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공(고은, 창비), 2012년 4월 읽음
허공
누구 때려죽이고 싶거든 때려죽여 살점 뜯어먹고 싶거든
그 징그러운 미움 다하여
한자락 구름이다가
자취없어진
거기
허공 하나 둘
보게
어느날 죽은 아기로 호젓하거든
또 어느날
남의 잔치에서 돌아오는 길
괜히 서럽거든
보게
뒤란에 가 소리 죽여 울던 어린시절의 누나
내내 그립거든
보게
저 지긋지긋한 시대의 거리 지나왔거든
보게
찬물 한모금 마시고 나서
보게
그대 오늘 막장떨이 장사 엔간히 손해보았거든
보게
백년 미만 도(道) 따위 통하지 말고
그냥 바라보게
거기 그 허공만한 데 어디 있을까보냐
허공에 쓴다
이로부터 내 어이 없는 백지들 훨훨 날려보낸다
맨몸
맨넋으로 쓴다
허공에 쓴다
이로부터 내 문자들 버리고
허공에 소리친다
허공에 대고
설미쳐 날궂이한다
이로부터 내 속속들이 잡것들 다 묻는다
허공에 나가 춤춘다
온 순수한 바깥이여
아버지라는 것
어머니라는 것
옛 옥황상제라는 것
그런 것들도
감히 그 이름이 되지 못한다
몇천년간 없어지지 않고 아직껏 떠도는
신이라는 것도
그 무엇도
그 무엇도
감히 그 이름이 되지 못한다
이로부터 집 없는 벌판 그 어드메 떠내려가서
내 가난의 울음 흐득흐득
허공에 뉘우친다
여기에 이르기까지 그 얼마나 헤매었던가
이제 여기에 이르러
허공의 고금에 고개 숙여 한줄을 쓴다 그 무엇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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