 도산의 삶을 온전히 찾아야겠다고 결심했다. 하지만 8.15 기념투쟁을 벌였다는 이유로 볼펜을 다시 빼앗기고 말았고, 그 뒤 1988년 10월 석방될 때까지 펜을 잡을 수 없었다. 석방된 뒤에는 노동자언론을 세우고 복지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느라 평전을 쓸 여력이 없었다. 그러다 학교 강의를 하는 지금 틈을 내지 않으면 도산에 대한 잘못된 초상을 바로잡을 수 없을 것이라는 위기감에 20여 년 만에 집필을 다시 이었다.


지금, 도산을 다시 부르는 까닭

도산이 세상을 떠난 지 68년이 지났다. 그 시간 동안 도산은 제대로 조명되지 못했고, 일제정책에 이용당했다는 오명을 쓰기도 했다. 하지만 지은이는 도산으로부터 나라와 겨레에 대한 사랑이 '공허한 말'이 아니라 '온전한 함'에 있다는 사실을, 자신을 끊임없이 혁신해가는 인간만이 자유로운 세계의 주인이 될 수 있다는 가르침을 배웠기에 그를 다시 역사의 광장으로 불러내야 한다고 말한다. 그 까닭은 다음과 같다.

첫째는 도산의 삶이 그 자체로서 아름답기 때문이다. 굶어죽는 독립운동이 아니라 싸워 이기는 독립운동, 공리공론을 일삼는 독립운동이 아니라 구체적인 방안을 무실역행하는 운동,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독립운동을 호소하고 몸소 실천하였던 인간이 바로 도산 안창호였다. 자리를 탐하고, 명예욕에 빠지며 변절한 몇몇 독립운동가와 다르게 오로지 독립운동이라는 대의에 철저했다.

둘째는 도산의 풍부한 독립운동방략에 배울 점이 많아서다. 구체적인 실천방안을 끊임없이 제시하는 인물들이 없으면 독립운동도, 독립 후에도 나라꼴이 제대로 되지 않는다며 '인물 기르기'를 강조했던 도산의 문제의식은 한국사회의 현실에서 여전히 유효한 교훈이다. 목소리만 요란할 뿐 현실에 근거한 실천방안이 없는 개혁파들, 언행이 일치하지 않는 지도층, 국민을 위해 헌신하고 희생할 생각보다 안일과 골프에 여념이 없는 고위 공직자들, 국가와 국민의 밥그릇보다 자기 밥그릇만 욕심내는 사회 각 집단들, 남북의 통일단결보다 정치적으로 서로 이용하기에 바쁜 게 우리의 현실이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대한민국의 중심축을 떠받칠 인물들을 기르고 그 인물들이 결집해야 한다는 점에서 도산의 가르침은 지금도 유효하다.

셋째는 분열과 갈등의 소용돌이에 빠져 있는 한국사회에서 통일단결과 통합의 리더십이 절실한 탓이다. 서로 감정이 쌓인 사람들에게 아무리 통합과 단결을 강조해도 마이동풍일 뿐이다. 분열적 언어와 행동을 삼가고 통일단결의 큰 길을 지향하며 민주적인 공론을 모아가는 리더십을 도산은 이미 독립운동 과정에서 보여줬다.


도산의 발자취

도산 안창호는 1878년 전형적인 잔반(殘班)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안창호는 서당에서 공부하다가 열여섯 살에 신학문을 배우려 고향 평안남도를 떠나 한양으로 가, 예수를 믿으면 가르쳐주고 먹여주고 재워준다는 말에 언더우드가 운영하던 구세학당에 들어간다. 그리고 그 이듬해에 서재필의 연설을 듣고 나라를 구하는 일에 일생을 바치기로 다짐한다. 이름 없는 우국청년으로 활동하던 안창호는 스무 살인 1898년 평양에서 만민공동회가 개최한 연설에서 18개 쾌재와 18개 불쾌로 탐관오리들의 학정과 비리를 규탄하고 외세의 침탈에 강력 대응할 것을 호소하여 유명해진다. 그러나 도산의 첫 구국운동의 무대였던 만민공동회 운동은 실패했고, 1899년에 고향에 돌아와 근대 학교인 점진학교와 개간사업을 전개하여 문명개화운동에 헌신했다. 1902년에 미국으로 건너가 샌프란시스코에서 한국인 친목회와 공립협회를 조직하고, 1907년 1월 귀국하여 이갑, 양기탁 등과 함께 비밀결사인 신민회를 조직하였다.

도산은 전국순회강연과 민중운동을 전개하였으며, 1908년 평양에 대성학교를 세웠다. 분투노력에도 불구하고 통감부의 탄압이 계속되자 1910년 망명하여 만주지역에 독립운동의 근거지 건설을 추진하였다. 1911년 다시 샌프란시스코로 건너가서 대한인 국민회 중앙 총회를 조직하고 1913년 5월 흥사단을 조직하였다. 3.1 운동 이후 상하이로 건너가 임시정부에서 내무총장직을 맡아 임시정부의 기초를 닦았다. 1932년 윤봉길 폭탄 의거로 투옥되었고, 1937년 동우회 사건으로 흥사단 동지들과 붙잡혀 투옥되었다가 병보석 중에 1938년 세상을 떠났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 공로 훈장에 추서되었다. 2006년 현재까지 도산의 인격과 가르침을 따르는 흥사단 활동이 이어지고 있다.


맺음 말 중에서

도산 안창호가 꿈속에서도 잊지 못했던 한반도와 평생을 바쳤던 동포들 곁을 떠난 지 어언 68년의 세월이 지났다. 도산이 대한의 독립과 조선혁명을 위해 살았던 60년의 시간보다 더 긴 시간이 흐른 것이다. 그 긴 세월 동안 도산은 1960년대 민족주의 열풍 속에서 잠깐 현실의 광장에 나왔다가 그 이후 내내 역사의 무덤 속에 갇혀 있었다. 하지만 도산이 그렇게 역사의 무덤에 파묻혀 있어도 좋은가? 아니다! 왜 그런가.

첫째, 도산의 삶에 대한 진지하고 순수한 태도는 우리가 본받아야 할 모습이었다. 독립운동가 이전에 한 인간으로서 안창호의 삶의 자세가 너무나 아름답다는 것이다. 도산 안창호는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독립운동의 영수로서 일제의 형무소와 병원에서 생을 마감하는 순간까지 자리에 대한 헛된 명예, 안락한 생활과 돈에 대한 탐욕, 이성의 유혹에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었고 오로지 밥을 먹어도 잠을 자도 조국의 독립이라는 목적에 전적으로 자신을 내던진 인간이었다. 망명객들이 대부분 빠졌던 자리에 대한 욕심 대신에 도산은 객관적인 정세와 조건을 먼저 고려하고 그에 맞는 사람에게 양보했다. 고난으로 점철된 생활을 하면서도 그는 언제나 빙그레 웃었고 말과 행동이 일치했으며 거짓과 꾸밈이 없고 솔직담백했다. 모든 일에 치밀하기 이를 데 없었으며 사람에게 지극 정성을 다했다. 보통 사람과 일반 지도자들이 배우기 어려운 경지이다. 격렬한 운동적 생활을 하면서 이런 수양의 깊이를 갖고 있는 인간을 우리가 만날 수 있다는 것은 크나큰 행운이 아닐 수 없다.

물론 도산의 일생은 완전무결하지도 않았고 성공보다는 실패가, 승리의 환호보다 좌절과 절망 속에서 몸부림친 경우가 많았다. 또 그의 판단과 분석이 언제나 옳았던 것도 아니었다. 어가동도 사건이나 블라디보스토크 신민회 분열, 3.1운동 이전의 정세, 국내 흥사단 조직에 대한 분석과 판단 등은 문제가 있었다. 하지만 도산은 다른 지도자들과 다르게 자신이 심사숙고하여 내린 판단이었다 하더라도 그 잘못이 있었을 경우에는 솔직하게 동지들에게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용서를 구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이는 전적으로 도산의 영혼이 순수했고 조국에 일생을 바치기로 다짐한 약속에 따라 오로지 조국독립이라는 대의에 철저했기 때문이다. 우리의 근대 100여년 역사, 아니 우리 겨레의 삶에서 도산 안창호 같은 인물을 다시 가질 수 있을지 의문이다.

둘째, 도산의 종합적인 독립운동 방략이 지닌 독립운동사적인 탁월성이다. 도산의 다방면에 걸친 활동을 정확히 모르는 사람들이 도산을 단순한 인격수양파, 무장투쟁론에 반대한 준비론자, 조선혁명이 아닌 개량주의자로 규정한다. 하지만 도산의 투쟁과 조직노선, 독립운동 방략은 매 시기의 정세와 주체적인 역량에 걸맞는 현실적인 조건에 기반한 과학적인 운동론이었고 종합적인 전망 하에서 구체화된 독립운동 노선이었다. 공리공론을 일삼고 일시적 흥분으로 떠들다가 며칠 못 가는 운동, 운동의 여러 투쟁 형태에서 일면적인, 특정한 부문만 강조하는 운동이 아니라 기초운동과 본격적인 운동, 단기적 투쟁과 장기적 투쟁, 경제투쟁과 정치투쟁 등 운동의 제반 상태와 조건을 면밀히 따져서 그에 맞는 형식과 내용을 찾아내 명렬히 실천한 지도자가 도산이었다.

도산이 이 구체적인 현실에 근거한 실천론을 몸에 익힌 시기는 불완전하지만 만민공동회 투쟁이 좌절된 이후부터였다. 활빈당이나 개혁당 같은 정치투쟁이 대중의 기초없이 추진되기 때문에 실패할 것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그래서 미국으로 건너가 공립협회라는 근대적인 조직을 만들어 운영하면서 탁상공론이 아닌 구체적인 현실조건을 운동의 출발선으로 정확히 인식하고 전체적인 국권회복 방안을 연구하여 체계화하고 직접 투쟁기구를 만들어 나갔다. 도산이 깃발을 든 신민회 운동은 망국 직전의 시기에 가장 큰 성과를 낸 운동이었고, 길림성 밀산 지역의 근거지 건설도 도산의 계획대로 됐다면, 독립운동의 그림이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상해임시정부 개조와 항일독립 역량의 통일단결도 이승만의 소아병적 감투욕과 좌익 및 일부 무장파의 주도권 다툼으로 물거품이 됐다.

도산의 주장대로 전 항일운동 세력이 망라된 통일단결된 조직이 건설돼 대중,대소 연합전선을 구축하여 체계적인 항일전쟁을 수행했어야 했다. 이를 바탕으로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여 전승국의 당당한 주체로서 능동적으로 대처할 수 있었을 것이다. 1935년 이후의 통일전선 운동은 이미 기회를 놓치고 만 뒤였다. 그렇기 때문에 목숨을 건 일제말의 무장투쟁도 중국과 소련의 적군에 편성돼 있었기 때문에 독자적인 독립국가의 군대로서 참전할 수 없었고 발언권도 국제무대에서 인정받지 못했다. 도산의 호소대로 좌우파가 연합하여 독립대당을 만들어 항일전쟁을 수행하지 못하면서 좌우파의 분열과 조국분단, 300만명이 죽은 6.25의 대참화가 예견됐는지도 모른다. 그 수난과 고통의 우리 현대사를 되돌아볼 때마다 도산의 진지한 호소가 우리 가슴을 파고든다. 도산이 제시했던 독립운동의 길은 도산 같은 인물만이 제시할 수 있었던 탁월한 방략이었고, 난마처럼 얽힌 시국을 뚫고 나갈 구원의 길이었다는 것이다.

셋째, 도산의 민족사회에 대한 장기적인 전망과 대비 때문이다. 도산이 여느 독립운동가와 달랐던 점은 그가 독특한 비전을 갖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도산은 다른 개화파와 마찬가지로 문명개화의 부강한 나라를 건설하는 목표를 세웠지만 식민지로 전락한 이후에는 대한의 독립과 모범적인 공화국의 복된 나라를 만들기 위해서 가장 중요하고 기초적인 작업은 제대로 된 인물을 키우는 작업이라고 보았다. 새로운 인물을 육성하는 의식적이고 조직적인 운동이 지속적으로 이뤄져야 한다는 것이다. 각종의 투쟁수단과 다양한 형태의 운동이 추진되더라도 이 인물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해 나가지 않으면 도로에 그칠 것으로 판단했다. 그래서 운동의 출발이나 운동과정, 그 결과 이후에도 무실역행하고 충의용감한 인물들로 개조되고 향상되지 않으면 진정한 발전과 진보가 없다는 관점을 중시했다.

정밀한 이론체계로는 좌익의 마르크스-레닌주의 혁명이론과 우익의 민족국가론도 있었지만 이 양측을 존중하여 통일단결에 힘쓰되 사람의 문제가 인간의 개조와 함게 진행되지 않는 민족혁명은 질적으로 발전할 수 없고 설사 독립이 달성되어도 같은 문제에 부딪힌다. 1945년 광복 이후 우리 사회가 걸어 온 분열과 대립, 지도층의 무능과 거짓 등 혼란스러운 길은 바로 도산이 우려하고 걱정했던 그대로였다. 그런 점에서 독립운동의 과정에서 인간의 문제를 제기하고 질적으로 고양된 인격자들이 끊임없는 자기 혁신을 통해 공동체의 문제를 맹렬히 풀어 나가야 한다는 문제의식은 지금도 오늘의 우리에게 생명력 있는 호소이자 준엄한 명령이다.

넷째, 민주적인 리더십의 소중한 유산 때문이다. 도산은 언제나 동지들의 토론과 공론화 과정을 통해 여론을 수렴해 나갔다. 민주주의에 대한 교육은 독립협회의 토론회 시기의 짧은 기간뿐이었음에도 도산의 민주적인 조직운영과 훈련지도는 뛰어난 것이었다. 1913년에 흥사단을 조직하면서 3권분립의 조직체계를 만들고 조직원들을 각종 과정을 만들어 훈련시켰다. 민주공화국의 건설에 대비한 것이다. 도산의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은 확고한 것이었고, 독립운동 과정에서 나타난 가장 모범적인 리더십이었다. 다른 지도자들은 나를 따르라거나 자기 주장만 일방적으로 선언하는 방식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도산은 상대방의 의견을 인내심 있게 끝까지 듣고 자신의 의사를 분명하게 표현하며 민주적인 절차를 중요시하고 그 결론이 설사 자신의 의견과 다르다 하더라도 존중하는 태도를 견지한, 그 시기에 도저히 출현할 수 없는 모범적인 민주적 리더십을 보여 줬다.

그러면 도산의 일생은 오늘의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각혈을 하면서 광분망식(狂奔亡息)할 정도로 독립운동에 헌신했지만, 해방의 기쁨을 보지 못하고 돌아갔으니 그의 삶은 실패한 것일까. 도산의 통일단결이라는 말이 유행할 정도로 항일 독립운동 진영의 통일단결을 위해 전력을 기울였으나 분열과 대립의 운동현실이 극복되지 못했으므로 이 역시 헛수고였던 것인가. 독립운동의 근거지를 구축하여 동포들의 생활을 안정시키면서 독립군을 양성해 독립전쟁에 대처하려는 노력을 끊임없이 시도했지만, 이 또한 일제의 중국침략이 확대되면서 가시적인 성과를 만들어내지 못했으니 도로에 지나지 않았던 것인가. 특히 도산이 강조했던 인물 기르기와 인격수련은 지금까지 도산 이상의 인물이 나오지 못했고, 이광수와 주요한 등 국내 흥사단의 주요 인물들이 일제의 이른바 대동아전쟁의 광기에 휩쓸려들면서 빛이 바래고 말았다. 총칼 앞에서 무릎 꿇는 사람의 인격을 어찌 무실역행하고, 충의용감의 정신으로 수련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얼핏 보면 도산은 실패한 독립운동가의 한 사람인지 모른다. 하지만 한 인간의 삶에 대한 평가는 사후에야 비로소 가능하다는 말처럼 늦었지만 도산의 삶에 대한 평가를 이제는 제대로 해야 한다.

도산의 동지들과 제자들은 도산을 무오류의 인격자로 절대숭배한 반면, 비판자들은 무식쟁이, 평안도 촌놈, 야심가, 지방열의 화신이라고 공격했고, 독립운동 노선에 대해서도 극단적인 평가가 엇갈렸다. 즉각적인 무장투쟁을 주장했거나 사회주의 혁명을 강조했던 이들은 도산의 종합적인 운동방략을 준비론, 개량주의, 외교론, 부르주아민족주의로 공격했다. 도산을 끊임없이 감시하고 탄압하여 끝내 목숨을 빼앗은 일제는 이토 히로부미처럼 도산 내각을 만들어 식민화에 이용하려던 자가 있었는가 하면, 미나미 지로 총독은 황국신민화의 장애물로 보고 씨를 말려야 될 불령선인의 수괴로 인식했다. 그들은 도산을 무단파와 대립하는 문치파. 독립운동의 영수가 아닌 평안도와 황해도 파벌의 두목이라는 딱지를 붙여 분열과 대립을 조장하는 숱한 유인물과 이면공작을 벌였다.

해방 이후 혼란스러운 건국 과정에서 통일단결을 부르짖고 인물이 없음을 한탄하고 인물 기르기에 노력했던 도산의 선견지명이 절실하게 다가왔음에도 도산의 호소와 헌신적 삶은 우리 사회의 師表와 귀감이 되지 못했다. 권력욕의 화신이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되고 민족을 배신하고 독립운동가들을 탄압했던 자들이 떵떵거리고 사는 사회에서 도산의 진실하고 치열한 삶이 설 자리는 없었다. 우리 사회의 지도층들이 거짓말을 일삼고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출세하거나 돈을 벌기만 하면 된다는 자세로 살아 온 사람들이기 때문에 국민들도 그런 자들의 타락한 삶을 성공의 척도로 삼았던 것이다.

훌륭한 인격을 따라 배우고 싶은 인물을 갖지 못한 사회란 지극히 불행한 사회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오늘의 이 가치관이 전도된 현실에서 도산을 되살려 내기 위해서는 아주 특별한 노력이 필요하다. 우선 가장 시급한 작업이 도산의 일생을 온전하게 복원하는 일이다. 그동안 이광수나 주요한 등 친일행위를 했던 이들의 도산, 특히 기초 준비작업에 몰두했던 시기의 도산만을 참모습으로 인식했기 때문에 도산에 대한 오해와 편견, 무지가 방치돼 왔다.

그러나 도산의 실천은 수십 년에 걸쳐 진행됐고, 임시정부의 실질적인 책임자였고 항일전선을 대표했던 영수로서 좌우파 모두 인정했던 정치지도자였으므로 도산의 생각과 실천은 매우 폭넓고 다양했다. 도산은 단순한 인격수양론자가 아니었다. 투쟁이 없는 준비만 강조한 것도 아니었다. 지주와 자산가들만을 위한 독립운동을 한 것도 아니었다. 도산은 어떤 고난도 이겨내고 끝까지 조국독립을 위해 싸우는 투사들의 인격훈련으로 무실역행과 충의용감을 강조했고 굶주려 죽는 독립전쟁이 아니라 준비하여 싸워 독립을 달성하자는 독립전쟁론자였으며, 조선의 모든 동포들을 불쌍히 여기고 그들의 해방과 모범적인 공화국, 복된 나라를 건설하려는 조선의 혁명가였다.

이런 도산의 삶이 소중하다면 그동안 도산에 대해서 퍼부어졌던 의도적인 왜곡과 부당한 편견, 수준 이하의 비방을 걷어치우고 도산의 전체상을 제대로 세워야 한다.

둘째는 도산의 삶의 자세와 정신을 오늘의 현실에서 어떻게 계승하여 발전시켜야 하는가 하는 것이다. 도산은 1878년이라는 역사적 조건에서 태어나 1938년 일제 말기까지 살았던 인간으로서 갖는 한계와 문제를 안고 있다. 식민지 권력의 무자비한 폭력적 상황에서 활동했던 도산이었기에 21세기의 대한민국에서 살고 있는 오늘의 우리와는 놓인 환경이 너무 다르다. 도산이 치열한 실천과정에서 제시했던 여러 해법과 문제의식들은 이제 불필요하거나 별 의미를 갖지 못하기도 한다.

하지만 도산이 온몸을 바친 실천을 통해 우리에게 던진 메시지는 분명하다. 그 하나는 밥을 먹어도 잠을 자도 나라와 국민을 위해서 하라는 것이다. 말로만 떠드는 나라와 국민을 위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나라와 국민을 위해서 온정신을 기울이고 몸을 던져 일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도산은 대공(大公)주의로 표현했지만, 각자 직업과 가정을 갖고 생활하는 한국 사회에서 나라와 겨레를 먼저 생각하고 전심전력을 기울이는 일은 쉽지 않다. 우리사회의 지도층이 국민들의 불신을 받는 이유는 간단하다. 국민을 위해 몸을 던져 일하지 않고 권력과 부귀영화만을 탐하거나 언행이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다. 개인이나 집단의 이익보다 나라와 국민을 먼저 생각하고 이를 위해 진지하게 실천하는 도산식의 삶의 자세를 갖는다면 한국 사회의 혼란은 어느 정도 수습될 수 있고 우리 겨레의 활로도 개척될 것이다.

나라를 위해 헌신한다는 것은 공리공론이나 일시적 흥분으로 떠들다 마는 방식이 아니라 두 번 세 번 되풀이해 생각하고 구체적인 현실 조건을 철저하게 따져 실천 가능한 방법을 찾아내 해결해야 한다는 가르침이다. 이런 접근방식과 문제해결 노력이 단세포적이거나 일면적 투쟁을 선호하는 사람들로부터 준비론이나 개량주의라는 비판을 받았지만 그때 도산의 실천론은 일반대중으로부터 환영을 받았고 설득력이 높았다. 자신들의 구체적 조건에서 길을 찾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경제의 질적 도약과 대기업과 중소기업, 수출과 내수, 첨단과 굴뚝산업의 균형적 발전이 필요한 시기에 국가전략 방향이 여전히 모호하고 한국사회가 양극화로 첨예한 갈등에 빠져 군사적 폭압 대신에 이해집단 간의 갈등과 대립을 조정하고 대안을 모색해야 하는 현실에서 도산의 실천론은 정말 소중한 유산이다. 독재로 모든 문제를 해결했던 군사정권 시대가 끝나고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정권이 들어섰지만, 사회적 혼란이 계속되는 것은 신뢰감이 없는 지도층이 구체적 대안을 갖고 국민생활을 발전시키지 못하고 공허한 말 잔치를 일삼고 구체적인 해법의 제시 없이 국정을 이끌기 때문이다. 의약분업과 교육개혁의 실패가 증거물들이다. 도산의 실천론을 계속 외면한다면 대한민국은 중국의 추격으로 매우 곤란한 상황에 빠지게 되고 사회갈등으로 혼란을 거듭해 군사 강국의 길로 나아가는 일본과 주변 강대국들의 일방적인 전략으로 궁지에 떨어질지도 모른다.

셋째는 도산이 직접 조직하고 뿌리와 기초공사라고 강조했던 흥사단을 어떻게 발전시켜 분단된 나라를 통일하고 언제나 염원했던 복된 모범공화국을 건설해 갈까 하는 것이다. 한 조직이 100년의 역사를 갖는다는 것은 한국의 풍토에서 기적 같은 일이라는 평가를 받을 만 하다. 어찌 보면 숱한 격변의 시기를 거쳐 오면서 살아남았다는 사실이 신기하기도 하다. 하지만 국민의 생활 속에 뿌리내리지 못했으며 그 100년의 역사에 합당한 무게만큼 한국 사회에서 그 위상과 실력을 갖고 있지 못하다면 도산정신을 드높여 왔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래서 21세기 오늘의 민족사회의 현실에서 도산정신의 계승자라고 할 수 있는 흥사단의 책임이 막중하다고 아니할 수 없다. 도산이 식민 통치의 혹독한 조건을 감안하여 인격훈련 단체라고 표면상 얘기했지만, 입단문답 과정에서 흥사단은 독립운동을 목적으로 하는 단체라는 점을 분명히 주지시켜 왔음에도 불구하고 해방 이후 흥사단은 일제시대의 합법단체의 형식과 내용을 그대로 답습해 인격수련 단체라는 점만 강조되고 말았다. 또 인격수련은 책상 앞에서 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민족현실과 그 해결을 위한 실천과정에서 건전한 인격으로 단련되는 것임에도 이를 게을리 함으로써 한국 사회가 인정하는 인물 들을 길러내는 데 성과를 내지 못하였다. 1960년대에 학생아카데미의 씨앗이 뿌려져 흥사단 부흥의 기회를 맞이했으나 1970년대의 유신군사 독재체제에 흥사단 일부 지도부가 순응하면서 무실역행과 충의용감이라는 인격수련 깃발을 부끄럽게 만들고 말았다. 도산 정신을 되살리려는 일부 젊은 단우들이 도산의 치열한 실천정신을 이어갔지만 국민들 속에서 흥사단이 신뢰받는 조직으로 자리 잡는데 실패했다. 이런 상황이 계속된다면 흥사단은 숱한 시민사회단체의 하나이거나 소시민적인 사교단체, 봉사단체로 끝날지도 모른다.

민족 전도 대업의 기초를 세우기 위한 조직이 이래도 좋은가. 도산과 흥사단을 그렇게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지게 해서는 안 된다. 도산이 민족 전도 대업의 기초로 조직한 흥사단은 항일운동조직의 유일한 생존자이면서 계승자이다. 대한민국 정통성의 뿌리이자 기초라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도산을 우리 사회의 사표로서 우뚝 세워 가면서 흥사단 운동을 활성화시켜 가야 한다. 정치, 경제, 교육, 복지, 환경 등 각 분야 인물 기르기에 대한 새로운 체계적인 프로그램도 만들고 민족현실에 대한 해법 마련과 그 실천 활동을 역사의 무게에 걸맞게 조직해 가야 한다.

도산이 신민회의 깃발을 들고 혜성처럼 나타나 구국운동의 횃불을 치켜든 것처럼, 1920년대의 암담한 현실을 통일단결과 민족대독립당 건설로 돌파하려 했던 것처럼 나라와 국민을 먼저 생각하는 흥사단 단우들의 의지와 프로젝트를 국민들에게 분명하게 제시하는 새로운 전략과 깃발이 휘날려야 한다. 100년 동안 민족사와 희로애락을 함께 해 온 흥사단이야말로 이 땅의 중심이고 주인이 될 자격이 있다. 그러나 현재의 흥사단은 100년 동안 힘을 기르자고 외쳐 왔으면서도 그만한 힘과 의지가 부족하다는 현실을 냉철하게 인식해야 한다. 그런 차원에서 도산의 유업을 실천해야 될 흥사단은 중대한 기로에 서 있다.

도산 안창호의 일생은 우리에게 나라와 국민들의 고통과 희망을 함께 껴안고 미래를 개척해 가는 흥사단, 그 문제해결의 과정에서 국민들의 신뢰와 사랑을 받는 인물이 넘쳐나는 흥사단이 돼야 민족 전도 대업의 기초를 다져 도산의 유산을 하나씩 현실화시켜 갈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도산의 삶을 본받기 원한다면 우리의 나태와 자기기만, 타락을 참회하고, 초심으로 돌아가 우리 사회 발전에 헌신하는 일대 자기혁신에 철저할 것을 다짐해야 하낟. 그래야 국민들도 흥사단과 단우들의 말과 몸짓을 신뢰하고 그 깃발 아래에 모여들 것이다.

아무쪼록 지하에 계신 도산의 빙그레 웃는 웃음이 지상으로 나와 이 땅 남과 북의 한반도에서 활짝 필 날을 고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