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창세기묵상

창세기강해34(하나님과 동행한 사람 에녹) 창5:21-24

기독항해자 2010. 8. 11. 12:36

2010년 8월 12일(목)

사도신경-542, 543장

본문: 창세기 5장 21-24절

21에녹은 육십오 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22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23그는 삼백육십오 세를 살았더라

24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제목:창세기강해34(하나님과 동행한 사람 에녹)

오늘 아침에는 하나님과 동행한 사람 에녹에 대해서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에녹은 다른 사람과 같은 평범한 생애를 살았습니다. 그렇지만 평범함 속에 비범함이 있었습니다. 에녹에 대한 성경 기록은 모두 세 곳에 등장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과 히브리서, 유다서에 등장하고 있습니다. 창세기에 4절, 히브리서에 한절, 유다서에 3절 기록되어 있습니다. 기록된 양으로 치면, 에녹은 성경의 등장 인물 가운데 아주 보잘 것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 내용을 보면 엄청납니다. 그래서 우리가 에녹을 읽게 되면 아주 신비해집니다.

창세기 5장은 인류 최초의 족보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모두 10사람이 나오고 있습니다. 그중에 아홉 사람은 모두 오래 살았습니다. 그러나 모두 죽었습니다. 여기에 죽었다는 기록이 왜 중요합니까? 아담의 범죄 이후에 사람들은 하나님의 심판으로 육체의 죽음을 맞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특이한 기록이 나오고 있습니다. 성경을 읽는 사람이라면, 한번쯤 이 본문에 머물러서 이 본문이 주는 의미를 생각해 보았을 것입니다. 단 4절이지만 그것이 갖는 의미는 아주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다 죽어야 하지만,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이지만, 죽지 않을 수 있는 길이 있음을 보여 주기 때문입니다.

다른 아홉 사람과 달리 성경 기자는 죽었더라는 말 대신에 길게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 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죽음도 분명히 하나님이 우리 인류를 데려 가시는 방법입니다. 그러나 에녹은 죽음 이외에, 죽음을 보지 않고 하나님이 데려 가신 것입니다. 에녹이 죽지 않고 천국으로 불려 올라가게 된 이유는 “하나님과 동행”하였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기자는 하나님과 동행하였다는 기록을 두 번이나 언급하고 있습니다. 에녹의 삶을 단 네 줄로 요약하면서, “하나님과 동행한” 사람이라고 결론을 맺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한” 사람이라는 기록을 우리는 노아에게서 딱 한 번 더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이후에 우리는 어디에서도 “하나님과 동행한” 이란 구절을 만날 수가 없습니다.

신앙생활에 있어 가장 중요한 사건은 ‘하나님과의 만남’과 ‘하나님과의 동행’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죄인이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먼저 죄의 문제가 해결되어야만 합니다. 이 죄 문제는 우리가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오직 거룩하신 하나님만이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해 주실 수 있고, 해결해 주셨습니다. 구약시대에는 소와 양의 죽음을 통해서 죄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신약시대에는 우리 주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길이 열렸습니다. 그리고 성령 하나님께서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원사건을 적용하기 위해서 우리들 각자의 심령 속에서 찾아오십니다. 이 사건을 바로 중생이라고 말합니다. 이렇게 찾아오신 성령 하나님은 우리에게 믿음을 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 나의 하나님으로 고백하게 하고, 구원 사건을 믿도록 만듭니다. 이렇게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하게 된 것이 하나님과 의 만남입니다.

에녹에게도 바로 하나님과의 만남이 있었습니다.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게 된 계기가 에녹이 아들을 낳게 된 것입니다. 21, 22절은 에녹이 므두셀라를 낳고 하나님과 동행하기 시작하였다고 말합니다. 에녹이 므두셀라를 낳은 후 그의 삶은 바뀌게 된 것입니다.

하나의 전설이 있습니다. 므두셀라라는 말의 뜻을 문자대로 하면 "창을 던지는 사람"이란 뜻입니다. 므두셀라는 힘이 센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다른 마을 사람들은, "창을 던지는 저 사람만 없어지면, 저 마을을 우리가 깨끗이 소탕할 수 있을 터인데"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이런 관념이 부연되어서 므두셀라라는 이름에는 "그가 죽으면 심판이 온다"라는 의미가 따라다녔습니다. 에녹은 그 아들의 이름을 통하여 들려온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메시지를 알게 되었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므두셀라가 죽은 이듬해에 홍수 심판이 있었습니다.

성경은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기 전에 하나님과의 만남이 있었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유다서 14-16절입니다.

“아담의 칠세손 에녹이 사람들에게 대하여도 예언하여 이르되 보라 주께서 그 수만의 거룩한 자와 함께 임하셨나니 이는 뭇사람을 심판하사 모든 경건치 않은 자의 경건치 않게 행한 모든 경건치 않은 일과 또 경건치 않은 죄인의 주께 거스려 한 모든 강퍅한 말을 인하여 저희를 정죄하려 하심이라 하였느니라 이 사람들은 원망하는 자며 불만을 토하는 자며 그 정욕대로 행하는 자라 그 입으로 자랑하는 말을 내며 이를 위하여 아첨하느니라.”

에녹은 모세가 하나님의 산 호렙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듯이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으로부터 메시지를 받았습니다. 에녹이 받은 메시지의 주제는 “하나님의 심판”이었습니다. 에녹은 이 말씀을 믿었고 믿음으로 이 심판의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그리고 이 심판의 메시지를 받은 후에 주와 동행하는 생활을 하였습니다.

우리가 누군가와 동행하기 위해서는 전제조건이 있습니다. 아모스 3:3 “두 사람이 의합지 못하고야 어찌 동행하겠으며” 두 사람이 동행하기 위해서는 생각과 뜻이 같아야 합니다. 생각과 뜻이 같이 않다면, 아무리 함께 수십만리를 간다할지라도 그것은 동행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생각의 일치, 뜻의 일치해야만 동행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동행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뜻과 하나님의 뜻이 일치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맞추든지 아니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뜻에 맞추어야 합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뜻에 하나님께서 맞추기를 원합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맞추기를 원하십니다. 여기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이 많지 않은 이유를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가 에녹처럼 하나님과 동행하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을 하나님의 뜻에 맞추어야 합니다. 에녹처럼 하나님과 동행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해야 하는 일들이 있습니다.

먼저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는 하나님과 따로 만나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이 시간을 통해서 우리는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그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됩니다. 성경본문을 읽고 묵상함으로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는 믿음은 우리가 성경과 함께 시간을 보내게 되는 중요한 동기입니다. 우리가 이 믿음이 없다면, 애써 이 시간을 가질 이유가 없습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이 성경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고 묵상하는 것은 단순히 고대의 관습이나 역사적 사건들에 대해 배우는 것 이상의 것, 우리가 자신의 삶과 관계된 어떤 것을 발견할 수 있다는 믿음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하는 사람들은 먼저 하나님께서 본문을 통해서 우리에게 어떤 것을 말씀하시고자 하시든지 그 말씀에 우리 자신을 진정으로 열어 놓아야만 합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순종하고자 하는 마음의 태도와 자세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성경을 묵상하면서 지금 읽고 있는 본문이 우리 자신을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확신해야만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동행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우리 개인이 하나님 말씀을 듣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둘째로 우리가 하나님과 동행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뜻을 알아야 할 뿐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야 합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 가운데 여러 가지 장애 요인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 장애 요인들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은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는 것입니다. 기도를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을 나의 능력처럼 사용할 수 있습니다. 기도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얻기 위해서 그리고 그 안에서 성장하기 위해서 또한 하나님과 함께 교제의 기쁨을 나누기 위해서 하나님과 대화하고 교제할 수 있는 관계 속으로 들어가게 합니다. 기도에는 두 가지 목적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나의 뜻을 하나님께 알리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의 뜻을 알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첫 번째 것은 보편적이고 일반적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과 동행하기 위해서는 두 번째 단계로 우리의 기도가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한 시간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만약 말씀 앞에서 우리의 일상생활을 멈추고 듣는 시간이 없다면, 우리의 기도는 무엇인가를 얻는 수준에 끝나버리고 말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가 단순한 간구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대화가 되도록 특별한 시간과 장소를 구별하여 경건의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데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삶을 말합니다. 말씀을 듣기만 하고 순종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말씀을 순종하는 것을 보통 사역이라고 부릅니다. 사역이란 우리가 하나님을 듣고 그 말씀대로 순종하며 사는 것을 말합니다. 여러분 모두에게 하나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삶이 있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