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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승부사들(서신혜지음, 역사의 아침)

기독항해자 2012. 4. 20. 13:53

조선의 승부사들(서신혜지음, 역사의 아침), 2012년 4월에 읽음


1. 관비 출신 혼혈아로 종3품에 오른 과학기술자 장영실

인생 승리의 대표주자라고 할 수 있는 장영실은 중국인 아버지와 관비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물건을 만드는 솜씨가 뛰어나 태종 때 궁궐의 공인工人이 되었고, 세종 때 천문기구인 혼천의를 만들어 노비에서 면천된 이후 측우기, 해시계, 물시계, 간의대, 규표 등 각종 과학기구를 만들어 그 공으로 승차(승진)를 거듭했다. 그 외에도 세종의 명으로 사사로운 온갖 일들까지 했는데 금은제련기술을 익히거나 연철을 채굴했고 엽전(우리나라 화폐의 시작)을 주조하기도 했다. 그를 시기하는 양반도 많았으나 그의 능력을 알아본 세종의 배려로 조선 초기 과학기술 발전을 주도적으로 이끌었다. 그의 이름은 600여 년이 지난 지금도 부산장영실과학고등학교, IR52장영실상(산업기술상), 장영실전형(성균관대과학인재전형), (주)장영실, 장영실서점 등으로 빛나고 있다.

2. 천민으로 태어나 한성부판윤(현 서울시장)이 된 상례喪禮전문가 유희경

유희경은 조선이라는 봉건국가의 가장 밑바닥 신분으로 태어나 ㅅ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나이에 아버지를 잃고 자리보전하고 누운 어머니를 뒷바라지해야 하는 절망적인 상황에 처해 었다. 아버지를 잃고 시묘살이를 하던 유희경은 당시 예학禮學에 조예가 깊은 남언경의 눈에 띄어 그에게서 예학을 배우게 되고 곧 상례에 정통한 전문가가 된다. 조선은 관혼상제, 특히 '상례'를 중시하여 상례전문가인 유희경은 어디서든 대우를 받았으며, 당시 예학파 학자들조차 상례에 관한 내용을 그에게 물었다. 또한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키고 각종 공로를 세워 다섯 차례나 벼슬을 받았으며, 한결같이 겸손한 자세로 사람을 대해 천민 출신임에도 양반들에게 존경받았다. 국가 경제가 파탄에 빠질 때도, 난신에 의해 정치가 어려웠을 때도 전혀 흔들리지 않고 자신의 길을 걸으면서 한 단계 한 단계 올라서 결국 한성부판윤의 자리에까지 임명된 사람이다.

3. 외교 난제를 해결하고 공신록에 오른 역관 홍순언

역관은 어느 시대나 있었을 테지만 정사로는 고려 충렬왕 2년조에 통문관을 설치하여 한어를 학습시켰다는 것이 가장 오래된 기록이다. 과거시험 제도에서 문과와 무과 외에 역과를 따로 두어 역관을 선출했는데, 주로 중인 계층이 여기에 응시했다. 때문에 외교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역관이 반드시 필요했는데도 양반들은 그들을 무시하기 일쑤였다.

조선 역사에서 가장 많이 회자되는 역관 홍순언은 중국 창가의 여인을 구해준 것이 인연이 되어 조선의 국가적 난제인 '종계변무'를 해결하고 그 공으로 2등공신이 된다. 또한 임진왜란 당시 노련한 통역과 외교술로 나라를 위기에서 구하는 데 일조하고, 조선과 명나라의 관계도 유연하게 풀어나간다. 홍순언은 조선 최고의 중국통이자 뛰어난 인품과 일처리 능력으로 조선뿐만 아니라 중국인에게도 높이 평가받았다.

홍순언은 처음에는 신분이 낮아 과거를 통해 청운의 꿈을 이룰 수 없는 처지의 사람이었다. 하지만 허국은 홍순언을 보내면서 끝내는 뭇닭 가운데 한 마리 학처럼 재주와 인품을 드러내는 뛰어난 인물이 될 것이라는 축복의 말을 남겼다. 그의 말처럼 홍순언은 역시 그런 삶을 산 그런 인물이었다.

4. 서출로 태어나 어의가 된 의원 허준

서녀인 어머니의 신분에 따라 천민이 된 허준은 그의 실력을 알아본 유희춘의 천거로 처음 내의원에 출사한 뒤 여러 병을 고치고 이전의 의학서를 교정, 개편하면서 자신의 위치를 높여나갔다. 왕자인 광해군의 두창을 치료한 공으로 당상관에 제수된 뒤 양반들의 시기와 질투로 시련을 겪기도 했으나, 묵묵히 자신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고 틈틈이 의학연구에 매진했으며 귀양지에서도 의서 편찬에 몰두해 15년 만에 우리나라를 넘어 동아시아를 평정할 만한 최고의 한의학서 『동의보감』(전25권)을 펴냈다. 허준은 서출로 태어나 그 신분을 뛰어넘어 당상관이 된 불세출의 인물이며, 환자 치료를 앞두고는 자기가 가진 것이나 지위를 생각하지 않았으며, 환경에 휘둘리지 않는 변함없는 충실함으로 우리나라를 넘어 동아시아를 평정할 만한 역작를 지어냈다. 

5. 비파 하나로 만인에게 인정받은 비파연주가 송경운

송경은 한양에서 나고 자랐다. 본래 절도사 이 아무개의 하인이었다. 양반집 하인으로 자란 송경운은 9세 때 처음 비파를 배웠는데 그 솜씨가 널리 알려져 어떤 일을 잘했을 때 "송경운의 비파만 해?" 할 정도로 조선팔도에 그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그 결과 하인명부에서 이름을 빼내어 평민이 되고 정6품 무관직 군공사과軍功司果가 된다. 정묘호란 때 전주(완산주)에 정착한 그는 20년을 한결같이 남녀노소, 신분고하를 막론하고 청중이 만족할 때까지 정성껏 비파연주를 들려주어 만인에게 칭송받았으며, 인품 또한 훌륭하여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 완산주 전체 사람이 그의 죽음을 슬퍼했다.

6. 삼정승 육판서가 두루 찾은 박물학자 황윤석

몰락한 양반가에서 태어난 황윤석은 책 한 권을 사기 위해 소 한 마리를 선뜻 내다 파는 분위기의 집안에서 자란 덕에 어려서부터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갖고 공부했다. 29세 때 진사시에 합격한 후 38세 때 첫 벼슬을 한 그는 21년 동안 14개 관직을 거쳤는데, 그는 이 기간 동안 온갖 것을 학문의 대상으로 보고 공부하여 기록으로 남겼다. 그 결과 나라의 고위 학자들조차 모르는 것이 있을 때는 황윤석을 찾게 되었고 임금에게도 인정받았다. 그는 매 순간 주어진 직책에 충실하며 늘 책을 가까이하고 기록에 열중해 실명할 위기까지 겪었으나 '하늘'이나 '땅'과 동일한 '인간'으로서 세상의 모든 이치와 물질들을 알기 위해 평생을 바쳤다.

왕윤석이 오늘날 우리에게 남긴 가장 위대한 유산은 어마어마한 분량의 일기다. 그는 54년간 57권 분량의 일기를 써서 『이재난고』를 남겼는데, 이것은 우리나라 일기 가운데 기록 기간이나 분량 면에서 최고이며, 그 내용 또한 그야말로 없는 것이 없을 정도여서 오늘날 18세기 조선을 연구하는 귀중한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7. 조선의 천문역상天文曆象 역사를 새로 쓴 천문학자 김영

농사꾼의 아들로 태어나 의지할 곳 없이 떠돌다 한양에 온 김영은 책 읽고 생각하는 것을 좋아했다. 어느 날 『기하원본』을 읽다 그 세계에 빠져 그 책만 본 끝에 뜻을 깨우쳐 역상학에 정통하게 되었다. 그러다 41세 때, 현륭원(사도세자의 무덤) 이장 당시 천문상의 문제를 해결한 공으로 과거 시험을 치르지 않고 관상감의 역관으로 채용된다. 김영은 당시 조선이 중국 중심의 천문학을 그대로 따르던 것에서 벗어나 우리만의 독특하고도 정확한 천문지리서를 편찬하는 데 온 힘을 기울였다. 당시의 천문학 발전 정도를 고려할 때 김영의 학문 수준은 매우 혁신적이었으며, 역상법에 정통해 나라에서 최고라는 칭송을 받았다.

김영을 두고 천문학자라는 이름을 붙였지만 음악 분야나 한국도교사에서도 그의 이름이 드러난다. 원악, 성률총서는 그가 남긴 음악 관련 글이고, 도교전의는 도교에 관한 책이다.

8. 그림만큼이나 인간다웠던 목민관 김홍도

중인 집안에서 태어난 김홍도는 기술을 천시하던 조선 후기에 정조의 어진(초상화)을 훌륭하게 그린 공으로 관직을 받는다. 그는 부임한 고을에 가뭄이 들자 기우제를 지낼 암자를 찾아가 자신의 녹봉으로 시주를 하고 불화佛畵를 조성하고 굶어 죽어가는 백성들에게 곡식을 내어주기도 했다. 화가로 널리 알려진 김홍도는 그림에 대한 열정과 출중한 실력뿐만 아니라 선비다운 인품과 성실함까지 갖추어 많은 사람들에게 존경받았다.

9. 10년간 두문불출하며 바둑에만 집중한 국수 정운창

어린 시절 병약했던 정운창은 사촌 형의 권유로 바둑을 처음 배웠는데 10여 년 동안 집밖에도 나가지 않고 바둑에만 열중하더니 홀연히 바둑의 묘한 이치를 깨닫게 된다. 그 후 당대 바둑으로 이름난 정박과 대국해 이김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세상에 알렸고, 계속해서 국수로 이름난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실력을 겨루어 최고의 고수로 인정받았다. 정운창은 당시 국수인 김종기를 꺾은 뒤에도 그의 명성을 지켜주기 위해 배려했으며, 최고가 된 후 20년간이나 바둑계를 제패했다.

10. 신체장애에 좌절하지 않은 출판전문가 장혼

소아마비를 앓아 한쪽 다리가 불편한 장애인 장혼은 책을 많이 읽어 아는 것이 많고 꼼꼼하며 일하는 속도도 빨라 각종 문집이나 책의 교정에 재주가 있다 하여 오재순의 추천으로 32세 때 규장각 소속 감인소의 사준이 된다. 그는 책을 출판하는 일이 쉽지 않던 시기에 감인소에서 25년간 성실히 일하며 이이의 『율곡전서』, 정조의 『홍재전서』 등 각종 문집을 펴내는 한편, 스스로 활자를 만들고 위항인들의 작품을 모아 책을 펴냈으며, 각종 아동교육서를 펴내 '한국의 페스탈로치'로 불린다. 일찍이 책과 기록, 아동교육의 중요성을 깨달은 장혼은 책의 교정, 편집, 제작에 남다른 재주를 가진 출판전문가이자 위항문학의 선도자, 아동교육가로서 자신뿐만 아니라 수많은 위항인들, 그리고 아이들이 인생의 새 꿈을 꾸며 사람답게 살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노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