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사람의 세계여행(규장각한국학연구원, 글항아리), 2012년 5월에 읽음
1장 자신감과 현실감으로 빚어낸 15세기의 세계지도: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와 해동제국기의 세계 인식(정호훈)
누워서 세계지도로 세상을 유람하다
15세기 조선 사람들의 세계 경험을 살펴볼 수 있는 자료는 1402년(태종2년)에 만들어진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이다. 이 지도는 조선에서 만들어진 현존 최고의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현재 국내에 남아 있는 것은 없으며, 류코쿠 대학 등 일본 내 여러 곳에 소장되어 있다. 이 지도가 만들어진 과정, 그리고 이 지도가 담고 있는 내용은 류코쿠 대학 소장본 지도에 적혀 있는 권근의 발문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의정부의 좌정승과 우정승 김사형, 이무 등이 중국에서 만들어진 ‘성교광피도’와 ‘혼일강리도’를 저본으로 하고, 여기에 조선과 일본의 지도를 덧붙여 만들었다고 한다. 조선의 강역 부분은 조선에서 새로 그린 것이고, 일본은 일본에서 구해온 지도를 활용하여 정리했다고 한다.
‘성교광피도’와 ‘혼일강리도’는 모두 13세기 원대에 만들어진 세계지도다. ‘성교광피도’는 천자의 교화와 은혜가 널리 퍼지는 지역을 그린 지도라는 의미다. 원나라 말기에 제작되었다. ‘혼일강리도’는 천자가 다스리는 하나로 된 세상의 지도라는 뜻을 담고 있다. 1360년 작품이다. 두 지도 모두 중국을 정복하는 한편, 유럽 지역으로 그 문화와 세력을 뻗치며 세계 제국으로 성장하기를 꿈꾸었던 원나라의 야망과 문화 역량을 담고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이들 지도에는 아프리카, 유럽, 아시아의 강역이 그려져 있는데, ‘혼일강리도’의 경우는 역사적으로 존속하고 소멸했던 여러 국가의 수도에 정보를 담았다.
자존과 자대의 조선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에 그려진 세계는 사실적이면서도 동시에 비사실적이다. 가령 아프리카와 유럽은 비교적 본래의 땅 모양과 유사하다. 반면 인도와 인도차이나의 형상은 실제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게 그려졌다. 조선의 지형은 비교적 정확하여 실제 모습과 흡사한 데 반해, 그 비율에서만큼은 중국이나 일본에 비해 지나치게 크게 그려졌다. 한현 이 지역의 지도는 중국이나 일본 지역과는 달리 산과 물길의 흐름을 뚜렷하게 표시하고 있다. 조선의 지도를 덧붙여 만든 흔적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또한 원의 지도제작 방식과 조선의 그것이 달랐다는 사실도 여전히 보여준다. 일본은 크기도 부정확할 뿐더라 본래의 ㅎ여상을 갖추지 않고 흐트러져 있다.
해동제국기 조선과 동아시아를 어떻게 그렸나
15세기 조선 사람의 세계에 대한 생각을 잘 알려주는 또 다른 자료는 1471년(성종2) 신숙주가 왕명을 받아 작성한 ‘해동제국기’이다. 1443년에 사신으로 일본에 다녀온 신숙주의 개인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이 시기 조선과 일본, 유구 사이를 오갔던 사람들이 수집한 내용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다. 해동제국이란 문자 그대로 동쪽 바다에 있는 여러 나라를 뜻하지만, 이 책에서는 일본·유구국을 주로 다루었다.
2장 바람 따라 물결 따라 표류한 조선 선비: 최부의 표해록으로 본 중국 강남 견문(조계영)
뜻하지 않은 표류, 무엇을 어찌해야 하나
500여 년 전인 1487년(성종 18년) 11월, 전라도 나주 출신의 조선 선비 최부(1454~1504)는 제주삼읍추쇄경차관으로 파견되었다. 최부는 11월 11일 아침, 해남현 관두량에 배를 타 12일 저녁에 제주도 조천관에 도착했다. 최부가 제주도로 출장온지 두 달 반지 지난 1488년 1월 30일에 고향 나주에서 상복을 가지고 온 종 막쇠에게서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최부는 윤1월 3일에 장례를 치르고자 고향 나주를 향해 제주도 별도포의 조천관에서 배를 타고 출발했다.
수차제작법을 알아내다
수차란 무엇인가: 낮은 곳에 흐르고 있는 하천의 물을 높은 지대의 논밭으로 끌어올리는 관개용 기구이다. 중국에서는 이미 고대부터 수차를 개발해 사용해왔고 송대에 이르러 널리 보급되었다. 중국의 강남이 화북지역을 능가하며 농업중심지로 부상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수차와 풍부한 수자원을 활용했기 때문이다. 중국의 수차 가운데 가장 널리 쓰였던 것은 번차다. 번차는 두판으로 불리는 직사각형 모양의 네모 널빤지를 체인으로 연결해 홈통 속에서 끌어올리는데, 거기에 물이 끌어올려진다. 번차는 사람들이 발로 밟아 돌리기 때문에 답차라고도 부른다. 최부는 소흥부를 지날 때 호수 언덕에서 발로 밟아 돌리는 수차를 눈여겨봐두었다. 조선은 논이 많은데 가뭄이 자주 드니 수차를 이용하면 힘을 덜 들이면서 물을 많이 퍼올릴 수 있을 것 같았다.
3장 착잡함과 우월감의 교차, 열두 번의 사행길: 조선통신사의 일본 여행(송지원)
열두 차례 파견된 조선통신사의 길
조선통신사는 일본의 요청에 의해 조선왕실이 일본에 파견한 외교사절이다. ‘회답 겸 쇄환사’라는 이름으로 사신을 파견한 세 차례를 포함 해 통신사라를 이름을 회복한 이후 1811년까지 아홉 차례, 총 열두 차례의 통신사를 일본에 파견하게 되었다.
숙소를 새로 짓고 좋아하는 음식 준비까지
조선에서 통신사 파견이 결정되면 일본은 조선통신사를 영접하기 위한 준비에 들어갔다. 에도 막부는 영접을 위한 주요 관료들을 임명하고 통신사가 지나가는 지역마다 들어갈 경비를 각 번에 할당시켜 조달하도록 했다. 또 통행하는 연로를 정비하고 이들이 묵을 만한 장소를 물색하거나 장소가 마땅치 않을 경우는 새로운 숙소를 지었다.
4장 예로써 섬긴 나라? 여자로 섬긴 나라!: 공녀로 본 여성의 해외 경험(이숙인)
해외로 팔려간 여성들
공녀란 중세기 한국에서 중국으로 진상된 여자를 말하는 데, 조공무역의 일환으로 공물로 취급되었던 사람들이다. 고구려와 신라에서 중국의 북위에 여자를 보냈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공녀의 역사는 멀리 5세기 초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런데 공녀가 본격적으로 요구된 것은 원의 간섭이 시작된 고려후기부터로, 조선전기에는 명나라에, 조선후기에는 청나라에 공녀를 바쳤다.
공녀 사냥에 온 나라 벌집되다
공녀를 구하는 사신이 압록강을 건너면 나라에서는 먼저 그녀들을 선발할 임시기구를 설치하고, 각 도에 그 할당량을 배정했다. 고려 때의 기구로는 결혼도감과 과부처녀추고별감이 있었고, 조선시댕는 진헌색과 혼례도감낭청이 있었다. 중국으로 보낼 공녀를 뽑기 위해 전국에 혼인금지령을 내리고 공녀 선발을 담당할 관직을 개설했는데, 이를 경차내관이라 하였다.
5장 북경 여행, 조선 실학의 숨은 추동력: 홍대용의 중국 기행과 서양 과학의 전래(전용훈)
석실서원에서 싹튼 천문학에 대한 관심
홍대용은 열두 살 때부터 남양주의 석실서원에서 스승 김원행(1702~1772)의 지도를 받았다. 석실서원에서 10여 년을 수학한 후에는 서울에 거주하면서 중앙의 신진기예들과도 교유했다. 이십대 중반에서는 연암 박지원(1737~1805)과 깊이 사귀었으며, 황윤석(1729~1791)과도 교분을 가졌다. 특히 석실서원에서 학문을 배운 것을 계기로 홍대용은 평생 천문학과 수학 방면에 관심을 갖고 깊이 탐구해 들어갔다. 석실서원은 경학은 물론 우주 변화의 원리를 주역의 괘나 수학적 원리에 연결시켜 논의하는 상수학의 전통이 강한 곳이었다.
학문을 오로지해 북경 갈 기회를 얻다
1765년 홍대용은 작은 아버지 홍억(1722~1809)의 자제군관 자격으로 북경을 여행했다. 신년하례에 맞추어 동짓달에 파견되는 동지사행에는 보통 300~500명의 대인원이 동원되었다. 사절단은 정사가 통솔하고 그 아래에 부사와 서장관을 두었다. 자제군관은 정사, 부사, 서장관이 각각 몇 명씩 데리고 갈 수 있었다. 이들은 특별히 맡은 임무가 없었기에 자유롭게 여행하며 세상에 대한 지식을 넓힐 수 있었는데, 그런 까닭에 사절단에 임명된 사람은 자기 가문에서 촉망받는 젊은이들을 자제관으로 데려가는 일이 많았다. 그가 작은 아버지의 자제군관이 되어 북경을 갈 수 있었던 것은 그의 학문적 재능에 대한 집안의 기대가 더해진 결과일 것이다.
홍대용은 북경 여행 후에 각각 한문본과 한글본의 두 가지 여행기를 남겼다. ‘담헌연기’와 ‘을병연행록’이 그것이다. 두 책은 서술 형식은 물론이고 내용도 많이 다르다. 한문본 ‘담헌연기’가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견물을 주고 기록한 사대부 학자들을 위한 여행기라면, ‘을병연행록’은 날짜별 일기 형식으로 개인적인 신변 기록이 많아 여성과 서민들을 위한 여행기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에는 ‘담헌연기’에는 없는 여행 일정이 꼼꼼히 기록되어 있어서 북경까지 오가는 여정과 경험한 일들에 대해서 샅샅이 알 수 있다. 반면 ‘담헌연기’는 북경에 도착해서부터 겪은 일에 대해서만 기록하고 있다. 여기에는 중국인 선비들과 나눈 대화 내뇽과 주고받은 편지가 실려 있어 홍대용의 사상을 탐구하는 데에 좋은 자료가 된다.
삼대를 이은 중국 선비와의 우정
홍대용이 중국인들과 교유한 것을 기록한 ‘간정동회우록’은 조선의 젊은 학자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이 책은 당시로서는 드물게 조선의 학자가 외국 학자와 학술적 논의를 하고 국경을 초월하여 우정을 나눈 예를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박지원은 특히 이 책에 감동하여 서문을 썼다.
실사구시의 학문을 여행길에서 얻다
홍대용의 ‘주해수용’은 실용 산술에서부터 방정식, 서양의 삼각함수, 천문기구 제작법 등을 폭넓게 다룬 수학책이다. 여기 실린 내용을 분석해보면 홍대용이 ‘수리정온’ 같은 서양 수학을 담은 전문적인 수학서를 깊이 이해하고 저술에 활용했음을 알 수 있다. 홍대용의 다른 저술인 ‘의산문답’의 의산은 북경으로 가는 길에 지나쳤던 의무려산의 다른 이름이다. ‘의산문답’에서는 허자가 실옹을 만나 지구가 둥글다는 파천황의 사실을 알게 되고, 허례허식을 버리고 실사구시의 정신으로 거듭나는 이야기가 나온다. ‘의산문답’에서 홍대용은 실옹의 입을 빌려 기일원론, 지전설, 무한우주설, 탈중화주의 같은 심오하고 획기적인 주장을 피력하고 있다.
6장 물건 팔러 떠났다. 풍속까지 설렵한 고려 상인의 중국 여행기: 외국어 학습서 ‘노걸대’로 떠나는 여행(이영경)
외국어 교재가 담아낸 생생한 중국 체험기
‘노걸대’는 조선시대에 가장 널리 사용되었던 한어학습서였다. ‘중국인씨’ 또는 ‘중국통’이란 뜻의 ‘노걸대’는 중국으로 말, 모시, 인삼 등을 팔러 간 고려 상인이 여행과 교역을 하면서 겪는 여러 기지 일들을 회화체로 꾸민 책이다. 이 책은 중국의 풍물과 생활문화에 관한 이야기를 역시 회화체로 꾸민 ‘박통사’와 함께 고려말기 당시의 한어를 학습할 목적으로 편찬되었는데, 이들은 조선시대 들어 사역원의 한어 교재로 채택되면서 여러 차례 개수되고 한글로도 번역되어 널리 쓰였다. ‘노걸대’는 언어적 지식뿐만 아니라 여행자나 상인, 역관 등 여러 목적으로 중국어를 학습하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상식도 제공했다. 예컨대 중국 여관에 드는 방법, 중국에서의 상거래, 우리나라 상품에 대한 중국인의 기호, 당시의 물가 등데 대한 정보를 이 책을 통해 얻을 수 있었다.
고려 상인, 중국 상인을 만나 북경으로 동행하다
‘노걸대’는 고려 상인이 도중에 만난 중국 상인과 함께 중국을 두루 돌아다니며 물건을 팔고 다시 고려에 갖다 팔 물건을 산 후 귀국길에 오르기까지의 긴 여정을 106개의 상황으로 설정해, 그에 맞는 대화를 꾸미며 내용을 전개한 책이다.
‘노걸대’는 한 권의 중국어 학습 교재일 뿐이지만 경험을 토대로 한 정교한 스토리와 생생한 장면 묘사로 그것을 읽는 내내 실제로 주인공과 함께 14세기의 중국 대륙을 여행하는 듯한 느낌, 바로 옆에서 그들의 대화와 행동을 직접 보고 드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되는 독특한 책이다. 이런 점에서 ‘노걸대’는 당시의 조선 사람들에게 간접적이지만 너무나 사실적인 색다른 중국 여행 경험을 제공하는 존재였음에 틀림없다. 그리고 현대의 우리에게도 당시 중국의 사회상, 생활문화, 경제 등을 연구할 수 있는 역사적 자료로 또한 어학 교재라는 성격에 걸맞게 그 시대 중국어와 국어의 구어적 모습을 살필 수 있는 언어 자료로 귀중한 문헌이 되고 있다.
7장 캐나다와 뉴욕까지 진출한 조선의 러시아 사절단: 1896년 민영환 일행의 세계여행(황재문)
민영환의 아라사 사절단, 길에 오르다
조선에서는 궁내부 특진관 민영환(1861~1905)을 특명전권공사로 임명하여 사절을 삼았다. 민겸호의 아들로 태어나 민태호에게 입양된 민영환은 바로 전해 명성황후를 잃은 고종이 가장 신임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 그는 이듬해이는 1897년에는 6개국 특명전권공사로 빅토리아 여왕 즉위 60주면 축하식에도 참석하게 된다. 사절단에는 당시 학부협한이었던 윤치호가 수원으로 선발되었고, 김득련과 김도일이 참서관으로 참가하였다. 또 러시아 공사관의 서기관 스테인과 민영환의 종인인 손희영이 일행에 합류했다.
8장 고비사막을 뚫고 모스크바를 향해 떠난 독립의 열정: 일제강점기 목술 걸고 떠난 여운형의 여행길(윤대원)
여운형의 또 다른 모습 엿보기
‘개론주의’ ‘반 인텔리’ ‘스포츠맨’ ‘감초사장’은 독립운동가 여운형(1886~1947)과는 영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말이다. 그러나 이 말은 일제강점기에 항상 그를 따라다니던 별명이었다. 여운형이 박학다식하기 하지만 체계적인 자기 이론을 갖추지 못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 ‘개론주의’ ‘반 인텔리’이다. 여운형은 누가 두꺼운 책을 읽고 있으면 “그거 언제 다 읽어? 서론하고 결론만 읽고 말아야지”라고 말했다. 어려서부터 운동을 좋아한 그는 1912년 YMCA야구단을 이끌고 일본 원정을 가지고 했고 상하이 망명시절인 1928년에는 후단 대학의 체육 코치가 되어 축구부를 이끌고 싱가포르, 마닐라로 원정경기를 떠나기도 했다. 1993년에 발간된 ‘현대철봉운동법’의 모델이기도 했던 여운형을 사람들은 ‘스포츠맨’이라 불렀다. ‘감초사장’은 그가 조선중앙일보 사장 시절에 결혼식이나 무슨 대회니 연설회니 하여 사람이 모이는 곳에서는 항상 그의 얼굴을 볼 수 있어 붙여진 별명이다.
여운형은 엄혹한 일제강점기인 1936년 다섯 차례에 걸쳐 월간 잡지 ‘중앙’에 자신이 1921년 11월에서 이듬해 2월 사이 모스크바로 간 여행기를 남겼다. 이 여행기에는 여운형 자신만 등장하지만 실제로는 상하이 임시정부 초대 외무총장 김규식과 라용균이 함께 했다. 여행기를 발표할 때는 일제 치하였던 까닭에 동지를 보호하기 위해 자신만 밝힌 것이다.
일제의 감시망을 따돌리고
1921년 10월 여운형, 김규식, 라용균 등은 상하이를 출발해 러시아를 향한 여정의 첫발을 내딛었다. 텐진에 온 여운형 일행은 11월초 펑텐행 기차 삼등실에 몸을 실었다. 그런데 텐진을 출발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역시 중국인 복장을 한 한국인이 일행을 예의주시하며 한국말로 수작을 걸어왔다. 그는 일제가 풀어놓은 밀정이었다. 눈치를 챈 일행은 곧바로 탕산역에서 내려 텐진으로 돌아왔다. 여운형 등은 텐진에서 사흘을 보낸 뒤 다시 펑텐행 기차에 올랐다. 이것도 헛수고였다. 이후에도 밀정에 텐진역에서 감시하고 있었던 터라 여운형 등은 기차여행을 포기했다. 대신 이들은 베이징에서 장자커우고 가서 그곳에서 고비사막을 건너 고륜(지금의 울란바토르)를 거쳐 이르쿠츠크로 가는 길을 택했다. 이 길이라면 일제의 감시망을 벗어날 수 있지만 험난한 고비사막을 건너야 하고 중간에 마적의 공격을 받을 위험을 감수해야 했다.
몽골의 ‘한인 슈바이처’, 이태준의 흔적을 찾아서
‘몽골의 한국인 슈바이처’로 불린 까우리 의사는 1914년 김규식을 따라 이곳으로 왔다가 동의의국을 개업했던 이태준이었다. 그는 김규식의 사촌 여동생 김은식과 결혼도 하여 김규식과는 항일 동지이자 사촌처남매부지간이었다. 당시 몽골은 불완전한 위생 시설과 라마교의 영향으로 주민의 70~80%가 성병 보균자였고 갖가기 질병이 이들 사이에 만연해 있었다. 이태준은 몽골 민중을 비참함으로 내몰았던 성병과 질병을 물리치는 데 일생을 바쳤다. 그의 의술과 정성에 감복한 몽골 국왕은 그를 어의, 즉 주치의로 삼았고 1919년에는 제3등 제1급의 높은 훈장인 ‘에르데나인 오치르’(귀중한 금강석이란 뜻)를 내렸다. 이런 의술활동 외에도 그는 의열단에 가입하여 항일활동에 참여했다. 그러나 1921년 2월 악명 높은 올겐 부대가 고륜을 점령하면서 이태준은 처형되고 말았다. 2000년 몽골 정부는 울탄바토르에 ‘이태준 기념공원’을 세워 그른 기념하고 있다.
9장 조선이 만든 첫 신문, 그 속에 비친 첨단의 세계: 박문국과 한성순보 그리고 경제제도(조영준)
문무백관의 정보소통수단, 관보
한성순보는 한국 최초의 근대 신문으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그 성격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어왔다. 한성순보는 국내관보를 수록했을 뿐만 아니라 주요 독자층이 사실상 일반 대종이 아닌 경외의 행정 계통에 속한 관리들이었다는 점에서 관보에 해당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서구의 창구역할을 한 한성순보와 박문국
한성순보는 1883년 10월에 창간되어 1884년 12월에 갑신정변의 실패로 발행이 중단되었고 1886년 1월에 한성주보로 다시 창간되어 1888년 7월에 폐간되기에 이른다. 한성순보는 국가기관의 하나인 박문국에서 간행되었기 때문에 박문국순보라는 별칭도 갖고 있었다. 박문국은 전환국, 기기국, 우정국, 직조국 등의 여러 정부기관과 더불어 1880년대에 설립된 일종의 근대적 공기업 또는 국영기업에 해당된다. 이러한 기관들이 이 시기에 집중적으로 신설된 데에는 개항과 그에 따른 불평등조약이라는 시대적 배경이 있었다.
1880년대 조선인, 지구를 넘어 우주를 인식하다
한성순보의 체제는 내국기사, 각국근사, 논설로 삼분될 수 있는데, 내국기사는 정치에 해당하는 국내관보와 사회면 또는 경제면에 해당하는 국내사보로 구성되었고 각국근사는 국제면에 해당되며 논설에는 사설이나 칼럼이 실렸다. 그 중에서도 각국근사의 기사 비중이 압도적으로 높았다.
10장 조선의 바깥에서 조선 여성을 바라보다: 나혜석의 구미 만유(김수진)
최초로 구미 여행에 오른 조선 여성이 되다
나혜석(1896~1948)이 구미 여행에 오른 것은 서른 두 살의 나이, 세 아이를 기르던 때였다. 만주 안동현 부영사로 일한 포상으로 구미 시찰을 가게 된 남편 김우영을 따라가는 것이었다. 나혜석 부부가 여행을 떠난다고 하자, 부산에서 만주 봉천까지 수백명의 지인과 친지들이 배웅을 나왔고 경성에서 출발하기 전날에는 신문에 “나혜석 여사 세계만유”라는 제목의 기사도 실렸다. 이로써 나혜석은 서울 최초의 유화 개인전을 연, 조선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라는 칭호에 덧붙여 조선 최초로 구미 여행에 오른 조선 여성이 되어 다시 한 번 언론계를 떠들썩하게 했다.
나혜석 부부는 1년 8개월 동안 열다섯 나라를 돌아다녔다. 1927년 6월 22일 경성역을 출발해 한 달 동안 대륙횡단열차를 타고 가며 러시아의 주요 도시를 둘러보고 1927년 7월 19일 파리에 도착한 뒤 한 달여 동안에는 스위스를 비롯한 북유럽을 구경한다. 이후 나혜석은 파리에 머물며 그림 공부를 하고 남편은 법학 공부를 위해 베를린에서 3개월 동안 체류한다. 1928년 3월부터 여행은 다시 시작되는데, 이태리와 남유럽을 둘러보고 7월에는 한 달 반 정도를 영국 런던에 머문다. 1년여 동안의 유럽 여행을 마치고 미국 뉴욕에 도착한 것은 1928년 9월 27일이었다. 영미 마제스틱호를 타고 대서양을 건너 뉴욕에 도착해서는 미국에 와 있는 동포들과 함께 크리스마스 시즌을 보냈다. 그러고는 1929년 1월 1일부터 두 달여에 걸쳐 미국 횡단 여행을 하게 된다. 이어 하와이 호놀룰루를 들러 1929년 2월 23일 일본의 태양환을 타고 태평양을 건너 요코하마와 동경을 거쳐 3월 12일 부산에 당도하게 된다.
11장 보편 세계를 꿈꾼 지식인이 본 세계의 대격변: 연희전문 교수 이순탁의 세계일주(조형근)
보편적 시선으로 자신의 삶터를 바라보다
무릇 여행은 바깥을 경험함으로써 안을 돌아보는 계기가 된다. 안과 밖을 나누는 경계가 가장 멀리 확장될 때 그 여행은 세계일주가 된다. 따라서 세계를 일주한다는 것은 보편적인 세계라는 시점을 확보하는 행위이며, 이 보편적 시점을 통해서 자신의 삶터를 새로이 보는 행위라 할 것이다.
좌파적 지향과 우파적 행동으로 문제적 인물이 되다
휴정 이순탁은 1897년 11월 7일 전남 해남에서 몰락한 양반 집안의 다섯째 아들로 태어났다. 일곱 살 되던 1904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가세는 더욱 기울어 소작농가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는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공립목포간이상업학교에 진학했지만 학비 문제로 한 학기 만에 중퇴하고 고향의 면서기와 군청 고원 노릇으로 생계를 이어갔다. 그러던 중 1914년에 일본 도쿄로 유학을 떠나 도쿄세이조중학, 고베고등상업학교 예과, 교토제국대학 경제학부 선과를 거쳐 본과에 편입한 후 1922년에 졸업했다.
유학 시절 이순탁의 사고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인물은 교토제국대학 경제학부의 스승 가와카미 하지메 교수였다. 가와카미는 일본 최고의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로 명성을 떨치고 있었다. 이순탁이 일제강점기 내내 조선에서 좌파경제학자로 자리잡게 된 데는 가와카미의 영향이 절대적이었다.
이순탁이 문제적 인물인 것은 학계에서의 좌파적 지향과는 달리 사회활동에서는 오히려 민족주의 우파로 행동했다는 점이다. 그는 민우회, 조선물산장려회, 조선사정연구회, 신간회 등 민족주의 노선과 민족협동론 노선의 단체에서 활동했다. 좌파적 사상과 우파적 실천이라는 그의 독특한 행로는 해방 이후 중간파적 입장에서 좌우합작을 주도하는 데까지 이어졌다.
파시즘, 대공화 그리고 세계대전의 시대
이순탁이 세계일주를 하던 1933~1934년은 대공황과 파시즘이라는 세계사적 사태가 한창 진행되던 무렵이었다. 1929년 말 미국에서 촉발한 세계대공황은 이 시기까지 여전히 진행 중었다. 이탈리아와 독일에는 파쇼 정권이 들어섰다. 바야흐르 파시즘은 세계적 조류로 자리잡고 있었다. 이순탁이 세계일주를 하면서 반드시 살펴보고자 한 것 중 하나가 대공황에 대처하는 세계열강의 자세였다. 독일과 이탈리아가 파시스트적 통제경제로 이에 대처하고 있었다면 미국과 프랑스는 자유시장 체제를 유지하면서도 정부의 적극적인 경제 개입으로 대공황을 극복하고 있었다.
12장 만주의 광활한 대지에서 피어난 문학적 상상력: 식민지 시기 조선 문인들의 만주 기행(서재길)
만주라는 명칭에 얽힌 역사
만주라는 말은 중국에서 이른바 ‘동북3성’으로 일컬어지는 요녕성, 길림성, 흑룡강성을 가리킬 때 주로 쓰이지만, 원래는 그 지역을 기반으로 한 민족을 일컫는 명칭이었다. 후금을 세운 누르하치가 자신을 ‘칸’으로 칭함과 동시에 나라의 이름을 만주로 바꾸면서 민족명도 여진에서 만주로 바뀌는데, 이때 처음으로 만주가 역사 속에 등장했다. 이처럼 민족의 이름이 청 제국의 역사 속에서 차음 요서·요동 지방을 가리키는 지역명을 바뀌고, 오늘날에 이르러 중국의 동북 지역을 일컫게 되었다.
만주국 이후 기행문 나타난 만주 붐
만주국 건국 이후 특히 1930년대 후반으로 접어들면 가히 ‘만주 붐’이라 할 정도로 잡지나 신문에 만주 관련 기사가 폭발적으로 증거하고 문인들의 만주 관련 기행문이나 수필도 흘러넘쳤다. 이러한 만주 붐에는 일본의 국책에의 동조, 전쟁 특수에 따른 경제적 관심 등의 복합적인 요인이 작용하고 있었다. 이 시기의 만주 관련 글들은 대체로 당시의 국책이었던 ‘동아신질서’ 구상을 수용하면서 만주국을 이상적인 공간으로 미화하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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