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8월 31일(화)
본문: 누가복음 3장 10-14절
10무리가 물어 이르되 그러면 우리가 무엇을 하리이까
11대답하여 이르되 옷 두 벌 있는 자는 옷 없는 자에게 나눠 줄 것이요 먹을 것이 있는 자도 그렇게 할 것이니라
12세리들도 세례를 받고자 하여 와서 이르되 선생이여 우리를 무엇을 하리이까 하매
13이르되 부과된 것 외에는 거두지 말라 하고
14군인들도 물어 이르되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하매 이르되 사람에게서 강탈하지 말며 거짓으로 고발하지 말고 받는 급료를 족한 줄로 알라 하니라
제목: 행동을 바꾸라
① 옷 두 벌 있는 자는 옷 없는 자에게 나눠 줄 것이요 먹을 것이 있는 자도 그렇게 할 것이니라
기독교의 믿음은 추상적이지 않습니다.
기독교의 믿음은 구체적이고 실천적입니다.
그것이 유대기독교의 가르침입니다.
그렇지만 그리스 철학의 영향으로 기독교의 믿음은 추상적이 되어 왔습니다.
기독교의 믿음이 유대 사회를 떠나 이방 사회로 향했을 때, 만난 사상이 그리스 철학입니다.
그 중에서 플라톤 그리고 신플라톤주의가 가장 크게 영향을 주었습니다.
그곳에서 영지주의가 꽃피었습니다,
기독교의 믿음은 행동지향적이고 구체적입니다.
기독교의 믿음은 행동을 바꾸는 데까지 나가야 합니다.
세례요한이 세례를 받으러 나온 가르침이 그것입니다.
그의 가르침의 요지는 행동을 바꾸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산상수훈의 가르침도 행동과 마음을 다 바꾸라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믿음은 행동과 마음을 다 바꾸는 것입니다.
속과 겉을 다 바꾸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우리의 노력으로 속을 바꿀 수는 없습니다.
속은 하나님의 은혜로 바뀌게 됩니다.
이것을 구원이라고 부릅니다.
성경은 이것을 새 사람이라고 부릅니다.
에베소서 4:17-25
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말하며 주 안에서 증언하노니 이제부터 너희는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 같이 행하지 말라
그들의 총명이 어두워지고 그들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그들의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그들이 감각 없는 자가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를 그같이 배우지 아니하였느니라
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 같이 너희가 참으로 그에게서 듣고 또한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을진대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과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라
에베소서의 이 말씀은 새 사람은 새 사람으로 살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것이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삶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고 했습니다.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란 이 예수님의 말씀이 산상수훈의 결론입니다.
그것은 기독교의 믿음이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근본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마태복음7:16-21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느니라
이러므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야고보서도 믿음과 행위에 대해서 같이 가는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야고보서2:14-26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하리라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을 알고자 하느냐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
이에 성경에 이른 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이루어졌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은 아니니라
또 이와 같이 기생 라합이 사자들을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믿음은 단순한 지적 동의가 아니라 행동을 바꾸는 것입니다.
전인적인 변화가 참된 회개입니다.
몸도 마음도 바뀌는 것이 회개입니다.
우리의 속은 우리가 바꿀 수 없지만 우리의 겉은 우리가 바꿀 수가 있습니다.
우리의 속은 위로부터 이루어지는 것이지만 우리의 겉은 안으로부터 일어나게 됩니다.
마음이 일어나서 행동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행동을 바꾸기 위해서는 뜻을 세워야 합니다.
생각이 우리의 행동을 지배합니다.
크리스천은 그리스도를 배우는 사람을 말합니다.
여기서 배운다고 할 때도 유대와 그리스는 갈라섭니다.
유대적인 배움은 스승의 모든 것을 배우는 것입니다.
글자 그대로 스승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리스적인 배움은 스승을 닮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스승은 지식의 전달자일 뿐입니다.
10, 11절입니다.
10무리가 물어 이르되 그러면 우리가 무엇을 하리이까
11대답하여 이르되 옷 두 벌 있는 자는 옷 없는 자에게 나눠 줄 것이요 먹을 것이 있는 자도 그렇게 할 것이니라
회개란 입술의 고백이 아니라 행동의 변화입니다.
행동을 바꾸는 것입니다.
옷 두 벌이 있는 사람들은 없는 사람에게 한 벌을 나누어 주는 것입니다.
먹을 것이 있는 사람은 없는 사람에게 나누어 주는 것입니다.
나누어 주는 삶이 회개하는 자의 삶입니다.
회개는 회개의 세례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나누어 주는 삶을 통해 완성되는 것입니다.
회개의 세례가 회개의 문이라고 한다면, 행동을 바꾸는 것은 회개의 본체입니다.
여기에 어떤 의문이 있을 수 없습니다.
기독교의 가르침은 아주 분명합니다.
추상적이지 않고 구체적입니다.
우리는 사도행전에서 초대교회 성도들의 나누는 삶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4:32-35
믿는 무리가 한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받아
그 중에 가난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그들이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 줌이라
있는 것을 나누는 삶이 회개한 자의 삶입니다.
믿음은 재정에서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내가 번 돈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믿음이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크리스천의 재정 원리는 청지기 원리입니다.
이렇게 나누게 될 때 어떤 결과가 일어났습니까?
그 중에 가난한 사람이 없었다고 말합니다.
이 말은 다 부유하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나누면 나눌수록 작아져야 하는데 오히려 더 커집니다.
우리는 염려 때문에 나누지 못합니다.
우리가 염려하지 않기 위해서는 지식을 가져야 합니다.
바른 지식을 가진 사람은 염려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무지하기 때문에 염려합니다.
그래서 나누지 못합니다.
호세아 4:6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
지식이 부를 창출합니다.
지식을 가진 사람이 부를 만들어 냅니다.
우리는 남과 다른 지식을 가져야 합니다.
이것을 차이라고 말합니다.
대체 불가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여기에도 희소성의 원리가 적용됩니다.
사람들은 희소한 것에 엄청난 값을 지불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이 지식이 없기 때문에 망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말하는 지식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말합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재정에 대한 지식도 포함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이 재정에 대한 지식을 알기를 원하십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영원한 세계에 대해서만 말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오늘 여기 이 땅에서의 우리의 삶에 대한 길을 제시해줍니다.
우리가 재정에 대한 말씀을 자세히 살펴보다면 아주 놀라움을 갖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신약에서만 금전과 재정에 대해 말하는 구절이 구원이나 믿음을 말하는 구절의 거의 열 배나 되는 것에 놀랄 수밖에 없습니다.
신약 성경 안에 믿음에 대한 구절은 215개이고, 구원에 관한 것은 218개이지만, 금전과 재정의 청지기직과 책임에 대해 다루고 있는 것은 2,084개나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38개의 비유 가운데 16개가 금전을 다루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많은 사람들이 단순히 돈을 보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을 아셨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돈을 찾지 않으시고 당신의 마음을 찾으십니다.
우리가 돈을 어떻게 대하느냐 하는 것은 곧바로 우리 마음의 내적 상태를 말해 줍니다.
결과적으로 하나님은 재정에 대해 우리에게 가르치시기 위해 당신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우리가 받은 명령은 전 세계로 가서 복음을 전하라는 것입니다.
이 과업을 이루기 위해서는 재정이 필요합니다.
우리에게 재정이 있을 때에는 세상의 체제로 하여금 하나님 나라의 일을 하도록 할 수 있습니다.
재정으로 텔레비전의 시간을 살 수도 있고, 비행기 표를 살 수도 있습니다.
성경을 출판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가서 가르치고 제자를 삼을 수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중생을 얻은 우리를 이 세상에 그대로 두셨는데 그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예수님에 대해 전하기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우리를 당장 천국으로 데려가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의 계획은 영원의 시간을 함께 보낼 남녀와 청소년, 모든 언어, 모든 족속, 모든 나라의 거대한 가족을 갖는 것입니다.
그분은 우리를 이곳에 남겨두시며, 가서 나의 복음을 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일을 위해서는 많은 사람과 돈을 포함한 많은 자원이 필요하게 될 것입니다.
재정 문제는 우리의 신앙을 드러내주는 수단이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신앙을 재정 문제를 통해서 테스트하십니다.
재정문제는 우리의 삶에 있어서 아주 실제적인 문제입니다.
재정 문제는 우리의 삶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크래그 힐과 얼 피츠가 쓴 책을 보면, 결혼과 가정 사역을 하면서 돈에 대한 태도와 관리가 주요한 갈등의 원인인 것을 알게 되었다라고 말합니다.
누구든 가정 법원에 가서 부부를 갈라 놓는 문제들을 들어보면, 대부분의 경우 재정이 첫째 이유임을 알게 된다고 말합니다.
재정 문제에 봉착하게 될 때 사람들은 난관에 부닥치게 되고, 많은 가정들이 깨지게 되는 아픔을 겪게 됩니다.
크래그 힐은 재정 관리의 압박감이 해결되면서 많은 부부와 가족이 치유되었다고 합니다.
주님을 신뢰하면서 그들이 할 수 있는 자연스러운 일을 하는 것을 배워가는 가운데 많은 가정이 그분의 초자연적인 공급을 경험하는 것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얼 피츠는 한 사람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오면, 그 사람의 재정은 공급자인신 하나님의 본질을 드러내게 된다고 합니다.
누구의 재정이든 하나님 나라의 질서는 형통이며, 빚으로부터의 자유라고 말합니다.
빚은 공급의 결여와 공급의 근원으로부터 단절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한 성도의 삶에서 하나님의 질서가 붕괴하는 것입니다.
재정에 대한 하나님의 뜻은 풍성함입니다.
가난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구약성경을 보면 가난은 항상 불순종할 때 찾아오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왜 우리는 가난할까요?
돈을 버는 하나님의 뜻에 대해 무지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한다고 했습니다.
재정에 대한 지식이 없기 때문에 우리가 가난한 것입니다.
성경에 나와 있는 재정에 대한 지식이 없기 때문에 가난하게 됩니다.
신명기 8:18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력을 주셨음이라 이같이 하심은 네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오늘과 같이 이루려 하심이니라
오랫동안 교회를 성실하게 다니면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려고 노력하였고, 위험한 삶의 기로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한 경험도 있고, 절실한 기도 끝에 응답을 받은 경험도 있는데, 여전히 재정 문제는 항상 염려하는 문제입니다.
나름대로 하나님이 내 삶을 평탄하게 인도하셨다는 사실에는 부정하지 않지만 하나님의 뜻과 성경의 방법대로 살면 재물의 복을 누리고 부유하고 형통하게 살 것이라는 말에는 쉽게 동의가 되지않습니다.
왜냐하면 나의 현실이 부와 관계가 멀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교회를 오래 다녔지만 교회에서 재정에 대한 성경적이고 합리적인 가르침을 받은 적도 없을뿐만 아니라, 가르침이 없기 때문에 그것을 개인적인 체험으로 만들어 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교회에서 재정에 대해서 가르칠 때는 주로 십일조를 중심으로 한 헌금에 대해서 포커스를 맞추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것은 재정 문제에 있어서 아주 작은 부분일 뿐입니다.
교회에서 재정에 대한 가르침이 적기 때문에, 성도들은 재물을 얻고 소득을 얻는 일에 있어서 세상의 환곙에 지배를 받으며 세상적인 지혜와 방법을 배워서 그것을 적용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교회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방법이란 주일예배를 성실하게 드리고 새벽기도회에 참석하며 십일조를 꼬박꼬박 내면 재물은 자연스레 얻어진다는 것이 지금까지의 가르침이었습니다.
이런 가르침은 현세적인 축복과 성공에 대한 성경적인 가르침이라기보다는 기복신앙에 가까운 가르침일 뿐입니다.
성도라면 마땅히 주일예배를 성실하게 드리고 새벽기도회에 참석하며 십일조를 잘 드려야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렇게 하는 성도들이 부유하게 살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크리스천들은 돈 버는 방법이나 돈 관리하는 방법에 대해 교회에서 가르쳐 주지 않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세상에서 배웁니다.
그러다보면 돈을 추구하는 세상 풍조에 빠져 세속적이고 인간적인 지혜와 지식을 배우고 실천하며 살아갑니다.
그래서 주일날 교회에 나온다고 해서 그런 습관이 쉽게 변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세상에서 배운 돈에 대한 지식을 교회에 교육시켜 교회를 탐욕적이고 세속적으로 변화시킵니다.
우리 주님은 재정에 대해서 많은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교회는 무지합니다.
그것은 말씀을 가르치는 목사들이 재정에 대해서 무지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다보니 성도들이 재정에 대해 무지합니다.
오늘 많은 교회들이 재정 문제로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왜 이런 재정 비리들이 생기는 것일까요?
그것은 재정에 대해서 무지하기 때문입니다. 이제 교회안에서 재정에 대한 바른 가르침이 회복되어야 합니다.
현대 교회는 빠른 속도로 세속화되어 가고 있습니다.
그것은 교회가 돈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가르치지 않은 결과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뜻을 가르치지 않고 실천하지 않는 교회는 하나님의 교회라고 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가르침을 잃어버리기 때문에 어떤 결과가 생깁니까?
각자 소견에 옳은 대로 살아가게 됩니다.
신본주의가 아닌 인본주의가 그 자리를 차지합니다.
세상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원칙을 배우지 못하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지 못하는 성도들은 당연히 돈의 노예가 되어 살아가게 됩니다.
아무리 지혜롭게 돈을 좇는다고 하더라도 돈에 대한 하나님의 원칙을 알지 못하면 사탄의 덫에 걸려 빈곤하게 되거나 귀중한 영혼을 잃게 됩니다.
우리는 돈을 벌고, 돈을 관리하고, 돈을 사용하는 문제에 있어서 성경의 원리들을 배워야 합니다.
새로운 결과들을 보기 원한다면 새로운 일을 시작해야 합니다.
변화하는 기술과 능력을 갖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자기완성과 목표 달성을 이루어야 합니다.
새로운 행동들을 이끌어내려면 새로운 정보를 우리 두뇌에 계속 집어넣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변화하는 것에 관한 모든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변화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하나님이 주시는 기회를 받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는 것입니다.
재물의 돌파구를 위한 준비
우리는 우리의 시간과 준비하는 과정을 소중하게 여겨야 합니다.
진실로 성공하기 위해 우리는 무슨 일을 하든지, 전심전력을 다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최대한의 성취를 기대하는 상황에서 최소의 일만 하는 사람은 스스로를 실패자로 전락시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무엇을 얻기 위해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오직 마지막에 요행만 바라는 사람입니다.
이런 태도는 곧 실패의 뿌리입니다.
그저 ‘쉽사리 성공하기’를 바라는 것은 행복과 성공을 놓쳐버리게 하는 요인이 됩니다.
탁월함이란 다른 말로 한다면 우리가 여분의 거리를 더 가고 두 배로 노력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준비가 안 된 탓에 축복을 받지 못합니다.
철저한 준비는 두려움에 대한 최고의 해독제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준비되면 위험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충분히 준비되어 있지 않으면 우리는 두려워하게 됩니다.
지혜와 명철, 그리고 유능함이란 우리가 태어날 때 가지고 온 자질이 아니라, 준비를 통해 생겨난 결과들임이 명백합니다.
전도서는 이런 자질만으로 충분히 성공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이런 자질과 시간과 기회를 잘 배합해야 합니다.
기회는 인내의 결과입니다.
우리가 준비를 한다 해도 기회가 매일 우리의 문을 두드리는 것은 아닙니다.
모든 것에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그러나 기회가 나타나자마자 우리가 그 기회를 취하려면 정말로 준비가 잘 되어 있어야만 합니다.
성공은 특정한 시간에 준비와 기회가 교차한 결과입니다.
성공한 사람은 적절한 시간에 자신이 유리한 점을 취할 기회가 있었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열심히 일함으로써 그것을 손에 쥘 수 있었습니다.
화가나 작가들은 언제 영감이 떠오를지 예측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심지어 한밤중에 찾아올 수도 있습니다.
영감은 기대하지도 않았던 곳에서 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때에 기회를 주십니다.
따라서 우리가 소명을 안다면 하나님의 시간을 위하여 준비해야 합니다.
부지런함은 부를 창출하는 데 필수적인 요소입니다.
이와 반대로 게으름은 가난해지는 원인 중 하나입니다.
만일 우리가 빈곤에서 탈출하고자 한다면, 그리스도인이든 아니든 부지런히 일하며 살아야 합니다.
너무나 많은 그리스도인이 재정적으로 성공하기 위해서는 다만 하나님의 일과 기도에 열심을 내고 좋은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뿐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봅니다.
이는 어느 정도 진실입니다.
이런 것들은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데 놀라운 원리입니다.
하지만 돈을 벌려면, 하나님은 우리가 부지런함의 원리를 잘 엮어 넣기를 요구하십니다.
교회 안에서 금식, 기도, 봉사 그리고 영적인 열심은 확실히 그것 자체로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하지만 일터에서도 그와 똑같이 부지런하고 정확해야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재정적 성공에 실질적인 희망을 가질 수 있게 됩니다.
예를 들면 자신의 사업에 매우 부지런한 불교 신자와 영적 충만에 열심을 갖고 있는 그리스도인을 비교해봅시다.
만일 이 그리스도인이 오로지 영적인 활동에만 열심이고 자기 사업에는 별 관심이 없다면, 잠언 10장 4절의 말씀은 그를 위해 역사하지 않습니다.
손을 게으르게 놀리는 자는 가난하게 되고 손이 부지런한 자는 부하게 되느니라
그가 부지런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를 부자로 만들어줄 의무가 없습니다.
하지만 불교 신자는 물질적 축복을 위한 하나님의 조건을 충족시켰기 때문에 물질적 부요함을 즐기게 됩니다.
우리는 이것을 일반 은총 영역이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은 오직 부지런한 신자에게만 부요함을 주겠다고 약속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누구든지 부지런함의 대가를 치르는 자는 부요함에 이르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인 형제를 사랑하십니다.
그는 구원받았기 때문에 천국에 갈 입니이다.
그리고 다른 영역에서도 복을 받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가 마냥 늘어져 있기만 한다면 하나님의 요구를 충족시키지 않았기 때문에 재정적인 결핍을 겪게 될 것입니다.
비록 불교 신자는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고 하나님이 베푸시는 다른 은사들을 누리지 못한다 해도 하나님은 그의 부지런함에 대한 보상을 해주실 의무를 가지십니다.
그가 주님의 말씀을 지켰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주님이 우리에게 돈을 맡기실 수 있도록 돈을 증식시키고 유지하는 지식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인격을 필요한 것을 변화시켜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재정적으로 성공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재정적으로 무지한 사람들의 돈은 재정에 관해 잘 아는 사람의 주머니 속으로 들어갑니다.
매달 월급 다음 날이 되면 재정적으로 순진한 사람들은 환상적인 광고를 통해 재정적으로 잘 아는 기업들에게 지능적으로 탈취당합니다.
돈은 항상 무지한 사람들의 손을 떠나 부자와 지식인들의 돈궤를 채워준다는 것을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가진 자들이 갖지 않은 사람들을 취하여 더 가집니다.
돈을 벌기 전에 지식의 부자가 되어야 합니다.
어리석은 자의 노동은 그를 피곤하게 하고 삶을 힘들게 합니다.
지식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기가 어디로 가는지도 알지 못합니다.
우리에게 지식이 없다면 모든 것이 우리를 피곤하게 만들기 입니다.
재정적인 법칙을 이해하지 못하는 무지한 사람은 피곤하고 힘들게 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무지한 사람이 가는 곳, 그 어디든지 거기엔 힘든 삶을 향한 문이 열려 있습니다.
교회는 어떻게 부를 창출할 수 있는지에 대해 가르쳐야 합니다.
대부분의 교회와 텔레비전 강사는 드리는 것만이 유일하게 번영으로 가는 길이라고 가르칩니다.
이것은 반쪽 진리입니다.
번영은 드리는 것을 포함하여 재정 법칙에 따라서 옵니다.
드리는 것만이 능사는 아닙니다.
하나님의 축복은 마술 혹은 묘기 같은 것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문제들을 하나님께 드렸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당신을 위한 약속의 땅으로 당신을 옮겨주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분은 도와주실 수 있을 뿐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지식과 일치가 되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우리의 죗값을 치러주신 하나님은 당신이 마땅히 해야 할 일까지도 당신을 위해 해주시지 않습니다.
주님은 당신을 위해 공부하지도 않으시며 시험을 치르지도 않으십니다.
주님은 아침에 당신의 이를 닦아주시지 않습니다.
이런 이들은 당신이 스스로를 위해 얼마든지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반복합니다.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호4:6).
사람들은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게 됩니다.
무지는 문제들과 고통 그리고 심지어 죽음의 원인이 될 수 있습니다.
지금은 지식의 시대입니다.
부유해지려면 지식을 가져야 합니다.
예전에는 일반인들은 마음대로 지식을 가질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지금은 누구나 다 지식에 접근할 수가 있습니다.
지식이 없으면 지식이 있는 사람의 지배를 받게 됩니다.
12세리들도 세례를 받고자 하여 와서 이르되 선생이여 우리를 무엇을 하리이까 하매
13이르되 부과된 것 외에는 거두지 말라 하고
14군인들도 물어 이르되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하매 이르되 사람에게서 강탈하지 말며 거짓으로 고발하지 말고 받는 급료를 족한 줄로 알라 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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