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마가복음 2장 15~17절
15그의 집에 앉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함께 앉았으니 이는 그러한 사람들이 많이 있어서 예수를 따름이러라
16바리새인의 서기관들이 예수께서 죄인 및 세리들과 함께 잡수시는 것을 보고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세리 및 죄인들과 함께 먹는가
17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제목: 예수님의 교제권
①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함께 앉았으니
고대 근동 아시아에서 함께 식탁 교제를 나누는 것은 그들을 친구로 대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러한 식탁 교제는 아브라함이 천사들을 대접하는 데서 비롯되었습니다. 히브리서 13장 1,2절의 말씀입니다. “형제 사랑하기를 계속하고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 유대인들에게 이런 잠언이 있습니다. “나그네를 대접하는 일은 하나님의 이름에 경외심을 표하는 것보다도 위대한 일이다.” 유대인들은 손님으로 오는 사람들을 누구나 다 하나님께서 보내주신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손님 접대는 신성한 의무라고 생각합니다. 손님을 대접하는 열의는 믿음을, 즉 대접해야 할 그 사람들이 바로 하나님께서 보내신 사람임을 믿는 정도를 표시했습니다. 아브라함은 “달려나가” 그 세 사람을 맞았고 급히 장막에 들어가 사라에게 음식을 준비시키고 짐승 떼에 달려가서 급히 송아지를 잡아 주고 급히 요리하게 하였습니다. 손님 접대는 이처럼 그 사람의 믿음의 정도를 표시하기 때문에, 성경의 많은 부분이 손님을 잘 대접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손님이 머누는 동안에 손님을 잘 대접하기 위해서는, 손님을 주인으로 생각하고 대접해야합니다. 손님은 머무는 동안 주인이고, 주인은 종의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7장에 보면, 예수님을 손님 대접했지만, 예수님으로부터 칭찬을 받지 못한 바리새인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고 있습니다. 대조적으로 그 자리에 불청객으로 왔던 한 죄인인 여자가 예수님의 칭찬을 받았습니다. “여자를 돌아보시며 시몬에게 이르시되 이 여자를 보느냐 내가 네 집에 들어오매 너는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아니하였으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그 머리털로 씻었으며 너는 내게 입맞추지 아니하였으되 저는 내가 들어올 때로부터 내 발에 입맞추기를 그치지 아니하였으며 너는 내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아니하였으되 저는 향유를 내 발에 부었느니라.” 예수님 당시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손님을 대접하기 전에 꼭 하는 절차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입맞춤입니다. 두 번째는 신발을 벗기고 발씻을 물을 제공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머리에 기름을 붓는 것입니다. 보통은 감람유를 부어서 당신을 환영합니다라고 표시했습니다. 이 바리새인은 예수님을 손님으로 대접했지만 당시의 기본적인 에티켓도 지키지 않았습니다. 대신에 여인은 예수님을 진정으로 손님으로 환대했습니다. 예수님의 종이 되어, 예수님을 주인으로 대접했습니다. 우리는 손님의 자리에서 주인의 자리로, 주인의 자리에서 종의 자리로, 손님으로 오는 사람들을 따뜻하게 맞이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 주께서 이 소자 중 하나에게 물 한 그릇 대접한 것도 결단코 상을 잃지 않을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세리와 죄인들을 접대하고 있을 때, 마음에 불편함을 갖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②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는가
예수님은 세리를 제자로 받아들인 것도 부족해서 이번에는 세리와 죄인들과 어울려 같이 식사를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과 같이 되신 것입니다. 세리와 죄인의 자리로 내려오셔서 그들을 친구로 대해 주신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그들을 정죄했지만, 예수님은 그들을 정죄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주셨습니다. 그때 거기에는 가장 종교적인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끼리끼리란 말이 있습니다. 유유상종이란 말도 있습니다. 사람들은 비슷한 사람들과 있기를 좋아합니다. 처지가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은 불편합니다. 믿는 사람들 가운데도 유유상종이 있는 것을 봅니다. 사두개파가 있습니다. 바리새파도 있습니다. 경건의 경쟁이 있습니다. 열심당도 있습니다. 헤롯당도 있습니다. 극단적인 경건을 추구했던 에세파도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싫어하는 죄인과 세리의 그룹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깨고 들어오십니다. 그리고 가장 낮은 곳으로 가십니다. 예수님께서 수원화성에 오시면 어디로 가실까요? 애석하게도 경건한 사람들이 모여 있는 교회로 가지 않을 것입니다. 아마도 그들은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가장 낮은 자의 모습으로 오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한 소자의 모습으로 우리를 방문하십니다. 예수님은 무당들과 술주정뱅이들과 친구가 되실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예수님을 보고 깜짝 놀랄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기대하는 예수님의 모습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빛난 옷을 입고 빛난 얼굴로 우리에게 오셔야만 합니다. 그게 우리가 상상하는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우리가 흠모할만한 모습은 한 군데도 찾아볼 수 없는 모습으로 오십니다.
③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우리는 믿는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가 참 편합니다. 그리고 믿는 사람들 중에서도 나와 생각이 비슷하고 형편과 처지가 비슷한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가 참 편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와는 다른 사람들이 우리 가운데 들어오는 것이 불편함을 느낍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우리에게 편한 곳을 떠나서 가라고 하십니다. 우리의 갈대아 우르를 떠나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낯선 땅으로 가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을 통해서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시키시기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시키시기 위해서는, 우리가 거친 들로 가야 합니다. 거기는 우리가 가고 싶지 않은 땅입니다. 거기는 우리가 함께 교제하고 싶지 않은 사람들이 살고 있는 가나안 족속들이 살고 있는 땅입니다. 죄인과 세리들이 살고 있는 땅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그곳에 보내고 싶으십니다. 우리 각자가 가야 할 가나안 땅은 다 다릅니다. 그곳은 우리가 사역해야 할 땅입니다. 갈대아 우르에서도 충분히 교회를 세우고 하나님의 나라를 세울 수가 있을 것입니다. 친숙하고 오랫 동안 교제했던 사람들이 그곳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가나안으로 가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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