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천과 삶/크리스천과 독서

인도이야기(마이클 우드, 김승욱, 웅진 지식하우스)

기독항해자 2012. 5. 26. 10:43

인도이야기(마이클 우드, 김승욱, 웅진 지식하우스), 2012년 5월에 읽음


마이클 우드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역사를 전공했다. 영국 왕립역사학회 회원이며, 현재 BBC의 역사 다큐멘터리 프로듀서이다. 고대 그리스·로마 세계와 이슬람 문명을 비롯해, 아메리카 대륙과 아프리카, 이라크, 이집트, 중국 등 전 세계의 역사와 문화를 다룬 100여 편의 저서와 다큐멘터리를 통해 영국 최고의 대중역사가라는 명성을 얻었다. 마이클 우드는 인도에서 사랑에 빠져 그곳에서 결혼하고 가족 모두 인도식 이름이 있을 만큼 인도에 대한 애정이 각별하다. 저자는 세계사의 중요한 전환점마다 어김없이 등장하는 이 위대한 문명을 가장 잘 설명할 수 있는 길잡이임을 자부하며, 지난 40년간의 지식과 경험을 이번 책에 모두 쏟아부었다. 주요 저서로 '신화 추적자', '암흑시대를 찾아서', '둠즈데이: 영국을 찾아서' 등이 있으며, 주요 다큐멘터리 작품으로 '서양의 미술', '유산: 문명의 기원을 찾아서',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발자취를 따라', '콩키스타도르', '셰익스피어를 찾아서'등이 있다.


인도의 역사를 발로 뛰면서 기록한 책이다. 저자는 역사의 발굴 현장을 답사한 경험을 중심으로 인도의 역사를 풀어 놓고 있다. 


1장 인도, 인도인의 뿌리

발루치스탄의 여명

메르가르 발굴은 인더스 강 유역에서 사람들이 정착생활을 시작한 시기가 대략 기원전 7000년경이라는 사실을 증명해 주었다. 이는 인도에서 최초의 도시가 번성하기 4000년 전이다. 메르가르는 오랜 역사를 이어가다가 기원전 4500년경에 변화를 겪었다. 이란 고원에서 새로 들어온 이민자들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하라파 발견

하라파와 모헨조다로 유적은 인도아대륙에서 역사가 시작된 시기를 밝혀 주었다. 이 두 유적 덕분에 인도에 도시가 생겨난 시기가 기원전 3000년으로 앞당겨졌다. 기자의 피라미드가 아직 지어지지도 않은 때였다. 하라파 유적이 발굴되기 전에 유럽에서는 인도 문명이 외부에서 수입된 것이라는 견해가 널리 퍼졌다. 지중해의 고전 문명과 근동의 유대-기독교 전통에 고대 이집트와 바빌론 문명이 조금 섞여서 인도 문명이 탄생했다고 본 것이다.

모헨조다로: 망자의 언덕

하라파 아래쪽으로 240킬로미터쯤 되는 곳에서 펀자브의 강들이 하나로 합쳐져서 인더스 강이 된다. 인도라는 이름은 바로 이 강에서 유래했다.

2. 생각의 힘: 부처와 아소카 왕

축의 시대

문명의 형성기는 기원전 500년을 전후한 몇 세대에 걸쳐 있다. 이 시기는 축의 시대라 불린다. 구세계의 수많은 위대한 사상가들이 바로 이 시기에 활동했기 때문이다. 인도에서는 부처와 마하비라(자이나교의 창시자), 중국에서는 공자, 노자, 장자가 활동했다.

세계를 다시 바라보다

업과 환생, 생명의 순환을 믿는 베다의 가르침은 가난한 사람들을 빈곤 속에 고착시키고 부자를 그들 위에 올려 놓았다. 그리고 이러한 구조는 그들의 아이들, 그 아이들의 아이들 세대에도 반복되었다.

깨달음으로 가는 길

인간은 원래 고통을 겪을 수밖에 없는 조건을 타고났다. 고통은 인간의 자아, 욕망, 집념, 애착, 탐욕 때문에 생긴다. 인류는 모든 불행, 불안, 공격성의 뿌리인 애착을 없애야만 고요함을 찾을 수 있다. 자유를 얻으려면 신을 숭배하지 말고 완전히 자율적이고 연민을 느낄 줄 아는 인간이 되어야 한다. 부처는 이런 진리에 이르는 길을 팔정도라고 불렀다. 이것은 정업과 진리의 길이다.

작은 곳이 적합하다

부처의 시대에 라지기르는 마가다 왕국의 수도였다. 마가다는 갠지스 평원에서 널리 퍼져 나가며 번성하던 여섯 개의 왕국 중 하나였다. 거대한 원형의 방벽을 인구도 많았던 것 같다. 지금은 먼지가 풀풀 날리는 자그마한 시골 마을이다. 부처는 45년 동안 걸어다니며 군주와 백성들에게 설법을 펼쳤다. 삶의 종말과 관련해서 부처는 환생이라는 개념을 결코 버린 적이 없는 것 같다. 무슨 말을 하든 그는 환생을 통한 삶의 순환을 당연한 일로 받아들였다. 그의 목표는 여기서 벗어나는 것이었다. 그의 이런 사상은 부라만들의 믿음에 대한 공격이었으므로 그를 죽이려는 시도도 여러번 있었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그는 강력한 지지자들을 얻었다. 말년에 그는 네팔로 갔다. 그의 여행은 쿠시나가르에서 끝났다.

“여긴 시시한 곳입니다. 정글 안에 박힌 외딴 곳이에요.” 부처의 제자들이 말했다. “어딘가 유명한 곳에 머무르면서 세상을 떠나시면 안 됩니까?”

“작은 곳이 적합하다.” 부처는 이렇게 말했다.

3. 문명의 성장: 세계와 만나다

고대의 인도양 안내서

<에리트라이 주항기> 홍해와 인도양에서 안 가본 곳이 없는 알렉산드리아의 늙은 선원인 히팔루스는 바람과 조류, 좋은 항구와, 나쁜항구, 물건을 사는 장소와 팔 문건에 관해 자세히 설명해 놓았다. .

열린 항구, 케랄라

인도와 지중해 사이의 향신료 무역은 4세기까지 계속되다가 페르시아인의 손에 넘어갔다. 페르시아인 다음에는 아랍인들이 주도권을 잡았고, 이슬람이 등장한 뒤인 7세기에는 아랍어는 쓰는 유대인들이 주도권을 잡았다.

마두라이: 남부 최초의 위대한 문명

판디아 문명은 역사적으로 위대한 발자취를 남긴 타밀나두의 세 문명 중 가장 남쪽에 위치한 것으로, 로마인들이 향신료를 구하려고 항해하던 시절에 인도 남부에서 가장 막강한 세력을 떨치고 있었다.

마두라이는 인도에서 가장 매혹적인 곳 중 하나다. 타밀나두에서 마드라스에 이어 두 번째로 중요한 도시인 이곳은 현재 상업적으로 번창하고 있으며 100만명의 주민들이 살고 있다.

사라진 고전 문명에 빛을 던지다

타밀 문학은 서유럽의 그 어떤 문학 못지않게 풍요롭다. 타밀 문학보다 오래된 것은 그리스와 라틴 문학뿐이다. 하지만 로마시대 말기와 중세 초기의 타밀 문학은 19세기에 대부분 사라졌다. 특히 자이나교도와 불교도들이 쓴 작품들 중 일부는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인쇄술이 자리를 잡고 서구식 교육이 전면에 나사게 되면서 야자수 이파리에 기록된 고대의 원고들이 유럽의 기독교식 기준에 따라 더 이상 아무 가치가 없다는 판결을 받은 탓이었다. 이 원고들은 파기되었다.

쿠샨인들의 기나긴 행군

쿠샨인들이 역사 속에 처음 등장하는 것은 중국 역사가들의 연대기를 통해서다. 중국 역사가들은 쿠샨인들을 월지라고 부르면서 이들이 만리장성의 전신인, 진흙 벽돌로 쌓은 장성 너머의 황야에서 중국 변방을 위협한다고 기록했다. 이 중국 최초의 장성은 월지 같은 종족들, 유목민, 이주민을 막기 위해 기원전 200년경 한나라가 세운 것이다.

4. 중세 인도: 황금과 철의 시대

수수께끼의 힌두 왕정

굽타 왕조의 힘을 뒷받침해준 물질적 기반은 어디에 있는가? 몇 군데 소규모 사원을 제외하면, “이것이야말로 굽타 왕조의 유산”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 궁전도, 공공건물도, 웅장한 사원도 없다. 석굴과 폐허가 된 사리탑이 있을 뿐이다. 굽타 왕조 시대의 일상생활, 국제의 행정, 사법 체계, 국내외 상업 활동에 관해서는 알려진 것이 사실상 하나도 없다. 왕들의 됨됨이도 신비에 싸여 있다. 과장된 찬미가만 몇 편 남아 있을 뿐이다.

황금시대?

굽타 왕조 시대가 황금시대였다는 주장을 내놓은 것은 묘하게도 인도인들이 아니라 영국인들이었다. 제국의 문을 연 사람은 찬드라굽타 1세였다. 찬드라굽타는 자신이 고대 베다 시대의 복원자임을 증명하기 위해 말을 희생 제물로 바치는 베다의 의식을 되살렸다. 굽타왕조는 이처럼 베다 시대의 제도를 되살리려고 의식적으로 노력했다. 갠지스 평원의 오랜 일족들을 조상을 둔 토착 왕조임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카마수트라>: 성과 삶

에로틱한 사랑에 관한 힌두 문헌 중 지금까지 남아 있는 최고의 자료인 이 책은 산스크리트어로 지어졌으며 집필연대는 300년에서 400년 사이인 듯하다. 저자인 바차야나는 과거 아소카의 수도였던 파트나에서 책을 썼을 가능성이 높다. 이 문헌은 도시적이며 국제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이 책이 겨냥하는 독자층이 나가라카, 즉 도시 남자들이기 때문이다. 이 책은 굽타 왕조 시대의 인도가 어떤 모습이었는지를 얼핏 보여주는 매혹적인 자료다.

카마수트라는 인간 행동의 세 번째 기둥이다. 다른 두 기둥은 종교적 관습과 <아라타샤스트라>에 등장하는 사회적인 법이다. 이 세 문헌은 모두 인간 즉 인도인들이 지닌 지식의 다양한 측면들을 성문화하고 체계화하려는 굽타 시대의 경향을 대표한다. 굽타 왕조 시대의 사람들에게 쾌락의 과학은 아르타(번영), 다르마(미덕)와 더불어 중요한 학문이었으며, 이 셋은 인생의 세 가지 목적이었다.

이슬람의 출현

이슬람의 도래라는 주제는 인도의 정치, 문화, 교육 분여에서 오래전부터 위대하지만 서로 대립하는 두 가지 해석을 낳았다. 그 중 하나는 독립운동의 중심 세력으로서 세속적인 인도인, 이슬람교도, 자유주의와 진보를 신봉하는 힌두교도들의 지지를 받았던 국민회의당이 퍼뜨린 세속적인 해석이다.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강경파 근본주의자에서부터 중도파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교파의 힌두 민족주의자들이 주로 지지하는 종교적인 해석이다. 세속적인 해석은 인도가 이슬람교도들에게 정복당했음을 인정하지만 침략자들이 인도에 적응해서 인도인으로 바뀌었다고 주장한다. 이 이야기 속에서 개종은 대개 대화를 통해 이루어졌으며 수백 년 동안 놀라운 교류와 상호작용이 이루어져 인도 북부에서는 대다수의 힌두교도와 이슬람교도 평화롭게 공존하는 인도-이슬람 문명이 생겨났다. 다시 말해서 다양성 속에서 통일을 이룩하는 인도 역사의 특징이 또다시 되풀이되었다는 뜻이다. 반면 힌두 민족주의자들은 이슬람의 도래가 외부의 침입과 단절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 외래 왕조들이 힌두교와는 근본적으로 어울릴 수 없는 일신교를 들고 왔으며 그들이 인도의 여러 종교들을 용납하지 않았기 때문에 수 세기에 걸친 갈등이 시작되었고, 현대에 영국이 실행한 ‘분리해서 다스린다’는 전술이 이런 갈등을 더욱 악화시켰다는 것이다.

5. 이성의 통치: 위대한 무굴제국

바부르, 무굴제국 최초의 왕

청동기 말기 이후로 카불 계곡은 리그베다의 땅에 속했다. 서력기원이 시작된 후 수백 년 동안은 불교 문화의 위대한 중심지였으며, 서기 600년부터 10세기까지는 힌두교를 믿는 샤들이 이곳을 다스렸다.

바부르는 페르가나에서 태어나 코젠트의 타지크 시에서 왕으로 선포된 그는 칭기즈칸과 티무르의 직계 후손이었다. 그는 1504년에 카불을 정복한 뒤 이곳을 발판 삼아 1525년에 인도 공격에 나섰다.

바부르가 인도 북부에 세운 제국은 궁극적으로 인도문화와 이슬람 문화를 통합한 위대한 제국이 되었으며 비록 짧은 기간이나마 모든 종교를 포용했다. 이 제국을 다스린 이슬람 황제들은 불상을 폭격으로 부수는 대신 불교도들과 대화를 나누었으며 자기 침실에 성모 마리아의 그림을 걸고, 힌두교도들을 우상숭배자로 배척하는 대신 힌두교 경전을 번역했다.

6 자유와 해방

인도라는 개념

인도는 역사상 어느 시기에도 하나의 통일된 국가로 존재한 적이 없다. 비록 아소카는 저 멀리 남쪽의 크리슈나 강짜기 자신의 영토가 뻗어 있다고 주장했고, 쿠샨 왕조, 굽타 왕조, 무굴 왕조 모두 인도 북부에서 아프카니스탄과 벵골 사이의 넓은 지역을 지배했지만 말이다. 인도를 정치적인 통일체로 보는 개념을 처음으로 생각해 낸 것은 바로 영국인들이다. 윈스터 처칠은 “인도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유명한 말을 했다. 하지만 수백 년 동안 인도를 지켜본 많은 사람들의 생각은 달랐다. 그들에게 인도는 비록 부족, 언어, 종교가 다양하지만 통일된 문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