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천과 삶/크리스천과 독서

허공(고은, 창비)

기독항해자 2012. 4. 13. 20:53

허공(고은, 창비), 2012년 4월 읽음


허공

누구 때려죽이고 싶거든 때려죽여 살점 뜯어먹고 싶거든 
그 징그러운 미움 다하여 
한자락 구름이다가 
자취없어진 
거기 
허공 하나 둘 
보게 
어느날 죽은 아기로 호젓하거든 
또 어느날 
남의 잔치에서 돌아오는 길 
괜히 서럽거든 
보게 
뒤란에 가 소리 죽여 울던 어린시절의 누나 
내내 그립거든 
보게 
저 지긋지긋한 시대의 거리 지나왔거든 
보게 
찬물 한모금 마시고 나서 
보게 
그대 오늘 막장떨이 장사 엔간히 손해보았거든 
보게 
백년 미만 도(道) 따위 통하지 말고 
그냥 바라보게 

거기 그 허공만한 데 어디 있을까보냐


허공에 쓴다

이로부터 내 어이 없는 백지들 훨훨 날려보낸다

맨몸 

맨넋으로 쓴다

허공에 쓴다


이로부터 내 문자들 버리고

허공에 소리친다

허공에 대고

설미쳐 날궂이한다


이로부터 내 속속들이 잡것들 다 묻는다

허공에 나가 춤춘다 


온 순수한 바깥이여


아버지라는 것

어머니라는 것

옛 옥황상제라는 것

그런 것들도 

감히 그 이름이 되지 못한다

몇천년간 없어지지 않고 아직껏 떠도는

신이라는 것도

그 무엇도

그 무엇도

감히 그 이름이 되지 못한다


이로부터 집 없는 벌판 그 어드메 떠내려가서

내 가난의 울음 흐득흐득

허공에 뉘우친다  


여기에 이르기까지 그 얼마나 헤매었던가

이제 여기에 이르러

허공의 고금에 고개 숙여 한줄을 쓴다 그 무엇을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