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신에 목숨을 건 조선의 아웃 사이더(노대환 지음, 역사의 아침), 2012년 5월에 읽음
1. 주상, 당신이 틀렸소, 정조의 문체반정이 반기를 들었던 이옥(1760~1812)
1792년 정조에 의해 문체반정이라는 일종의 문화정책이 시행되었다. 문체를 단속해 기강을 바로잡겠다는 것인데, 이때 주요 표적이 된 것은 청에서 유입되어 유행하고 있던 패관소품이었다. 패관소품은 요즘의 단편소설이나 수필에 해당되는 것인데, 정조는 흥밋거리로 지어지고 읽히는 이런 작품들이 사회를 어지럽힌다고 보아 문체반정을 시도한 것이다. 당시 가장 인기 있는 작가였던 박지원을 비롯해 많은 이들이 문체를 어지럽힌다는 이유로 비판을 받았다. 정조는 순정한 작품을 지어 바쳐 속죄하도록 명했고, 지목된 이들은 일종의 반성 작품을 제출했다. 이옥 역시 패관소품을 지어 문체를 타락시켰다고 지목된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순정문을 지어 죄를 용서받았던 다른 이들과는 달리 그는 자신의 문체를 고치지 못해 난관을 겪었으며, 그 때문에 인생 자체가 엉망이 되어 버렸다. 정조의 지적을 받은 문사들이 대개 순정한 글을 지어 바쳤지만 이옥은 자신의 문체를 버리지 않았고, 그 때문에 그의 삶은 궁색해졌다. 그의 삶과 바꾼 글이지만 이옥은 세상을 떠난 후 그의 글을 주목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최근에 들어서야 이옥은 새로운 의식을 지닌 작가로 인정받아 그의 문학 세계가 활발히 연구되고 있다.
2. 아내가 그리워 매일 밤 눈물을 흘렸소, 죽은 아내에게 수십 편의 글을 남긴 심노숭(1762~1837)
평생 고락을 함께 했던 아내의 죽음을 슬퍼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아내를 잃은 슬픔과 아내에 대한 그리움을 적극적으로 표현하는 것은 조금 다른 차원의 문제다. 시대와 지역에 따라 표현 방식에 차이가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조선 시대라면 특히 상황이 다르다. 가능한 한 희노애락의 감정을 절제하는 것을 선비의 도라고 여기는 성리학 사회였던 탓이다. 그 때문에 마음은 있다고 해도 아내의 죽음을 안타까워하고, 아내를 그리는 글을 많이 남긴 사람은 많지 않다. 간혹 제문에 애통한 심정을 표하기는 했지만 대개 단발성에 그쳤는데, 그런 점에서 심노숭은 조금 특이한 사람이었다. 그는 먼저 세상을 떠난 아내를 그리워하는 수십 편의 글을 남겼는데, 이러한 예는 다른 이들에게서는 거의 발견되지 않는다.
3. 그 누구도 내 글을 비난할 수 없소, 자신을 최고의 문인으로 믿었던 요절 시인 이언진(1740~1766)
중인은 조선 성리학 사회가 만들어낸 특수한 존재였다. 이들은 평민보다 한 단계 위에 있었지만 일종의 도태층이었다. 성리학을 최고의 가치로 여겼던 양반층이 손대지 않는 그저그런 일을 맡아보는 부류로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제2인자 그룹임에도 불구하고 양반들에게 늘 홀대받았지만 중인층 가운데에는 양반에 뒤지지 않을 정도로 뛰어난 문학 실력을 갖춘 이들이 적지 않았다. 이언진은 자신의 실력에 자부심이 대단했던 중인 문학가였다. 당대 최고의 문학가였던 연암 박지원에게 당당히 도전장을 던질 만한 문인은 별로 없었는데, 그는 연암의 박한 평가에 독설로 맞설 정도로 자신감이 충만했다. 하지만 그도 양반들이 자신의 문학을 인정해주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심한 좌절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4. 아이는 할아비인 내가 키우겠소, 손자의 육아 일기를 남긴 이문건(1494~1567)
조선 시대에 일기를 남긴 이들은 적지 않다. 기록을 중시했던 지식인들은 관직 생활을 비롯하여 제사나 농사 등 주변의 다양한 이야기들을 일기에 담았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그 많은 일기 가운데 아이의 양육에 관한 기록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이다. 일기에 아이의 이야기가 단편적으로 등장하는 경우는 물론 있지만 아이 기르는 일만을 전적으로 기록한 것은 이문건의 ‘양아록’이 유일하다. 아이의 사소한 성장 과정을 기록하는 것을 남자답지 못하다고 여겼기 때문일까. 그런 점에서 ‘양아록’은 매우 희귀한 작품이다. 이문건은 ‘양아록’에서 손자가 자라는 과정을 흥미롭게 기술했다. 손자가 정상적으로 성장하는 것을 보면서 느끼는 신선함, 손자가 병에 걸린 것에 대한 안타까움, 말을 듣지 않는 손자에 대한 분노에 이르기까지 할아버지의 솔직한 마음이 그대로 나타나 있다.
5. 벗 없는 세상에선 벼슬하지 않겠소, 친구의 죽음에 과거를 포기한 박지원(1737~1805)
연암 박지원은 당대 조선 최고의 문학가였다. 20세를 전후하여 사람들 사이에 이미 이름 석자가 널리 알려졌으며, 모두를 그의 앞길이 화려할 것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그런데 사람들의 예측과는 달리 그는 과거에 적극적으로 응시하여 출세를 도모하지 않았다. 정확히 이야기하면 그는 과거를 통한 출세를 아예 단념했다. 집안이 한미했다면 그 때문이라고 하겠지만 그는 최고 가문의 하나인 반남 박씨 출신이었다. 과거에 집착했던 것은 아니지만 젊은 시절에는 여러 차례 시험에 응시했고, 훌륭한 답안으로 영조의 칭찬을 받은 일까지 있었다. 친구 간의 의리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사람은 없겠지만, 연암처럼 친구의 죽음에 상심한 나머지 자신의 앞 길을 포기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6. 개처럼 사느니 차라리 흙이 되겠소, 스승의 죽음에 평생을 은둔한 양산보(1503~1557)
16세기는 사화의 시기였다. 네 차례의 피비린내 나는 사화가 조선을 덮쳐 많은 이들이 죽임을 당하고 피해를 입었다. 사화는 기본적으로 주자성리학으로 무장한 신진 사류들이 기존의 정치 세력을 대체하는 과정이었다. 그 과정에서 기존 세력의 공격을 받아 신진 사류들이 화를 입었는데, 특히 기묘사화로 사류들은 큰 타격을 받았다. 사류의 전형이라 할 수 있는 정암 조광조를 비롯한 신진 세력이 목숨을 잃었으며 그에 실망한 많은 사람들이 세상을 등졌다. 조광조의 문인이었던 양산보도 그런 이들 가운데 하나였다. 조광조의 촉망받는 문인이었던 그는 스승의 죽음에 충격을 받아 출세를 포기한 채 고향 땅에 소쇄원을 짓고 평생을 처사로 지냈다. 그와 뜻을 함께하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던 소쇄원은 처사들의 마음의 안식처였다. 양산보가 조영한 소쇄원은 한국 최고의 정원으로 손꼽히지만 단순한 정원은 아니었다.
7. 어머니를 위해 소설을 쓰겠소, 극진한 효심으로 소설 구운몽을 지은 김만중(1637~1692)
효는 조선 시대 최고의 가치였다. 병든 부모에게 자신의 넓적 다리 살을 베어 버린다는 것은 현대인들로서는 감히 상상할 수조차 없는 일이지만 조선 사회에는 이런 효행을 실천한 인물이 얼마든지 있었다. 서포 김만중은 그런 기인한 행적을 보였던 효자는 아니었지만 양반 사대부 가운데 어머니에 대한 사랑을 가장 적극적으로 표현했던 인물이다. 유복자로 태어나 어머니 밑에서 성장했던 그에게 어머니는 절대적인 존재였으며, 김만중은 그런 어머니를 평생 극진하게 모셨다. 복잡했던 시기에 관직 생활을 한 까닭에 정치적 부침이 끝이 없었지만 그의 마음속 한가운데에는 언제나 어머니가 자리 잡고 있었다. 유배라는 정치적 역경 속에서도 어머니를 기쁘게 해드리려는 일념으로 구운몽을 지었던 김만중의 표심은 보통 사람이 흉내내기 어려운 것이었다.
8. 실천하지 않는 학문은 하지 않겠소, 의리와 실천으로 무장한 행동파 유학자 정인홍(1535~1632)
조선 중기의 여러 학파 가운데 남명 조식(1501~1572) 학파는 다른 학파와는 구별되는 특징을 지니고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실천정신이다. 퇴계 학파에에서 잘 나타나듯 이론과 학설이 중심이 되었던 조선 중기에 남명은 실천의 중요성을 강조했으며, 옳다고 생각하는 바를 과감하게 실천에 옮겼다. 이러한 실천성은 남명학파의 상징이 되었다. 남명의 문인들은 당연히 이러한 실천정신을 중시했지만, 그 가운데 정인홍은 특히 유별난 인물이었다. 남명을 빼닮아 스승으로부터 학문의 계승자로 인정받았던 그는 스승에게서 배운 의리관과 실천성으로 무장하고 광해군 때 정계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9. 한 번 당한 치욕은 꼭 갚겠소, 일평생 오로지 북벌을 꿈꾸었던 윤휴(1617~1680)
조선 사회는 왜란과 호란, 두 차례의 큰 전쟁으로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경제적인 측면에서 볼 때 호란은 7년간 지속되었던 왜란과 비교가 되지 않지만 정신적 측면에서는 호란의 충격이 훨씬 컸다. 임진왜란은 어쨌든 조선이 왜군을 축출하여 일본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게끔 만들었던 데 비해 호란은 그동안 오랑캐라고 하찮게 여겨왔던 청에게 완전히 농락당한 전쟁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인조 임금이 일개 오랑캐 황제 앞에 항복한 것은 참을 수 없는 굴욕이었다. 조선의 많은 지식인들이 이 치욕을 갚기 위해 나섰는데, 그 가운데 진정한 북벌론자라 할 수 있는 이가 백호 윤휴였다.
10. 쇠심줄 같은 고집으로 평생을 살았소, 경세에 목숨을 걸었던 김병욱(1808~1885)
17세기 후반 이후 조선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새로운 학문적 움직임이 본격적으로 나타났다. 철학적 사유와 이론적 분석에 치충하는 성리학자들의 태도를 비판하며 백성과 나라에 도움이 되는 학문을 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된 것이다. 이러한 움직임은 18세기 후반 북학 사상으로 꽃을 피웠지만 19세기 세도 정권에 들어서자 보수적인 분위기에 눌려 시들해져갔다. 이러한 시기에 뇌서 김병욱은 백성과 나라에 이익이 되는 학문을 해야 한다며 경세학을 제창하고 나섰다. 어린 시절부터 현실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냉철하게 현실 문제를 관찰하면서 경세책을 구상하는 데 정열을 바쳤고, 자신의 경제책을 실현시키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11. 내 몸을 바쳐서라도 외세를 막겠소, 온몸으로 천주교에 맞섰던 김치진(1822~1869)
19세기 커다란 사회문제 가운데 하나는 서학 즉 천주교의 유행이었다. 18세기 후반부터 본격적으로 전파되기 시작한 천주교는 세도정치기에 들어서자 곳곳에서 신자층이 생기는 등 급속히 확산되어갔다. 천주교의 유행을 큰 위기로 파악한 정부와 지식인들은 천주교의 확산을 막는데 주력했다. 이러한 가운데 천주교도에 대한 대대적인 처벌이 이루어져 많은 신자들을 목숨을 잃었다. 천주교 신앙이 죄악으로 간주되던 당신에 희생자들이 나타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천주교를 믿어서 처형된 것이 아니라 천주교의 확산을 막다가 처형된 인가 있었다. 그가 바로 김치진이다. 그는 평생 천주교를 조선 땅에서 몰아내는 데 모든 노력을 기울이다가 체포되어 효수되었다.
12. 오직 나만의 길을 가겠소, 개화와 척사 사이에서 제3의 길을 걸었던 이건창(1852~1898)
19세기 후반은 이념의 대립기였다. 그동안 지식인들은 성리학이라는 이념을 공동의 기반으로 하고 있었지만, 시대가 복잡해지면서 공동의 기반은 붕괴되었다. 서양 세력의 침탈이 가시화되면서 서양 세력을 물리쳐야 한다는 의식으로 무장한 척사론이 전면에 부상했고, 다른 한편에서는 서양의 문명을 흡수하여 조선을 변화시켜야 한다는 개화론이 등장했다. 두 주장은 접점을 찾지 못한 채 평생선을 달리며 조선 사회를 이념 갈등의 구렁에 몰아넣었다. 대부분이 어느 한쪽을 택했던 그 시절 영재 이건창은 어느 편에도 쏠리지 않고 자신의 노선을 걸었다. 그의 노선은 척사론이나 개화론 어느 쪽에서도 인정을 받지 못했지만 그 자신의 고집을 꺾지 않았다. 그는 이념을 위한 이념이 아니라 백성과 나라를 구할 수 실질적인 방법을 찾고자 노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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