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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 세상에 홀리다(줄리언 스팰딩, 김병화 옮김, 세미콜론)

기독항해자 2012. 5. 23. 23:16

미술, 세상에 홀리다(줄리언 스팰딩, 김병화 옮김, 세미콜론), 2012년 5월에 읽음


줄리언 스팰딩

작가이자 독립 큐레이터. 셰필드, 글래스고, 맨체스터 등 영국 여러 도시의 미술관과 갤러리의 관장으로 일했다. 러스킨 미술관, 오픈 뮤지엄, 세인트 멍고 종교 미술 및 생활 박물관, 글래스고 현대미술관 등을 설립했고, 2000년에는 캠페인 퍼 드로잉(Campaign For Drawing)을 출범시켰다. 스팰딩은 현재 에딘버러에 살면서 정원을 가꾸고, 독서를 하고 또 세계 곳곳을 여행한다. 저서로는 [The Poetic Museum- Reviving Historic Collections], [The Eclipse of Art- Tackling the Crisis in Art Today], [The Art of Wonder; (미술, 세상에 홀리다 /김병화 역)] 으로 2006년 영국작가클럽(the Authors' Club)이 우수한 예술분야저서에 수여하는 Sir Banister Fletcher 상을 받았다.


출판사 서평

"아는 만큼 보인다"라는 말은 이제 문화와 예술을 향유하고 감상하는 기본적인 방식이자 태도처럼 얘기되곤 한다. 그러나 미술 감상, 정말 아는 만큼 보일까? 미술 사조와 학파, 양식 대해 더 잘 알면 그 작품을 더 잘 감상할 수 있을까? 혹시 아는 것만 보이는 것은 아닐까? 줄리언 스팰딩의 『미술, 세상에 홀리다』(원제 Art of Wonder: A History of Seeing)는 미술을 제대로 느끼고 알고 싶다면 미술사에 대한 지식에서 자유로워지라고 말하는 책이다. 다년간 미술계에서 활동하면서 그 누구보다 미술사적 지식에 출중할 것이 분명한 저자는 아이러니하게도 미술을 제대로 보기 위해 필요한 것은 태초 인류가 세상과 자연, 신에게 보내던 그 순수하고 경이로움에 찬 눈을 회복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경이로움을 발견하는 눈을 되찾는 것만으로 예술의 본질을 경험할 수 있다고.

새로운 시각으로 미술을 바라보고 또 그런 시각을 갖기를 권고하는 이 책은 총 10장으로 이루어졌다. 1~7장까지는 미술의 영원한 소재이자 고대 인류가 자연과 세계에 대해 신성하고 친근하게 여기던 별, 태양, 달, 계절, 탄생, 죽음, 신 등의 주제들이 어떤 시각에서 어떻게 미술품으로 표현되었는지 살펴보고, 8~10장부터는 우리에게 익숙한 연대기 순으로 중세의 미술부터 현대미술까지의 흐름을 살펴본다. 저자는 7장까지의 무역사적이고 자유연상적인 주제별 접근을 흐르는 물속에 몸을 담그고 있는 것에 비유하고 그 이후의 역사적 접근을 강둑에서 흐르는 물을 지켜보는 것에 비유한다.

이 책은 영국 작가 클럽(Author's Club)에서 우수한 예술서 저작에 수여하는 베니스터 플레처 상을 수상했다. 건축가이자 건축사가였던 베니스터 플레처 경의 이름을 따서 제정한 상으로 곰브리치를 비롯하여 케네스 클라크, 니콜라우스 페브스너 같은 유수의 미술사가들이 역대 수상자 명단에 올라있다.

사람은 누구나 스스로가 비평가이고 자신이 보고 느낀 것을 믿어야 한다고 말하는 저자는 주석을 의도적으로 배제했다. 고대 예술에 대한 우리의 해석을 확증해 줄 문자 기록이 전해지지 않는 것처럼 이 책에서 행하는 분석은 지식과 텍스트의 뒷받침을 받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대신 자신이 본 것을 독자들에게도 보여 주기 위해 풍부한 도판을 사용했고, 도판을 쓰기 어려운 것은 직접 그린 수채화 삽화로 실었다. 자신이 그린 그림으로 시각적인 주석을 단 셈이다.

미술 양식이나 미술가가 중심인 기존 미술사의 서술 방식을 따르지 않는 이 책은 언뜻 보기엔 쉬운 읽을거리로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읽을수록 그 공력의 깊이가 크게 느껴지며 여운이 남는 책임을 깨닫게 된다. 이 책의 저자야말로 서양미술사에 그치지 않고 인도, 중국, 일본, 아프리카, 남미의 미술에 이르기까지 전체 미술사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통찰력을 지녔으면서도 지식의 무게에 눌리지 않고 태초의 눈이 지닌 순수한 경이감을 스스로 보존하고 있는 시각의 소유자가 아닐까 한다.


1. 영혼을 품은 빛, 별

우리는 세계가 둥글고 달은 암석 덩어리이고 태양은 핵폭발이 지금도 진행 중닌 불덩어리라는 생각에 너무난 익숙해져 있기 때문에, 얼마 전까지도 달은 매달 새로 임신하며 태양은 밤새도록 배에 실려 지하는 지나고 낮 동안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말들에게 이끌려 하늘을 건너간다는 생각이 지극히 타당하고 여겨졌다고는 상상하기도 힘들다. 지금은 그런 생각이 너무나 바보같이 여겨지지 때문에, 아무도 그런 생각을 진지하게 믿지 않았으리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우리에게 있다. 하지만 선조들에게는 그런 생각이 하나의 상식이었다.

2. 고대인의 세계관을 담은 미술

고대인의 세계관은 논리적인 동시에 비논리적이고, 단순하면서도 모순적이었다. 무엇보다도 그들은 항상 시적이고 상징적이었다. 왜냐하면 자신들이 보는 모든 것에 대해 일관성 있고 물질주의적인 설명이 가능하리라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고대 세계관에 대한 완전한 해석이 거의 전해지지 않으며, 그런 해석을 해보려는 시도조하 아마 없었으리라고 해도 놀랄 일이 아니다. 그런 생각은 모든 사람의 마음 배후에 자리 잡고 있었다. 누구나 당연하게 여기는 것에 대해서는 거론하지 않는 법이다.

3. 생명의 근원, 태양

모든 생명은 분명히 태양에 의존한다. 태양빛이 닿지 못하면 아무것도 자라고 번성할 수 없다. 달에게서도 빛이 나오지만 차갑고 창백하다. 온기와 색채를 가져다줄 수 있는 것은 태양뿐이다. 태양이 새벽이 모습을 드러내면 새들이 그토록 찬란하게 지저귀는 것도 그 때문이다. 모든 자연이 찬양에 합세한다.

4. 사랑과 혼돈을 나타내는 달

태양 광선은 흙을 바삭바삭하게 태운다. 달의 차가운 광선은 흙에서 습기를 뽑아낸다. 태곳적의 인간이 자연의 리듬에 의존하여 살았다는 점을 생각할 때, 달과 밀물썰물, 또 지금은 바다에서 생명이 처음 생겨났을 때에 대한 생물학적 기억으로 간주되는 여성의 월경주기 사시의 관계를 그들이 알아차리지 못했다면 오히려 이상할 것이다. 달은 오래전부터 물과 결부되어 있었다. 햇빛이 비나 수증기와 부딪치면 무지개가 나타난다. 무지개는 태양과 달, 인간과 고등동물의 눈동자, 꽃의 중심부처럼 완벽한 원형을 이루고 있다. 햇빛과 달의 증기가 뒤섞이면 무지개에서는 마술처럼 세상의 모든 색채가 나타난다. 또 추수기가 되면 세상은 더없이 강렬한 색조를 띠게 되며 그 붉은 색조는 추석 보름달까지도 물들인다.

5. 모든 신비 가운데 으뜸인 탄생

출생은 자연의 모든 신비 가운데서도 가장 심오하다. 1670년경 정자가 발견되기까지는 무엇이 출생의 원인인지 정확하게 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도 그런 뒤에도, 150년 전까지만 해도 대부분의 사람은 생쥐 크기 이하의 작은 생물은 먼지와 부스러기에서 저절로 생겨난다고 생각했다. 사람들은 벌은 성적 진화를 하지 않고 생식하며 왕벌에게는 침이 없다고 여겼는데, 이는 곧 군주제에 대한 교훈이 되었다.

6. 삶을 뛰어넘는 신비, 죽음

현대는 죽음에서 해방되고 싶어 하는 많은 사람들의 갈망이 최초로 나타난 시대이다.20세기 중반 미국에서 저온 보관법이라는 수상한 과학기술이 개발되어, 미래의 과학자들이 죽은 이를 되살려 낼 방법을 발견할 때까지 시신을 보관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상주의자인 20세기의 공산주의 사회는 지도자의 시신을 영구보존한다는 괴상한 관행을 만들었다. 그들이 무슨 불후의 카톨릭 성자이기나 한 것처럼 말이다. 러시아에서는 레인이, 중국에서는 마오쩌뚱이 뺨에 붉은 화장을 한 채 시신으로 누워 있다. 이는 이집트의 파라오처럼 그들이 영혼이 몸에 돌아오기를 기다려서가 아니라 마치 결코 죽지 않은 것처럼 또 결코 죽을 수 없는 존재처럼 보이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7. 신의 모습을 그린 미술

옛날 사람들은 신들이 자기를 볼 수 있고 자기들도 특별한 때와 장소에서 신들을 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오늘날 우리는 이미지를 숭배하는 사람들을 조롱하며, 그들이 생명도 없는 나무나 석고 덩어리에 희망과 두려움을 의탁한다고 비난한다. 하지만 우리의 선조들은 달이 빛을 반사하는 바위 덩어리일 뿐이라고 생각할 수 없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행복에 넘친 표정의 성모 마리아 조각을 그저 색칠된 나무토막이라고 생각할 수 없었다. 얼굴이나 인체를 조각하거나 그려 본 적이 있는 사람은 거기에 눈을 그려 넣는 순간 그것이 어떤 식으로 독자적인 존재감을 획득하게 되는지를 안다.

8. 신성한 빛을 그린 중세와 르네상스

강둑에 서서 물이 흘러가는 것을 보고 있는 것과 물속에 들어가서 계속 자신을 행해 흘러오고 흘러가는 물속에서 헤엄치는 것과는 다른 문제이다. 강둑에 있을 때 우리는 관찰자의 입장이 되며, 분리되었다는 기분은 들지만 흘러가는 시간을 아주 첨예하게 느끼게 된다. 강물 속에서는 모든 것에 속해 있다는 느낌을 갖게 된다. 우리는 변화를 인식하지만 그것을 현재 진행 중인 것으로, 또 우리가 겪고 있는 현재 경험의 생생한 긍정으로 느낀다. 헤험을 칠 때는 사물이 어디서 오고 어디로 흘러가는지 볼 수 없지만 강둑에 서면 이쪽 지평선에서 저쪽 지평선으로 가는 강의 여정을 전체적으로 볼 수 있다.

9. 빛에서도 어둠을 본 계몽주의 시대

계몽주의가 본 것은 우리가 이해하고 있던 보는 행위의 종말만이 아니라 빛 그 자체의 종말이기도 했다. 사람들은 빛이 “태양으로부터 6분 30초 만에 온다”는 사실을 뉴턴이 계산해 내기 전까지는 볼테르가 말했듯이 “빛이 공기 중에 존해한다”고 생각했다. 뉴턴은 스펙트럼의 메커니즘을 발견하여 무지개를 마음대로 만들어 낼 수 있었다. 뉴턴은 기독교도였고, 자신이 우주에서 발견해 낸 원리가 “지성과 힘을 가진 존재의 조언과 지배하에서만 작동할 수 있었다”고 확신했다. 하지만 그는 그런 존재가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칠 것인지 말해 줄 입장에 있지 않았다. 독일의 문인인 괴테는 이 문제로 씨름했다. 그가 볼 때 아름다운 무지개가 그저 물리적 현상만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했다. 거기에는 우리에게 교훈이 될 무언가가 반드시 있어야 했다.

10. 보이지 않는 세계를 향해, 현대

현대의 세계관은 20세기 초반에 형성되었다. 그때쯤이면 화가든 과학자든 자신들의 활동 영역을 자기들의 눈에 보이는 세계로 국한하지 않았다. 두 진영 모두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 있다고 믿는 진리를 모색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